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도플갱어의 섬 일본 추리소설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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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에는 추리소설이지! 지옥철을 견디는 데는 추리소설이 제격이지! 하면서 집어든 에도가와 란포의 <도플갱어의 섬>- ‘심리시험’, ‘지붕 속 산책자’, ‘도플갱어의 섬’, ‘검은 도마뱀’ 네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역시 재미있어. 흥미롭게 빨려 들어가면서 읽었는데, 응? 이상하다, 이 기시감은 무엇? 알고 보니 ‘지붕 속 산책자’와 ‘도플갱어의 섬’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으로 읽은 작품이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재미나게 읽었다. 결말을 알고 읽는 데 무슨 재미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추리소설은 범인은 바로 너! 이런 이유 때문이지! 우후훗- 하고 범인을 지목하고 범죄 방법이 드러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 때문에 읽는다. 그러나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처음부터 범인이 드러나면서 시작하고, 심지어 범죄 방법까지 독자는 안다. 그런 상태에서 그 범죄를 탐정이나 형사가 어떻게 밝혀내는가를 지켜보기 때문에, 범인과 범행 수법을 안다하더라도 다시 읽는 재미가 크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범죄를 저지르게 된 동기, 인간의 이상 심리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에 네 작품을 읽으면서 란포 특유의 작법 스타일이랄까, 범죄자로 치자면 그만의 고유한 트릭이랄까, 그만의 개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란포는 젊은 주인공, 주로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갓 졸업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 실린 네 작품 중 세 작품(‘심리시험’, ‘지붕 속 산책자’, ‘도플갱어의 섬’)이 그러한데, 주인공들은 주로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데도 이상하게 이 세상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지붕 속 산책자’의 사부로나 ‘도플갱어의 섬’의 히로스케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부로는 어떤 직업을 가져 봐도 통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노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당구, 테니스, 수영, 등산, 바둑, 장기뿐만 아니라 각종 도박에 이르기까지 오락백과 사전 같은 책까지 사들여 놀이라는 놀이는 죄다 시도해보았지만 직업과 마찬가지로 늘 실망만 한다. 여자와 술에도 마찬가지. 그래서 그는 “이런 재미없는 세상에서 오래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히로스케는 또 어떠한가.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무료하게 살아간다. 학교 다닐 때는 스스로 철학과 출신이라 칭했으나 그렇다고 철학 강의를 들은 건 아니다. 한때 문학에 몰두하면서 그 방면 서적을 탐독하더니, 때로는 건축과 강의를 듣기도 한다. 사회학, 경제학에 이어,  유화 도구를 사들여 화가 흉내를 내는 등 엄청난 ‘변덕쟁이’였다. 무엇에도 오래 집중하지 못하고 금방 싫증을 내는 성격이다. 직업을 갖고 평범한 생활을 영위한다는 식의 생각이 없다. 그는 세상을 경험하기 전부터 세상에 완전히 질린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도 하숙방에서 도무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극단적인 몽상가로 언젠가는 자기만의 이상향을 세우리라는 몽상에 잠겨 있다.

이렇게 인생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던 인물들이 우연한 기회를 통해 눈이 번쩍 뜨이는 재미난 ‘놀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범죄’로 이어지고 만다. 주인공들은 대개 처음에는 일종의 유희처럼 금지된 선을 조금 넘는 정도에 그치는데, 거기서 조금씩 욕망의 싹이 자라나 마침내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고야 만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는 인간의 그릇된 욕망, 지나친 호기심이 ‘그’ 또는 ‘그녀’를 살인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부로는 싫증을 잘 내는 성격 때문에 하숙집도 번번이 바꾸는데, 새로 옮긴 하숙집에서 어느 날 우연히 벽장을 발견한다. 벽장을 통해 천장으로 올라갈 수 있고, 그 천장을 돌아다니면서 말 그대로 ‘지붕 속 산책자’가 되어 다른 하숙생들의 방을 천장 위에서 엿보는 일에 재미를 들인다. 사부로는 그 전에 아마추어 탐정 ‘아케치 고고로’를 알게 되면서 지금까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범죄’에 새로운 흥미를 느끼게 되기도 했다. 탐정 소설을 읽으면서 가능하다면 자신도 그 범죄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눈부시고 요란한 놀이를 해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품게 된 가운데, 지붕 속을 돌아다니면서 남의 방을 엿보는 은밀한 놀이를 즐기게 된다. 여기까지는 관음증에 그치고 말았을 텐데, 그는 왠지 한대 후려갈기고 싶게 생긴 하숙생 ‘엔도’를 죽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사실 처음에는 천장 위에서 그를 엿보다가 잠든 엔도의 입에 침을 뱉으면 커다랗게 벌어진 그의 입 속으로 침이 똑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만일 그 입속에 독약을 넣는다면? 하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심리시험’의 후키야가 학비 걱정에 시달리던 참에 부잣집 노파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노파가 돈을 숨겨놓은 비밀 장소를 알게 되고, 일종의 유희처럼 살인 계획을 세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나, 히로스케(‘도플갱어의 섬’)가 우연히 대학시절 그와 쌍둥이처럼 닮았던 고모다 겐자부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범행을 꿈꾸는 것 등등 모두가 우연한 기회에 살인자가 된다. 조금 다른 경우이지만 ‘검은 도마뱀’의 흑천사, 즉 검은 여인은 범죄 자체를 즐기는 인물이다. 그녀는  탐정 아케치와 내기하듯, 게임하듯 범죄를 즐긴다. 더욱이 그녀가 범죄를 저지르는 동기는 돈이 아니다. 그녀는 이 세상의 아름다운 건 죄다 모아보는 게 소원이다. 보석, 미술품, 아름다운 사람까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간은 미술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이 부분은 자신만의 이상향을 꿈꾸던 히로스케와 닮았다. 그리고 그들은 애초에 별 거리낌 없이 무료한 일상, 지루한 삶, 흥미를 잃어버린 삶에서 일탈함으로써 쾌락을 느끼듯이,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도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경찰 조사를 받고 돌아온 후키야는 득의양양해서 으쓱해하면서 떠들기도 하고(‘심리시험’), 사부로는 살인을 저지른 뒤 자신의 솜씨를 자랑스러워할 여유까지 보인다. “나도 참 대단해, 이것 봐, 누구 하나 여기 이 하숙집에 무서운 살인범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잖아.”(‘지붕 속 산책자’) 어디 그뿐인가. 죽은 이를 사칭하고, 자신의 엄청난 비밀이 밝혀질까 봐 사랑하는 여인까지 죽이게 되는 히로스케는 자기가 만든 기이한 왕국을 보며 흡족해마지 않는다(‘도플갱어의 섬’). 앞서 말했듯 검은 도마뱀은 사람을 수집하고(그래서 죽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모아놓고 황홀해하는 기이한 심리를 지닌 여인이다. 그릇된 욕망과 호기심이 악의 질주를 멈추지 못한다.


진실은 항상 드러나고 나쁜 짓은 항상 폭로된다, 사람의 아들은 역시 결국 탄로 나는 법이다.(셰익스피어 인용-‘지붕 속 산책자’)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는 늘 허점이 있으니, 그 허점은 주로 그들의 무의식이 빚어낸 결과이다. 살인을 저지를 때 찢겨진 병풍, 언제부터인가 피우지 않게 된 담배, 아주 오래 전에 썼던 삼류 소설 등등. 자신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생각지도 못했던 자기의 무의식이 결국 자기의 범죄를 지목하고 덜미가 되고 만다. 결국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 속 인물들은 주로 무료한 일상에 놓여 있다가 비뚤어진 호기심에서 유희처럼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의 완벽한 범죄에 우쭐거리지만, 하나의 허점, 무의식에 덜미를 잡히고 마는 것이다. 결국 란포는 모든 범죄는 인간의 그릇된 심리 상태에서 시작되고 인간 스스로 덫을 놓고 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도플갱어의 섬>을 읽는 내내 인간 심리 탐구자 란포의 정신세계를, 그 머릿속을 산책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사부로가 지붕 속을 거닐며 다른 하숙생들의 방을 엿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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