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일은 사실 누구하고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신문사에 있다 보면 더더욱 그렇다. 말하자면 수평으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더라도 입과 귀만으로 관계는 가능하다. 거기에 감정이 발생하려면 보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만 한다. -215쪽
"저에겐 이미 마음이란 게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너무 오래 우주복을 입고 하늘에 떠 있었나 봅니다. 도로 지구로 내려갈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질 않는군요."..... "전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몽땅 백지수표로 끊어 주었기 때문일 겁니다."-226쪽
화랑이란 사실상 미술품의 영안실에 해당되는 그런 곳이다. -250쪽
<에스키모 왕자> 그것은 아마도 유년의 여름날에 본 앵두나무 이파리들 사이로 뭉텅뭉텅 빠져 나가던 아침 햇살 같은 것이리라. 얼핏얼핏 혈관이 끊어지는 듯한 그런 현기증 나는 순간들 사이에서 맴돌던 적막. 그러다 아슬아슬하게 다시 이어지는 거미줄 같은 시간의 줄에 매달려 숨 가빠하던 기억. 채송화가 피어 있는 따뜻한 담장 밖으로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걸어가던 누군가의 어룽어룽한 뒷모습. 큰 싸움이라도 난 듯 멀리서 여럿이 외쳐 부르던 소리. 그때 에스키모 왕자가 뒤에서 다가와 거밋줄에 걸린 나를 안아 내리고는 감쪽같이 사라져 갔지. -293쪽
<에스키모 왕자> 발목에 추를 단 기분-295쪽
<에스키모 왕자> 암암한 얼굴빛
봄날에 복사꽃 무진장 피면 나는 자살을 꿈꿨다. 그러나 삶은 아무때나 함부로 죽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311쪽
<에스키모 왕자> 존재의 투명한 슬픔
창창한 햇빛 속으로 분분히 날려가던 복사꽃 이파리들.-329쪽
<에스키모 왕자> 에스키모 왕자. 그는 나를 데리고 여행하는 자이다. 그는 또한 내가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나로 존잰하던 자이다. 그는 아주 추운 곳에서 뾰족한 창 하나를 들고 시간의 이름으로 내게로 왔다..... 무한한 시간대를 앞뒤에 둔 나인 나이며 동시에 나 아닌 무한 자유이다. 나는 다만 그가 멀리서 끌고 온 시간 위에서 잠시 춤을 추고 있는 자일 뿐이다. -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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