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핵심'만 적절한 분량에 간결하게 추렸다. 어쩌면 당연한 상식을 뒤늦게나마 확인한 사례들이 표현의 자유를 확장하였다고 평가받게 되는 현실이 서글프다. 다른 생각을 인내하고 (겉으로, 전략적으로, 교악하게라도) 환대할, 확고한 다짐과 수양이(때로는 전략적 태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러한 뒤늦은 성취조차 되레 허물어뜨려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선택과 집중이 가능한 사건 수, 사법제도 덕분에 "생각할 시간"을 갖고 이런 "생각"을 벼리시게 된 것이겠지만, 며칠 전 경향신문에 실린 스티븐 브라이어 미국 연방대법관의 다음 인터뷰를 새겨볼 만하다. 이범준 기자, "[초국적 인권사회]<1> 스티븐 브라이어 미 연방대법관 '가짜뉴스·혐오표현이라도 누구나 하고픈 말 하는 게 민주주의'", 경향신문 (2018. 12. 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12040600035.  


  "(생략) 서로를 죽이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유일한 방법은 민주주의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유지됩니다. 증오표현에는 그저 당신의 생각이야말로 증오스럽고 역겹다고 말해주면 됩니다. 미국 수정헌법 1조('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인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권리 및 고충 구제를 위해 정부에 청원할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는 마음에 드는 발언을 보호하려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규제를 시작하면) 앞으로는 판사가 어떤 발언이 문제인지 정하게 됩니다. 이것을 진정 원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발언은 허용되고 어떤 발언은 금지되는지 누군가 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선택(a very dangerous step)입니다."

  "수정헌법 1조는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바라는 바가 당신이 바라는 것보다 낫다고 설득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안된다, 그 얘기도 안된다, 이건 지나치다, 저건 너무 위험하다, 사회에 위협이 된다 식으로 정하기 시작해보십시오. 조만간 권력자가 당신의 얘기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이 옵니다."

  마지막으로 청와대에서 가짜뉴스 규제를 주장하며 예로 든 명백하고 악의적인 허위사실의 미국판을 찾아 질문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 태생이 아니어서 피선거권이 없다는 얘기처럼 기록으로 허위가 증명되는 표현들도 마찬가지인가요." 브라이어 대법관은 변화가 없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바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지 못하게 하면 오히려 그걸 두 배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가짜뉴스, 혐오표현이 성가시고, 거슬리고, 심지어 혐오스럽다면, 그것이 왜 가짜이고 혐오스러운지를 실증적 근거와 보편타당한 설득력을 갖추어 말해주고 지지를 얻으면 될 일이지, 그 입이 밉다며 틀어막을 일이 아니다. 당장 평온함을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더라도, 그것은 언제라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특히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등 형사처벌은 없애고 줄이고 제한하여야 한다.



  장마다 나온 참고문헌과 그 언저리의 책들이다.




  덧붙여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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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한국사』를 참 잘 읽었는데, 기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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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되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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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홍규, "샌델의 정의와 법", 민주법학, 제46권 (2011. 7.) 을 읽고 간단히 메모





  정의란 무엇인가』가 별로라는 취지의 글을 어딘가에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여튼 박홍규 교수의 위 논문은 샌델 교수가 어떻게 자유주의를 오독, 모함하고 있으며, 그의 '도덕주의적 공동체주의'(?)가 얼마나 애매하고, 보수적이고, 황당하기까지 한지를 비교적 잘 정리하고 있다. 논문 심사위원 명단(김도균, 이재승, 정태욱)도 흥미를 끈다.


  한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은 그야말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자 징후였는데, 책을 제대로 읽은 덕분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던지지만 결국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결코 답하지 않는다. 그가 "자유 남용" 내지 "극단적 개인화에 따른 자유 가능성 파괴"의 근거로 드는 법과 정책들은 주로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편견에 따라 주관적으로 선택된 것들이다. 가령 7강에서 다룬 '소수 집단 우대정책'은 소수 집단이 차별받아온 현실을 개선하려는 '목적'에서, 도리어 극단적 개인화로 인한 불평등을 시정하고자 하는, 반개인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정책으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불만』에서는 자유주의에 근거한 무책주의(파탄주의)적 이혼법이 도덕적 판단을 제외함으로써 가족 등 성적 공동체를 파괴했다고 비판하나, 무책주의는 이미 파탄된 부부관계를 더 이상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 그 자체가 부부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Public Philosophy』 6장(우리말 본 제목은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에서는 클린턴 정부의 '덕치'를 칭송하면서 클린턴의 성추문을 교묘하게 옹호하기까지 한다. 낙태나 동성애, 종교의 자유 문제 등에서 '도덕'을 앞세우는 것은 그 자체로 보수적, 폭력적 논리로 흐를 위험이 다분하다.

  샌델의 막무가내적 도덕주의=꼰대성(?) 내지 샌델 열풍의 맹목성을 비판하거나 다룬 책, 논문은 위 논문 외에도 꽤 많이 있는데, 아무튼 '자유주의 v. 공동체주의'를 다룬 문헌들을 찾아 읽다가 메모하여 둔다. 미국과는 달리,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하고 덜 위험한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당장 더 필요한 것은, 둘 중에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침해부터 하지 않는) 자유주의 쪽이라고 생각한다(공동체주의자들의 자유주의 비판은 부당한 경우가 많은데, 『정치의 생각』, 201-233쪽이 잘 다루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게 생각된다. 패션처럼 유행을 좇지 말고, 차라리 마이클 왈저를 읽고, 존 스튜어트 밀을 읽자.

  『무엇이 정의인가?』에도 박홍규 교수의 글이 한 편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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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23 0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의가 부재하던 시절에 나온
책이라 상대적으로 더 많이
팔렸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정작 읽은 분들은 많이
없더군요. 저를 비롯해서...

묵향 2018-12-19 23:55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아무래도 시대와 제목발을 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책이 팔리고 입에 오르내린 것에 비하면,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우리의 고민을 얼마나 성숙시켜주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정의‘라는 개념이 필연적으로 ‘불의‘라는 대당항을 전제하게 되기 때문인지, 정의를 독점할 수 있다는 독선과 아집만 많아진 게 아닌가 우려되기도 합니다. 과학과 달리 ‘정의‘나, 이를 실현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오컴의 면도날을 대고 싶다는 유혹을 억눌러야 할 듯 싶습니다. 급한 불의를 끈 다음에는, 보다 섬세하게 ‘정의‘의 내용을 채워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2018-11-23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묵향 2018-12-26 00:49   좋아요 1 | URL
그런 면도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세상의 모든 자기 배불리기는 저마다 정의의 이름을 빌린다는 생각도 들구요. 누군가의 일용할 양식을 빼앗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의 배를 불릴 수 있으면 그것이 정의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좋은 연말 보내십시오^^
 
북유럽 셀프 트래블 -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에스토니아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21
유진선 지음 / 상상출판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껏 본 여행 가이드북 중 단연 최고의 책. 신판이 다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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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2018-12-18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에스토니아(탈린) 쪽은 매우 부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