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은 덕택에 <영국 왕을 모셨지>도 읽게 되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지 않았다면 보후밀 흐라발도 몰랐을 터이고 <영국 왕을 모셨지>를 읽을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참 고마운 작품이다. <영국 왕을 모셨지>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한동안, 아니, 이게 정말 보후밀 흐라발의 작품이란 말이야? 싶어서 어리둥절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과는 처음부터 분위기가 꽤 다르기 때문이다.

고독 속에 침잠하여 35년 동안 폐지 압축 일을 하던 한탸와는 매우 다른 인물인 수다꾼 디테가 등장하는 <영국 왕을 모셨지>. 이 작품은 매 장이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 좀 잘 들어보세요!’하고 시작해서는 ‘괜찮았나요? 오늘은 이 정도로 할게요’로 끝나는데, 그야말로 입담꾼이 펼쳐놓는 속사포와도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디테는 마치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들려준다. 그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물론 한탸의 이야기와도 매우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한탸는 철저히 혼자 일했으며, 유일한 친구라고는 책 또는 지하실의 쥐 정도인데 비해, 디테의 직업은 호텔 웨이터이다. 10대 때부터 견습 웨이터로 시작해, 자신의 호텔을 세울 때까지. 단 한 순간도 혼자 일해본 적이 없다. 아니, 진실로 혼자 있어 본 적이 있기라도 할까?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을 철책으로 삼아야 하는 호텔 웨이터이지만 디테는 언제나 동료 아니면 손님들로 둘러싸여 조용할 날 없는 호텔에서 오직 백만장자가 되기를 꿈꾸며 부지런히 일한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그의 이야기는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아닌 그야말로 ‘너무 시끄러운 혼란’ 그 자체이다. 때문에 <영국 왕을 모셨지>를 중반까지 읽는 동안은 보후밀 흐라발은 이런 작품도 잘 쓰는구나, 입담꾼 기질도 농후하네, 감탄하면서도 뭐랄까, 조금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낄낄낄 웃기면서 풍자와 해학이 넘치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 끝나면 조금 아쉬울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무엇보다 디테가 나치에 점령당한 조국의 현실과는 무관하게 독일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오직 그 사랑 때문에 모든 체코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면서도 그 여자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결혼하는 장면에서는 좀 위험한데 싶은 생각이 더욱 들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아니나 다를까, 작고 어수룩하고 부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 밖에는 관심 없어 보였던 이 보통 사람 디테마저도 자기 삶에서 뭔가 잘못 되었음을 서서히 깨달아간다. ‘독일 혈통의 아리안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힘 있게 찍어 결혼 허가서를 내주던 그 도장’이 바로 체코 애국자들을 사형에 처하게 한 그 도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꿈꾸고 바라왔던 자기 인생의 모순을, 그 균열을 통렬하게 실감한다.



체코 애국자들이 처형당하고 있는 동안 나치 의사들에게 독일 여자 체육 교사와 성교할 능력이 있는지 검사를 받고 있었으며, 독일인들이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했을 때, 결혼식을 올리고, 군가 <대열을 바싹 좁혀라!>를 부르고 있었고, 고향에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독일 호텔에서 독일 군인들과 에스에스 대원들의 시중을 들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쟁이 끝나면 프라하로 더 이상 돌아갈 수가 없었다. (225쪽)

그때부터 이 작품은 조금은 묵직하게 나치 치하 체코와 공산화된 체코의 현실을 그려나간다. 물론 풍자와 해학은 잃지 않는다. 하지만 키 작은 디테는 이러한 현실을 깨달으면서 물리적인 키가 아닌, 마음의 키가 크게 자란다. 특히 그는 수용소 생활 뒤 산 속으로 돌아가 홀로 은둔하면서 진정한 인생의 행복을 찾게 된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침묵 속에 은둔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함을 나타내주는 것이 침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222쪽)

나는 내일 어디론가 멀리 떠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분명 그곳에도 사람은 있을 테지만 뭔가 다를 것이다. (299쪽)


바로 이 장면에서부터는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한탸와 디테의 모습이 겹쳐진다. 디테는 산 속에서 만난 어느 교수로부터 문학과 철학, 예술, 그 모든 것들이 담긴 책이 주는 위로와 기쁨을 알게 된다. 자연 속에서 동물을 벗 삼아 책을 읽고 문학, 철학, 사상을 논하는 것 그러면서 자기 자신과 오롯이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삶. 그런 삶이 주는 행복을 만끽한다. 디테 또한 한탸처럼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행복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나 혼자로 충분했고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게 거추장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중에는 나 자신하고만 이야기하게 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의 가장 좋고 가장 편안한 동반자, 나의 또 다른 자아, 나의 격려자이며 나의 선생이었다. 나는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게 점점 더 좋아졌다. (312쪽)

아마도 그 교수가 사람은 혼자 있어야 한다는 내 생각을 더 확인시켜준 것 같다. 밤마다 별을 보고 낮에 깊은 우물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313쪽)


그러니까 디테는 곧 한탸가 그렇게 고독해지기 전까지, 고독한 삶을 살게 되기까지 이전의 삶을 보여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발표 순서를 살펴봐도 <영국 왕을 모셨지>가 1971년으로 <너무 시끄러운 고독>(1976년)보다 앞선다. 꼬마 디테가 온갖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뒤 내적으로 성장해, 고독하지만 내면에 충실한 삶을 사는 한탸가 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렇게 생각하니, <영국 왕을 모셨지>를 읽으면서 처음에 느껴졌던 이질감이랄까, 낯설음이 그제야 모두 해소되었다. 보통, 인간은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바쁜 삶이 제대로 잘 굴러가는 인생인 줄 알다가, 뒤늦게야 그게 아님을 깨닫지 않은가.

디테와 한탸가 한 사람처럼 느껴지면서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영화 <타인의 삶>의, 너무나 사랑하는 인물인 비즐러말이다. 비즐러는 동독의 비밀경찰로 유명한 극작가와 배우 부부를 몇 년 동안 감시하다가 그들의 삶과 사랑, 예술에 감화되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영화 끝 부분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우체부로 조용히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위해 출간된 ‘그 책’ 한 권을 사들고 담담히 거리를 걷는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이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 순간, 비즐러만큼 행복한 사람도 없을 것임을. 



진정한 세계인은 익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거짓 자아를 벗어버릴 수 있는 자라고 했다. (340쪽)


나는 왜 디테와 한탸, 그리고 비즐러가 한 사람처럼 느껴졌을까? 디테와 한탸, 그리고 비즐러는 모두 익명 속으로 조용히 침잠해, 거짓 자아를 벗어버린 인물들이다. 그리고 모두 시와 문학, 예술이 주는 기쁨을 깨달았으며, 거기에서 가장 큰 만족을 얻는 이들이다. 그럼으로써 진짜 행복을 찾은 사람들이다. 이런 그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극작가와 배우 부부를 감시하면서 점점 감화되는 비즐러 -<타인의 삶>의 한 장면




그리고, 우체부로 조용히 살아가게 되는 비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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