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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시절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평점 :
조지오웰의 소설을 차례 차례 읽을 예정이다. 첫번째 소설 <버마시절>(1935)을 먼저 읽었고, 앞으로 <카탈로니아 찬가>((1938), <동물농장>(1945), <1984>(1949)를 차례대로 읽어 볼 생각이다.
<버마시절>은 1920년대,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를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조지오웰은 영국에서 대학을 마친 뒤 버마로 건너가 '인도 제국주의 경찰'이 되었는데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에 환멸과 회의를 느껴 사직서를 제출하고 귀국했다고 한다. 본인이 버마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이 소설의 주인공 플로리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플로리는 버마에서 활동하는 영국인 관리인데 다른 영국인들과는 달리 버마인에게 온건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비난이 두려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해 갈등하는 인물이다. 버마에 머무는 영국인들이 조직한 '클럽'에서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고독한 존재이다.(플로리의 얼굴 한쪽 뺨에 큰 모반이 있는데, 이러한 설정은 플로리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 같다. 사랑하는 연인 엘리자베스에게 결국 자신의 모반을 온전히 보여주며 청혼할 즈음 클럽 내에서 플로리의 발언 역시 자신감을 얻어 간다.)
반면 엘리스, 래커스틴, 베럴, 엘리자베스는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 버마 원주민들을 멸시하고 그들만의 세계에 접근하지 못도록 철저히 경계한다.
"물론 우리가 약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검은 형제들을 계몽시키러 왔다는 거짓말이죠. 아주 자연스럽지요. 하지만 그 거짓말이 우리를 타락시키고 있소.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방법으로 말이오. 우리에게는 천성적으로 협잡꾼과 거짓말쟁이가 되어 밤낮으로 우리 스스로를 정당화하라며 끊임없이 충동질하고 괴롭히는 기질이 있소. 이것이 우리가 원주민들에게 가하는 야만적 행태의 원인 중 하나죠. 영국인들이 스스로를 도둑으로 선언하고 합법적으로 도적질하고 있다고 인정하기만 해도, 그럭저럭 참아 줄 수 있을 거요."(54)
플로리가 가깝게 지내는 원주민 의사 베라스와미에게 하는 말이다. 영국인은 反영국적인데 반해, 인도인은 親영국적이라는 것이 아이러니다. 영국 정부는 저들의 식민통치를 포장하기 위해 클럽에 지위 높은 원주민을 한 명 이상 포함시키라는 결정을 내렸다. 클럽 내의 모든 영국인의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플로리는 내심 베라스와미를 클럽의 의원으로 선출하고 싶어 했다. 원주민에게 온건적인 플로리를 동성애자로 몰아 클럽에서 추방하려고 하는 엘리스의 음모와, 베라스와미가 클럽 의원으로 선출되는 것을 막으려는 야심 많은 원주민 우 포 킨의 계략으로 플로리, 베라스와미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만약 그가 전적으로 의사의 편에 선다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를 못 받았다고 하는 편이 훨씬 좋은 방법이다. 의사는 좋은 친구였지만 백인 나리 계급의 분노를 사면서까지 그를 옹호한다는 것은... 오, 아니, 안되는 일이지! 자신의 영혼을 구원받는 대신 전 세계를 잃는다면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플로리는 편지를 가로로 한번 찢었다.'(108)
아직은 자신의 모반을 떳떳하게 드러내기 부끄러워하는, 백인의 반발이 두려워 원주민을 편들이 주저하는 플로리의 모습이 인간적이라 느껴졌다. 그렇지만 플로리가 원주민을 대하는 태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서 잘 나타난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나 방식은 그녀에게 모호하지만 깊은 불쾌감을 자아냈다. 왜냐하면 그녀는 플로리가 <원주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하고, 또 버마의 관습과 버마인들의 특성을 끊임없이 찬양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원주민들을 영국인들과 비슷한 품격을 지닌 존재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것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플로리의 사랑은 결국 이뤄지지 못한다. 플로리와 버마에서의 영국의 식민통치 역시 화해하지 못한다. <버마시절>은 플로리의 자살로 끝을 맺는다. 제국주의는 지배하는 자, 지배받는 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