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서태후 - 개정판
펄 벅 지음, 이종길 옮김 / 길산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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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수업준비 하다가 네이버캐스트에서 서태후에 대한 글을 읽게 됐는데 대강만 봐도 너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갔더라. 아들, 며느리를 죽게 하고 그녀 자신은 47년간이나 중국을 통치하는 최고 자리에 있었으며 이화원을 짓느라 군함을 만들기 위해 비축해뒀던 국고마저 털어서 썼다는 이야기 등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러던 중 중고서점에 펄벅의 <연인 서태후>가 올라왔길래 사서 읽게 됐다.

예흐나라(서태후의 본명)는 17살에 함풍제의 후궁으로 입궐했다. 정비인 사코타와는 사촌 지간이었는데 그녀는 딸을 낳았고 예흐나라는 아들을 낳아 사코타와 같은 지위인 정비 자리에 올랐다. 동시에 사코타는 동궁의 자안황후로, 예흐나라는 서궁의 자희황후로 불리게 되었다.

예흐나라에게는 입궐하기 전, 영록이라고 하는 정인이 있었다. 예흐나라는 정비가 되자 자신과 영록의 관계를알고 있는 사코타가 앞날의 장애물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는 후에 동치제가 되는 서태후의 아들이 함풍제의 자식이 아니라 영록의 자식임을 암시하는 부분이 많은데 정사에서는 어떻게 얘기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p 133 애로호사건 이야기)

함풍제는 젊은 나이에 기력을 잃어갔고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결정과 명령을 공친왕과 서태후가 하게 되기에 이른다. 공친왕은 도광제의 아들이자 함풍제의 동생이다.

서태후의 사치가 얼마니 심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 있었는데, 한번은 코뿔새의 앞니가 갖고 싶다고 안달해 환관을 보내기까지 해야 했다. 당시 코뿔새는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 수마트라 등지의 정글에만 서식하는 새로 그 부리의 앞니는 진귀한 보물에 속했다고 한다.

한편 책에는 서태후와 공친왕의 대외관이 어떻게 달랐는지도 잘 나타나있다.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북경까지 처들어오자 황실은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으로 피난했다. 이때 서태후를 견제하던 황제의 측근 숙순파가 황후와 영록의 사이를 고해바쳐 서태후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황제 모르게 태자에게 황위 계승권이 있다는 것과 태자가16 살이 될때까지 두명의 황후가 공동으로 섭정하게 하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작성했다.

함풍제는 결국 피난중 사망하고 말았다. 서태후는 채 서른이 안된 젊은 여인인데다 황실의 직계 혈통인 왕들과 그녀를 시샘하는 막강한 만주족 가문의 수장들이 주위에 포진해 있는 상황이었다. 또 아들이 보위에 올랐지만 어미인 자신보다 동태후를 더 좋아하고 따르자 서태후의 마음속에는 질투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황제는 열여섯살이 되는해 혼례를 치뤘고 최고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서태후는 아들인 황제에게 나라를 물려준 이상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임무가 끝난 셈이니 모든 업무에서 물러나 여생을 즐기겠다고 말했다. 또한 아들이 혼자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도록 처신하겠다고 언명했다. 하지만 서태후는 국정을 잊어버린듯 행동하면서도 염탐꾼 노릇을 하는 환관들을 통해 수시로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외국 사절단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황제와 서서히 대립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 노선을 택해가자 서태후는 고립감을 느꼈고 황후가 아들을 낳아 후계를 잇게 되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들과 며느리의 사랑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서태후는 잃어버린 사랑을 권력으로 보상받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황제는 서태후의 계략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었고 황후와 태후가 싸우는 걸 지켜보다가 황망하게 죽어버렸다. 서태후는 다시 한번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순친왕과 자신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다. 황후에게는 황제를 따라 죽을 것을 명했다. 결국 임신한 황후는 아편을 삼키고 자결했다. 이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한편 서태후의 사치는 여름궁전을 짓는 과정에서 극에 달했다. 대리석으로 만든 배를 호수에 띄우겠다는 황당한 발상들을 했고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해군 국고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명분은 광서제에게 옥좌를 넘겨준 이후 여름궁전을 거처로 삼겠다고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권력을 조키이자 양자인 어린 황제가 열 일곱살이 되는 해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서태후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협조에 고무되어 궁전의 규모를 무모할 정도로 확대했다.

P498 "이 전쟁에는 많은군대나 함대가 필요지 않소. 최악의 경우 적들이 우리 영토를 침범할 경우 그때는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그들을 다시 바다로 몰아낼 것이오. 그렇게 되면 거친 파도가 적들을 몰살시킬 것이오."
"마마께서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잘 모르고 계십니다. 궁중에만 계셔서 마치 꿈을 꾸고 계시는 듯합니다."

서태후의 정세인식이 얼마나 유아적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광서제는 서태후를 고립시키기 위한 계획을 도모했다가 원세개의 배신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더욱 입지가 축소되었다.

p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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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의 상징, 비무장지대 설정의 전말> 中

 

".. 8일 열린 예비접촉에서 유엔군 측은 동양의 풍습에서 '황제와 승자의 자리'를 뜻하는 '남면(남쪽을 향해 앉는 것)'을 선점했다. 반격에 나선 공산군 측은 보드카와 맥주, 과일 캔디 등을 내놓았다. 승자의 아량을 베푸는 하사품을 의미했다. 숨은 뜻을 알아차린 유엔군 측 연락장교단이 거절했다. 이틀 뒤 공산군 측 지역인 개성에서 열린 1차 본회담에서는 더욱 유치한 신경전을 벌였다.

  양측은 예비회담에서 안전보장을 위해 유엔군 측 대표가 탈 지프에 백기를 게양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그 합의대로 유엔군 측 지프가 백기를 달고 개성에 도착했다. 그러자 공산군 측 트럭 3대가 이 백기를 단 유엔군 측 지프를 개성 시내로 천천히 안내했다. 마치 '항복사절'을 연상시켰다. 이 뿐이 아니었다. ... 키가 작은 남일 등 공산군 측 대표들의 얼굴이 아주 높아 보였다. 공산군 측이 대표단 자리에 4인치나 낮은 의자를 놓았던 것이다. 유엔군 측이 항의하고 의자를 바꿨을 때는 이미 공산군 측 사진기자가 '높은 의자에 앉아 패자를 깔보는' 사진을 충분히 찍은 뒤였다."

 

최근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대표자의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산된 남북 고위급회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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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3 황석영 대하소설 3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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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총을 움켜쥐고 뛰어가는데 솟구쳐나오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목덜미를 적시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손목을 부여잡으며 반겨주던 아내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아내를 보자, 애간장을 태워준 자신이 얼마나 몹쓸 사람인가 뉘우쳐지는 것이었다. 옥을 나서자마자 아내 걱정은 고사하고 묘옥의 일부터 물은 일이 얼마나 매정하게 여겨지는지 몰랐다. 자식 못 낳은 설움이라면 남정네인 자기보다도 아내 쪽이 훨씬 서럽고 서운했을 터이다. 평생을 따라다니며 분원 일으키는 데 조력하여 초년 고생을 겪었고, 이제 밥술이나마 먹게 되니까 자식 낳을 걱정으로 경순이 외방으로 나도는 것을 참아내던 아내였다... (275)

 

길산이와 묘옥이, 이경순. 이들 셋이 대면할 순간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아.. 사람의 연이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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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강준만 편저 / 개마고원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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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책이다. 대학 입학을 앞둔 2004년 겨울, 참여정부가 출범했을 당시였는데, 노무현에 대한 책이 시중에 많이 출간되었었다. 그때 처음으로 강준만의 책을 몇 권 읽었다. 한국근대사산책과 현대사산책 세트를 제외하고 단행본을 읽은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갑자기 '리영희'를 읽게 된 건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때문이다. 유시민의 청년 시절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의 하나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기 전, 조금 가볍게 리영희를 알고자 해서 강준만의 이 책을 읽게 됐다.

 

"리영희는 아홉번이나 연행되어 다섯 번 구치소에 가고 세 번이나 재판받고 언론계에서 두 번 쫓겨나고, 교수 직위에서도 두 번 쫓겨났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1012일에 이른다. 오로지 진실을 추구했다는 죄 하나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이해하겠지만 리영희는 자신의 신체에 가해진 것보다 더욱 혹독한 정신적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왔다."(작가 서문 중)

책은 '리영희의 삶을 통해서 본 한국 현대사'라는 주제에 맞게 194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대해 리영희가 어떻게 발언했고, 어떤 실천을 해왔는지 보여주고 있다.

 

국민 방위군 사건. 이승만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조차 이 사건을"9만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 아사, 병사한 공노할 사건"으로 가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리영희의 기록. "단테의 연옥도,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초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영희를 리영희로 만든 것은 군대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학교깨나 다닌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가고, 이 틀림없는 죽음의 계곡에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 나라의 불쌍한 자식들만이 보내지는가? 나라 사랑은 힘없는 자들만이 하는 것인가? 전쟁과 군대를 알게 될수록 나는 점점 더 사색적으로 되어갔다. 그럴수록 이 나라의 기본부터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생각이 들었다."

리영희의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1966년 중앙정보부가 한국 군대가 베트남인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써줄 것을 후한 조건으로 부탁했는데 단호히 거절했다. 이런 사명감과 대쪽같은 양심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걸까.

"인문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에는 한가지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자연과학의 공부는 깊이 들어갈수록 정도가 높아질수록 어려운 이론이 나온다. 인간의 마음과 생활에 대한 공부인 인문 사회과학도 별의별 이론이 많기로는 자연과학에 못지 않으면서도 되돌아오는 곳은 단순한 인간도 대체로 수긍할 수 있는 본질적 요체, 평균적 두뇌로 이해되는 간단한 결론이다. 무엇인가 자꾸만 어려운 이론이나 학설, 철학을 동원해야 자기의 정당성을 변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책, 사상.결정,입장은 벌써 민중을 떠난 소수자의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박현채의 글을 인용한 부분. "박정희 체제의 후계를 노리는 군부의
작은 고양이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위한 승부처를 끈덕진 저항의 역사를 가지면서 경제력에서 약하고 역사적 투쟁에서 싸움의 좌절과 좌절 속에서 처절함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절 속에서 체념을 배운 전남에서 선택했다고 보았다. ... 무력감에 빠진 호남인들은 훗날 아무 말 없이 오직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통해 그 한을 풀고자 했지만 인정머리 없는 일부 한국인들은 그들의 그런 평화적인 선택에 대해서조차 경멸을 보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적 인간관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완전히 개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바로 그러한 것이 사회주의의 실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소유 및 사유재산을 통해 인간의 이러한 생물학적 특성들을 조장하는데 성공한 것 같다. 우리는 세계 가 30% 정도의 타락과 60 % 의 도덕성, 인간성을 유지하면 성공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러한타협을 이루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현실과 이상이 조화되는 안정 된 사회이며 '존재를 위한 체념' 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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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2 황석영 대하소설 2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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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원을 혼내주려다 관에 붙잡혀 옥에 갇힌 길산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옥에 갇혀 지내는 동안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성찰하게 되고 살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길산이 옥에서 달포를 지내는 중에 문득 설움받는백성의 삶을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헌헌장부로 되어진 지금까지 받은 온갖 수모는 자신이 오직 천출 관대이기 때문이려니 하여 세상의 귀천과 빈부를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남칸 살옥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숱한 사연을 보고 듣는 가운데. 일찍이 박대근과 초 대면하여 그가포부를 말할 적에 느끼지 못했던 점이 이제 와서 환히 보이는 보이는 듯 했다. ... 이제부터는 보다 더욱 지혜롭게 더욱 강하게 되어야만 할 것이다. ... 힘은 지혜로움만 같지 못하니 맹수가 함정에 빠지는 격이요, 지혜는 또한 덕에 미치지 못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여럿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마음이 올바를 것이요, 따라서 마음을 닦아야 할 것이다. 아, 여기서 내가 미욱하고 짧은 젊음을 마칠 수는 없구나."(p. 57)

길산이가 처형됐다고 생각한 묘옥은 고달근네 사당패와 어울려 정처없는 길을 떠나게 됐다.

 

박대근의 묘책으로 탈옥에 성공한 장길산과 우대용은 구월산에서 무리와 합류했다.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재인말을 보면서 길산은 크게 상심한다. 묘옥도 떠나버린 상태...

 

장길산 무리는 자비령, 멸악산을 근거지로 하여 산에서는 녹림당, 시장에서는 보부상, 떠돌아다닐 때는 광대짓을 하며 살아가기로 의기투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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