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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과 연민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이처럼 부드러운 감정의 양면이었다. 종종 멀리 숲에서 올빼미가 우는 소리를 잠자리에서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어린 나는 동물 세계의 자유에 대한 동화적인 동경의 마음과, 어두운 숲속 나무 구멍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속 노래해야 하는 저 작은 ‘생명’을 향한 연민의 마음을 함께 느꼈다.
...


- <시를 쓰는 소년> 중 <나팔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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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득한 절벽 아래로, 신비스러울 만큼 고요한 물기슭이 보였다. 그것을 물기슭이라 부를 수 있을까. 울퉁불퉁한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푸른 바다가 더한층 짙은 색으로 끓어오르는 절벽 아래쪽이, 저 멀리 펼쳐진 평온하고 희미한 바다 수면보다 더 고요해 보이는 것은, 조금 전에 경험한 것과 똑같이, 소리가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리라. 세밀하고 또렷하게 찍힌 작은 사진처럼, 그 풍경은 너무도 작아서 별세계의 그림처럼 보였다.

- <시를 쓰는 소년> 중 <곶 이야기>에서

🌱
제가 미시마의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묘사 하나하나가,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의 감정이든 눈앞에 펼쳐지듯 선명하고 생생하게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무척 아끼는 단편 중 하나인 <곶 이야기>를 번역하면서 마치 제가 소년의 눈이 되어 아득한 바다를 보고 현기증을 일으키기도 하고, 소녀가 백합을 내밀 때는 꽃향기가 페이지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번역을 하면서도 이런 감정이 드는 저 자신이 놀랍기도 하고... 어쨌든 문장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문학을 번역하면서 종종 느끼는 감정이지만 이번 작품들에서는 더더욱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가끔은 너무 정교하고 논리적이라 담백한 나의 사랑 소세키의 문장이 그리워지기도 해요🤭)

오늘 어느 독자님이 이 책을 읽고 미시마의 표현력에 감탄하시면서 “바다를 묘사하면 그곳의 햇살과 공기마저 스며드는 듯하다”라는 멋진 감상을 써주셔서 저도 미시마의 문장에 대한 생각을 한번 써봤습니다.

언젠가 미시마의 문장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논리적이고 치밀하고 철저한 문장이고, 생생하고 선명한 묘사가 특징이라고 했어요.
이런 글을 쓰려면 일단 글의 소재와 주제에 대해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것으로는 절대 쓸 수 없다는 겁니다. 에세이 <소설가의 휴가>에서 미시마는 예술가의 명민함은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그중 첫 번째가 “소재(주제)에 대해 구석구석까지 음미하고 잘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금각사를 쓸 때는 교토로 날아갔고, 풍요의 바다 시리즈를 쓸 때는 인도로 날아가서 철저히 보고 느끼고 구상하고... 또 그걸 묵혔다가 다시 생각하고... 작가는 그런 과정을 거쳤어요.

문장의 힘이 참 대단한 게 시각적, 청각적 요소 없이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이 감각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상상하게 한다는 것 같습니다. 그런 문장을 쓰기가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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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의 좋은 문장을 만나서 작품 전체를 사고 싶을 때도 있고, 한 줄의 나쁜 문장을 만나서 작품 전체를 없애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

요즘 한창 작업 중인 미시마 유키오의 에세이 중 한 문장입니다.
저야 작가는 아니니 작품 전체를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좋은 문장 하나로 작품 전체를 사고 싶다는 말에는 너무나 공감합니다.

작업하면서 어떤 문장을 만나면 말 그대로 가슴이 떨릴 때가 있어요.
<시를 쓰는 소년> 작업할 때도 그런 문장을 많이 만났는데 오늘은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속 저를 설레게 한 문장입니다. ^^

🌸
눈처럼 하얀 손은 새벽빛 속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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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단편선의 표제작 <시를 쓰는 소년>은 제게 무척 흥미로운 글입니다.

미시마가 스스로 평하기는 “소년 시절 나와 언어(관념)와의 관계, 제멋대로에다 숙명적으로 내 문학적 출발점이 형성된 과정이 담겨 있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겪은 감정이 거의 없는 열다섯 살 소년. 그가 자신의 언어로 사물이 아닌 감정을 표현하게 되는 과정이 참 흥미롭습니다. 천재를 부여받은 인간의 슬픔, 어떻게 보면 장애라고도 할 수 있는 재능. 어린 시절에는 깨닫지 못한 그것을 서른의 미시마가 회상하며 쓰는 글인데, 자신의 모습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그때의 심리를 하나하나 해부하듯 써내려간 문장이 참 인상적입니다.

미시마의 말과의 관계는 <가면의 고백>에서도 언급되지만 에세이 <태양과 철>에서도 인상적인 문장으로 등장합니다.

🌱
곰곰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게는 말의 기억이 육체의 기억보다 훨씬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육체가 먼저 찾아오고, 그 다음에 말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말이 먼저 찾아왔고, 한참 후에, 마지못해 온다는 듯이, 이미 관념적인 형태를 가진 육체가 찾아왔고, 그 육체는 말할 것도 없이 이미 말에 갉아 먹혀 있었다.
🌱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인데, 그토록 철저하고 치밀하게 말을 대하고 다루어온 미시마라는 작가를 조금은 알 수 있는 글이기도 했어요.

아래 글은 열다섯 살의 미시마가 쓴 시 중 하나입니다. 감정과 마주치기 전의 미시마의 눈이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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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문장 🌱

미시마의 문장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무척이나 난해하고 관념적이어서, 번역하고 교정하면서 육체노동도 아닌데 온몸이 녹초가 되곤 합니다.
S에게 미시마 문장이 어떠냐고 물어봤어요. 글을 대단히 어렵게 쓴다, 글을 대단히 잘 쓴다, 외국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일 거다, 라고 합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덧붙이자면, 글이 대단히 논리적이고 치밀하다, 마치 눈앞에서 사물을 보고 있는 듯이 문장이 생생하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미시마의 소설을 번역한 어느 프랑스 번역가가, 미시마를 번역하는 작업은 마치 모자이크를 맞춰가는 것 같다고 했어요. 서양 언어 번역가인데도 정말 똑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했습니다.
보통의 번역 작업이 돌담을 쌓아가는 작업이라고 하면 미시마의 문장은 모자이크나 직소 퍼즐을 맞추는 듯한 느낌입니다. 모서리가 딱딱 들어맞지 않는 돌을 쌓아올리려면 번역가가 어떤 식으로든 군데군데 틈을 메워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미시마의 문장은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만큼 논리적이고 철저하고 치밀한데, 그런 의미에서 번역가에게는 더없이 이상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고 해독하는 범위는 저마다의 역량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요.

미시마의 문장에는 굉장히 어려운 어휘나 잘 쓰지 않는 한자어가 많습니다. 소세키야 메이지 작가니까 그렇다 쳐도, 미시마 같은 전후 작가의 경우에는 보기 드물어요. 인쇄소에 없는 한자가 많아 인쇄소로 3번 정도 원고를 주고받고 하면서 새로 활자를 만들 때까지 기다렸다고 해요.
이렇게 문장에 철저한 미시마였지만, 서양에서 발표된 기사나 인터뷰를 읽어보면 정작 자신의 작품 번역서에는 아주 관대했다고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오역이 있었는데, 그렇게 읽을 수도 있군요 하며 호탕하게 웃어 넘겼다고 해요)
하지만 아마도 그건 서양 언어로 된 번역을 염두에 둔 거라 그랬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서양의 언어로 일본어를 의미 전달을 넘어서 문장의 맛까지 살려 번역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거예요. 소세키가 생전에 <풀베개> 번역을 허락하지 않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거라 생각하는데, <풀베개> 같은 시적인 문장으로 쓰인 소설을 문장의 맛까지 살려 번역하긴 불가능해요. 하지만 전 우리말 번역은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서양 언어에 비하면, 의미 전달만이 아닌 작가 고유의 문장과 어휘의 맛을 어느 정도까지는 음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시마가 생전에 미국에서 인터뷰한 기사에서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어요.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어려운 한자를 왜 쓰냐고 물었더니, ‘장미’를 한자로 쓰면서 이 글자를 보라고, 글자 자체에서 화려하게 피어난 장미가 느껴지지 않냐고, 그래서 이 한자를 쓴다고 했어요.



요즘은 일본에서도 ‘장미’를 쓸 때는 간단히 히라가나로 쓰지만, 말의 소리, 글자의 모양 하나하나까지 철저했던 미시마라는 작가를 조금은 알 수 있는 에피소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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