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오랫만에 미치오 슈스케님의 책을 손에 들었다. 아마 작년쯔음 읽었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이후 미치오님의 책은 이번이 두번째인듯하다. 사실 책의 내용을 알기전 표지가 마음에 들었던 책이 아니였을까 생각이 든다. 해바라기...를 읽은이후 작가의 미스터리 스릴러물을 기대했을지도 , 아니면 무언가 나의 현재의 몽롱함과 건조함이 풀풀 풍겨나는 일상에 충격이 될만큼의 독특한 이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며 읽기를 시작한다.

주인공 신이치는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의 도산으로 가마쿠라시에서 멀지않은  할아버지(쇼조)가 살고있는 집으로 이사를 한 후,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얼마 안되는 아르바이트와 할아버지의 연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형편이다. 신이치는 전학 후, 또다른 전학생 하루야와 친해진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또 한명의 여자친구인 나루미가 있다. 그 세 아이 모두 내면 속 깊이 아픔과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신이치는 아빠를 암으로 잃은후 슬픈 상처, 하루야 역시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밥을 굶기는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 그리고 신이치의 할아버지(쇼조)가 몰던 배를 탄후 사고로 엄마를 잃은 나루미! 이야기는 신이치의 관점에서 진행되어 아이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한다. 전학 이후, 같은 반 아이들에게 소외당하고 따돌림을 받던, 신이치와 하루야는 소라게를 라이터로 지저 딱지에서 나온 소라게를 신으로 삼아 소원을 비는 그들만의 놀이로 스스로의 외로움과 상처를 다독이는듯하다. 점점 아이들이 소라 게 에게 바라는 소원 또한 악()이 가득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라는 것이 있다. 세상일 전부에 분명히 이유가 있어. 내 다리가 잘린 것도, 그때 그 녀석을 제대로 찾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이야. 제일 먼저 도망쳤기 때문이지. 뭐든지 결국은 말이다.... 결국은 자기한테 되돌아오는 법이야. (189쪽)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세 아이의 심리가 극에 달하는듯 느껴진다. 어른들은 알수없는 아이들만의 시선으로 보는 상처와, 슬픔을 심리, 내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상처를 끄집어 내기 두려워하는 하루야가 늘 끄적이던 '네(ね)' 라는 글자는 도대체 무슨 뜻이였을까? 역자 후기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있지만 혹 책을 읽는 분들을 위해 굳이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하루야가 어떤 뜻으로 '네'라는 글자를 반복해서 썼는지 책을 읽는 동안에는 알수 없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에게 학대 당하는 고통과 상처를 누구에게도 숨긴채 스스로 풀어버리고 싶었던 강한 분노의 표현이 아니였을까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심적 고통을 친한 친구들에게 내비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하루야의 모습과, 세 아이의 묘한 심리적 갈등들."가 생각했던 거 내는 안다. 니가 내를 싫어하기 시작한 거 안다. 여서 눈 감고 손 모으고 있을 때도, 니 내 생각했제? 내가 우예 되믄 좋겠다고 생각했잖아. 하지만 그거 아나? 니한테 미움 받으믄 내는 이제 갈 데가 엄따. (355쪽)"  이야기는 단순히 소라게에게 소원을 비는 것 외에도 나루미를 사이에 둔 하루야와 신이치의 심리적인 경쟁과, 질투등 복잡한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물 흐르듯 진부하듯 나른하게 진행되어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의 속도도 느릿하게 무심히 넘어간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그리고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인지도 모른체 활자에 시선을 고정한채 빠르지 못한 느낌으로 책 페이지를 넘긴듯하다. 어느 부분에선 몰입이 되다가도 또다시 느슨한 나사처럼 확 풀리는 느낌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또한 "신이치, 뱃속에 너무 묘한 걸 기르지 말거라.(344쪽)" 라고 말하는 쇼조(할아버지)의 말에서나 "꿈에서도 본 적 없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얼굴을 한 소년이 바로 맞은편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볼을 추하게 끌어올리고, 입술 틈새로 이를 내보이며, 그 이 사이에 타액으로 만들어진 실을 늘어뜨린채 검은자위 테두리가 몽땅 드러날 정도로 두 눈을 크게 뜨고서(372쪽)"라는 문장에서 볼수 있듯이 저자만의 독특한 문체와 내면의 묘사들을 볼수있다.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던 것 역시 그만의 독특한 묘사를 몇번씩 되뇌이며, 그 뜻을 이해하려 부단히 노력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추리소설이 아닐까 생각으로 읽기 시작 했는데, 이외로 <달과 게>는 참 암울하고 어두운 느낌의 성장소설인듯하다.  내가 그렇게 책에 집중하지 못한것도 그리고 '루즈하다'라고 느낀 것 또한 아마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읽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싶다. 어쩌면 그전에 읽었던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이란 책을 읽은후 두번째로 접한 책이여서 더욱 그런 고정된 생각으로 집어 들어서 일수도 있을듯! <해바라기가 피지않는 여름>을 읽으면서도 문체나 소재, 그리고 묘사들이 독특함이 가득하다고 느꼈었는데 <달과 게> 역시 저자의 개성적인 독특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책의 막바지로 치달리며 나의 집중은 가장 빛을 발한 듯하다. 신이치가 강하게 바랬던 소원은 이루어졌을지, 또한 어린 아이의 암울한 결말을 가져오지 않을지 은근 불안하기도 했다. 어른과 아이의 애매모호한 경계선의 나이에서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과 묘한 어른스러움을 보여주기도 한 소설이다 . 왠지 한 편의 고요함이 흐르는 일본 영화를 보는 듯도 했지만, 알수없는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 소설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염마 이야기
나카무라 후미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톰한 책한권을 참 오래도 손에서 놓칠 못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까짓 3~4일이면 끝낼수 있었을텐데, 더딘 그리고 게으른 책읽기의 결과가 아니였나 싶다. 작년말쯔음부터 시작된 나의 나태하고 게으른 책읽기는 새해가 되어서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느릿느릿 한 페이지, 한페이지 넘기기가 버겁고 무겁다고 느껴질만큼 힘든 책읽기의 연속이다. 그렇게 <염마 이야기> 또한 2주동안의 긴 시간을 할애 해야만 했던 또 한권의 책이 되고 말았다.

1866년 일본 막부시대 말기, 조슈번 출신의 사무라이 아마네는  신센구미 자객 밀정으로 잠입하고 그곳에서 함께 입대한 오카자키를 만난다. 그는 아마네에게 신의를 다해 대해주며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하지만 아마네는 신분이 발각되면서 심한 부상을 입고 도망치다가 우연히 문신사 호쇼 바이코의 집앞에서 쓰러지며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살고싶다... 죽는건 싫어..."라는 한 마디로 인해 그의 인생은 크게 달라지게 된다. 자신이 죽기전 불사의 '신귀새김'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바이코에게 아마네의 살고싶은 욕망은 좋은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심한 부상으로 혼절한 며칠후 깨어난 아마네의 손바닥에는 범어로 된 염마(閻魔)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로 '불로불사'의 몸이 되어 버린 것. 결국 아마네는 자신이 원치 않았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을 지닌채. 아마네는 바이코에게서 문신 기술을 배우며 "효소 염마"라는 또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바이코는  문신사에겐 금기였던  자신의 몸에 신귀새김을 하여 지독한 고통과 부작용을 이겨내려면 사람의 심장을 먹어야 하는 자신의 또다른 제자 "효소 야차"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하며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15여년이 지난 1883년 우연히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던 오카자키를 만나게 되지만 오카자키는 부랑자로 몰려 경찰에게서 심한 고문으로 끝내 죽게되고 그의 딸이였던 나쓰를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게된다. 15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염마는 스무살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이는 나쓰의 아빠 뻘이지만 스무살의 외모인 염마에게 어쩔수 없이 나쓰는 여동생으로 곁에서 머물게 되고,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면서 나쓰는 여동생에서 누이, 어머니, 할머니로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염마에게 애틋한 감정을 지닌채 차마 표현하지 못하고 늘 곁에서 염마를 지켜주던 나쓰, 그리고 염마 또한 자신이 나쓰를 향한 마음이 단순한 감정이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의 친구였던 오카자키의 부탁을 차마 배신할수 없었던 것.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는 자체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100여년이 넘는 세월을 불로불사로 살아가며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고, 외로이 살아가야 한다.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찔리지 않는한 죽지 않는 염마 . 그는 자신 이외에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변함을 두려워 했다. 자신 곁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나쓰도, 그리고 또 한사람 ,염마가 불로불사임을 알고 그를 끝까지 늘 곁에서 지켜 주었던 무타 노부마사 역시 세월이 흘러 힘없고 병든 노인에 불과 했다. 그런 그들이 언젠가 세상을 등지게 된다는 사실이! 또한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과 두려움이 염마에게는 큰 공포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학도병으로 끌려가던 어린 소년에게 불사의 신귀새김을 해주었던 것도 영원히 함께 불사로 살아가고 싶었던 한명의 동지이자 친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만 했어, 이 세상에 외톨이로 남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너를..." 결국 엄청난 부상을 입고도 죽지 못하는 끔찍한 소년의 모습을 보며 염마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뉘우치며 소년의 손바닥에서 귀신을 빼내주며 영원히 잠들수 있도록 해준다. 

소설은 초반의 지루함이 중반부, 후반부를 지나면서 나 스스로가 염마라는 캐릭터에 푹 빠져 있었던 듯함을 느낀다. 신귀의 강한 살인유혹에도 인간의 본성을 지키려 했던 그의 모습과, 자신이 사랑했던 나쓰를 자신과 같은 불로불사의 신귀새김으로 영원히 함께 할수 있음에도 끝까지 그녀를 '인간'으로 지켜주었던 모습들이 말이다. "나는 선인이 아니야. 약해빠진 괴물이지 쉽게 죽지도 못하고 나이도 먹지 않고, 그저 그뿐이야. 껍데기만 멀쩡하고 내 심성은 그걸 따라가지 못해" 왠지 책을 덮은후 염마가 측은해졌다. 그리고 불쌍하다.. 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의 이름이 아마네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염마라는 이름에 푹 빠져 있었을 정도로 염마의 한 세기의 삶에 집중해 있던 탓이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 이 책을 읽기전 판타지적인 느낌이 있다는 지인의 말에 책을 펴보기도 전에 거부감이 몰려왔다. 몇 권의 일본 판타지 소설을 접한 후, 하나 같이 모두 실망스럽기도 , 또한 읽기를 포기하기도 했던 적이 있던 터라, 스스로 결심했던 한가지는 절대 일본 판타지물은 읽지 말아야지! 라며 마음 먹었었기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땐 별 기대없이 뻔한 내용이겠거니 하며 읽기 시작한 책이다. 하지만 생각외로 몰입도, 재미도 , 그리고 은근 매력적인 한 권의 소설이였을 줄이야! 나의 섯부른 판단에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야겠다!
 

가끔 나 또한 불로불사의 삶을 상상해 보곤 했었다. 막연히 "어떨까.....?"로 시작했던 나의 상상은 점점 두려움으로 나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평생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을테고, 늘 지금처럼 여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수 있지 않을까... 하며 생각하다가도 점점 나의 친구들은? 가족들과 지인들은...? 모두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게 된다면 홀로 남는 공포감과 두려움이 극심할듯 함에 등골이 서늘해 짐을 느끼기도했다. 외로움이라는건 아마 인간이 느끼는 가장 지독한 고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세월의 흐름대로, 각자의 삶의 방식대로 공기의 흐름에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다 눈을 감는다 해도, 죽음과 삶의 경계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것이기에 나 또한 두려움보다는 받아들임으로 삶의 일부분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늘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적는다는건 매번 어렵게 느껴진다. 이번에도 그런 난해함과 고달픔은 찾아왔다. 잠시 미루고 생각을 정리한후 포스팅을 작성하려 했지만 왠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정리는 커녕, 오히려 그때의 나의 생각과 감정들이 모두 안개처럼 흩어져 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생긴다. 그리고 결국 이 늦은 시간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끄적끄적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나에게 고전이란 어떠한 것일까? 사실 그동안 아니 전혀 고전이란 분야에 관심을 두지도, 눈길 조차 주지도 않았다. 책 표지만으로도 거부감이 생겼고, 나와는 상관없는, 관심없는 분야일뿐! 이라며 치부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언젠가 우연히 고전 한권을 읽고 어렵다고 치부해 두었던 고전에 조금씩 긍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연히 집어들게 된 <인간실격> 제목에서 풀풀 풍기듯 가볍지 않을거라는건 분명하다!

  

 

이야기는 3번의 수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3장의 사진과 함께. 사진은 요조의 유년시절, 그리고 청년시절, 그리고 피폐해진 그의 타락한 모습의 사진이다. 그 사진의 요조 모습의 표정은 감정을 읽을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 그 이유는 요조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자신을 숨긴 또다른 요조의 이중적인 모습을 말해주는게 아니였을까? 요조는 인간을 무서워한다. 가장 무서워했던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고, 자신의 실체를 사람들이 알아채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떨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그는 일명 광대짓이란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와 실체를 숨기며 살아나간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항상 바들바들 떨면서, 또한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 털끝만큼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채, 그리고 나만의 고뇌는 가슴속 작은 상자에 감춰두고서, 그 우울과 긴장을 꼭꼭 감추고 또 감추며 오로지 천진한 낙천성만 있는척 나는 장난꾸러기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19쪽)' 무엇이 이 요조라는 아이를 이렇게 만든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눈 밖에 나는것을 두려워했고, 자신의 원하지 않으면서도 떳떳하고 소신있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며, 오로지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고 그 사람이 행복해 하면 그것으로 자신의광대짓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요조. 그것이 지나치게 나약하고 섬세하고 예민한 자신을 지키는 일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인간을 두려워하고 도망치고 대충 속이며 사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으면 탈도 나지 않는다'는 영리하고 교활한 처세술을 신봉하는 자들과 똑같은게 되는 걸까요 . 아아, 인간이란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하고, 아예 완전히 잘못 보았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평생 그걸 깨닫지 못한 채 상대가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고 있는건 아닐까요 (92쪽) 이 문장을 나는 몇번이나 되풀이하며 읽은듯하다. 왠지 그냥 슥- 하고 한번 읽고 지나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는듯해서... 이 문장 뿐 아니라 책을 읽는내내 자꾸 내 발목을 , 눈길을 , 시선을 빼앗는 문장들이 여럿 있었다. 공감하기 보다는 왠지 자꾸 나와 비교되는 느낌이랄까? '나는... 정말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행동하고 있는걸까?' 라는 의문이 수없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자꾸만 책을 읽다 깊숙한 생각에 빠져 버리곤 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인간의 삶을 두려워했던 요조, 그는 주변 사람들로 인해 점점 피폐해져 간다. 마약에 빠지고 알콜 중독자가 되며, 결국엔 친한 친구들에게 끌려 정신병원에입원하게 되는건 그에게 어쩌면 큰 충격이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나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갑니다. 내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이른바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가지 진리라고 생각되는건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간다.  나는 올해 스물 일곱 살이 됩니다. 흰머리가 엄청 늘어서 사람들은 대개 마흔 넘은 나이로들 봅니다 (135쪽) 이 글에서 <해설> 에서는 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36년에 자신의 생애는 끝나버렸다.그 다음은 인간으로서 살지 않았다. 라는 다자이의 통절한 의식이 드러나 있다고 말이다. 나는 이 책을 다 읽을때까지 저자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책을 읽은후 마지막 해설 부분을 읽으며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했다는 글을 볼수 있었다. 책의 문체가 독특하게 수기이면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듯 써내려가는 느낌이라 읽는내내 왠지 나에게  긴 장문의 편지를 누군가가 써서 보낸 듯한 느낌을 지울수도 없었지만, 그런 무거우면서도 자신의 비밀스런, 그리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듯 써내려간듯한 문체 때문인지 읽는동안 거부감 없이 읽을수 있었던 것 같다.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실격>의 요조의 삶과 너무나 흡사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왠지 자서전 적인 면이 다분히 느껴지는 소설이다

 

다자이 요사무는 몇번이나 자살시도 후, 결국  비극적인 자살로 삶을 마감했지만, 스스로 인간의 삶에 융화되고 자신을 거짓으로 위장하지 않고, 인간의 진실과 사랑과 정의와 미를 추구하려 노력했던게 아닐까? 이런 점만 보아도 소설속 요조와 삶은 너무나 흡사함을 많이 가지고 있다. 책을 덮은후 가볍지많은 않은 무거움이 내리 짓누르는 오만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가식들, 어쩌면 나도 주변인, 지인들에게 요조가 말하는 광대짓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왠지 그런 생각을 쉽게 떨쳐 버리지도 못함에 내 스스로 마음 깊숙히 억누르고 있던 그 무언가가 정답을 말해주듯 고개를 치켜드는 기분이다. 왠지 어렵다고만 생각되었고, 왠지 공감대를 많이 느끼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이 책을 거부할수 없는건 아마 작은 불씨같은 생각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소설로 그린 자화상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이제야 접하게 되었다. 제목이 많이 익숙했지만 사실 제목의 뜻이 무엇인지 그녀가 말했던 '싱아'가 무엇인지 알지못했을뿐, 사실 내가 읽을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선정도서, 권장도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음에도 내게는 관심없는 한권의 책이였을뿐이다. 단순히 소설의 하나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집어들었을뿐! 읽으면서도 책 제목의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하던 찰나 책 앞부분에 고맙게도 '싱아'라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되어있다. '싱아 :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 풀. 높이는 1미터 정도로 줄기가 곧으며 , 6~8월에 흰 꽃이 핀다. 산기슭에서 흔히 자라고 어린잎과 줄기를 생으로 먹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나서 예전에는 시골 아이들이 즐겨 먹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왜 제목을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라고 지었을까? ...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 그 시절 자신이 어린시절을 보낸 시골에서 자주 접하고 즐겨먹던 '싱아'라는 풀이 그리워서였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자신의 추억을 써내려 가야하는 이 책의 제목에 딱 어울리는 기억이 아니였을까...'가끔 나는 손을 놓고 우리 시골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하염없이 생각하곤 했다. 말수 적은 오빠도 내 향수를 알아 차리고는 여름방학이 며칠 안남았다는걸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여주곤 했다.(106쪽)에서 말하듯이 말이다!

 

<그 많던 싱아...> 이 소설은 박완서님의 자서전을 듬뿍 담은듯한 성장 소설이다. 그녀가 보낸 어린시절의 4~50년대의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아온 박완서님의 길고 긴 일기같은 소설이라고 해야하나? 사실 초반의 책장을 넘기면서 익숙치 않은, 낯설었던 몇몇 단어들로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어쩌면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게 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박완서님의 굉장한 솔직함에 놀라기도 했다. 숙부와 소실에 관한 부분이라던지, 자신의 뜻이 강하고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속물근성의 어머니를 따라 서울 현저동으로 이사온후, 학교에 입학한 후 친구 하나 없이 혼자 즐겁게 보내는 방법등을 터득하는  부분들이 그러하다.

 

처음 접한 박완서님의 책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반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때까지 읽는 나로 하여금 이 책에 매료되도록 끌어당기는 문체에 반했다.4~50년대를 직접 겪어보지 못한 나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자칫하면 어둡고 음울했을 그 시대의 현실을 재미난 문체와 이야기로 풀어내었고, 무거운 마음이 아닌 가볍게 읽을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이야기로 논픽션과 픽션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한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당연히 아득하기만한 어린시절의 일들을 한올한올 모두 끄집어 낼수 없으니 그녀의 상상과 실화를 적절히 섞어내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같은 시대, 같은 시기의 어린시절을 보낸건 아니지만, 그녀의 자서전적인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공감가는 부분이 꽤 있었던건, '어려서 그런 계산까지 한 것은 아니건만도 뒷간에 갈때는 동무들하고 떼로 몰려서갔다.(28쪽)에서 나오듯,비록 시골은 아니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서도 화장실은 집밖 마당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밤 늦은 시간이나 새벽에 화장실이 가고 싶을때면 꼭 언니들을 깨워서 함께 가자고 졸라대거나, 혼자 가게 되면 꼭 화장실 문을 조금은 열어놓고 용변을 보는 일이 잦았다. 정말 어릴때는 화장실 가는게 곤혹스러움이였다.

 

<그 많던 싱아...>는 박완서님 자신이 써내려간 일이지만 그녀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오히려 중심이 되어간다. 왠지 그녀는 가만히 가족들의 일상을 한켠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관찰하는 느낌이랄까?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1/3정도로 밖에 많은 분량을 차지 하지 않는다. '교정을 보느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거지만 가족이나 주변인물 묘사가 세밀하고 가차 없는데 비해 나를 그림에 있어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았다. 그게 바로 자신에게 정직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작가의말)'에서 말했듯이 어느 누구나 자신에 대해 말하거나 소개하거나 글을 쓴다는건 참 어려운 난해함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스스로를 가장 잘 알면서도 어쩌면 가장 잘 모르는게 바로 자신이 아닐까? 하지만 박완서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많은 비중을 넣지 않는반면 이 소설속 꽤 많은 인물들의 등장함에 있어, 한정되지 않은, 가족 외에도 꽤 많은 이야기들을 도란도란 들려주듯한 느낌이다.

 

고인이 된 박완서님의 책을 이제야 접하게 되었다는 것에 왠지 마음 한편으로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단 한번도 어둡고 불편한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다시 한번 가만히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조각조각 맞추듯 떠올려보니, 박완서님의 어린 시절이 가히 순탄하거나 평범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느낌들을 독자들이 전혀 눈치채지못하게 이 글을 써내려갔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지금 <그 많던 싱아...>의 후속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빠른 시일내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할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혜화,동 - Re-encount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우연히 무료했던 주말, 영화사이트를 뒤적이다가 놓치는줄 알았던 <혜화,동>의 상영시간표를 보고 환호를 했다. 한주 전까지만 해도 상영관이나 상영시간대가 오전 일찍, 아니면 심야12시쯔음 밖에 편성되어 있지 않아서, 관람을 포기했었는데, 심심치 않게 매체에서 호평이 쏟아져서 그런가, 이미 종영되었을꺼라 생각했던 영화가 오히려 시간대가 조금 더 늘어났다는 즐거운 소식에, 무작정 영화를 예매 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 따사로운 주말 , 가까운 영화관으로 향했다. 여전히 주말이지만, 모두들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러 나들이를 가셨는지, 영화관은 한산하기만 하다. 그리고 내가 입장한 무비꼴라쥬관 역시 한산~ 하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약기운에 계속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나름 집중해 보려고 부단히 애를 쓴듯하다. -_-)a

영화속 혜화는 철거지역에서 유기견들을 데려와 돌보는 일을 한다 왜 영화제목이 <혜화,동>인지는 영화를 다 본후에야 조각을 맞추듯 풀어나갈수 있다. 사실 나도 영화제목에 고개를 갸웃하긴 했다. 다들 , 대부분이 생각하는 어느 한 특정 동네 '혜화동'을 생각했을테지만, 이 제목에서는 혜화, 동을 다른 의미를 부여하듯 두 단어로 나뉘어 놓았다. 대충 줄거리를 읽어본 분들이라면 '혜화'는 여주인공 이름이라는것쯤은 알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붙어있는 '동'이란 의미는 무엇일까? 동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동' - 冬, 童, 動, 同 > 찬찬히 내용을 짜맞춰 보면 이 네 한자의 의미대로 영화의 계절은 겨울이다. 그리고 소녀 혜화는 미혼모로 한 아이를 낳았다. 또한 그녀의 닫힌 마음이 서서히 움직이고, 자신의 마음과 똑같은 슬픔을 가진 유기견들을 보살피면서 치유해 가는 과정을 그린듯하다.

밝고 낙천적이였던 혜화가, 아이를 잃은 상실과 슬픔으로 그녀의 모습은 늘 어둡고 우울해 보인다. 그녀가 배우고 싶어했던 네일아트를 그만두고 유기견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것도, 어쩌면 자신이 느낀 깊은 상처로 인해 유기견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움직여진게 아닐까? 혜화의 임신을 알게 된 이후 사라졌다가 5년후 갑자기 나타난 한수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원망과 분노만이 가득했을듯한 혜화. 그리고 우연히 앍게된 자신의 출생에 관한 여러가지 복잡한 스토리. 동물병원에서 유기견을 돌보며,동물병원 원장에게 자신의 가진 마음을 내비치지 못하고, 결국 놓치고 마는, 어쩌면 서투르면서도 사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였을까? 이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혜화를 통해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그리워했던 情이 아니였을까 생각이 든다.  

 

이 영화 역시 참 크로즈업이 많은 영화인듯하다 앞서 보았던 <파수꾼>에서처럼 어쩌면 주인공들의 표정을 크로즈업 함으로써 내면의 감정을 관객들이 모두 읽을수 있길 바라는 의도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파수꾼>과<혜화,동>은 모두 성장통을 겪는듯, 청춘영화이면서도 그들의 심리 상태나, 내적인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감성적인, 그리고 한편으로는 거친 표현으로 풀어낸듯하다. 집중하지 못한 탓에 영화에 몰입하지 못한 탓인지 나의 평점이 높지는 않지만, 조금 컨디션을 회복하면 다시 한번 집중해 보고 싶어지는 영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