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 제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해경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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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의 전개가 특이하다. 조금은 지루한 느낌도 들고…….

     등장인물들이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그, 그녀, 부인, A, B, C, D, 선배L, M, N으로 불리는 호칭이나, 등장인물들이 온통 소설에 관련된 일들로 엮여 있다. 유일하게 인칭대명사가 사용된 사례는 술집에서 만난 ‘브리트니’라고 붙인 접대부가 전부이고, 소설을 쓴다고 부인이 구입해 준 노트북컴퓨터가 ‘데이빗’이라고 한 것이 전부이다. 주인공인 ‘그’는 소설을 쓰는데 있어 만나는 사람마다 소설을 구상하고, 쓰기를 시도하고, 상상 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고, 주인공 또한 자발적이든 부인의 권유에 의한 것이든 소설을 쓰는데 있어 여러 가지 고뇌를 한다. 또 다른 주인공인 ‘그녀’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통해 그를 통한 소설을 쓴다. 이런 모든 과정이 결국은 이 소설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가 탄생하였다.

     소설에 대한 속설들 중에는 “소설은 작가가 겪은 경험들의 산물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자전적인 이야기에 가상의 상상력을 가미한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이런 속설을 배경으로 이 소설의 내용과 작가 후기의 내용을 보면 왠지 모를 연결고리의 상상으로 등장인물 ‘그’가 바로 작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자의적인 상상을 해 본다. 어찌 보면 이런 상상도 나만의 억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달리 보면 보편적인 일반인들의 삶의 모습 하나하나가 바로 소설을 쓰는 과정이지 않나 생각해 본다.

     우선 이 소설을 보게 된 경위가 수상작이라는 점이 왠지 나름대로의 심사 기준을 통과되어 선발된 작품이라고 하는 대에 의미를 부여 한다. 출판의 과정을 거쳐 책으로 만들어진 모든 소설들이 각자 자신의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느낌과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 소설 중에서 수상작이라고 하는 것은 상을 주는 곳의 뜻과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이 소설도 수상작이 보여주는 메시지가 있어 보이기에 선택하여 읽게 된다.

     읽는 과정이 조금은 지루하고, 불리는 등장인물의 호칭들이 고유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인칭대명사나 특정 문자로 표시가 되니, 고유명사가 가지는 의미가 빠진 명칭이 어느 경우는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반대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누구의 얘기인지 혼돈이 되어 지금 무슨 대목을 읽고 있는 것인가 할 때가 많다. 처음 외국소설을 접하면서 처음 겪는 난관은 숫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어느 소설은 친절하게 등장인물 요약부분이 있어서 그 페이지를 매번 참고하면서 봤던 기억이 난다. 반면에 이 소설은 오직 그, 그녀, 부인의 중심인물들의 상상과 이야기가 딴 생각을 하면 바로 헛갈리게 되어 있다. 또한 주인공 ‘그’가 회사를 퇴직하고 도서관을 출퇴근 하면서 소설을 쓰는—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가 쓴 소설을 부인에게 전달하고, 부인의 평을 그녀에게 전달 하는 매개자의 역할과 그 과정들—과정이 ‘그’가 이사 간다고 했던 열흘간의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가 작가의 말솜씨와 어울려 장편소설이 탄생하였다.

     이 소설을 읽고 과연 작가는 무엇을 이 소설에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소설의 내용이 사람이 살아가는 삶을 들여다 보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한마디로 표현 가능한 어떤 진한 감동을 주는 소설도 아니고, 휴머니즘이나 인간애에 대한 내용도 아니지만 작가가 서술하는 ‘그’의 행동과 생각의 면면들은 과거 내가 ‘그’가 겪는 그 순간, 그 상황에서 느꼈던 느낌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느껴져 온다. 한편으로는 소심하고, 한편으로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나의 행동과 생각들이 틀에 맞춰지고, 마음 저편에 있었던 생각들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여지는 그 과정의 내용은 공감이 간다. 이런 얘기가 쉽게 글로 옮겨지지 않는 내용인데도 작가는 조금은 지루하게 보일 수 있는 내용을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 내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가 길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미가 붙어 끝까지 읽게 하는 저력이 묻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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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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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출신의 작가이면서 작년(2006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 중에 하나라는 얘기에 읽어 보게 된다. 조금은 생소한 느낌의 소설이고, 이야기의 전개가 그 동안 읽었었던 소설들과는 구분된다. 또한 터키라는 지리적 특성이 묻어나는 내용이 많은 것 같은데 번역된 소설의 내용을 보면서 내가 경험했던 일들을 중심으로 상상을 하니 그 내용의 원 뜻인지 약간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찌 보면 노벨상 수상작가의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품이다라는 배경을 통해 읽게 된 느낌이 더 크다.

     내용의 줄거리도 특이하다. 17세기의 시대적 상황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의 지리적 환경도 생소하다. 해적에 의해 납치되어 노예로 전락한 ‘나’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과학도로 그가 겪는 노예 생활과 자신과 쌍둥이처럼 같은 외모의 호자와의 대화와 오가는 지적인 교류를 풀어가는 이야기가 특이하다.

     한국에서도 신분상의 차별이 있었고, 그 차별적인 신분 중에서도 노예계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봐 왔지만 작가가 풀어 가는 17세기의 터키—당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영화 속에 나오는 터키풍의 배경이 연상된다—의 상황이 영화나 그림을 통해 봐 왔던 배경들과 겹치면서 내 나름의 상상을 하게 한다. 쉽게 상상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영화와 그림을 통한 상상하는 것이 전부이다 보니 작가가 풀어가는 이야기의 내용이 그 한계 속에 있어 또 다른 느낌과 분위기가 있는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특이한 느낌의 소설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소설을 읽어 본 느낌이나 소설에 대한 풀이, 해설 등을 보면 작가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동양(터키)과 서양(이탈리아)의 상황을 비교한 내용이라고 나와 있다. 이런 내용은 호자와 소설 중의 내가 서로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내용이고, 이를 통해 상호 생각하는 방법, 문화적인 차이, 동서양의 경계인 터키의 지리적 위치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한편으로는 이해되지만 동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에서 터키나 이탈리아를 보면 모두 서양에 속하는 느낌이고, 그들만의 문화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거리상의 인접지역들로 생각되어 유럽 내에서 동서양을 나누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런 내용은 어찌 보면 지리적인 발견이 적었던 17세기의 시대적 상황을 지구촌 시대의 오늘날의 시각으로 봐서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멀리 아시아의 끝에 위치한 한국의 입장에서 보는 느낌이라고도 하겠다. 이런 느낌이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상황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동양의 동쪽 끝에 있는 한국에서 바라보는 생각에서 동양의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고 하니 왠지 납득되지 않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동양으로 바뀌는 경계지의 이미지가 서양에서 바라보는 동양의 이미지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야기의 소재나 내용이 특이한 점과 풀어가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실화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나’와 호자와의 외모나 생활모습이 비슷하고, 마지막에 서로의 위치를 바꾸는 내용이 상상을 통한 이야기라는 느낌을 갖게 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의 내용은 어느 해적에 납치된 노예의 회고담 같은 느낌을 갖게 하지만 서로의 역할을 바꾸는 내용은 정말 일까 하는 또 다른 야릇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소설의 느낌은 기존의 소설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전해 주고 있으며, 처음 읽었을 때에 한번에 느껴지는 느낌 보다는 이 글을 쓰면서 곱씹으면서 생각하고 음미하는 느낌이 더 많다고 하겠다. 이는 생소한 문화권의 소설을 보면서 소설 속에 그려지는 여러 배경들—생활모습, 정치적 상황, 일상에서 오는 사소한 것들의 느낌들, 등등—이 겪어 보지 못해서 이해되지 않는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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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1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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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화재 속에 올라 있는 이름하면 ‘황진이’가 거론된다. 역시 TV의 위력이라고 할까? 드라마 ‘황진이’가 화려한 드라마의 몇 개의 수식어를 달고 세간에 인기드라마로 자리 메김 했다가 얼마 전에 종영되었다는 뉴스를 접한다. 이런 TV드라마의 내용과는 별개로 한번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에 찜 했다가 이제야 읽어 본다.

     시대적 인물로 알려진 황진이는 직업은 기생이며, 빼어난 미모와 특별한 기예 및 문학적 소질은 현대에 있어서도 그녀의 문학작품은 교과서나 고전을 통해 널리 배우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 그녀의 삶과 생각은 신분의 제도적 장치에 의해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로 자리 메김 되어 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 ‘황진이’는 재미와 사랑이야기를 덧붙여 보여주고 있다.

     황진이가 재미있는 내용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잘 알려진 그녀의 삶은 기생이고, 기생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넘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에 하나로 알려진 탁월한 문학성과 기예는 그녀를 탁월하게 한 내용이라고는 왠지 부족해 보인다. 역시나 탁월한 기예적인 면과 더불어 그녀의 알려지지 않는 그 밖의 내용이 유명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송도삼절을 대표하는 서경덕과 얽힌 황진이가 이런 유명세를 만들어 냈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이 내용 또한 약해 보인다. 소설 속에 그려진 그녀의 삶을 보면 유년기를 지나 자신의 태생에 대해 알게 되고, 그 배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을 선택한 내용부터 몸 바쳐 만들어 낸 부를 버리고 첩으로, 금강산으로, 전국을 돌아보는 과정이 자신만이 자신의 삶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이 황진이를 유명하게 만든 핵심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 다른 재미는 조금은 통속인 느낌이 드는 내용으로 여느 통속 연예소설과 같이 뭇 남성들과 벌이는 정사신이 자극적이다. 기생으로서의 첫 장면이나, 현감과의 사랑이야기, 연인 이사종과의 사랑, 권력자 소세양과의 사랑내기, 등의 장면은 자극적인 영화의 한 장면이다. 당시 조선시대의 사랑하는 방법이 최근 영화화 되어 나오는 내용은 무척이나 개방적이며 자극적으로 비춰져 보이고 있으며, 그런 내용에 편승하여 소설 속에 그려지는 내용 또한 자극적으로 그려져 있어 영화의 장면과 별 차이를 못 느끼게 한다. 이런 이야기가 이 소설은 재미있게 하는 한 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 다른 재미를 찾아 보면 중간중간에 보여지는 황진이의 시 한편, 편지 한 토막의 내용일 것이다. 여느 역사 소설들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에서도 그녀의 사랑이야기가 소설의 이야기와 어울려 다시 주인공의 사랑이야기가 문학작품과 어울려 재미를 돋구어 낸다. 어찌 보면 생활 속에서 얘기한 사랑의 속사김이 문학작품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내용이 소설 속에 녹아 들어가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데 있어 재미를 돋우는데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는 부유층의 이야기가 기생과의 사랑 놀음이라는 내용과 엮이면서 시대적인 신분차이, 계층과의 괴리감, 탐관오리의 성을 사고파는 행위 등은 지금 시대와는 다른 당시의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거부감이 느껴지는 내용이다. 일부 내용 중에 주인공이 기생을 위한 복지기금을 확보하여 운영하는 내용은 있으나 전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반감이 느껴지는 내용이겠다. 기생의 이야기라서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또 하나 처음 기생의 길로 들어서면서 겪는 심리적, 육체적인 어려움에 대한 대목을 볼 때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입각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전통적인 관점에 의하면 기생의 사회적 신분이나 역할에 있어 천한 역할이라는 것을 무척이나 강조하고 있으며, 그 신분에서 오는 각종 불이익이 타의에 의한 피해자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기생이라는 직업(?)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자의에 의해 선택한 역할이라고 한다면 좀더 다른 상황과 느낌이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전통적인 정조 관념을 부각시키는 내용은 아니지만 유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내용으로 느껴진다. 누구나 그렇게 되길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직업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분명 기생도 하나의 직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 프로의식이 초기에는 부족한 면을 많이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전체적으로 재미있다. 그 재미는 있지만 책의 출판은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두 권으로 나뉘어 출판되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용적으로나 분량 면에서 보면 한 권으로 묶어서 출판되었어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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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후회는 없다 - 에베레스트에서 사라진 맬러리를 찾아서
피터 퍼스트브룩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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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세계 최고이기를 원한다. 그 방법은 다르지만 최고가 되려고 하는 염원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조지 리 멜러리와 앤드루 코민 어빈은 좀 특별하다. 세계 최고봉이라고 하는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최고봉에 올랐든 그렇지 않았든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들의 기억은 영원한 산악인으로 최고라고 하는 의미에서 특별하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일상사와 에베레스트의 도전기는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니 읽어 보면 될 것이다. 그의 사생활이나, 그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작가의 서술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또한 당시의 산악계의 상황도 자세하게 느낄 수 있도록 세세한 내용별 설명은 인상적이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방법으로 인식되는 (8,000m급)고봉 등정의 업적을 만들기 위한 경쟁적인 상황이 최근에는 스포츠의 한 단면으로 인식되는 상황이고, 최고봉인 8,848m의 고산을 오르는 것이 여러 가지 상황 보다는 경제력에 의한 문제로 축약되어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고산등정에 따른 위상이 많이 변화되고 바뀌었지만 당시 1924년의 에베레스트 등정의 과정은 고행의 수도보다도 더한 극한의 도전이라고 생각된다. 사진에 보여지는 모습이 어느 야산에 산책 온 사람들과 같이 간편한 복장—자켓을 입은 모습이 5,000m의 베이스캠프의 모습과 같이 보이지는 않는다—에 단체사진 속의 일부분의 두 사람의 모습은 평범해 보이기도 하고 평온해 보인다. 이런 복장 의 모습으로 최고봉을 올랐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진짜 등정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어찌 보면 이 책의 화두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올랐다고 하면 1953년에 처음 올랐다고 하는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의 초등정 기록을 대폭 수정해야 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인류의 극지탐험의 발자취의 역사를 바꿔야 하는 내용이기에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라고 하겠다. 허나 1999년 영국BBC 방송팀—이 책의 저자 피터 퍼스트브룩의 얘기처럼—의 멜러리 시신발견이 그 진실은 사람들에게 밝혀 주고 있지 않다. 또 다른 멜러리의 동료였던 어빈의 시신이나 그가 소지했던 여러 추정되는 자료가 과연 최고봉 등정에 대한 자료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하지만 결국에는 멜러리와 어빈은 최고봉 등정을 이룩했을까 라는 진실은 영원히 신의 영역에 남겨 놓은 수수께끼라고 하겠다.

     최고봉에 멜러리와 어빈이 올랐다가 하산하는 동안에 추락사한 것인지, 아니면 밀어 닥치는 악천후에 돌아서서 하산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산에 오르는 과정 속에 사람들이 뚫고 나가는 역경의 극복은 한번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지 않나 생각해 본다.

     작가가 들려주는 최고봉 등정의 역사나 에베레스트의 발견사 등등의 산악사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하면서도 다각도로 그 내용을 설명해 주고 있다. 멜러리의 등정시대인 1924년의 상황이나 멜러리의 흔적을 찾는 1999년의 모습에 대한 비교는 산악등반 기술의 변천과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등반대의 구성과 그 속에서 겪는 대원들간의 갈등은 지금이나 당시나 역시 겪는 내용이지만 좀처럼 알 수 없는 내용들로 생각된다. 최고봉 등정이 성공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최후 등정 시도자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등정이라고 결론 나 있는 등정이기 때문에 그 문제점에 대한 내용도 잘 보여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느 산악 등반기의 내용과는 다르게 당시의 상황과 내용을 현대의 상황에 비추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으로 유추할 때 상황에 따라 최고봉 등정을 성공 했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주장 할 수 있다. 나 개인적으로는 최고봉 등정을 성공했다는 쪽에 의견이 모아지지만 중요한 것이 등정을 성공했을까 아닐까 하는 것 보다는 주인공인 멜러리의 발자취와 그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황을 되 짚어 볼 수 있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지금에는 산악등반이 국익과 연관된 내용 보다는 개인의 스포츠정신에 입각한 등정으로 인식 된다. 8,000m급 고봉의 완등이나 무산소 등정 등의 화려한 타이틀의 등반기록들이 그 시발점은 결국 멜러리의 등정과 같이 초등의 역사가 있지 않고는 이런 기록들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화려한 등반도구와 기술은 많은 부분에서 극한 상황의 극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런 도구들은 단지 사람을 도와주는 역할이지 그 자체가 극복하게 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즉, 극한 극복의 강한 의지가 최고봉에 서게 하는 강력한 힘이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분명 최고봉 등정에는 조지 멜러리의 이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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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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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대한 것, 속박 받는다는 것, 여자라는 것, 삶이라는 것 등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이 소설 ‘내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보면서 이런 주제들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가장 많은 의미와 생각을 하게 하는 단어로는 『여자』라는 단어에 의미가 더해 진다. 특히 한국에 사는 여성들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사랑하면 상대를 구속하고, 속박하고, 속박 받으면서 사는 것이 사랑이라고들 생각하고 느끼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의 사회규범이라는 범주 속에 남자, 여자의 차이와 남녀의 성 도덕이라는 범주 속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반응과 받아들이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남녀차별이라는 단어로는 그 표현이 거칠게 느껴지고, 단지 그 속해 있는 사회 속에서 인식 되어지는 차이라고 생각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미흔과 그 남편 효경, 그리고 부정의 상대자로 등장하는 규. 그 밖에도 주변 조연으로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모습 속에 한국의 사회가 안고 있는 삶의 토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배경으로 나오는 수몰지구의 쓰러져가는 폐허 속의 부희가 살았던 집의 모습은 미흔과 효경, 규의 관계가 부적절하게 이어지면서 몰락해 가는 모습을 또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화자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흔은 이제 30대 초반의 전형적인 가정주부가 남편의 외도와 그로 인한 본의 아닌 피해자로서 모습이나 따분한 일상에서 만난 옆집남자 규와의 애정행각(?)은 또 다른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여지고 있다. 허나 이런 모습이 사회 속의 규범을 벗어난 일탈된 모습으로 결국에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남편 효경이 벌이는 미흔에 대한 집착은 사랑이라고 느껴지기 보다는 소유욕에 의한 집착과도 같게 느껴진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삶들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부부간의 살아가는 모습 속에는 많은 이유와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런 모습 속에 과연 어떤 삶과 부부간의 삶이 바람직한 내용일까 생각해 본다. 이런 생각의 주 관점은 역시 나를 중심으로 한 이기적인 발상에서 시작함이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 철저히 나를 중심으로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미흔의 삶은 사회의 통념 속에 지탄 받아야 할 인물일까? 미흔을 중심으로 한 주변 마을 사람들의 수근거림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 합당할까? 또한 남편 효경으로부터 퍼부어지는 숫한 폭력을 받아들여야 하고, 견뎌내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남자는 괜챤고 여자는 안된다는 생각이나, 여자는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양육하는 주된 임무를 수행하는 주체로서 본인의 의무를 망각한 행위로 당연히 지탄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옳을까? 미흔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을 찾았고, 남편에게서 충족되지 않는 자신의 행복을 찾았던 한 여자라는 것이 모두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소설의 줄거리가 남편의 외도와 이어지는 부부간의 거리감, 그에 상반된 여자의 이웃남자와의 통정은 이야기 구도상에서 보여지는 모습이지만 나는 남녀평등 등등의 구호내용을 얘기하려는 것 보다는 순전히 나를 중심으로 한 이기적인 발상에서 바라본다면 당연히 사랑—여자가 보여주는 외간남자와의 통정이 사랑이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내용이지만—을 찾고 이를 통해 행복하고 싶어하는 모습은 결코 지탄받아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마치 어느 TV드라마 속에서 보여주는 부부클리닉의 한 이야기와 같은 내용이지만 여자의 생각과 우리 주변에 둘러쳐져 있는 틀 속에서 우리들을 정형화되고, 규정화 시키는 모습을 통해 개인의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내용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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