어린 시절 나는 법은 평등하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결코 그렇지 않음을 절감한다. 하다못해 법은 여전히 양성(兩性) 평등조차 이루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판결이 날마다 일어난다. 법과 법조문을 다루는 사람들, 그러니까 판사, 검사, 변호사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더 많아진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법의 불평등함은 이 땅에서 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현대의 모든 인권 관련 문서는 법 앞에 양성(兩性)이 평등하다는 진술을 담고 있다. 미국의 헌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 딸과 외손녀, 그 후에 올 모든 딸들을 위해 나는 그 진술을 우리 정부의 근본 통치 수단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싶다’고 말하며 그 자신이 법 앞에 양성 모두가 평등해지도록 평생을 바치고,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있다.

미국 역대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이자, 차별에 맞서 싸우는 진보의 아이콘이 된 긴즈버그. 그가 이렇게 여성이나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삶을 살기까지는 그 자신의 차별 경험이 큰 역할을 한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는 브루클린에서 유대인 이민자의 딸로 태어나,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 코넬대학교에 입학한다. 코넬대 졸업 후에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는데, 입학생 오백 명 가운데 여자는 단 아홉 명이었다. 긴즈버그는 여성으로는 최초로 권위 있는 <하버드 로리뷰> 발간에 참여했으며, 컬럼비아 로스쿨로 편입학해 공동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렇게 눈부신 이력에도 로스쿨 졸업 후 일자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유대인이자 여성이며 아이 엄마였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얻는 데서만 차별을 겪은 것은 아니다. 성장 과정 내내 일상적으로 여성이라는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제한받고 차별받았다.

긴즈버그는 자신이 자랄 때는 여자아이가 장래희망으로 꿈꿀 수 있는 것에 제약이 많았다고 술회한다. 경찰관도 소방관도 광부도 될 수 없었고, 밤에 일할 수도 없었다. 여성 변호사는 극소수라서 전체 변호사의 3퍼센트가 될까 말까 했고, 여성 판사는 더 적었다. 생계를 꾸리려면 선생님이 되는 편이 나았기에 긴즈버그는 변호사는 물론이고 판사가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 시절에는 여자아이가 롤 모델로 꼽을 만한 여성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긴즈버그는 실제 롤 모델과 가상의 롤 모델을 한 사람씩 두었다고 고백한다. 실제 인물은 ‘어밀리아 에어하트(Amelia Mary Earhart)’로 그는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비행사였다. 가상 인물은 ‘낸시 드루’로 미스터리 소설 <낸시 드루>의 주인공인데, 낸시는 행동가이자 실천가로 독립적이고, 자신감 있고 똑똑한 여성의 표본이 되어 미국 여성들의 이상적인 롤 모델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긴즈버그 말고도 힐러리 클린턴, 로라 부시 등 많은 여성들이 유년 시절 영향 받은 책으로 꼽는다고 한다.

긴즈버그의 말에 따르면 1950년대 초반 코넬대학교는 여학생 한 명에 남학생 네 명이었기 때문에 여학생에게 좋은 학교로 통했다. 엄격한 쿼터제였으며, 그 말은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똑똑한지를 보여주는 건 곤란했다. 공부는 하지 않고 파티나 쫓아다니는 여자라는 인상을 주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그녀는 대학교 화장실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기숙사로 돌아갈 때에는 이미 숙제를 다 한 상태였다고. 하버드대 로스쿨 원장이 신입 여학생들을 환영한다며 저녁식사 초대를 하고는, 여학생들에게 한 명씩 돌아가면서 ‘남학생 자리를 빼앗으면서까지 하버드대 로스쿨에 온 이유를 말하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게다가 로스쿨에서는 긴즈버그에게 시아버지의 재정 증명서를 내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긴즈버그가 지적하듯이 ‘기혼 남학생 중에 장인의 재정증명서를 내라고 요구 받는 학생’이 과연 있었을까? <하버드 로리뷰> 발간에 참여하던 무렵, 라몬트도서관에 정기 간행물을 보러 갔는데,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정문에서 출입을 금지당하기도 한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당했던 긴즈버그가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차별 철폐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긴즈버그가 비로소 여권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로 부임했을 때이다. 그는 종신 재직권이 보장된 첫 여성 교수였고, 학생 몇몇으로부터 여성과 법에 대한 강좌를 열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법원에 제소된 성차별 사건은 거의 전무했고, 미국의 법과 법령은 여성에게 불리한 판례로 가득했다. 긴즈버그는 곧 이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법률가로서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와 협력해 여성 인권 사업을 추진하면서 무엇보다 젠더 차별과 관련한 소송 사건들을 맡아 판례를 바꿔나가는 전략으로 차별을 크게 개선해 나갔다. 연방대법관에 오른 후에는 남성 입학생만 받던 버지니아군사대학교에 여성이 지원할 기회를 최초로 여는 판결을 내린다(‘연방정부 대 버지니아 사건’). 이 사건은 남성에게 늘 열려있는 기회를 여성에게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긴즈버그 경력의 백미로 자주 꼽힌다. 남성 동료보다 임금이 적었던 여성 노동자를 위해 반대 의견을 작성하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법정 활동은 법 앞에서 평등을 구현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긴즈버그는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교재로 널리 사용된 1968년판 재산법 판례집에는 다음과 같은 희극적인 문장이 실려 있었다. ‘땅은 여자와 마찬가지로 소유의 대상이다.’ 지금은 아득한 시절이 된 그때로부터 우리는 먼 길을 걸어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때와는 달리 ‘오늘날 미국 로스쿨 재학생 절반가량이 여성이고 연방대법관 세 명을 비롯하여 연방법원 판사의 3분의 1이상이 여성이다. 미국 로스쿨 원장의 3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고, <포춘> 선정 500대 기업의 24퍼센트 정도가 여성고문 변호사를 두고 있다.’ 그의 말대로 ‘엄청난 변화를 목도’하고 있는 셈이다. 때로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자, 이제 여성 대법관이 세 명입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에 여성 대법관이 몇 명 있어야 충분하다고 보십니까?” 긴즈버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홉 명이 될 때”라고. 사람들이 의아해한다면 이렇게 덧붙인다. “대법원이 대법관 9인 체제가 된 이후로 오랫동안 대법관 아홉 명이 모두 남성이었다. 여성 대법관이 아홉 명이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긴즈버그의 딸 또한 비슷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어머니가 두 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의 딸은 이렇게 말한다. “좋지요. 하지만 우리나라 법원 곳곳에 여성 법관이 더 많이 생겨서 숫자를 일일이 세지 않게 된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54쪽)라고.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이와 같은 변화를 겪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긴즈버그는 ‘평등권을 그저 종이에 적힌 진술문이 아닌 실재하는 권리로 만들려면 그것을 실행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그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긴즈버그는 교향악단에서 여성 단원을 본 적이 없다고 회상한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오디션 참가자와 심사위원 사이에 커튼을 치자는 근사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곧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거의 하룻밤 만에 여성들이 교향악단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긴즈버그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제 모든 영역에 그때처럼 커튼을 치면 좋겠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영역에 커튼을 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사람,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그녀 자신이 세상 모든 여자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실재 롤 모델로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다. 부디 더 오래 오래 살아서, 더 많은 좋은 영향을 끼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 (32쪽)

“여성의 권리”라는 표현은 다소 문제가 있다. 인간의 권리다.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을 모든 인간의 권리다.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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