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 - Guzaar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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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제가 자주 이용하는 상암CGV에서 <청원>시사회를 한다해서 신청했습니다. 영화 '세얼간이' 이후, 오랫만에 보는 인도 영화이기도 했고, 세얼간이를 본 제게는 인도영화가 낯설지도 않았지만, 꽤나 흥미롭고 기대이상으로 즐겁게 보았던 터라 이번 <청원> 시사회에도 조금은 기대를 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네영카(http://cafe.naver.com/movie02)' 의 초대로 , 덕분에 좋은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네요. 포스터가 왠지 뮤지컬을 연상케 하기도 했지만, 인도영화 <블랙>을 잇는 감동 스토리라는 문구가 더욱 눈에 띄기도 했지요, 블랙은 루즈한듯 평범한  앞이 보이지 않는 한 소녀의 삶의 내면을 잘 그려낸 영화였습니다. 꽤나 Ending 이 제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기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번 <청원>에서는 전신마비인 마술사 '이튼'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4년전 마술 공연중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튼은 그 이후 단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는 늘 이튼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12년간 그를 보살피고 간호해 주는 간호사 '소피아'가 있지요, 대저택에서 남 부러울것 없이 지내는 이튼은 전신마비 이후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이 되어주는 라디오 DJ로 또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좌절이나 고통은 찾아볼수 없었지요.그의 라디오를 듣는 청취자들은 모두 그를 통해 희망을 얻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자신의 변호사 친구를 통해 자신의 안락사를 '청원' 하게 되지요 


 

그는 왜 갑자기 자신의 안락사를 법원에 청원을 하게 된 것일까요? 이야기는 이렇듯 이튼의 안락사 청원을 시작으로 그의 내면속 이야기와, 자신의 화려했던 마술사 최고의 명예인 '멀린'의 위치에 올라있던 삶을 , 현재와 과거의 반복 속에 보여줌으로써 , 이튼의 전신마비 이후 고통스러운 현재의 심리와 그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가 갑작스런 안락사 청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하는가, 단지 자유롭게 움직일수 없는 몸 때문인것일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요, 그런 생각은 어쩌면 저처럼 평범한 정상인들에게는 받아 들이기 힘든 , 이해 불가능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있어 그런 몸의 장애가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수 없으니 말이지요, 하지만 어쩌면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삶을 살던 이튼과 같은 사람에게 갑작스런 이런 사고는 한순간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그 사고로 인한 전신마비는 그에게 삶의 모든 희망을 완전히 앗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평범한 삶이 아닌 '최고'였기에 더욱 더 좌절감이 컸을지도요, 숨을 쉬고 있지만, 그리고 그렇게 살아있지만, 아무것도 할수없는 자신의 몸은 그에게 지옥과 같은 삶이 였을 것입니다. 숨이 막히는 감옥 속에 갇힌채 답답함과 괴로움을 흠씬 안고서 14년이란 세월을 견뎌 왔을테지요.
 

 

이튼으로 인해 삶의 희망과 용기를 얻었던 청취자들과 팬들은 그의 안락사에 대해 모두 반대를 하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튼'의 삶의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오롯이 생명의 존귀함만을 내세웠을 뿐이지요, 그래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튼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다가도 , 다른 한편으로는 삶을 포기하려는 그를 이해할수도 없을 뿐입니다. 또 하나, 과연 누가있어 이튼의 삶과 죽음에 있어 결정하고 판단하는데 권한이 있고 권리가 있을까요? 오롯이 자신의 인생이고 삶일 뿐인데, 누군가에 의해 그 삶과 죽음이 결정지어진다는 것 자체에 잠시 실소가 나오기도 합니다.

 

영화 <청원>은 이렇게 짐짓 무거운 소재인 '안락사'의 논쟁을 중심으로 흐르지만, 오히려 인도 특유의 음악, 춤, 즐거움이 조화롭게 섞여 보는 관객들에게도 , 무게가 느껴지는 짓누름이 아닌 , 편안함을 주는 오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마술이라는 환상적인 볼거리와, 웃음 포인트 또한 적절히 녹아 들어 있지요. 하지만 , 왠지 그것들이 완전히 조화롭게 이루어져 잘 버부려진 느낌이 들진 않았습니다. 아직 인도영화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함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상황에 맞지않은 음악 삽입이라든지,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조금은 부자연스러운듯한 연기라든지 말이지요, 제게는 관람하는 내내 걸림돌처럼 불편함을 안겨 주었습니다.

 

완전히 이튼의 고통을 이해하기에는 , 그리고 안락사 청원을 도와주는 변호사 친구의 입장 또한 그녀의 입장을 , 그리고 생각을 이해 하기에는 부족했었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튼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부르던 "What A Wonderful World"를 들을 때는 정말 표현 할수 없을 만큼 묘하게 가슴 아림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참 훌륭한 영화임에도 ,저는 영화 속에서 전달하는 감동, 고통, 슬픔, 행복, 희망 등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모두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함이 못내 아쉽게 느껴질 뿐입니다.하지만 왠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한번 Replay 해보고 싶어지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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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 The Help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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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보름남짓 , 참 오랫만에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이네요. 저에게 보름만의 영화는 참, 가끔 있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10월에는 미친듯 8편이상을 보더니 11월에는 모든게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져서인지, 영화에 흥미를 살짝 잃었습니다. 11월의 어느 주말, 오랫만에 긔요운 한샘 양과 상암CGV를 찾았어요. 오랫만이라 그런지 이미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를 갈팡질팡 자리를 찾지 못하는 계절에서 모든 나무들의 말라버린 나뭇잎들을 힘겹게 늦가을을 보내기 싫은지, 꼭 쥐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답니다. 문득 '아, 조금 일찍 집을 나서 근처 공원이라도 산책할껄 그랬나? ' 하는 아쉬움이 한아름 이기도 했고요, 그렇듯 11월의 차가운 바람을 느낄수 없는, 그래서 연말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어색하고 생소하게 와닿는 지금, 오랫만에 아주 긴 - 가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저의 책을 쥐는 시간도 잉여생활과 함께 점점 소원해 지고 있기도 하고요 (웃음))

 

그렇게, '혼자'가 아닌 '둘' 이라는 주말이 문득 즐겁기도, 합니다. 이제 겨우 개봉한지 일주일 정도 지난 영화인데 벌써 상영관 수가 많이 줄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시간대 역시 선택의 폭이 많이 줄기도 했고요, 워낙 영화는 개봉과 함께 1~2일 내로 보는 성격이다 보니, 이렇게 개봉된지 일주일 넘은 영화를 보는것도 참, 무언가 때늦은, 혹은 뒤늦은 게으름(?)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하고, 영화를 보고싶다는 흥미, 관심도도 부쩍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보게 되서인지 , 설레임보다는, 무심함이 더욱 크게 적용되는것 같네요.  


 

 

사실, 이 영화의 원작은 <헬프>를 소장하고 있지만, 역시나 읽어보지 못한채 지내다보니 결국 영화가 개봉하고 말았네요, 워낙 사랑받은 원작이라 그런지,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도 컸던것 같습니다. 영화의 이야기1963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잭슨 흑인 가정부는 백인 주인과 화장실도 같이 쓸 수 없다?!  아무도 가정부의 삶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녀가 책을 쓰기 전까지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정원과 가정부가 딸린 집의 안주인이 되는 게 최고의 삶이라 여기는 친구들과 달리 대학 졸업 후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역 신문사에 취직한 ‘스키터(엠마 스톤)’. 살림 정보 칼럼의 대필을 맡게 된 그녀는 베테랑 가정부 ‘에이빌린(바이올라 데이비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다른 인생은 꿈꿔보지도 못한 채 가정부가 되어 17명의 백인 아이를 헌신적으로 돌봤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은 사고로 잃은 ‘에이빌린’. ‘스키터’에게 살림 노하우를 알려주던 그녀는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자신과 흑인 가정부들의 인생을 책으로 써보자는 위험한 제안을 받는다. 때 마침 주인집의 화장실을 썼다는 황당한 이유로 쫓겨난 가정부 ‘미니(옥타비아 스펜서)’가 두 여자의 아슬아슬하지만 유쾌한 반란에 합류한다. 차별과 불만을 이야기 하는 것조차 불법이 되고 생명을 위협받는 일이 되는 시대에,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하는 ‘에이빌린’과 ‘미니’. 그녀들의 용기 있는 고백은 세상을 발칵 뒤집을 만한 책을 탄생시키는데..(네이버제공) 

 
 

 

불과 멀지않은 50여년전, 미국의 인종차별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들의 인종차별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 영화속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다보면, 과연 이 이야기가 정말 불과 50여넌전의 이야기 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여인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백인들은 오롯이 유색인종을 같은 인격을 지닌 인간이 아닌 '가정부'에 불과합니다. 백인들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흑인들에게 있어 자신의 미래와 또다른 삶은 없는 것이지요, 이미 정해진 운명을 따르는,삶에 그들의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보면 그녀들은 딱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정적이거나,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타인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처럼 가슴으로 많은 사랑을 주지요. (비록 자신의 아이는 백인들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해도 말입니다).

 

영화 자체는 130분이 넘는 러닝타임임에도, 그리고 참 찬잔한 드라마 장르임에도 지루함을 느낄수는 없습니다. 어찌보면 남자가 아닌 여자들의 삶이라 그런지 '인종차별'이란 여타 꽤나 충격적이고 강한 , 충격의 소지를 다분히 줄수있음에도, 영화 <헬프>는 오히려 웃음과,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지요, 하지만 단지 이야기가 그런 느낌만을 전하지도 않습니다. 치밀어오르는 강한 분노보다는 잔잔하게 슬며시 베어나오는 분노를 느끼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흑.백의 삶이 참으로 확연하게 선명한 선이 그어지듯 뚜렷함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래도 문화적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부분을 직접 느끼거나 , 경험해 보지 못함이어서 인지 이들의 이야기가 공감 백으로 다가오진 않지만, 문득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나는 이 영화속 유색인(가정부)들 처럼 미래의 삶이 자신의 의도와 뜻과는 상관없이 올가미처럼 옭메여 있는 것도 아닌, 그래서 내가 하고싶은 대로, 꿈꾸는 대로 살수있는 자유로운 삶이 보장되어있으면서도, 왜 이렇게 늘, 내 삶에 있어서 이렇게 무관심 한 것일까?' 라는 생각이 말이지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드니, 참으로 허영스러운 인생을,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책감이 들기도 하네요. 이 또한 , 이런 생각 또한 잠시잠깐 이겠지만. 말입니다.

 

  * 문득, 한 구석에 파묻혀 놓았던 <헬프>를 원작으로 읽어보아야 겠다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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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 - The King of Pi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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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급작스럽게 겨울이 성큼 다가온듯한 날씨에, 아직 추위에 적응할 준비를 하지 못한 저의 몸은 찬바람이 마냥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춥기도 했고, 요즘 부쩍 작업실 일의  양이 늘어나니, 몸은 평소보다 천근만근 배로 피로함이 많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음 같아선 6시쯤 퇴근과 함께 여유롭게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싶었지요, 하지만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지 않나 봅니다. 일이 더뎌지니 퇴근시간도 그만큼 딜레이 되어 버렸고, 결국 조금은 빠듯하게 저녁을 떼우고 신촌 아트하우스 모모에 도착했습니다.  따뜻한 커피한잔을 구입해 상영관에 들어서고 싶었지만, 독립영화관에선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뭐 예외인 곳도 있긴 하지만) 물 이외에는 반입 금지이니, 조금 아쉽네요.

 

영화 <돼지의 왕>은 한국 최초 잔혹 스릴러 라는 타이틀을 내걸었습니다. 그러하다 보니, 청소년관람 불가 이기도 하고요,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뒤로 쳐진채 빛을 보지 못한 우리 나라 애니매이션이 올해 들어선 꽤나 인기, 흥행선에 올라탄듯 싶습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 이라든지 <소중한 꿈> 등을 보면 알수 있듯이 말이지요. 하지만 이번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이 두 영화와는 달리 꽤나 잔혹스럽고 거친 느낌입니다. 그리고 절망적이기도, 어둡기도 하지요.
 

 

이야기는 세상이 버렸던 15년 전 그날, 그 끔찍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 됩니다. 성인이 된 ‘경민’은 중학교 동창이었던 ‘종석’을 찾아 나섭니다.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작가로 근근히 먹고 사는 종석은 15년 만에 찾아온 경민의 방문에 당황을 하지요. 경민은 무시당하고 짓밟혀 지우고 싶었던 중학교 시절과 자신들의 우상이었던 '철이'이야기를 종석에게 시작하며, 행복하지 않았던 그들의 학창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과거로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 가지요.

 

경민과 종석은 가진 자들에게, 그러니까 공부 잘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같은반 학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경민 또한 부유하지만 작은 체구에 연약하기 그지없는 아이 입니다.  종석은  비참하리 만큼 가난함을 품고있는 아이이지요, 두 소년이 친해질수있었던 것 또한 부유함과 가난이 아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서 같은 동지애(?)같은 것 때문이 아니였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경민과 종석에게 강한 힘이 되어주는 '철이'가 있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가정 불화로 겁날 것, 무서울것이 없었던 철이는 권력과 지배자로서의 힘을 휘두르려 하는 그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짓밟아 버립니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초반에 언급한것과 같이, 꽤나 잔혹하고, 어둡습니다. 대사들 또한 거침이 없기도 하지요. 얼핏 보면 학원물로 보여지지만, 학교 폭력을 가장한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 입니다. 인간을 동물로 표현함에 있어선, 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종석과 경민은 누군가의 먹이로 바쳐지기 위해 살찌우는 "돼지"로 비유되고, 그런 그들을 지배하는 자들은 인간들의 사랑을 받는 "개"로 비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 또한 비참하리만큼 지금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권력과 폭력, 악과 선의 경계, 약육강식 등, 현실에서도 약한 자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  그리고 강한 자에게 비겁하리만큼 굽신거리는 약한 자들의 생존방식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 직선적이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 거침없는 대사에 불편하다기 보단, 순응하고 받아 들이고. 때로는 철이가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에선 내심 스스로 쾌재를 부르짖기도 합니다. 그것이 저 또한 , 비겁한 약자라는 의미가 아니였을까 생각 들기도 하네요. 강자에게 비굴하리만치 고개 숙이는 약자들을 보면서도 선뜻 그들에게 당당히 맞서지 못했던 종석과 경민처럼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돼지의 탈을 쓴 채 , 비굴하고 나약한, 비겁한 모습의 약자들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돼지의 왕>의 그림체는 참으로 투박하고 거칠뿐 아니라, 움직임 역시 부자연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또한 영화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정기복이 아닌 조금은 강압적인 느낌을 띄고 있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이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뻔히 보이기도 하고 , 너무 적나라한 비판적이고 어두운 이야기 이다 보니 관객들을 설득함에 있어 , 조금은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건 이 애니메이션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지극히 지금의 피할수 없는 안타까운 불편한 진실인 현실상을 실사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함에 있어, 실사 영화가 표현하기 힘든 부분들을 꽤나 잘 소화해 내었습니다.  

 

왠지 만화책의 느낌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겨놓은 듯한 , 70년대의 투박함이 물씬 풍기기는 하지만, 의외의 반전은 저에게는 꽤나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애니메이션임에도 잔혹하고 잔인한 장면들이 많기도 했고요, 그리고 정말 많이 분노하고 또 분노했습니다. 그것이 '개의 노예' 로써인지 '돼지의 왕'으로 써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문득 문득 여러 장면에서 꽤나 분노 스럽고 답답스러운 한숨이 끊임없이 입을 통해 토해졌으니까요,

 

  * 문득 찾아온 겨울을 알리는듯한 차디찬  밤 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향하는길, 왠지 참 세상이 우울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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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드벤처 라이프
다카하시 아유무 글 사진, 양윤옥 옮김 / 에이지21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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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한권의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결국, 오랜 시간 손에 쥐고 놓질 않았던 지지부진한 한 권의 책을 완독하기를 포기(잠시 접어두었다고 합시다!)하고 조금은 가볍게 읽을수 있는 에세이집을 말이지요. 이 또한 우연히 형제 분이 운영하는 단골카페를 방문했다가, 그들의 추천으로 살짝 빌려왔습니다. 하지만 빌려온지 2주 후가 지난 지금에야 읽기를 시작했네요.  왠지 책 제목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저도 <어드벤처 라이프> 같은 삶을 살고 싶어지기도 하네요.

 

다카하시 아유무. 알고 보니 <LOVE & FREE>을 쓴 작가였네요, 뭐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꽤 눈에 자주 띄였던 책이였던 것 같습니다. 살짝 구매를 할까.. 란 생각에 손에 들었다 놨다 했던 기억도 어렴풋 나기도 합니다. 그에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꽤나 자유스럽고 , 유쾌해 보입니다. 이 에세이를 읽다보면 , 그런 그가 참으로 부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에게 삶은 어쩌면 "도전" 이란 하나의 단어에만 중점을 두지 않았나 싶을정도로, 때로는 무모하다, 아니면 대책없음. 이라든가, 라는 생각이 저와 같은 소심하고 계산적인, 생각에 치우친채 도전하지 못하는 삶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정말 버라이어티 함이 가득합니다. <어드벤처 라이프>는 다카하시 아유무의 자서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에세이 집입니다. 얇은 이 에세이 집에 그의 10대에서 지금을 살고있는 30대까지의 삶을 꾹꾹 눌러담아 놓은듯 보입니다. 다카하시 아유무는 10대 때부터 남들과 달라보입니다. 남들과 같은 삶의 패턴으로 살아가는 수순의 인생에 태클을 걸듯이 말이지요.

 

다카하시 아유무는 우연히 톰크루즈가 나오는 영화 <칵테일>을 보곤, 바텐더가 되면 멋지겠구나, 라는 단순한 하나의 생각 하나는, 그를 바텐더로 만들었고, 결국 친구들과 칵테일 바 까지 차리는 큰 성공을 하게 되지만, 그는 또다시 그 모든것을 버리고 , 다시 백수로 돌아오지요, 그리고 "무언가 재미있는것이 없을까?"라는 새로운 목표를 찾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내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출판사'에 대한 어떠한 정보나 지식없이 직접 출판사를 차립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도전에는 수많은 실패가 뒤따르기 마련이지요,여러번의 출간책들의 실패로 끝나지만 , 결국 그의 끈기가 , 끊임없는 노력이 베스트셀러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출판사 또한 성공적으로  이루어 낸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또다시 그 모든것을 버리고 백수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왠지 그에게 모든 것들을 쉽게 이루는듯 보이지만, 그는 자신의 목표와 도전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했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지인들에게 어려운 손을 내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면에는 수없는 실패와 감당할수 없는 부채(빚)이 생겨나기도 했지요, 그는 그렇듯 자신의 목표를 이루면 또다른 목표와 도전을 만듭니다. 끊임없이!

 

역시 참되게 폼 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아내나 자식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확실하게 큰 사랑을 쏟아주며 살더라. 가족, 형제, 친구, 연인, 신세를 진 사람 등등.. 내게 소중한 사람을 확실히 소중하게 여기는 거, 그게 의외로 어려운 건데 말이야.(215쪽)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건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 한다는 건,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나는 선택할 용기가 아직 부족한 것 같아. (222쪽)

 

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거야. 내 어떤 부분을 키워가느냐에 따라 미래의 나는 변하게 되겠지? '나를, 그리고 내 인생을 하나의 작품으로 본다.' 그런 시점이 좋더라 (225쪽)

 

다시 백수로 돌아온 다카하시 아유무는 오래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 후 , 그동안 모은 자금으로 어떠한 목적없이 몇년간의 세계여행을 떠납니다. 오로지 모은 돈을 다 쓰고 나면 돌아오자 , 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이런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 책 제목 그대로 'Adventure Life'가 아닐수 없단 생각이 드네요. 늘 느낍니다. 그리고 생각을 하지요, 이런 분야의, 아니 나와 다른 이들의 삶을 담아낸 에세이나 책을 읽다보면, 제가 감히 꿈꾸지 못하는 ,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나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그들을 바라보면서 자괴감과 괴리감이 동시에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막연히 나에게도 이런 삶을 살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과연 .. 나도 가능할까.. 라는 막연한 생각을 말이지요.  어찌보면 다카하시 아유무의 삶이 참 , 무모하고 대책없는 철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처럼 자신의 앞날의 미래를 생각하며 인생을 설계하고 안정적인 노후를 준비하려는 정도(正道)만이 정답인듯 그 길을 향하는 우리같은 인생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의 이런 무모하고 모험적인 삶을 이해할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런 안정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 속에 과연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과연 지금 ,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고 인생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도요. 어쩌면 이들 모두가 이렇게 어드벤처 라이프를 꿈꿀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마 우리에게는 이렇게 도전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그만큼 거대한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지요. 쉽지 않습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쳐 수없이 고민을 하고, 저울질 하며 결국은 꿈을 포기하는 것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막연한 '꿈'만 있을 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수는 없는 없습니다. 그러나 원한다면, 간절히 원한다면, 그 꿈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생각이 조금은 들기도 하네요.

 

참 즐거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유스럽고 모험적인 삶을 동경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어쩌면 대리만족이겠지요, 이런 모험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위로를 하듯, 자신감, 용기, 도전 이란것, 그 단어들의 생각만으로도 점점 움츠려드는 저에게 질책을 하듯, 마음으로는 모든걸 수용하고 공감하면서도 결코 섣불리 용기를 내보지 못함에, 위축 되어버린 자신감이 결국.. 씁쓸함으로 남을 뿐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내게도 그의 삶은 잠시의 휴식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잠시의 일탈을 꿈꾸게 해주었고요,  삶의 회의를 느끼거나, 단조로운 일상에 지친 분들에게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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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펭귄클래식 19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최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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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충동 구매.

 

  평일의 휴식은 왠지 모르게 더 특별한 하루를 저에게 만들어 주는듯 합니다.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 오랫만에 서점을 방문했지요, 그리고 몇 권을 구입함으로써 오래된 위시 목록들을 하나씩 지워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번 소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 위시 목록에 없었던 것이지요, 순전히 충동 구매 입니다. 아마, 이 소설을 구입한 이유를 말하라 한다면,지금의 '가을'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요, 그냥 어떠한 잡스러운 이유를 나열하기 보다는 '가을' 하나의 단어가 모든 의미를 담아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가볍게만 , 신파적인 요소가 강한 지금의 현대 로맨스물에 슬슬 지겨워 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떠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랑'이라는 단어속에 깊은 고통과 슬픔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고전이라는 두터운 벽은 참으로 어렵고 어렵습니다.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내게, 1860년에 쓰여진 <첫사랑>의 사랑 이야기는 깊은 공감과 울림을 일으키기에는 많은 노력과 이해를 필요로 하며, 어떤 면에서는 괴리감을 만들기도 합니다.

 

  가난한 귀족의 딸인 스물 한살의'지나이다'에게 , 아직은 어리게만 느껴지는 16세의 순수함이 묻어나는 소년 '블라디미르'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지나이다는 참으로 강한 매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아름다움을 무기로 많은 청년들을 자신의 하나의 장난감 같은 존재로 여길 뿐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서로 대적토록 만들어 질투를 이끌어 내며, 조롱하고 유흥을 즐길 뿐입니다. 그렇게 지나이다만을 바라보던 블라디미르는 어느날 그녀가 사랑에 빠졌음을 알게 되면서, 질투와, 분노, 시기를 느끼게 되지요. 하지만 그 상대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알게 된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분노와 질투의 감정은 사라지고 아버지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깨달아 갑니다. 어쩌면 블라디디미르에게 있어 아버지는 윤리적 평가나 객관적 판단을 넘어서는 신화화된 존재이기에 , 따라서 '여신'인 지나이다와 '신화'인 아버지의 사랑은 인정할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녀는 오래전에 낡아버린 어두운 빛깔의 드레스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누가 이 드레스와 앞치마의 주름 한자락이라도 만지도록 해준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듯했다. 그녀의 신발 코가 드레스 밖으로 보였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신발에 절이라도 할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물 만난 고기처럼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백 년이라도 이 방을 나가지 않을수 있을 것 같았다. (P.47)

 

이후 한달 동안 나는 많이 성숙해졌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헛되이 억지로 분간해 내고 싶은 아름답지만 준엄한 미지(未知)의 얼굴처럼, 나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 사랑 앞에서 나의 설렘과 사랑의 고통은 너무나 어린애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P.147)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 하거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 (P. 148)

 

  사실, 이야기는 마흔살의 중년이 된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써내려간 수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되지요.  하지만 그의 추억 속 첫사랑은 참으로 간절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만큼 첫사랑에 대한 어릴적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잠시의 불타오르는 듯한 열정과 욕망, 소유욕, 사랑, 질투는 그 잠시 뿐이였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지도요,

 

  얇은 한 권의 고전을 읽으며, 무심한듯 결코 무심히 흘려 버리지 못함에 잠시 멈칫했습니다. 고전이라는 얇고 단단한 벽에 가리워진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서지 못함으로 조금은 답답함에 읽어 내려갔을 뿐입니다. 억지스럽게 공감하려 했고, 무언가를 끄집어 내려는듯 쥐어짜듯 읽었지요, 이 책을 구입했던 그날, 카페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리고 나의 방 침대에서, 끊임없이 이야기 속에 함께 묻히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음 이였지요, 무료하고 , 지루한듯 읽어나가던 저에게 이 책의 결말은 참으로 신선하고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결말 때문만은 아니지요. '첫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내포되어 있는 또다른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문득 어렴풋한 푸릇한 갓 청춘의 나날들 속에 파묻혀 있던 내 첫사랑도 이반 투르게네프로 인해 또다시 수면 위로 다시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또한 한낮 한 순간의 열병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 또한 ! 

 

* 여담. 

한달여 넘게 잡고있던 소설을 결국, 끝내지도 못하고 던져 버린채, 지겹도록 공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냥 계절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싶습니다만. 결코 그 이유만은 아닌듯도 하네요, 비움으로 가득찬 가슴을 꾸역꾸역 채우기 위해, 미친듯 영화를 보고, 지인들과의 만남을 갖고, 쉴새없이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오롯이 '혼자'가 되어 방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비움은 결코 채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옷깃을 여미는 '겨울'이 손을 내미는 그 날이 오면, 조금은 채워지겠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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