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사상의 은사 vs 의식화의 원흉

왕성한 활동을 할때부터 돌아가신 지금까지도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는 리영희선생 평전을 읽었다. 어떻게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토록 대척점에 위치할 수 있을까. 그것도 어느 입장에서든 굉장히 적극적으로. 그만큼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치중립적으로 얘기하자면, 그것이 곧 리영희선생의 영향력을 반증하는 척도이기도 할 것이라 생각된다.

기자가 되고 싶어했던 그때에 리영희를 몰랐던 것이 정말 부끄럽다. 리영희선생은 베트남전쟁과 파병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돈, 직장, 반공법 기소 취하를 보장해줄테니 베트남 출장을 다녀와 달라는 언론사주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기회주의적으로 당대의 권력층에 편승하려는 후배 기자들에겐 무서운 귀신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문화원에 방화를 했던 문부식, 김은숙 같이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사상의 은사'였다. 문부식이 재판에서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반미사상을 갖게 됐다고 진술했는데 이 때문에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계한 일이 없는 리영희가 증인으로 출두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베트남전쟁과 파병의 실상을 잘 몰랐는데, 선생이 쓴 <베트남 전쟁>이나 <대화>를 꼭 읽어봐야 겠다.

김원봉이 해방 후 친일경찰 노덕술에 잡혀가 일제치하 일본 경찰에게서도 당하지 않은 모진 고문을 받고나서 굴절된 해방정국을 한탄스러워 했듯이, 리영희 역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동상 걸린 열 개 발가락의 피를 뽑아내며 자기 국가의 시설 안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냐며 서글퍼했다. 일제시대 때 감옥보다도 못한 처지였다.

리영희선생은 기자, 교수였던 적이 있지만 거듭된 해직과 수감생활로 순탄한 직장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영희를 얘기할때 기자, 교수라고 하기 보다는 '지식인'이라는 수식어를 많이 쓴다. 오늘날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리영희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요즘 독보적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가?

김대중 정부 수립 직후 3.1절 기념 사면조치에 앞서 준법서약서라는 것을 쓰게 했는데, 리영희가 김대중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그 조치의 부당성을 논박했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김대중 정부는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양심수들의 석방에 준법서약의 굴레를 씌우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죽을때까지 일관된 신념을 갖고 발언한, 실천한, 양심있는 지식인이 또 있을까?

지식인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새롭게 알게 해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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