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한 오백 년 눈이 내렸으면, 이대로 얼어붙어 모든 생명이 죽고 난 뒤 한 천 년 세월이 흐른 다음 다시 깨어났으면... 깨끗하게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19쪽
소쩍새는 울면서 봄을 키우고 호박은 꽃잎을 닫으면서 가을을 끌어내리고 겨울은 눈이 내릴수록 깊어지고 사람은 우는 만큼 맑고 가벼워진다.-24쪽
세상의 모든 인연은 상처지만 그 인연을 쉽게 끊지 못하듯이 세상의 모든 길은 상처투성이지만 집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어떤 더위도 땡볕도 이 발걸음을 이기지 못한다. -37쪽
이성복은 읽는 게 아니라 몸으로 먼저 느껴야 한다. 철저하게 망가져 본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들을 것이다. 게으르고 싶고 편해지고 싶고 무수한 욕망에 쉽게, 빨리 편승하고 싶은 요즈음 세대들에게 그의 작품 속에서 새벽 찬물 같은 죽비 세례를 맞아보기를 권한다. -57쪽
좋은 작품은, 온몬으로 일하고 치열하게 삶을 밀어붙인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론을 실천한다는 뜻에서, 신탄진에서 사는 이면우, 영천의 이중기, 예산의 이재형, 담양의 고재종과 더불어 태안의 정낙추 시인을 감히 제 스승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98쪽
똥방죽에서 썩은 물이 해파리 같은 부유 물질을 달고 천수만을 오염시킬 때도 미나리, 개망초, 민들레 들이 새파랗게 눈을 뜨고 겨울을 견디고..-107쪽
한창훈 소설의 미덕은 오래 참고 견딘,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버틴, 직전의 힘이다. 직전에 터져 나오는 탄성, 직전의 아름다움이다. -119쪽
이래봬도 봄날, 갈아엎은 밭고랑처럼 살고 싶었다. 여름에는 깎아 놓은 논두렁처럼 살고 싶었다. ... 오소리처럼 굴을 파고 추녀 끝까지 쌓아올린 장작처럼 살고 싶었다.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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