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송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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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2권 겉표지에 보면 '이것은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들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이다.'라고 적혀있다. 1권 700페이지나 되는 분량을 읽어 놓고도 이 구절에 동감하지 못했다. 2권을 다 읽은 후 책을 덮으니 이 구절이 내 눈 앞에 어때? 그렇지? 라고 하는 듯 보여졌다. 그래, 그랬다. 2권을 다 읽은 후 이 구절을 보면서 나는 맞는 말이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으리라.

이 책은 딱히 누가 주인공이다, 라고 할 수가 없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서 자신의 눈에 비친 타인에 대한 이야기와 이야기 도중 자신이 그 이야기를 하면서 느끼는 세세한 감정까지 1인칭으로 표현되어 있다. 각각의 인물에 따라서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이 책 속의 등장인물들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들라크루아의 경우, 지나치리만큼 세세한 감정까지 잡아낸다. 상대방과 예술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도 상대방은 내 의도를 이렇게 받아들였군,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 할까 하다가 아니, 그냥 상대방이 받아들인대로 적당히 맞장구나 쳐 주자, 이런 생각에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까지 모조리 다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들라크루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그가 어떤 심경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히라노 게이치로가 받아들인 클라크루아의 모습과 그 사람의 고뇌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아마, 이 들라크루아의 예술론과 그의 고독에 깊히 동화 되었기에 이런 장대한 책을 낼 수 있었겠지.

나는 끝내는 이 책의 주인공이 들라크루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쇼팽은, 만인에게 사랑받고 그 사랑으로 자신의 재능과 생활을 유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소설 속에서는 마치 쇼팽이 주인공인 것 같다. 쇼팽과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 쇼팽의 지인들, 이 모든 사람들이 쇼팽 주위를 감싸고 있고 이들을 위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들라크루아 쪽으로 시선이 넘어오면 그의 연인과 몇 장면, 사용인인 제니와 몇 장면, 가까운 친구들과 몇 장면, 하지만 이는 대부분 그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
이야기의 흐름은 쇼팽을 따라가지만 정작 중요한 알맹이는 들라크루아가 쥐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쇼팽의 죽음 부분에선 두 천재의 대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쇼팽의 죽음을 앞에 두고 들라크루아가 보여 준 행동을 통해 이 책의 주인공은 들라크루아라는 나의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쇼팽은 만인에게 사랑 받고 그 만인에 의해 재능을 인정 받고 그 인정으로 그의 예술가적 지위와 생활, 그리고 죽을 때 까지의 안식처, 등을 제공받았으며 모든 이가 그의 천재를 위해 그를 아끼고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들라크루아는 애초에 화단의 이단자로 분류되어 있어 그의 성장과 지위에는 불안요소가 존재했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그때마다 적절한 처세로 자신의 창작 활동 앞에 나타난 난관들을 헤쳐나간다. 그리고 화가로서 자신의 작품이 오래도록 안전하게 보관 될 수 있는 모든 지혜를 짜 내며 자신의 화가로서의 생명력을 자기 스스로가 키워 나갔다. 이는 나에게 냉혹한 천재의 모습으로 비쳤다.

들라크루아의 천재는 들라크루아로 하여금 자신의 가족의 죽음, 가까운 지인의 죽음, 심지어는 쇼팽의 죽음마저 외면하게 만들었다. 쇼팽이 위독한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이유는? 언제 죽을 지를 몰라서. 지금 당장 죽을 지 저 상태로 얼마나 있다 죽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한번 그 곁에 있으면 쇼팽의 임종까지 그 옆을 지켜야만 한다. 그 기간동안 자신은 창작활동을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쇼팽의 죽음을 외면하고 그의 창작을 위한 활동을 하게 되고 결국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그의 부음을 받고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와서 조차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파리를 떠난다. 그의 죽음, 그의 부재에 대한 슬픔을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서? 아니, 그 슬픔으로 인해 자신이 창작활동을 하지 못할까봐. 죽기 직전의 쇼팽을 외면한 것과 다르지 않은 이유로 쇼팽의 죽음이라는 슬픔까지 외면해 버린 채 파리를 떠나 창작활동에 몰두 하게 된다. 들라크루아는 냉혹한 천재이다.

아니, 그의 천재가 그에게 너무 냉혹했다. 그를 철저히 사용해서 그 천재를 드러낸다. 이 두 천재, 자신의 천재를 자신의 통제아래 두려고 했던 쇼팽과 그 자신의 천재에 휘둘려버린 들라크루아. 쇼팽은 연주에 있어 모든 걸 그의 통제아래 두기를 원했고 자신의 요구사항이 수용되지 않으면 그의 창작활동에 악영향을 끼칠 줄 알면서도 거부했다. 자신의 예술적 재능이 정치를 위해 사용되길 바라지 않았고 정치에 부응한 적도 없다. 그는 그의 천재를 지극히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천재를 끝내 모두다 사용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창작활동을 위해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하고 그 시대의 정권교체에 유연하게 대응해 모든 정권에서 그의 창작활동을 보장받았다. 쇼팽은 모든 이가 그의 재능을 조심스레 다루어 쇼팽이 원하는 상황에 맞춰 주었지만 들라크루아는 본인이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갔다. 쇼팽은 쇼팽 스스로 그의 천재를 사용하고 통제했지만, 들라크루아는 그의 천재가 그를 사용했기에 쇼팽은 끝내 그의 천재를 모두 다 사용하지 못했고 들라크루아는 창작의 고뇌와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는 창작을 해 내야만 했다.

아, 말이 무지 길었다. 어쨌든 이건, 냉혹한 천재 들라크루아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은 들라크루아라는 냉혹한 천재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천재로 인해 그의 지인들의 죽음과 죽음 후의 슬픔까지 외면해야만 했던, 그렇게 자신의 천재 앞에 자기 자신을 모조리 바쳐야만 했던 한 천재의 이야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히라노 게이치로는 진정한 천재가 되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천재적인 재능만 갖춘 그런 천재 말고, 그 재능을 세련된 기술로 펼쳐내 보일 수 있는 그런 천재 말이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성실성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히라노 게이치로. 요, 이쁜 녀석. 일본에 가면 내가 널 가만두지 않을테야! 

 

오타 신고.

2권 p45

고뇌하는 그녀 -> 고뇌하는 그 (문맥상 그녀가 아니라 그,일걸요.)

2권 p300

거슬리는 부분이 겁니다. -> 거슬리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있는,이 빠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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