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결국은 해피엔딩이야! 키만 큰 30세 아들과 깡마른 60세 엄마, 미친 척 500일간 세계를 누비다! 시리즈 2
태원준 글.사진 / 북로그컴퍼니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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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쌤 추천으로 1권을 읽은 뒤 2권을 기다린지 두달여만에 손에 쥐게 됐다. 저자인 태원준씨 여행 블로그를 드나들다 개설한지 3년 정도 된 블로그 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배낭여행을 향한 부푼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어느 곳을 가든 그곳의 문화나 역사를 평가하지 않겠다는 저자의 여행관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그러리라 다짐했다.

2권에서 펼쳐지는 모자의 여정은 터키에서 시작해 런던에서 끝난다. 동유럽에서 끝날 예정이었던 세계여행은 파리에 대한 엄마의 집념과 누나의 지원, 아들의 효심으로 한달 간 더 늘어나게 된다. 어쩌면 중국에서, 적어도 동남아시아에서 끝날 거라 생각했던 여행이 300일을 채울 수 있었던 건 서로를 무한히 신뢰하고 사랑하는 두 모자가 함께했기 때문인 것 같다. 친구끼리의, 연인끼리의 여행이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나라면 스무번은 절교했을 거다. 백프로.ㅋ

코끝이 시큰해지는 부분이 2권엔 더 많았다. 여행의 고단함과 피로에 적응된 엄마 한동익씨가 완벽한 배낭여행가 변신하면서 제대로 느끼고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생겨난 변화랄까. 마지막일지 모르는 유럽여행을 하면서 한곳 한곳을 눈에, 가슴에 담고자 하는 엄마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중요한 거 현재라는 엄마의 여행노트는 짧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실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너무 모른척, 포기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1권의 주인공이 단연 저자 태원준씨였다면 2권의 주인공은 엄마 한동익씨인 것 같다. 엄마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북유럽과 서유럽에 대한 여행기록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열매쌤한테 말로만 듣던 카우치서핑을 모자가 무려 40번이나 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 그런 경험 한번 없이 늙어버리면 정말 아쉬울 것 같다ㅜ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이다.

"마을에는 수백 년의 세월을 품은 옛집들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고, 그 사이로 백 년은 거뜬히 되어 보이는 돌담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커다란 고목나무의 가지들이 미풍에 느릿느릿 움직이는가 싶더니 지천에 널려 있던 포도 넝쿨에서 설익은 포도송이들이 툭툭 터져 나와 어깨를 스치고 굴러간다. 모두가 새로운 물결에 휩쓸릴 때 고집스레 자신의 모습과 자리를 고수한 뚝심이 느껴지는 마을, 마치 수십 년 외길을 걸어온 장인의 굳은살 같은 마을이다. 어디를 걸어도 '새것'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옛것'만이 깊게 패인 주름살처럼 펼쳐져 있다."

이렇게 옛것만을 간직한 곳이 한국엔 있을까? 중세의, 고대의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시간여행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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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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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최근작 <정글만리>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한지 오래인데, 아직 읽지 못했다. 서점 직배송 중고책이 나오거나 새책 가격이 좀 더 떨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 책 <허수아비춤>을 읽고 나니 적어도 이때부터 작가는 중국을 무대로 한 소설을 쓰기로 구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직전에 읽었던 조정래의 <인간연습>은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붕괴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삶의 이유를 송두리째 빼앗긴듯 휘청거리는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허수아비춤>에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사실상 시장경제의 길을 걷고 있는 중국의 현실이 종종 묘사되어 있다. 이 문제를 본격 다루고 있는 책이 <정글만리>인 것 같다.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허수아비춤>은 로얄패밀리, 골드패밀리의 삶을 소재로 한 드라마처럼, 내 곁엔 없지만 현실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초상류층의 부패, 비리를 다루고 있다. 국민은 그들을 떠받치고 그들에게 착하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허수아비'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책을 다 읽었을때 불쾌하고 허탈한 느낌이 든다. 검사, 변호사, 교수, 언론인들이 다같이 한 마음이 되어 기업의 눈치를 보고 입안의 혀처럼 구는 모습이, 사람들이 기업의 불법증여, 억대 조대 비자금 조성 소식을 접하고도 금방 망각해버리는 모습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나도 말못하고 바람에 일렁일뿐인 허수아비임을 자각하게 하는지라.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최근 1, 2년 동안 화두가 된 말인줄 알았는데, 이 책에서 이미 작가는 이 시대가 직면한 과제가 경제민주화임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불매운동에 나설 것을 권유하고 있다. 정치민주화가 투표 행위 과정에서 실현되듯이 사람들이 불매운동에 나설때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고 얘기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 모습이 추하든 아름답든 그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 자화상을 똑바로 보기를 게을리할수록, 회피할수록 우리의 비극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440)

 

자신의 비겁함을 직면하는 것 만큼 힘든 일도 없는 것 같다...

 

낮 한 시까지 퍼질러 자고, 그 뒤로도 세시간을 누워서 밍기적 거리다 해 떨어질때쯤 기어나와  카페베네에서 밀크티 홀짝거리며 삼성이 만든 컴퓨터를 앞에 두고 리뷰를 끄적이고 있는 지금. 허수아비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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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5 - 단종.세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5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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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실록은 본래 <노산군일기>라는 이름으로 편찬되었다. 편찬 경위, 편찬 일시, 편찬자 이름 등은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숙종때 복권되면서 <단종실록>으로 개칭되었는데 제목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술되어 있다. 게다가 수양대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이 많이 강조되어 있어서 진실에 접근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문종 사후 조정은 친수양파, 친안평파가 형성되어 대립하였다. 대신들은 안평의 편에 섰다. 한편 단종과 가장 가까웠던 종친은 금성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고명사은사를 자처하고, 단종의 혼인을 적극 청하는 등의 행동을 통해 왕위에 오르려고 한다는 주위의 의심을 불식시키고자 했다. 이징옥이 북방의 무기를 한양으로 빼돌렸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수양파는 안평이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록에는 안평과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신뢰할만한 증거가 제대로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수양 측은 역모의 전모를 밝혀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다만 관련자들을 그자리에서 모두 죽여버렸다. 아비와 열여섯 살 이상의 아들도 죽임을 당했고 15세 이하의 아들은 관노로, 처, 첩, 딸은 원수격인 공신들의 노비가 되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은 명나라 사진들을 대접하는 연회 자리에서 수양대군과 한명회 등을 제거하려고 계획했다가 수양 측이 별운검을 두지 않기로 함에 따라 주춤해진 사이 이탈자가 발생하여 단종 복위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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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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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신작 <아크라 문서>를 뒤적이다 정작 그 책의 후기에 <연금술사>에 대한 언급이 더 많은 것을 보고,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보게 된 책.

 

"항상 똑같은 사람들하고만 있으면 그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해버린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들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려 든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바뀌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한다. 사람들에겐 인생에 대한 나름의 분명한 기준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적 자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40)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47)

 

"난 내꿈을 실현하고 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 자네는 양이나 피라미드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고 그걸 실현하길 원하지. 그런 점에서 자넨 나와 달라. 나는 오직 메카만을 꿈으로 간직하고 싶어. 마음속으로는 벌써 수천 번 사막을 가로질러 성스러운 반석이 있는 광장에 도착하고, 율법에 따라 그 바위를 만지기 전에 광장을 일곱 바퀴 돌고 있는 나 자신을 눈앞에 그려보았지. 나는 이미 내게 일어날 일이며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일, 그리고 함께 나눌 대화와 기도까지 상상해보았다. 다만 내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크다란 절망이 두려워 그냥 꿈으로 간직하고 있기로 한 거지." (94. 크리스털 상점 주인의 말) ...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꿈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묵숨이나 농사일처럼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것들을 잃는 일이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가 다같이 신의 커다란 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단숨에 사라지는 것이오."(130. 낙타몰이꾼)

 

"지상의 모든 인간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보물이 있어. 그런데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그 보물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아. 사람들이 보물을 더이상 찾으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만 얘기하지. 그리고는 인생이 각자의 운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들을 이끌어가도록 내버려두는 거야. 불행히도, 자기 앞에 그려진 자아의 신화와 행복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상을 험난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아예 침묵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얘기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기를 원해. 그건 우리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지."(214. 마음이 속삭이는 소리)

 

"바로 그게 연금술의 존재 이유야. 우리 모든 자신의 보물을 찾아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게 연금술인 거지. 납은 세상이 더이상 납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납의 역할을 다 하고, 마침내는 금으로 변하는 거야. 연금술사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거야. 우리가 지금의 우리보다 더 나아지기를 갈구할 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함께 나아진다는 걸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지."(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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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8 : 일본 2 역사편 먼나라 이웃나라 8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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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때부터 일본사는 왠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고 이해도 잘 안 됐었는데 이 책을 읽고나니 정말 쏙쏙 들어온다. 만화책이라 간단하고 쉽게 설명해서 그런 거겠지만, 일본사도 나름 매우 흥미롭고 재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전쟁 전까지 일본은 학교에서 신화를 가르쳤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에는 신화교육이 금지되어 상고사부터 다루고 있다. 일본의 신화가 일본 국민을 단결시켜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까지 몰고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일 거다.

 

천상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오누이 신인 오빠 이자나기, 여동생 이자나미로부터 신화가 시작된다. 둘이 결혼해서 바다뿐인 세상에 일본 땅을 만들었다.(지금도 일본에서는 사촌끼리 결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자나미는 여러신을 낳았는데 그 중 불의 신을 낳다가 사망했다. 혼자가 된 이자나기의 눈과 코에서 세 아이가 탄생했는데, 그 중 하나가 태양신인 '아마테라스 오오가미'이다. 이는 덴노의 조상신이자 일본 민족의 시조신이다. 아마테라스는 손자 호노니니기에게 지상에 내려가 인간세계를 통치하게 한다. 이때 호노니니기에게 옥구술, 거울, 신검을 하사했는데 이 세 가지의 보물은 지금까지도 덴노의 상징이다.

 

호노니니기는 규슈땅에 내려와 고노하나(꽃)와 언니인 이와(바위) 두 여인을 만났는데, 이 중 고노하나를 선택했다. 수명이 짧은 꽃을 택했기 때문에 호노니니기와 고노하나의 자손은 신이면서도 영원히 살지 못하고 인간처럼 죽는다는 것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 같다.

 

초대 덴노는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즉위한 진무덴노이다.

 

한편 불교를 수용하려는 소가가문과 신토를 지키려는 모노노베가문의 싸움에서 소가가문이 승리하여 불교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조정은 다시 소가파와 덴노파로 나뉘게 되는데 소가세력이 덴노를 암살하고 최초로 여성을 덴노 자리에 앉혔다. 스이코 덴노는 조카인 쇼토쿠태자에게 정권을 맡겼고 일본 역사상 첫 섭정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정권은 소가 가문과의 연립정권으로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했고 이때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 쇼토쿠태자는 덴노를 중심으로 왕권을 확립하고 고조쿠(호족)를 제압했다. 또 17개조 헌법을 제정했는데 이때 와(和)를 강조했다. 和는 일본의 국시이자 국가이념이 되었다.

 

소가가문의 힘이 너무 강해지자 덴노의 아들은 대신과 공모해 소가가문을 제거했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해 '후지와라'라는 성을 하사했다. 후지와라가문은 그 후 수백년간 일본을 주무르는 세도가문이 되었다. 소가가문 제거한 직후 덴노는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호적을 파악해 토지를 분급하고(반전수수법) 이후에 다이카개신을 단행했다. 덴노 단독의 강력한 중앙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673년에 덴무 덴노가 즉위하면서 개혁에 박차를 가했고, 나라로 천도했다.

 

귀족세력이 계속 강해지자 덴노는 정부기구를 축소하고 통폐합하면서 중앙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율령체제가 더 해이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귀족들의 장원 확대가 심화되고 덴노의 힘은 약해졌다. 귀족의 힘이 덴노를 능가하면서 덴노가 어릴 때 대신 정권을 맡아 정사를 보는 셋쇼(섭정) 정치가 시작되었다. 왕이 성인이 되어도 정권을 내놓지 않고 간바쿠(관백)가 되어서 정치를 주도했는데, 이를 셋칸정치(섭관정치)라고 한다.

 

최고의 세도가문은 후지와라 가문이었다. 헤이안시대는 덴노세력과 후지와라 세력 간의 힘겨루기의 역사였다.

 

고쿠시는 덴노가 지방에 파견한 관리인데 지방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스스로 장원을 소유하고 토지 개발 사업을 벌였다. 농민들이 고쿠시의 횡포 때문에 귀족에게 땅을 바치고 보호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농민에게 토지를 기증받은 장원 주인을 영가라 했다. 점차 전국의 토지가 장원으로 개인소유화 되어 갔다. 심지어 장원의 영주들은 귀족 세력 내세워서 고쿠시의 장원 출입을 금지하고 세금도 국가에 내기를 거부했다. 이에 정부가 장원금지령을 내렸지만(902년) 효과는 없었다.

 

장원소유자들은 고쿠시에 맞서기 위해 부시(무사)계급을 양성했다. 점차 세력이 커져 결국엔 귀족세력 몰라내고 바쿠후라는 부시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가장 두드러진 바쿠후 가문은 서부의 미나모토 가문, 동부의 다이라 가문이었다. 이들은 전국의 농민반란을 진압해 중앙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귀족에 눌려 뒷전으로 밀려나있던 덴노가 일대 반격에 나서면서 덴노와 귀족의 세력 다툼은 본격화되었다. 이때의 덴노는 '고산조'였는데 170년 만에 후지와라의 피가 섞이지 않은 덴노였다. 덴노는 후지와라 가문을 몰아내고 불법 장원을 모두 폐쇄했다. 고산조의 뒤를 이은 시라카와 덴노는 즉위하자 마자 일곱살난 아들에게 물려주고 조우고(상황)가 되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인(院)을 설치해 실질 권력을 장악했다. 이를 인세이(원정 정치)라고 한다. 이때 조우고의 신임을 얻은 신하, 후궁, 그들의 친인척 등 주변집단이 실세로 등장했고 귀족세력은 부시 집단과 손을 잡았다.

 

양대 부시귀족인 겐지(源氏) 가문과 헤이시(平氏) 가문은 서로 대립했다. 덴노와 조우고가 권력을 잡기 위해 대립하자 후지와라, 겐지, 헤이시 가문도 덴노파, 조우고파로 분열되었다. 그 결과 호겐의 난(1156년)이 벌어졌고, 덴노파가 승리했다. 곧이어 헤이지의 난(1159년)이 일어났고 덴노를 지지했던 헤이시 가문이 승리했고 미나모토 요시토모는 죽임을 당했다. 아들 요리토모와 요시쓰네는 유배를 가게 됐다. 두 사건을 통해 부시의 힘에 의해 덴노 자리가 좌우됨이 드러났다.

 

헤이시 가문이 폭력적 군사독재정권의 모습을 보이자 전국적으로 반헤이시 움직임이 고조되었다. 그 중심인물이 미나모토 요리토모였다. 요리토모는 군사를 일으켜 헤이시 가문과 5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지방의 부시계급도 겐지편에 가담했다. 헤이시가문은 덴노를 데리고 도망갔고 미나모토 요시나카가 세이타이쇼군(정이대장군)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곧 요시쓰네에게 격파되었고 헤이시가문은 토벌되어 겐지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들은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설치했다. (1192년)

 

이들은 덴노를 정치에서 완전히 격리시키고 정치권력을 박탈했다. 그럼에도 덴노를 그대로 둔 이유는 덴노는 곧 일본 역사의 시작과 함께 있었고 일본의 정통성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겐지정권은 부시 계급과 교토의 귀족 계급을 갈라놓기 위해 부시 계급을 가마쿠라 바쿠후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지방에는 슈고와 지토를 파견했다. 고쿠시는 그대로 두었는데 그 이유는 교토정부가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다 것을 과시하는 한편 실제로는 바쿠후가 전국의 토지와 세금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었다.

 

요리모토 사후 바쿠후의 내분으로 2대 쇼군과 3대 쇼군이 사망했다. 덴노는 이때 토벌명령을 내렸는데 이 사건이 조큐의 난(승구의 난)이다. 이 난은 바쿠후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겐지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호조가문이 득세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했는데 태풍으로 실패했다. 여원연합군의 침략을 막아낸 바쿠후의 위세는 더욱 강화되었고 1318년에 즉위한 고다이고 덴노는 덴토친정을 내세웠다. 호조의 장기집권으로 부시 계급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바쿠후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칸코의 대슈고였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덴노와 연합해 가마쿠라를 점령했다. 다카우지는 덴노 군대를 격파하고 1336년 교토에 입성했다. 덴노는 남쪽 요시노란 곳으로 도망갔고 다카우지는 새로운 덴노를 즉위시켰다. 두명의 덴노와 두개의 조정이 수립된 것이다. 이 시기를 남북조시대라고 한다. 끝내 북조가 승리하였는데 3개의 보물을 가진 남쪽의 덴노가 정통성 측면에서 앞섰다. 아직도 일본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남북조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가 매우 활발하다고 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교토 무로마치에 바쿠후가 수립되었다. 바쿠후는 지방 행정 담당자로서 슈고 다이묘를 파견했다. 가마쿠라 바쿠후 시대의 슈고와 차별화하기 위해 슈고 다이묘라 불렀다. 쇼군은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다이묘에게 상당한 힘과 자치권을 부여했는데 부시들은 쇼군보다는 직속상관인 다이묘와 사적인 주종관계를 맺어 쇼군의 권위를 떨어지게 만들었다. 강력한 다이묘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관계가 성립되었고 이 시기를 센코쿠 시대 즉 전국시대라고 한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나라와 교역을 활발히 했다. 명 조정에서는 요시미쓰에게 일본국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는데 이 국서는 일본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기록으로 매도되고 있다.

 

전국시대.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농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스스로 토지와 생명을 지키기위해 조직적인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이를 고우손세이라고 한다. 농민들이 일으킨 잇키를 도잇키라고 하는데 15~16세기에만 50여 차례의 잇키가 발생했다. 

 

한편 8대 쇼군 아시카라 요시마사는 쇼군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주기로 했다가 아들이 태어나자 약속을 철회했는데 이를 계기로 쇼군가에 분쟁이 일었다. 전국의 다이묘가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11년 동안이나 치열하게 싸웠다. 이를 오닌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를 계기로 교토는 폐허가 되었고 쇼군의 권위는 추락하게 됐다. 그리고 센코쿠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다이묘는 '센코쿠 다이묘'라 불리는데 이들은 독자적인 지방세력으로서 바쿠후가 임명한 슈고 다이묘와는 달리 지방에서 군림하는 존재였다. 오다 노부나가도 센코쿠 다이묘 중 한 명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포르투갈을 통해 들어온 조총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고 병농분리제를 시행해 병사들의 전투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교토에 입성해 쇼군을 폐위하고(1573년) 혼노지라는 절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아케치 미쓰히데라는 부하의 공격을 받아 싸우다가 자결했다. 적은 바로 내부에 있다는 의미로 "적은 바로 혼노지에 있다"는 말이 쓰이고 있다.

 

도요토미는 주군을 배신한 아케치 미쓰히체를 죽이고 권력을 계승했다. 오사카성을 건립하고 경쟁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벌여 승복을 받아냈으며 에도의 다이묘로 봉해졌다. 1590년 센코쿠 시대를 종식하고 일본을 통일했는데,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전쟁을 중단하라고 선포했다. 이 시기 전국의 토지와 수확량을 조사해 세금을 부과했고 농민의 무기 소유를 금지했다. 그리고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성립시켰다. 도요토미는 부시들에게 영지를 나눠주기 위해 조선 침략을 계획하는데, 애초 계획은 인도까지 쳐들어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도요토미가 다섯살짜리 아들 히데요리를 남기고 죽은 뒤 다이묘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이때 도쿠가와는 중립을 지켰고 도요토미 가문과는 혼인관계를 맺기까지 했다. 도쿠가와의 힘이 커지자 다이묘 세력은 도쿠가와의 동군과 이에 반대하는 서군으로 나뉘어 대립했는데 이 전투가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도쿠가와가 승리했고 에도에 바쿠후를 설치했다. 도쿠가와는 모든 경제기준을 쌀로 통일했고 병농분리와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시했다. 부시들은 상공업자들과 함꼐 도시에서 사는 관리로 변화시켰다. 또 쇼군의 허락 없이 다이묘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그리스도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후미에'라는 것을 시행했는데 예수의 그림을 밟고 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도쿠가와 바쿠후 말기 대기근과 연이은 농민반란으로 국내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사쓰마, 조슈, 히젠, 도사번 등이 자체적으로 개혁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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