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 – 두 번째 이야기

며칠 전 소개한 스승 가와바타에 대해 쓴 미시마의 평론 <영원의 나그네>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읽었을 때, 물론 미시마의 작가로서의 역량이나 인기는 스승을 훨씬 뛰어넘었을 때이긴 하지만, 26살이나 연상인 데다 문단 데뷔 때부터 의지해온 대선배 작가를 이렇게 평하는 것부터 감탄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일본 사회는 서열이 무척 엄격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그것이 파격적으로 깨부수어질 때가 있는데 예술 쪽에서 그런 느낌을 특히 많이 받습니다.
거의 아들뻘 나이이지만 가와바타는 미시마를 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이라고 하며 평생 그를 아꼈습니다. 물론 노벨상 수상 후의 묘한 기류가 있긴 했지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고 생각해요.

<영원한 나그네>에 등장하는 가와바타는 과묵하고 모든 세상사와 인간관계에서 벗어난 듯한 모습, 누구에게도 다정하고 배려심이 넘치지만 또 동시에 누구에게도 어느 선을 넘는 감정을 갖지는 않으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 가와바타가 평생의 스승이자 벗으로 여긴 이가 요코미쓰 리이치와 미시마 유키오였습니다.
미시마는 문단 데뷔 때부터 가와바타와 서간을 주고받았는데, 그 편지를 읽어봐도 일직선으로 다가가는 미시마에 비해 가와바타는 늘 한 발 물러서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런 가와바타가 미시마의 자결 직후 남긴 짧은 글이 있는데, 안타까움과 함께 미시마의 죽음을 막지 못한 자책감, 그를 좀 더 이해하려고 하지 못한 데에 대한 참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첫 문장이 참 인상적이에요.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삶에 놀라고 슬퍼해야 했다고, 자주 참회하게 된다. 가까운 이의 죽음에는 자신의 마음이 부족했다는 아픔이 반드시 따르는 법이기에, 나 역시 몇 번이고 이 한스러움을 겪을 때마다, 나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과 함께, 가까운 이가 언제 죽는다 해도 나는 그 사람의 삶을 소중히 해왔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곤 한다. ......
그 후로도 나는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으며 이 말을 떠올렸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주 일어났다. 타인의 죽음이라는 슬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죽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자주 일어났다.
...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너무나도 자주 겪은 가와바타가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어떤 태도로 대하게 되었는지는 조금은 짐작이 갈 것 같기도 합니다.
가와바타는 미시마의 자결 후 1년 반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가 왜 굳이 그렇게 삶을 끝낼 수밖에 없었는지 가끔 의문스럽지만, 저는 가와바타의 죽음에 미시마의 영향이 꽤 크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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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서의 독자님이 <하루하루 와카>를 읽고 리뷰를 해주셨어요.

이렇게 예쁜 사진과 함께 사랑의 와카를 읽으니 더 와 닿는 것 같네요.

와카는 이렇게 사랑을 노래한 것이 많지만 하이쿠처럼 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도 많습니다.


봄날에 아름다운 와카와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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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휴가>에 <영원한 나그네>라는 에세이가 있습니다. 미시마가 스승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과 삶을 평한 것으로 유명한 글인데 무척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때, 선생의 내면에 인생에 대한 확신이 생겨난 것 같다.
... 정념이 정념 그 자체의, 감성이 감성 그 자체의, 관능이 관능 그 자체의 법칙을 유지하고 그곳에 머무는 한, 파멸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허무 앞에 팽팽히 쳐진 한 가닥 비단실은 지옥의 폭풍우에 휩쓸리더라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가와바타의 문학을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함께 평한 미시마의 독특한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미시마는 가와바타를 “문체를 갖지 않은 소설가”라고 평했습니다. 평생 집요할 정도로 ‘문체’에 대해 떠들었던 미시마에게 그런 가와바타는 이해할 수 없는 작가였던 것 같습니다.
미시마는 문체를 "세계를 해석하려는 의지이자 열쇠”라고 했습니다. 세계를 해석하고 정리하기 위해서는 ‘지력’이 필요하지만, 지력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감수성’을 따르며, 사물을 해석하지 않고 즉물적으로 판단한 가와바타가 그에게는 수수께끼 같았던 겁니다.
자신의 감수성을 그토록 없애버리려고 했던 미시마의 눈에 그의 문학과 삶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저는 끝내는 미시마가 자신의 모습을 스승에게 비추어보며 뭔가를 깨달았다고 생각해요. 관념과 이론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모순에 빠지거나 헤매게 할 때가 있으니까요. 미시마의 말처럼 어느 쪽이 안전할지는 모르는 거죠.


선생이 문체를 갖지 않는 소설가라는 것은 선생의 숙명이고, 세계 해석의 의지의 결여는 어쩌면 단순한 결여가 아니라 선생 자신이 적극적으로 포기한 것이다.
추상적 관념의 성곽에 갇힌 사람의 눈에는, 선생의 삶은 허무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한 마리의 나비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안전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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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곡가 말러가 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동시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사후에야 빛을 본 예술가들은 정말 많습니다. 고흐, 카프카, 에밀리 디킨슨, 멜빌...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작가만 해도 여럿이네요.

미시마 유키오 단편선 <시를 쓰는 소년>에 실린 <곶 이야기>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단편입니다. 그래서 표제작으로 싣기도 했는데 낭만주의 미시마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이 소설은 미시마가 대학 1학년생일 때 군수 공장에서 집필한 것으로, 그 무렵 절박한 심정으로 거의 미친 듯이 소설 집필에만 매달렸을 시기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곶 이야기>를 포함해 그때 지은 몇몇 작품을 들고 출판사를 돌아다녔을 때의 재밌는 에피소드가 <소설가의 휴가>에 나옵니다.

🌱
10여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웃지 못할 이야기인데, 훗날 연상의 친구가 된 나카무라 미쓰오 씨가 당시 지쿠마쇼보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그 원고들을 읽고 마이너스 120점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 원고가 세상 빛을 볼 리가 만무했으니, 몇 번이고 찾아갔지만 허사로 돌아갔고, 결국은 원고를 돌려받았다. ....
나도 착실히 공부해 공무원이 되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재밌는 건 그 평론가는 후에 열렬한 미시마의 팬이자 친구가 됩니다.

하지만 미시마는 다행히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 자리 잡게 되니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작가로 불리기에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전이란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작품일 텐데... 하는 생각에 이런 에피소드를 읽을 때마다 참 뜻밖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빛을 못 보는 작품이 많을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후 세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작품을 매의 눈으로 찾고 싶은 마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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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휴가>의 여러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은데요, 그중에서도 다자이 오사무와의 만남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다자이를 싫어한 이유를 곳곳에서 펼치는데, 미시마의 생각에 동감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여리고 나약한 다자이가 저는 좋습니다. 하지만 미시마가 다자이를 싫어한 것도 자신이 다자이처럼 여린 면을 가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다자이가 그걸 이겨내길 바랐다고 생각해요. 책 속의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다자이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다자이가 가진 성격적 결함은 적어도 그 절반은 냉수마찰이나 기계체조, 규칙적인 생활로 나을 수 있었다. 생활 속에서 해결해야 할 일로 예술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

조금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낫고 싶어 하지 않는 병자는 진정한 병자의 자격이 없다.


                                                             - <소설가의 휴가> 중


사실 다자이가 무명 작가였다면 달랐겠지만 전후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였으니 내내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같은 극작가이자 친밀한 관계였던 테네시 윌리엄스가 일본에 왔을 때 둘이서 대담한 적이 있는데 이때도 어김없이 다자이 얘기가 나옵니다. 테네시는 일본문학과 일본 고전에 조예가 깊었고 노가쿠를 바탕으로 한 희곡을 쓰기도 했어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재밌어서 소개합니다.

🌱

테네시 : 일본 문학의 현실 개념이나 비극의 감각이 미국 남부 문학과 매우 가까운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카슨 맥컬러스의 소설을 연상시키거든요. <사양>도 마찬가지고.

미시마 : 다자이 얘기가 나왔는데, 다자이를 숭배합니까?

테네시: 대단히 숭배합니다. 당신은요?

미시마: 예술가로서는 숭배합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 다자이 오사무는 정말 싫어했어요. 딱히 작가로서의 경쟁심 때문이 아니라, 그냥 싫은 겁니다. 제가 다자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취해 있었죠.

테네시: 그게 일본에선 드문 일인가요? 미국에서는 아주 흔한 일인데요.

미시마: 제가 다자이를 왜 싫어했느냐 하면, 그 감성이 지나치게 낭만적이었기 때문이에요. 다자이는 늘 푸념만 늘어놓는 성격이에요. 그리고 남을 원망하기만 하죠. 또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떠벌리고 다닙니다. 저는 그게 정말 싫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수성이 상처받기 쉽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죠. 전 그게 정말 괴로웠어요.

테네시: 그걸 숨길 수 있나요? 예술가란 언제나 자신을 상처 입히고, 자신의 몸을 베어 거기서 흐르는 피를 타인에게 뿌리는 것 같은 존재잖아요. 그리고 언제나 꿈을 꾸고 있고요.

미시마: 저는 테네시 당신처럼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 좋습니다.

테네시: (웃음) 당신이야말로 개성이 있죠. 제 인품은 싫어합니까?

미시마: 아니요, 좋아합니다. (웃음)

🌱

예술가에 대한 테네시의 말이 좋네요.

지나치게 낭만적인 감성 때문에 다자이가 싫었다고 말하는 미시마. <소설가의 휴가>에는 미시마가 자신의 낭만적인 감성을 얼마나 싫어했고, 그걸 얼마나 없애버리려고 애썼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년의 미시마는 결국 자신은 낭만주의자인 자신을 버릴 수 없었다고, 그것이 자신이 돌아갈 고향이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만년의 미시마는 다자이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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