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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영화 <라스트 나잇>을 보고 나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사실 의도했던 건 아닌 우연이였을뿐, 이웃 블로그에서 우연히 알게된 책이여서 호감이 가기도 했고, 얇아 금방 읽히겠다는 생각에 구입했다. 리뷰책들을 잔뜩 쌓아놓고도 이 책을 집어들었던건, 요 며칠 지끈거리는 몇권의 책을 연이어 읽은 탓에 조금은 가볍고, 난해하지 않은 책을 읽고 싶었을 뿐. 금방 읽을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여전히 200페이지 남짓한 이 책한권도 4일씩이나 잡아먹고 마는구나.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집을 나간 남편 때문에 슬픔과 절망에 빠진 클로에는 시아버지(피에르)의 권유로 어린 두 딸과 함께 시골 별장으로 내려간다. 시아버지는 평생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늘 거리감이 있는듯하다. 늘 가족들에게 냉정했고 차갑고 무뚝뚝하기만한, 그리고 일밖에 몰랐던 성실하기만한 사람이였다. 그런 시아버지의 호의가 클로에는 달갑지 않다. 어쩔수 없이 시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별장에 간다. 그곳에서 며칠을 보내던 어느날 시아버지와 클로에는 부엌에 마주 않아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번도 자신의 마음을 , 자신의 이야기를 한적이 없는 시아버지의 이야기가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찬 클로에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왜 내가 답답한 늙은이라고 생각하지?"/"아무도 사랑하지 않으시니까요. 아버님은 마음가는 대로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법이 없어요. 단 한 번도 우리들 속에 들어오신 적이 없죠. 우리의 대화, 우리의 바보 같은 짓거리에 동참 하신 적도 없고, 우리의 보잘것 없는 잔치에 끼신 적도 없어요. 아버님은 단 한번도 자상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어요.언제나 입을 꾹 다물고 계시지요. 아버님의 과묵함은 우리를 무시하거나 경멸한다는 느낌을 줘요. 또... "(72쪽) 가족에게는 늘 이런 존재로 느껴지는 시아버지는 며느리(클로에)와의 대화에서 그의 또다른 모습은 어쩌면 본 모습, 말하지 않음에 표현하지 않음에 가족들이 몰랐던 피에르(시아버지)의 모습을 모두 토해내는듯하다. 피에르가 며느리 클로에에게 하는 대화를 읽으면서 마음 한구석이 찡하게 아려오는듯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라고 치부하고 생각해온 가족들에게 차가운 냉대를 받은 긴 세월동안 피에르는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처음 이 책을 집어들었을때 사실 몰입이 되지 않아 살짝 애를 먹었다. 뜬금없이 시작되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클로에의 대화에 적응하기도, 내용을 이해하고 파악하기도 꽤 시간이 걸렸다. '이게 무슨 내용이야?' 갸웃거리며 읽어내려갔지만, 200페이지 남짓한 이 소설 한권은 점점 나의 시선을 빨아드리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거의 90%이상이 클로에와 시아버지(피에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었고, 시아버지 피에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읽는 나로 하여금 흥미롭기도 또한 그들의 그때의 감정들이 내게로 그대로 흡수되는듯하기도 하다. 대부분의 대화형식의 소설 이여서 일지도 모르지만.....피에르는 처음으로 자신이 다른 여인을 사랑했던 지난날의 일들을 며느리에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피에르 역시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 자식들을 두었지만,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닌 어쩌면 풋사랑에 얼결에 하게된 결혼이였다. 그는 자신이 절대 사랑할수 없는 , 그리고 가족을 두고 바람 피지 않을 거라는 자신만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뜻밖에 그런 그에게 진실한 사랑이 찾아온다. 그녀와의 사랑과 추억, 이별들을 며느리에게 세세한 기억까지 모두 토해낸다.
"어느날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에게 잘못을 저지를 권리가 있을까?' 하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사람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야. 그 몇 마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자기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잘못된 것과 추악한 것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해.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모든 것을 망가뜨릴 것을 각오하는 용기 말이다. 그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기심에서? 순진한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건 아닐거야. 그럼 뭘까? 생존 본능?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 아니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용기. 우리 인생에서 적어도 한번은 그런 용기를 내야 돼. 오로지 자기 혼자서 자기 자신과 맞서야 할때가 있는 거라고. '잘못을 저지를 권리', 말은 간단하지. 하지만 누가 우리에게 그래주겠어? 아무도 없어. 있다면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야" (98쪽)
누구나 한번쯤 다른 사랑을 꿈꾸지 않을까? 피에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이 가기도 , 그리고 안타깝기도 했다. 자신의 가슴아픈 진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어쩌면 피에르는 클로에게 현명한 삶의 선택을 하길 바랬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이런 혼란스런 마음으로 충동적인 후회의 삶을 선택하지 않길 바라며 기나긴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을지도! "네 나이의 두 배를 살다 보니 내 나름의 깨달음이 생겼다. 삶이란, 네가 아무리 부정하고 무시해도, 너보다 강한 거야. 그 무엇보다 강한게 삶이야. 전쟁중에 수용소에 갇혀서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본 사람들도 돌아와서는 아이들을 만들었어. 고문당한 사람들, 자기 가족과 집이 불타는 것을 본 사람들도 예전과 다름없이 버스를 잡기 위해 달음박질을 치고 날씨에 대해서 말하고 자기네 딸들을 결혼시켰어.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싶겠지만 인생이 그런거야. 삶은 그 무엇보다 강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지만, 삶에 맞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아. 우리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목소리를 높이지.(206쪽)"
책을 덮은후 참 오랜시간 여운이 남는 소설인듯하다.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 쉽고 빠르게 읽히지만, 이야기는 가볍지않은, 가슴 어딘가를 꾸욱 눌러주는 느낌이다. 작가 '안나 가발다'는 이 소설을 32세에 썼다고 한다. 그리고 두 아이를 둔 이혼녀라는 말에 소설속 '클로에'의 이미지가 저절로 떠오르기도 한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지, 어떻게 그런 젊은 나이에 이런 내면 깊숙한 소설을 쓸수 있었는지 감탄스럽다. 위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영화 <라스트나잇>과 비슷한 듯한 소재의 내용이지만, 이 소설이 한결 진실되고 정직(?)한 느낌이 든다. 언젠가 구입해두었던 <함께 있을수 있다면1.2>도 조금 여유가 생긴다면 그녀의 소설을 다시 손에 쥐어야겠다는 생각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