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해 거짓말
필립 베송 지음, 김유빈 옮김 / 니케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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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베송의 <이런 사랑>을 우연히 읽은 뒤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때 아마 서점에서 책을 들췄다가 문체가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뒤로도 그의 작품이 번역되어 나오면 습관적으로 읽었다. <10월의 아이>, <포기의 순간> 같은 작품들. 필립 베송의 문체는 담백하고 건조하고 쓸쓸하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삶을 말한다. 실화를 소재로 한 <10월의 아이>를 제외하고 <이런 사랑>과 <포기의 순간> 두 작품만 보자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경계에 선 자들이다. 중심에 속하지 못하고 주변부를 겉돌기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작가의 성 정체성이 중요하지는 않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정보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필립 베송의 <그만해 거짓말>을 읽으니, 이제야 그의 작품들이 왜 그토록 경계에 선 사람들, 아니 경계 너머에 있는 이들의 삶을 쓸쓸히 그리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게이인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를 그린 <이런 사랑>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필립 베송 그 자신이 게이일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필립 베송은 열일곱 소년들의 사랑을 그린 <그만해 거짓말>에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토록 진솔하게.

<그만해 거짓말>의 화자인 ‘나’는 명백히 필립 베송 그 자신이다. 그리고 그가 사랑한 ‘토마’는 ‘나’ 그러니까 필립 베송의 첫 사랑이다. 이 책을 펼치면 맨 앞에 ‘토마 앙드리외를 기억하며’라는 구절이 보인다. 작품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만해 거짓말>은 필립 베송이 자신의 눈부신, 그러나 너무나도 아팠을 첫사랑인 ‘토마’에게 바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토마 앙드리외를 기억하며’라는 말 바로 다음에 토마의 생몰연도가 적혀있다. 때문에 책을 읽는 이들은 토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작품을 읽게 된다. 죽은 첫사랑을 기억하며 회한에 잠겨 쓰는 글들은 어떠할까? 더군다나 그 사랑이 어떤 세계에서는 여전히 허락되지 않는, 때로는 그 때문에 목숨을 읽어야만 하는 사랑이라면…….

<그만해 거짓말>은 십대 소년들의 사랑을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어떤 사람에게 반하고 서로 만나게 되고 뜨겁게 사랑하고 질투하고 아파하고 헤어지는 모든 연인들의 익숙한 과정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그 사람을 몰래 엿보며 마음을 키워나가다가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같음을 알게 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또 그래서 그토록 어려운 사랑을 하게 되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과정이 예상 가능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 작품이 조금 남다른 까닭은 <그만해 거짓말>이라는 제목에서 비롯된다. ‘거짓말’을 ‘그만하라’는 말은 이 작품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처음에 이 제목은 ‘필립’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필립은 아주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삶을 마음대로 지어내는 취미가 있었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상상해보거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지어 내고 그들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점을 염려한 필립의 엄마가 그에게 이렇게 주의를 준다. “그만해, 거짓말.”이라고. 필립은 이 이야기를 작품이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한다. 그러니까 작가로서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이야기를 지어내던 기존의 작품과는 달리, <그만해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닌 자신의 진실한 이야기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교장의 아들인 ‘나’는 결석하는 일도 없고, 언제나 최고 점수를 받는, 교사들의 자랑거리인 모범생이다. 그의 한 가지 비밀이라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는 것으로, 열한 살에 이미 자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립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도 전혀 낙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점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 짓는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그들과 구분될 것’이며 자신은 ‘더 이상 모범생이 아니게 될 것’이라고 절대 ‘무리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은근히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필립이 사랑에 빠지는 토마도 과연 그러할까? 기적처럼 토마가 필립에게 먼저 다가오지만, 토마는 철저히 자기의 정체성을 숨긴다. 그들의 만남도 늘 비밀 장소에서 남몰래 이뤄질 뿐이며, 학교처럼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서 토마와 필립은 완전히 남남처럼 행동한다. 때문에 맨 처음 토마가 필립을 만나러 오기까지는 아주 큰 어려움이 따랐다. 그는 온갖 의문, 망설임, 부정,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 지극히 내성적이고 은밀하며 조용한 갈등을 이겨내야만 했다. “어째서 나야?”라고 묻는 필립에게 토마는 말한다. “네가 남들과 전혀 달라서. 너는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지만 내 눈에는 너만 보여.” 그리고 필립이 절대로 잊지 못할 말을 덧붙인다. “왜냐하면 너는 떠날 거고, 우리는 남을 테니까.”

토마의 말처럼 필립은 그 작은 도시를 떠날 사람이었다. 공부 잘하고 미래가 밝은 소년. 토마는 필립이 ‘책을 보는 소년이고 더 큰 곳을 향해 나아가는 소년’이라고 한다. 반면 자신은 농장을 좋아하고 땅을 좋아한다고. 다른 것을 열망하지만 자신은 외아들이므로 그가 가업을 잇지 않으면 농장은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곳으로 떠나서 곧 사라질 사람과 이곳에 남아 자기의 정체성을 숨긴 채 어느 가족의 일원으로 묵묵히 살아가야 할 사람. 토마는 어쩌면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닌 필립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 둘이 줄곧 그 작은 도시에서 살아갔다면, 그래서 혹 계속 서로 사랑했다면 토마의 정체는 탄로 나고 말았을 테니까.

토마의 예언대로 필립은 대학에 진학하고 이 작은 마을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작가로서 성공한 삶을 살며 텔레비전에도 종종 나오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 삶을 살아간다. 작품을 통해서도, 또 실제로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며 살아간다. 필립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애초부터 자기의 정체성을 남들과 자신을 구분지어 주는 특별함이라고 받아들인 태도에서도 비롯되었을 테지만 성공한 작가라는 이력, 때문에 게이라는 정체성이 종종 작가적 이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토마는 어떨까? 농장에 남아 외아들로 가업을 잇고 작은 마을에서 평생 살아야만 한다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당당히 밝힐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른이 된 필립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까지, 몇 년이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남들에게 거짓말을 했노라고 고백했던 남자들을 떠올리며, 토마는 그들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단순히 용기의 문제일까? 필립도 곧 이렇게 말한다.



용기라고는 했지만 어쩌면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한 걸음 더 내딛지 않은 사람들, 자신의 깊은 본성과 화해하지 않은 사람들이 반드시 겁쟁이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너무 넓고 빽빽한 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그래서 당황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만해 거짓말>, 206쪽)


숲에서 길을 잃고 당황한 사람들. 그렇지만 마음속에 평생 자기 혼자만의 비밀, 그 진실만은 간직했던 사람. 그가 바로 ‘토마 앙드리외’이다. 그래서 <그만해 거짓말>은 필립 베송의 이야기이지만 작품을 읽다 보면 진짜 주인공은 토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애초에 ‘거짓말’을 ‘그만하라’는 말의 의미는  ‘토마’가 그 자신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필립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자신의 삶이 거짓말 그 자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던 고독한 토마가 스스로 ‘그만해 거짓말’하고 다그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자기 정체성을 숨기고 거짓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토마의 고독하고도 쓸쓸한 모습이 떠올라서 <그만해 거짓말>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책을 덮고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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