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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 선사 삼국 발해 ㅣ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0년 9월
평점 :
대학 졸업 전까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일대를 두루 답사했고, 경주만 세 번을 다녀왔지만 기억에 남는 건 별로 없다. 누군가 강진 가봤어?, 공주 가봤어? 하고 물으면 자신있게 "어~ 나 거기 가봤어"라고 대답하지만, "거기 어때?, "거기 가면 뭐 뭐 봐야돼?"와 같이 조금만 구체적으로 물어볼라 치면, 어디론가 숨고 싶어진다. 게다가 역사교육과를 졸업했기 때문에 누구나 교양 수준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기대하지만, 난 아직도 그런 순간이 두렵다ㅠ 탑 앞에서 작아지고, 불상 앞에서 초라해지고, 박물관 안에서 뒷걸음질 치게 되고.. 천마총, 무령왕릉 속에서 죽고싶어 진다..ㅠ
수업시간에도 문화사 내용을 다룰때면 두리뭉술 설명하고 아이들이 질문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구렁이 담 넘어가듯 훒고 지나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책 한 권 읽는다고 문화사 소양이 훌쩍 쌓이지는 않겠지만서도, 당당해지기 위한 첫걸음으로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권을 샀다.
생소하고 어려운 내용은 그냥 지나쳤으며, 어디선가 한 번 봐서 낯 익지만 자세히는 몰랐던 것들 중 새롭게 알게 된 내용만 정리해가며 읽었다.
선사시대
-1909년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비너스'. 여성의 유방, 배, 엉덩이, 성기를 과장되게 표현한 여인상으로 열굴의 이목구비는 전혀 표현하지 않고 오직 여체에서 출생과 관계되는 부위만 강조하였다. 교과서나 문제에서 수도 없이 봤지만, 비너스 상에 눈, 코, 입이 없다는 건 처음 알았다.
-신석기시대의 덧띠무늬토기는 한반도에서 뿌리 내리지 못하고 기원전 4,000년 무렵 빗살무늬 토기의 등장과 함께 소멸하게 된다. 그래서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하면 '빗살무늬 토기'를 떠올리게 된다. 토기라는 것이 인간이 처음으로 응용한 화학변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지닌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빗살무늬 토기의 '빗살무늬'는 토기의 허전한 벽면을 꾸며주는 기능을 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빗살무늬'는 사람 손바닥의 지문과 같은 구실을 하여 미끄러지지 않고 잡기 편하게 한다. 또 빗살무늬의 상징성은 대체로 생선뼈무늬로 이해되는데, 본래 선사시대 미술에서 통째로 벗긴 동물 가죽이나 살을 발라낸 생선 뼈는 정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기원전 1,500년 무렵부터 기형에 납작바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약 2,500년 동안 신석기인들의 삶에 어떤 변화도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울산 울주 반구대 암각화.
발견 당시에는 청동기시대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가 행해진 유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울산만의 지형이 신석기시대에 고래사냥에 적합한 곳이었음에 주목하면서 신석기시대인들의 유적이라는 학설이 제시되었다. 또 청동기시대는 본격적으로 농경이 이루어진 시기인데, 암각화의 내용은 모두 어로와 수렵에 관련된 것들이가 신석기시대의 유물이라는 사실을 뒤받침해준다.
청동기시대
-밭을 가는 남자의 발기된 남근이 정확히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는 깃털 같은 것을 꽂고 있어 생산과 풍요의 상징으로서 성관념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김광언의 <쟁기연구>에 의하면 평양지방에서는 얼마전까지도 농한기가 끝나고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봄에는 남자가 남근을 내놓고 밭을 가는 풍습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동북아 고인돌의 분포를 보면, 한반도에서는 전역에 퍼져있음에 반해 중국에서는 요동반도와 황해안 주변, 일본에서는 규슈 지방에 일부 남아 있어 단연코 우리나라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삼국시대
삼한시대이면서 삼국이 태동하는 시기였고 낙랑이 있었다. 이 복잡한 고대국가 태동기를 고고학에서는 '원삼국시대'라고 부른다. 삼국으로 정립되어가는 기원의 단계라는 뜻으로 문헌사학에서는 삼국시대 초기라고도 하지만 아직 부여, 삼한 등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삼국시대라는 시대개념으로 부르는 것이다.
도기의 등장
도기의 등장은 획기적인 기술혁명이었다. 밀폐된 가마를 사용함으로써 화도를 더 올려 좀 더 견고하게 구워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원삼국시대의 회색 연질 도기에서 흑색 경질 도기로 전환하게 되는데 삼국시대의 도기는 우리나라 도자사에서 고려 청자, 조선 분청사기, 조선 백자와 함께 당당히 한 장을 차지하는 뛰어난 분야라고 한다. 국내외 미술사가들과 박물관 관계자들이 한국미술사에서 재평가될 대상 중 첫번째로 꼽는다.
고구려 도기의 특징은 과묵한 정서를 담고 있으며 듬직하고 튼튼하다는 것이며, 백제 도기의 특징은 간결하면서도 부드럽고 우아한 고전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도기는 화려하고 장식성이 많다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세계 문명사에서 1500년 전에 산라, 가야 처럼 질그릇으로 다양한 손잡이잔을 만들어 사용한 나라는 없다고 한다.
신라와 가야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일본 토기는 붉은색을 띠고 있는 연질의 하지키였다. 이것이 5세기 전반부터는 흑색 경질 도기로 바뀌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스에키라고 부른다.
스에키는 도기의 질과 기형 모두가 가야도기와 거의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하다. 이는 391년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쇠망의 길로 들어선 금관가야인이 집단으로 일본에 건너가면서 일으킨 변화였다.
고구려 고분벽화
1) 초기(350~450) 초상화 벽화 무덤 : 안악3호무덤, 덕흥리무덤
2) 중기(450~550) 생활 풍속화 벽화 무덤 : 약수리무덤, 수산리무덤, 춤무덤, 씨름무덤
3) 후기(550~668) 장식무늬와 사신도 벽화 무덤 : 강서큰무덤, 퉁구사신무덤
-안악3호분 : 발견된 고구려 고분 벽화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벽화의 내용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벽화의 조성연대와 피장자를 알 수 있는 문서가 쓰여있어 고분 벽화의 편년을 세우는데 가장 중요한 고분이 되었다.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의 무덤이라는 설과 미천왕릉 또는 고국원왕릉이라는 설이 있다.
-수산리 고분 벽화 : 남녀 주인공의 행차에 따른 여러 수행원의 모습을 인물의 비중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면서 일직선상에 그렸는데 맨 앞에는 높은 죽마를 타고 재간을 부리는 길눈이가 있고, 맨 뒤에는 수행하는 두 여인이 있다. 뒤이어 발견된 일본의 다카마쓰 고분 벽화의 여인상 옷차림이 이와 비슷하여 주목을 받았다.
-춤무덤 벽화 : 팔을 뒤로 젖힌 춤 사위를 나타낸다는 것이 한쪽 팔을 머리 위로 올려놓았고,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의 옷자락은 진행방향에 맞추어 앞으로 빠져나와 있다. 이러한 묘사는 그릠의 경험이 적은 아동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냥하는 모습 : 화면 왼쪽 끝에는 말을 타고 뒤따라 가는 한 젊은이가 있는데 그는 마지못해 사냥에 따라온 듯 게으른 표정이다. 말도 가기 싫은 듯 뒷걸음하는 모습이다.
사신도 벽화 : 사신도만으로 이루어진 벽화무덤이 나타남. 이는 동시대 중국의 고분 벽화가 인물과 신선으로 채워진 것과는 사뭇 다르다. 사신의 개념을 만든 것은 중국이지만 그것을 죽음의 공간에서 영혼을 지켜누는 완벽한 도상체제로 구현한 것은 오히려 고구려였다.
백제고분
신라는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이중삼중의 지하매장 구조여서 비교적 도굴의 피해가 적었지만 백제의 벽돌무덤과 굴식돌방무덤은 지상구조여서 쉽게 도굴되었다. 무덤 축조 이후 아무도 손을 댄 일이 없는 무령왕릉이 발견되면서 백제 고분미술의 아름다움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관을 만든 목재가 금송이라는 사실이다. 금송 식생지의 중심지는 일본 남부 시코쿠와 규슈 남부지방, 그리고 나라 근처 고야산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461년 개로왕은 임신한 후궁을 동생 곤지와 찍지어 주고 일본으로 가게 했는데, 가는 길에 이 후궁이 나은 아들이 바로 무령왕이라고 한다. 이런 기록으로 인해 일본의 26대 천황인 게이타이가 무령왕의 동생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는데 이는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도다이지의 쇼소인(정창원)은 왕실의 유물창고이다. 1946년부터 해마다 가을철에 일부씩을 주로 나라국립박물관에서 특별전 형식으로 공개해오고 있는데, 1993년과 2008년 전시회에서 백제 의자왕이 보내준 자단목 바둑판, 상아바둑알, 바둑알 통인 은형탈합이라는 유물이 공개되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바둑판이고 바둑알이다. 백제인이 바둑을 좋아했다는 것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해서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 죽게 된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신라의 고분
마립간 시기 서라벌에는 거대한 봉분의 고분이 축조되었다. 황남대총, 천마총,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등은 모두 마립간 시기의 고분이다. 이 대형 고분은 돌무지덧널무덤 구조를 하고 있다. 마립간 시기의 대형 고분은 왕경의 지배층이 장례의식을 성대히 하고 무덤을 거대하게 만들어 주변지역 사람들에게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고, 부장품들은 일종의 위세품이었다.
신라왕 시기 고분의 형태와 장례풍습은 마립간 시기와는 사뭇 달랐다. 대형 고분은 자취를 감추고, 껴묻거리도 전처럼 많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고분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돌방무덤이었다. ...이와 같이 묘제가 간소화되었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신라인의 의식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불교의 영향으로 사후의 세계에 대한 정신적 보상을 받을 수 있어 죽음의 의미가 전보다 약해진 것이다. 종래에 고분 조성에 보여주었던 열정을 사찰 건립과 불상에 바치게 된다.
- 신라 금관 : 신라 금관의 세움장식인 나무와 사슴뿔은 오래전부터 시베리아 일대에 널리 퍼져있던 샤먼신앙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신라 금관에 반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 또 신라 금관은 일반적으로 왕이 머리에 쓰던 관이라는 생각도 사실과 다르다. 지금까지 6개의 신라 금관이 발견되었는데, 금관이 만들어진 시기로 추정되는 5~6세기의 왕은 눌지마립간, 자비마립간, 소지마립간, 지증왕 이 네 명에 불과하다. 또 남자무덤에서 금동관이 출토되고 여자와 15세 전후 아이 무덤에서 금관이 나온 것으로 보아 신라 금관은 왕이 아니라 시조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관이 착용했던 것으로 왕관과는 별개라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