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도 고래여인의 속삭임이 들리는가. '고래여인의 속삭임'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그저 책표지에서 등장하는 그녀처럼 등치도 크고 뚱뚱한 그런 여인의 내면을 보여주는 책일 것이라 지레짐작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녀가 화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래 여인인 레베카가 학창시절 너무나도 사랑했으나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레베카를 함께 왕따(?) 시켜버린 베로니카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25년만에 비행기에서 옆좌석에 앉게 된 그녀들. 옆 좌석에 앉은 그녀가 레베카임을 알아챈 베로니카는 레베카의 눈을 피해 모른척 하고자 했으나 자신이 그녀에게 실수로 쏟은 음료로 인해 레베카와 안면을 트게 된다. 하지만 후에 그 모든 것들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음을 알게 된다. 베로니카는 껍질뿐인 남편인 지오반니와 끔찍하게 사랑하는 15살 난 아들. 세바스티안과 함께 꽤나 잘나가는 국제부 기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일에서도 인정받으며 만족하는 미모의 40대 여성이다. 그리고 패트릭이라는 멋진 내연남까지 둔 나름 완벽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여인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레베카를 만나고 싶지 않았고 아는 척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 그것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이리라. 왕따가 만연해 있는 요즘의 상황을 미약하게나마 보여준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녀는 학창시절 다른 친구들과는 모르게 레베카와 우정을 쌓았었다. 베로니카가 알고 있는 레베카는 책도 많이 읽었으며 말도 잘 통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눈을 피해 함께 영화도 보러 다녔었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좋아했던. 아니 사귀던 남자친구는 잘 생기긴 했지만 머리는 비어 있었고 레베카에게 파티에 함께 가자는 약속을 해서 레베카를 부풀게 만든 뒤 그녀를 바닷가 식료품점 앞에 내려주며 실컷 비웃는다. 그리곤 그녀는 자살까지 생각했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그 파티에서 베로니카와 그 남자의 키스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상처를 받았고 그 이후로 둘은 서먹해졌고 25년의 시간이 흐르게 된 것이었다. 그 시간이 흐른 뒤 레베카는 예전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고래를 연상하는 몸집이었고 미혼이었으며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부자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외로움만 가득했다. 레베카는 베로니카를 사랑했다. 그리고 증오했다. 그 미묘한 감정을 표현한 작가의 글솜씨가 부러울 정도였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회 풍조. 그리고 외모지상주의. 그런 것들을 비난하고 힐책하기 위해 지은이는 이 글을 쓴 것은 아닐까하는 조심스러운 생각도 해본다. 베로니카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외로운 사람이었고, 레베카는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함께 누릴 사람이 없었다. 만일 베로니카가 타인의 눈을 조금이라도 덜 의식했다면..그리고 레베카가 다른 이들의 사랑에 목말랐다면 조금이라도 외모를 가꾸는데 노력했다면 둘은 완벽한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아주 좋은 평생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베로니카의 병원에 찾아온 레베카의 후회와 용서는 아마도 서로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은 아니었을까 싶다. <책속의 말> 모든 건 오해에서 시작돼.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의지를 확실하게 밝히는 거야. 독서는 일종의 피난처였잖아. 여자란 고독이 깊으면 책과 함께 하나 봐. 누군가가 너하고 함께 있는 것처럼, 누군가가 너한테 어떤 얘기를 해주는 것처럼. 안 그러니? 추억이란 차츰 자라나는 어떤 일들 같아. 그렇게 생각 안 해? 결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거 말이야. 추억이란 살아 있는 일들이고, 그 모습이 변해가는 거야. 고독이 주위를 향해 날을 세우게 만든 거야. 일상이란 정상적인 게 모인 박물관이잖아. "삶은 온통 우연들의 집합체야." 그녀가 판결하듯 말했다. "우린 우연이란 게 우리 편으로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돼. 나는 늘 그 순간을 생각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