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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The Read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흔히 4월은 극장가의 비수기라고 합니다. 전 블록버스터 없는 비수기가 좋습니다. 흥행성 때문에 개봉을 미뤄 왔던 수작들을 많이 만날 수 있거든요. 올해도 예외 없이 좋은 영화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 전 “그랜토리노”에 이어 연속으로 좋은 영화를 보게 되어 좋았습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는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거의 비슷한데,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 나름의 장점을 살려 서로 같으면서 다른 느낌입니다. 대개 영화가 괜찮으면 소설이 재미없거나 소설이 재미있으면 영화가 재미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야기는 드물게 영화와 책이 모두 훌륭합니다. 각각 봐도 좋고 함께 봐도 좋은 특이한 경우입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나중에 읽으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958년 독일의 베른, 15세 고등학교 1학년 마이클(독일어로는 미하엘: 데이빗 크로스)은 어느 날 전차를 타고 가다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중간에 내려 어느 집 앞에서 구토하는데 한 여자가 얼굴을 닦아주고 토사물을 씻어줍니다. 집으로 돌아 온 마이클은 성홍열을 심하게 앓습니다. 오래 앓고 난 뒤, 병이 다 나은 마이클은 감사의 인사를 하러 그 여자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마이클은 우연찮게 여자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엿보게 되고 탄탄하면서도 원숙한 중년 여자의 아름다움에 매혹 당합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마이클은 달아나지만 며칠 뒤 다시 찾아갑니다. 여자는 마이클을 유혹하고 두 사람은 관계를 맺습니다.
몇 번의 정사가 반복된 뒤, 마이클은 여자의 이름을 물어 봅니다. 그녀의 이름은 한나(케이트 윈슬렛), 나이 서른여섯의 전차차장이었습니다. 마이클은 걷잡을 수 없이 한나와의 육체관계에 빨려드는데 한나는 정사 전에 책을 읽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후 한나에게 학교 문학 시간에 배우는 책들을 읽어주는 게 마이클의 일상이 됩니다. 두 사람은 함께 자전거 여행을 다녀오는 등 관계를 지속하는데, 어느 날 한나가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집니다.
8년 뒤, 법대 대학원생이 된 마이클은 강의의 일환으로 한 재판을 참관하는데 피고석에 앉은 한나를 보고 놀랍니다. 한나의 혐의는 전쟁 중 독일군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가스실로 보낼 사람들을 지목한 점과 유태인 여성들을 호송하다가 임시로 가두어 둔 교회가 폭격으로 불탈 때 문을 열어주지 않아 300명의 사람을 죽게 만든 점 두 가지였습니다. 폐허가 된 교회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유태인 모녀가 한나를 포함한 여성감시원 6명을 고발한 것이죠.
범죄사실을 극구 부인하는 다른 피고들과 달리 한나는 순진무구하게 자신이 했던 일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합니다. “재판관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라고 반문하는 한나야말로 진실을 얘기하고 있지만 재판관이나 배심원, 객석의 사람들에겐 한나가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나찌즘에 동조한 마녀 같은 모습으로 비칩니다. 나머지 피고들은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순진무구한 한나의 진술을 이용해 당시의 모든 책임을 한나에게 미룹니다. 한나는 자신이 책임자가 아니었다고 강변하는데 재판관은 한나가 당시 보고서의 작성자가 맞는지 아닌지 필적감정을 해 보자고 합니다. 이 말에 갑자기 자신의 모든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는 한나. 순간 마이클은 한나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한나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목숨이 달린 문제를 뒤집어쓰고 만 것입니다.
마이클은 고민합니다. 한나의 진실을 알려 그녀를 구하고 싶은 마음과 한나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 한나를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과 한나의 죄과에 대해선 처벌해야 한다는 마음, 자신이 한나를 부인했던 일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은 한나의 과거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었다는 자기 합리화의 마음 등등 모순된 마음들 사이를 오가며 고민합니다. 한나를 면회하기로 했던 마이클은 결국 면회장으로 가지 않고 한나는 종신형을 받습니다.
마이클은 이후 결혼을 하고 딸을 낳습니다만 삶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수 없었던 마이클은 이혼하고 딸과도 멀어집니다. 오랜 만에 고향집을 찾은 마이클은 과거 자신이 한나에게 읽어 주었던 책들을 발견하고 다시 그녀를 떠올립니다. 마이클은 직접 책을 읽고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감옥의 한나에게 보내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습니다. 주제가 단순하지 않고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보면서 짜증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공들의 모호한 내면처리가 더욱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원작 소설은 좀 더 내면묘사가 자세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최근 영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깊은 철학적 사유를 애절한 이야기에 잘 버무린 걸작입니다. 표면의 애절한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데 숨어 있는 상징이나 비유까지 생각하면서 보면 더 좋다는 얘깁니다.
독일이나 우리나 굴곡 많은 현대사를 가진 공통점이 있죠. 독일은 가해자의 입장이었고 우린 피해자의 입장이었지만 여러 가지 아픈 과거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공감하는 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선과 악, 죄와 벌, 과거와의 단절과 화해에 대한 고민을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게 상징화해 보여줍니다.
마이클은 전후세대입니다. 전쟁 중의 죄과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습니다. 한나는 전쟁 중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간여한 전쟁세대입니다. 히틀러와 나찌에 동조하거나 적어도 묵인한 대다수 독일인 중 한 명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문맹입니다. 그녀가 감시원이 된 것이나 자신의 일에 충실해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 모두 그녀가 문맹이었기에 저지를 수밖에 없는 과오였습니다. 한나는 성실하고 깔끔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지만 모든 자기행위를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일일이 판단해 볼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충실했고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마이클은 고민합니다. 그녀의 과거를 몰랐다고는 하나 그는 분명 한나를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했던 여자가 어느 날 악마적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마이클은 한나의 순진무구함을, 의도가 결여된 몰가치적 행위들을 이해하지만 그녀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무지와 무식이 그녀에게 면죄부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이클은 그녀를 구할 수 있었지만 외면하고 그 죄값을 치르게 합니다. 그래놓고 다시 책을 읽어 녹음해 보냅니다. 한나는 마이클이 자신을 이해한다고 믿고 감옥에서 새로운 희망을 갖고 스스로 글을 깨우쳐 편지를 보내지만 마이클은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습니다. 마이클의 의도는 한나가 무지를 벗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마이클은 한나가 20년의 형기를 채우고 특사로 출소하기 일주일 전 찾아가 묻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생각 많이 했어요?”
“물론 쭉 네 생각을 했지.”
“아니, 나 말고, 전쟁 때 있었던 일.”
“.......그 재판이 있기 전까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어.”
“감옥에서 뭘 배웠어요?”
“읽는 걸 배웠지.”
독일은 60년대 학생운동을 통해 전후세대가 전쟁세대를 호되게 단죄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책임은 없더라도 부모세대들이 저지른 죄과에 대해 공동의 죄책감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경우인 일본은 독일만큼 공동책임을 느끼지 않고 흐지부지 얼버무리고 말았죠. 일본의 그런 태도에 세계가 공분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앞으로도 일본사회가 진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피해자였던 우리는 일본보다 더한 갈등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물론 건국 초기 과거사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때문이겠죠. 한데 사실 알고 보면 독일이나 프랑스도 과거사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전범이나 범죄사실이 명백한 몇몇 사람들만 처벌 받았을 뿐입니다. 이유는 사람이란 존재가 칼로 무를 베듯 딱 잘라 선과 악으로 분류하기 매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잣대,어떤 원칙을 갖다대도 경계는 모호하고 예외적인 상황들이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일은 비단 친일이나 항일의 문제에 국한되진 않습니다. 민족상잔의 전쟁, 군부독재,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극심한 반목과 갈등을 겪었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고통 속에서 증오심을 키워 온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일부는 여전히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의 오랜 노력과 희생 덕에 사회 전반적으로 더 좋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긴 합니다만 최근 우리나라 정치 환경은 좀 우울합니다. 극단으로 치우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섭니다.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 나의 원칙은 무조건 옳고 너의 생각은 잘못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어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틀린’ 사람들이라고 매도합니다. 그러면서 또 그 기준을 쉽게 바꾸기도 합니다. 네가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식이죠. 남에겐 엄격하면서 자신에겐 관대합니다.
영화의 후반, 마이클은 비로소 한나를 이해합니다. 하지만 한 발 늦었죠. 마이클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한나의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줍니다. 부모뿐만 아니라 자식 세대하고도 소통하지 못한 격정의 시대에 대한 반성입니다. 마이클과 한나는 남이지만 남이 아니듯, 인간세상은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물론 반성할 건 하고 분명히 짚을 건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마이클이 좀 더 일찍 한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은 게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러브 스토리로나 정치적.철학적 상징으로나,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나 뛰어난 연출과 시나리오 각색 면으로나 어느 면으로 봐도 훌륭한 수작입니다. 2시간만 즐거운 게 아니라 평생 여운을 맛볼 수 있는 좋은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