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The R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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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4월은 극장가의 비수기라고 합니다. 전 블록버스터 없는 비수기가 좋습니다. 흥행성 때문에 개봉을 미뤄 왔던 수작들을 많이 만날 수 있거든요. 올해도 예외 없이 좋은 영화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 전 “그랜토리노”에 이어 연속으로 좋은 영화를 보게 되어 좋았습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는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거의 비슷한데,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 나름의 장점을 살려 서로 같으면서 다른 느낌입니다. 대개 영화가 괜찮으면 소설이 재미없거나 소설이 재미있으면 영화가 재미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야기는 드물게 영화와 책이 모두 훌륭합니다. 각각 봐도 좋고 함께 봐도 좋은 특이한 경우입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나중에 읽으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958년 독일의 베른, 15세 고등학교 1학년 마이클(독일어로는 미하엘: 데이빗 크로스)은 어느 날 전차를 타고 가다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중간에 내려 어느 집 앞에서 구토하는데 한 여자가 얼굴을 닦아주고 토사물을 씻어줍니다. 집으로 돌아 온 마이클은 성홍열을 심하게 앓습니다. 오래 앓고 난 뒤, 병이 다 나은 마이클은 감사의 인사를 하러 그 여자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마이클은 우연찮게 여자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엿보게 되고 탄탄하면서도 원숙한 중년 여자의 아름다움에 매혹 당합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마이클은 달아나지만 며칠 뒤 다시 찾아갑니다. 여자는 마이클을 유혹하고 두 사람은 관계를 맺습니다.

 몇 번의 정사가 반복된 뒤, 마이클은 여자의 이름을 물어 봅니다. 그녀의 이름은 한나(케이트 윈슬렛), 나이 서른여섯의 전차차장이었습니다. 마이클은 걷잡을 수 없이 한나와의 육체관계에 빨려드는데 한나는 정사 전에 책을 읽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후 한나에게 학교 문학 시간에 배우는 책들을 읽어주는 게 마이클의 일상이 됩니다. 두 사람은 함께 자전거 여행을 다녀오는 등 관계를 지속하는데, 어느 날 한나가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집니다.

 8년 뒤, 법대 대학원생이 된 마이클은 강의의 일환으로 한 재판을 참관하는데 피고석에 앉은 한나를 보고 놀랍니다. 한나의 혐의는 전쟁 중 독일군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가스실로 보낼 사람들을 지목한 점과 유태인 여성들을 호송하다가 임시로 가두어 둔 교회가 폭격으로 불탈 때 문을 열어주지 않아 300명의 사람을 죽게 만든 점 두 가지였습니다. 폐허가 된 교회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유태인 모녀가 한나를 포함한 여성감시원 6명을 고발한 것이죠.

 범죄사실을 극구 부인하는 다른 피고들과 달리 한나는 순진무구하게 자신이 했던 일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합니다. “재판관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라고 반문하는 한나야말로 진실을 얘기하고 있지만 재판관이나 배심원, 객석의 사람들에겐 한나가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나찌즘에 동조한 마녀 같은 모습으로 비칩니다. 나머지 피고들은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순진무구한 한나의 진술을 이용해 당시의 모든 책임을 한나에게 미룹니다. 한나는 자신이 책임자가 아니었다고 강변하는데 재판관은 한나가 당시 보고서의 작성자가 맞는지 아닌지 필적감정을 해 보자고 합니다. 이 말에 갑자기 자신의 모든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는 한나. 순간 마이클은 한나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한나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목숨이 달린 문제를 뒤집어쓰고 만 것입니다.

 마이클은 고민합니다. 한나의 진실을 알려 그녀를 구하고 싶은 마음과 한나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 한나를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과 한나의 죄과에 대해선 처벌해야 한다는 마음, 자신이 한나를 부인했던 일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은 한나의 과거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었다는 자기 합리화의 마음 등등 모순된 마음들 사이를 오가며 고민합니다. 한나를 면회하기로 했던 마이클은 결국 면회장으로 가지 않고 한나는 종신형을 받습니다.

 마이클은 이후 결혼을 하고 딸을 낳습니다만 삶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수 없었던 마이클은 이혼하고 딸과도 멀어집니다. 오랜 만에 고향집을 찾은 마이클은 과거 자신이 한나에게 읽어 주었던 책들을 발견하고 다시 그녀를 떠올립니다. 마이클은 직접 책을 읽고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감옥의 한나에게 보내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습니다. 주제가 단순하지 않고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보면서 짜증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공들의 모호한 내면처리가 더욱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원작 소설은 좀 더 내면묘사가 자세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최근 영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깊은 철학적 사유를 애절한 이야기에 잘 버무린 걸작입니다. 표면의 애절한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데 숨어 있는 상징이나 비유까지 생각하면서 보면 더 좋다는 얘깁니다.

 독일이나 우리나 굴곡 많은 현대사를 가진 공통점이 있죠. 독일은 가해자의 입장이었고 우린 피해자의 입장이었지만 여러 가지 아픈 과거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공감하는 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선과 악, 죄와 벌, 과거와의 단절과 화해에 대한 고민을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게 상징화해 보여줍니다.

 마이클은 전후세대입니다. 전쟁 중의 죄과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습니다. 한나는 전쟁 중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간여한 전쟁세대입니다. 히틀러와 나찌에 동조하거나 적어도 묵인한 대다수 독일인 중 한 명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문맹입니다. 그녀가 감시원이 된 것이나 자신의 일에 충실해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 모두 그녀가 문맹이었기에 저지를 수밖에 없는 과오였습니다. 한나는 성실하고 깔끔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지만 모든 자기행위를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일일이 판단해 볼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충실했고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마이클은 고민합니다. 그녀의 과거를 몰랐다고는 하나 그는 분명 한나를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했던 여자가 어느 날 악마적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마이클은 한나의 순진무구함을, 의도가 결여된 몰가치적 행위들을 이해하지만 그녀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무지와 무식이 그녀에게 면죄부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이클은 그녀를 구할 수 있었지만 외면하고 그 죄값을 치르게 합니다. 그래놓고 다시 책을 읽어 녹음해 보냅니다. 한나는 마이클이 자신을 이해한다고 믿고 감옥에서 새로운 희망을 갖고 스스로 글을 깨우쳐 편지를 보내지만 마이클은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습니다. 마이클의 의도는 한나가 무지를 벗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마이클은 한나가 20년의 형기를 채우고 특사로 출소하기 일주일 전 찾아가 묻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생각 많이 했어요?”

 “물론 쭉 네 생각을 했지.”

 “아니, 나 말고, 전쟁 때 있었던 일.”

 “.......그 재판이 있기 전까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어.”

 “감옥에서 뭘 배웠어요?”

 “읽는 걸 배웠지.”

 독일은 60년대 학생운동을 통해 전후세대가 전쟁세대를 호되게 단죄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책임은 없더라도 부모세대들이 저지른 죄과에 대해 공동의 죄책감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경우인 일본은 독일만큼 공동책임을 느끼지 않고 흐지부지 얼버무리고 말았죠. 일본의 그런 태도에 세계가 공분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앞으로도 일본사회가 진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피해자였던 우리는 일본보다 더한 갈등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물론 건국 초기 과거사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때문이겠죠. 한데 사실 알고 보면 독일이나 프랑스도 과거사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전범이나 범죄사실이 명백한 몇몇 사람들만 처벌 받았을 뿐입니다. 이유는 사람이란 존재가 칼로 무를 베듯 딱 잘라 선과 악으로 분류하기 매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잣대,어떤 원칙을 갖다대도 경계는 모호하고 예외적인 상황들이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일은 비단 친일이나 항일의 문제에 국한되진 않습니다. 민족상잔의 전쟁, 군부독재,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극심한 반목과 갈등을 겪었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고통 속에서 증오심을 키워 온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일부는 여전히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의 오랜 노력과 희생 덕에 사회 전반적으로 더 좋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긴 합니다만 최근 우리나라 정치 환경은 좀 우울합니다. 극단으로 치우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섭니다.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 나의 원칙은 무조건 옳고 너의 생각은 잘못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어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틀린’ 사람들이라고 매도합니다. 그러면서 또 그 기준을 쉽게 바꾸기도 합니다. 네가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식이죠. 남에겐 엄격하면서 자신에겐 관대합니다.

 영화의 후반, 마이클은 비로소 한나를 이해합니다. 하지만 한 발 늦었죠. 마이클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한나의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줍니다. 부모뿐만 아니라 자식 세대하고도 소통하지 못한 격정의 시대에 대한 반성입니다. 마이클과 한나는 남이지만 남이 아니듯, 인간세상은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물론 반성할 건 하고 분명히 짚을 건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마이클이 좀 더 일찍 한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은 게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러브 스토리로나 정치적.철학적 상징으로나,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나 뛰어난 연출과 시나리오 각색 면으로나 어느 면으로 봐도 훌륭한 수작입니다. 2시간만 즐거운 게 아니라 평생 여운을 맛볼 수 있는 좋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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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제일 교귀발
하오루춘 지음, 문은희.김남희 옮김 / 왕인북스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교귀발은 중국 청대의 상인입니다. 진상(晋商)은 중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상인 조직 중 으뜸이요, 그 중에서 교씨 일가가 산서(山西)지방 최대의 부자였다고 하는데 교귀발이 그 창업자입니다. 교귀발은 여덟 살에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고 열한 살에 어머니 마저 병으로 잃습니다. 고아가 된 귀발은 외가에 더부살이를 하며 두부를 만들어 파는 일을 돕습니다만 외숙모의 차별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열여섯에 다시 기현의 고향집으로 돌아갑니다. 영리하고 힘이 장사였던 귀발은 귀향 하자마자 마을의 일꾼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때마침 귀발은 어릴 적부터 오누이처럼 지냈던 이웃집 아가씨 금환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하지만 금환의 아버지 정경아는 가난을 핑계로 귀발의 청혼을 거절하고 딸을 왕부자집 반편 아들에게 시집 보내려 합니다. 귀발은 가난의 한을 뼈저리게 느끼고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대처로 나갑니다. 귀발은 운 좋게도 대성괴(大盛魁)라 불리는 대상의 낙타몰이꾼으로 취직합니다. 수 천 리 길을 오가는 고된 일이었지만 귀발은 높은 임금을 받고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는다고 해도 낙타몰이꾼으로서는 평생을 일해도 큰 돈을 벌긴 어려웠습니다. 2년 여 낙타몰이꾼으로 일한 귀발은 장사를 하기로 하고 대성괴를 나와 살랍제라는 곳으로 갑니다. 가진 돈과 경험이 전무한 귀발이었지만 오랜 숙고 끝에 콩나물과 두부를 팔아 장사 밑천을 마련합니다.
 귀발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진사아란 젊은이를 만나 의기투합해 경쟁이 치열한 살랍제를 떠나 새로이 성장하는 도시인 포두로 옮겨갑니다. 귀발과 진사아는 포두에 객점을 열고 남들보다 한 발 앞선 투자로 일약 상계의 거두가 되고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합니다. 큰 돈을 번 귀발은 십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뜻밖에 금환이 홀로 자신의 아들을 키우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금환은 결혼 하자마자 허약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곧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커가면서 점점 귀발을 쏙 빼닮은 것이죠. 그 동안 금환의 눈물겨운 고생과 자신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을 안 귀발은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여 성대하게 혼례를 치룹니다.
  꿈 같은 시간이 지난 후, 귀발은 다시 사업을 위해 홀로 포두로 갑니다. 그런데 그 동안의 승승장구로 자신감을 가진 귀발은 그만 자만하다가 대손해를 봅니다. 처음 맛 본 고배에 마음을 상한 귀발은 심하게 앓고 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일 년여 농사만 짓고 살던 귀발에게 진사아가 찾아옵니다. 마음을 다잡은 귀발은 다시 포두로 향합니다. 귀발은 뼈저린 실패를 거울 삼아 매사 신중을 기하는 가운데 더욱 공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합니다. 마침내 귀발은 하늘이 준 기회를 잡아 막대한 이윤을 남깁니다. 귀발은 광성공(廣盛公)이라는 대상단 조직을 만들어 진상제일의 기틀을 닦습니다.

 최근 중국의 전설적인 상인들에 대한 전기가 쏟아졌는데 교귀발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중국상인 중에서는 호설암이 가장 유명한데 그는 주로 관을 상대했던 사람이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입니다. 좋게 보는 쪽은 신처럼 떠받드는 반면 그렇지 않은 쪽은 비열한 돈벌레로 묘사하고 있어 진정성이 많이 떨어지는 인물입니다. 반면에 교귀발은 순수한 민간의 상인이었고 '덕(德)'을 갖춘 인격자로 후손에 이르기까지 온 집안이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았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단지 거부(巨富)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과 동료를 위하고 고객을 최우선 했으며 신의와 의리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입니다. "진상제일 교귀발"은 진정한 상도(商道)와 군자의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멋진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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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앤 나이트 블랙 캣(Black Cat) 3
S. J. 로잔 지음, 김명렬 옮김 / 영림카디널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뉴욕의 사립탐정 빌 스미스는 새벽 2시에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조카 개리가 길가에 쓰러져 자던 사람을 털다 잡혀 경찰서에 있다는 얘깁니다. 빌 스미스는 여동생과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몇 년 만에 본 개리는 건장하고 성실해 보이는 고등학생입니다. 개리는 무슨 일인지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뉴욕에 왔다가 돈이 떨어져 길에서 자는 사람을 뒤졌을 뿐이라고 해명합니다. 빌은 개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재웁니다. 하지만 개리는 새벽에 3층 창문을 깨고 거리로 도망칩니다.
 빌은 책임감을 느끼고 동생이 사는 곳을 수소문해 찾아갑니다. 여동생이 사는 뉴저지의 워런스타운은 고급주택이 늘어 선 작은 마을입니다. 여동생네는 얼마 전 남편의 고향인 이곳으로 이사왔습니다. 빌은 조카를 찾기 위해 한 때 사겼다는 여자애 집으로 찾아가는데 창밖에서 들여다 본 집안은 난장판입니다. 좋지 않은 예감에 경찰을 불러 함께 들어가보니 여자애가 죽어 있습니다. 가출한 조카 개리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면서 빌은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S.J.로잔은 여성작가론 드물게 하드보일드한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합니다. "윈터 앤 나이트"는 "빌 스미스와 리디아 친"시리즈 중 하나로 2003년 에드거 앨런 포 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에 이 시리즈는 이 책 한 권만 소개돼 있는데 다른 편은 재미가 없어서 그런 건지 궁금합니다. 이 책만 보면 무척 재미있거든요. 
 사소한 사건에서 출발해 점점 사건의 규모가 커지다가 사회문제로까지 발전하는 이야기 구조는 영화 "차이나타운"을 연상시킵니다. 사건의 흐름도 짜임새가 있지만 주인공의 심리묘사도 일품입니다. 아마도 여성작가이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과거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인물들간의 갈등 구조도 상당히 설득력 있습니다. 빠르고 건조하면서도 감성적인 문체도 좋습니다. 마치 영화를 보듯 선명한 묘사로 초반만 지나면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박진감이 넘칩니다.

 어느 사회나 오랜 세월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다 보면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고 안정된 미국의 한 소도시가 속으로 곪아 터지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미국 영화를 보면 왜 그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풋볼,농구,야구 등 스포츠를 좋아하고 성공신화에 열광하는 지 늘 궁금했었는데 이 소설을 읽으니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는 허울과 달리 미국은 신분상승을 이루기 몹시 어려운 나라라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하긴 그나마 그 정도라도 열린 곳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겠습니까만! 
 우리나라도 점점 계층이 분화되고 그 계층간 이동이 어려워지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예전과 달리 '왕따'니 '서민'이니 '귀족'이니 하는 말들이 많이 들려오는 게 그 증거가 되겠지요. 우리나라도 소설 속 워런스타운을 닮아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윈터 앤 나이트"는 재미와 생각거리를 동시에 던져주는 걸작 스릴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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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 - Gran Torino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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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을 함께 한 아내를 마지막 떠나보내는 자리에서도 월터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슬픔 보다는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얼굴입니다. 젊어 포드사에서 자동차를 만들던 기술자 출신 월터는 변해가는 세상이 못마땅합니다. 자신이 피땀 흘려 지키고 가꾼 미국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어섭니다. 두 아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고 막돼먹은 며느리와 손자들은 혐오스럽기만 합니다.

 인종차별주의자인 그에게 유색인종들로만 채워지는 새 이웃들은 불쾌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우월주의자인 그에게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는 외제들은 또 다른 위협입니다. 월터에겐 옆집에 사는 아시아인 가족의 이질적인 행태가 야만스럽기만 합니다. 아들이 팔고 다니는 일제 자동차도 그의 눈엔 조잡하게만 보입니다. 그의 유일한 낙은 자신이 직접 조립한 포드의 1972년산 중형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일뿐입니다.

 어느 날 옆집의 몽족 소년 타오(비 방)가 그랜 토리노를 훔치러 들어왔다가 월터가 들이댄 총에 위협을 받아 도망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사실 타오는 착한 아이지만 몽족 갱단들의 강요에 못 이겨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타오의 엄마와 누나 수(아니 허)는 타오에게 사과하고 일로써 잘못을 갚으라고 합니다. 처음엔 모든 게 못마땅했지만 월터는 예의 바르고 정 많은 타오와 수를 통해 점점 편견의 벽을 허물고 그들과 친해집니다.

 월터는 수를 통해 몽족이 베트남전에서 미국편을 든 이유로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고 일말의 책임감을 가집니다. 그도 젊어 한국전에 참전해 십수명의 적군을 사살한 사람입니다. 국가의 강요로 했다기보다 자신도 믿었던 가치를 위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총을 들어 쏠 힘도 없었던 소년병을 쏜 경험은 평생의 죄책감으로 남아있습니다.

 수와 타오를 통해 가족 이상의 정을 느껴가던 즈음, 몽족 갱단이 타오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화난 월터는 갱단의 한 소년에게 린치를 가하고 위협합니다. 갱단은 보복으로 타오의 집에 총을 난사하고 수를 겁탈합니다. 월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월터는 타오와 수를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섭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를 더 이상 안 할 모양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작 영화 ‘그랜 토리노’를 보며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늙은 배우이자 감독이 미국에 남기는 유언입니다. 위대한 배우이자 감독이고 보수주의자이기도 한 팔십 노구의 남자가 자신의 조국에 마지막으로 꼭 해 주고 싶은 마지막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랜 토리노란 자동차는 영광스러웠던 미국의 과거를 상징합니다. 근육질의 이 자동차는 미국이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에 나왔던 제품입니다. 월터는 이 자동차를 직접 조립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동차를 직접 조립한 것처럼 미국을 자신의 피땀으로 일군 사람입니다. 미국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고 살아남았습니다. 인종차별적인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 전쟁 중에 자신이 썼던 M1 소총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는 어쩌면 가장 전형적인 미국의 꼴통보수주의자입니다. 하지만 언뜻 꼴통처럼 보이는 월터지만 알고 보면 그야말로 진정한 보수주의자입니다.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거리낌 없이 내뱉지만 사실 그도 이름에서 보듯 폴란드 이민의 후예입니다. 그의 친구들도 죄다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등등으로 정통 앵글로색슨 백인이 아닙니다. 그는 보수주의자의 장점인 높은 도덕성과 따뜻한 온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는 썩어빠진 핏줄보다 건전하고 인정 많은 몽족 소년에게 그랜 토리노를 물려줍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 월터는 아시아에서 온 소수민족 출신 소년 타오에게 미국의 미래를 맡깁니다. 후세를 위해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그가 바로 진정한 보수주의자입니다.

 세상엔 이상하게도 자칭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는 꼴통들이 많습니다. 이기적이고 권력지향적이고 폭력적인 면에서 그들은 희한하게 쌍둥이처럼 닮았습니다. 그들은 가짜 보수주의자, 가짜 진보주의자들입니다. 진짜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가운데 옳은 것, 건전한 것, 따뜻한 것을 지키고 가꿀 줄 아는 보통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들에게 보수주의든 진보주의든 이름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다움’이 있을 뿐입니다. 노작가의 경륜이 묻어나는 따뜻한 말씀 한마디를 들으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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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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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조대학 부속병원의 만년 강사 다구치는 2월 초 다카시나 병원장의 호출을 받습니다. 병원장이 부른 이유는 외과의 간판인 ‘바티스타 수술팀’에 대한 내부조사 요청. 수술이 싫고 병원내의 복잡한 정치구도가 싫어 신경내과의 만년 강사로 지내고 있는 다구치는 요청을 거절하려 하지만 병원장의 간곡한 요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조사를 수락합니다.

   

 ‘바티스타 수술팀’은 미국의 심장병 전문병원으로부터 초빙돼 온 심장수술의 권위자 기류 교이치가 이끄는 수술팀으로 수술 성공률 백퍼센트를 자랑하는 외과의 간판. 최근 세 차례 원인불명의 수술실패가 잇따르면서 위기감에 빠져 있습니다. 곧 조사는 사실 기류 본인의 요청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다구치는 수술팀의 일원들을 한사람 한사람 면담하고 수술을 직접 관찰하기도 하지만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데 갑자기 등장한 한 사나이, 일본 후생성의 괴짜 공무원 시라토리가 나타나자 돌연 조사는 급물살을 탑니다.




  재미있습니다. 미스터리는 강하다고 할 수 없지만 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주는 긴장감이 대단하고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작가인 가이도 다케루는 실제로 현역의사라고 합니다. 병원내의 정치구도나 치료행위를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이나, 의료체계 전반이나 의학계의 치부를 슬쩍 드러내는 전문성은 역시 현역의사가 아니면 묘사하기 힘든 내용일 겁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구축에 있습니다. 주인공 다구치와 시라토리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바탕에 깔린 기질은 서로 통합니다. 늘 조직의 생리를 거슬르는 타고난 반골이지만 따뜻한 마음과 전문성을 갖춘 진정한 프로들이죠. 두 사람이 엮어내는 앙상블이 매우 훌륭합니다. 주변인물들의 성격도 흥미롭습니다. 조연들도 모두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로, 각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심리를 드러내는 묘사방식이 탁월합니다. 한 번 손에 쥐면 끝을 보기 전엔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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