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
윌리엄 골딩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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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파리대왕

인간의 어두움을 끄집어 내는 처절한 과정





이 투표라는 장난은 소라에 버금가는 신나는 것이었다. 잭이 항의했지만 아이들의 고함은 대장을 뽑자는 일치된 소망에서 랠프를 대장으로 뽑자는 갈채로 돌변했다. 이런 이유를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는 소년은 아무도 없었다. 지혜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보여준 쪽은 새끼돼지였고, 리더십을 두드러지게 발휘한 쪽은 잭이었다. 그러나 앉아 있는 랠프의 모습에는 그를 다른 아이들과 구별 짓는 묵언의 힘이 있었다. 덩치도 그렇고 그의 용모는 매력적이었다.

소라의 소리 (p31)

윌리엄 골딩 (1911~1993)

부커상, 노벨문학상 수상


<파리대왕>(1954) 원고는 출판사에서 스물한 번의 거절을 받았고 이 소설은 결국 세상에 나왔다. 소설 <상속자들>(1955), <핀처 마틴> (1956), <자유 낙하>(1959)는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첨탑>(1964), '땅끝까지'의 첫번째 작품 <통과 제의>(1980)로 부커상을 수상, 198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땅끝까지'의 두번째 <밀집 지대>(1987), 세번째 (심층의 불>(1989) 출간 후 1988년 영국 왕실 화하위 훈작사를 받았다.

윌리엄 골딩의 작품들과 수상이력을 이렇게 적는 이유는 내가 기억하고 싶어서다. 부커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라는 사실은 <파리대왕>을 읽고 나니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럴만 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탄탄한 스토리와 생생한 표현력은 책을 읽고 난 뒤에도 감흥이 오래 남았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순수하게 책 제목과 시놉시스 때문이었다. 우연히 책 내용을 전달하는 숏츠를 보게되었고 읽고 싶다고 생각했고,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그런데 무려 부커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이라니, 그저 이 책을 만났다는 사실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 뒤로는 은빛 달이 수평선을 벗어나 있었다. 그들 앞에는 거대한 원숭이 같은 것이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숲속에서 바람이 포효하고 어둠 속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그러자 그 생물은 머리를 쳐들더니 핼쑥한 얼굴을 그들 쪽으로 돌렸다.

그림자와 큰 나무 (p193)



파리 대왕 줄거리

랠프, 새끼돼지, 잭 그리고 사이먼

외딴 섬에 불시착한 '랠프'와 '새끼돼지'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여러 소년들은 하나둘 모이더니 하나의 단체를 형성했고 섬에서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랠프는 모두의 지지를 받아 대장으로 선출된다. 민주적인 절차와 합리적 선택을 하는 랠프의 모습은 매우 인간적이며 이치에 맞고 훌륭한 대장의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천식도 있고 통실한 몸을 가져 소년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새끼돼지'는 남다른 지혜를 가진 소년이었다. 랠프를 도와 단체의 민주적인 방향성을 지지하고 조언한다.

'잭'은 성가대원의 리더로 리더십을 겸비한 소년이다. 자츰 민주적 절차를 고수하는 '랠프'의 방식이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랠프와 잭의 대립구도는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중요한 축으로 작용한다. 대장 랠프는 구조 신호의 역할을 하는 봉화의 불을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반면 잭은 무리를 이끌어 멧돼지 사냥을 하는데 온 관심이 쏠려있다.

랠프와 잭의 갈등으로 인해 잭은 무리에서 빠져나온다. 잭을 따르는 소년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다른 그룹을 형성한다. 멧돼지 사냥에 성공한 잭의 무리는 더욱 하나로 뭉치게 되며 야만성이 켜켜히 쌓여 올라간다.

짐승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내용은 좀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소년들이기에 미지의 대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저 오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낙하산을 타고 불시착한 성인 남자를 짐승으로 오해했다. 소년들은 짐승의 존재로 인한 두려움으로 하나로 뭉치는 듯 했으나, 그 두려움은 오히려 독이 되어 사고가 발생하게 되고 겉잡을 수 없는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인간의 어두움과 야만성을 끌어내다

옳은 것이 항상 승리하지 않는 극한의 현실 반영

해골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랠프를 바라보았다. 메스꺼운 공포와 분노가 그를 엄습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추악한 것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그것은 장난감처럼 흔들흔들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와선 그의 얼굴에다 대고 씽긋 웃으며 있었다.

사냥꾼의 소리 (p293)

과연 무엇이 이 소년들을 야만인으로 만들었을까. 잭의 무리와 랠프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잭의 무리는 인간 본연의 어두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멧돼지를 사냥하고 자신이 마음에 안드는 무리를 처단하는 야만인의 면모를 과감히 드러낸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절차라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테타를 하는 셈이다.

마지막까지 랠프를 잡기 위해 잭의 무리는 커다란 돌을 굴리는가 하면 섬을 불로 태우는 일까지 하게 된다. 섬을 불로 태우면서 발생한 연기는 봉화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고, 해군들에 의해 소년들은 발견되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단지 모든 것이 사고였을까. 마지막 랠프가 느낀 공포는 나에게까지도 전해졌다. 야만성이 극에 달해 자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잭의 무리, 그들을 피해 도망가는 랠프의 모습은 상당히 처량하다. 선하고 바른 랠프는 보호받지 못하는 야속한 현실 반영이 안타깝고도 애석하다. 이런 아이러니하고도 이율 배반적인 현실의 이치, 인간의 어두운 면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그 과정들, 극한의 상황과 피할 수 없는 사고들까지... 소설을 모두 읽고 나서도 나의 마음 한 켠에는 그 무언가 찝찝하고도 불쾌한 자투리가 남아 있었다.

"너는 바보 같은 애구나" 하고 파리대왕이 말했다.

"그저 무식하고 바보 같은 애야."

사이먼은 부르튼 혀를 움직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너도 네가 바보라는 것을 잘 알지?"하고 파리대왕이 말했다.

어둠에게 주는 선물 (p225)

파리대왕의 존재가 등장하는 유일한 부분이다. 사이먼은 짐승의 존재를 인식하고 소년들에게 이를 알리고자 했으나 오히려 짐승으로 오해를 받아 살해당한다. 멧돼지 머리에 파리들이 가득 들러 붙어 있는 기괴한 모습이 떠오른다. 사이먼은 파리대왕 즉, 환영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묘사되는데 마치 암덩어리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파리대왕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모가 발현된 하나의 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절대 통제할 수 없는 그간 만나지 못했던 인간 본연의 어두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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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니체가 말했다 - 자유롭고 단단한 삶을 위한 이기심의 심리학
이관호 지음 / 다산초당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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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니체가 말했다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고 니체의 철학에 환호했다

니체의 철학이 궁금했다. 니체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 니체 철학의 첫 책으로 올해 초에 대표 저서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그런데 함축적이고 은유적 표현들이 많아서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찾아보니 온전히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행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들이 존재했다. <선악의저편>,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즐거운 학문> 이렇게 4권의 책을 읽어야 니체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니체의 철학에 다가서는데 약간의 좌절감을 맞본 입장에서 니체 철학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쓴 <너를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니체가 말했다>를 선택했다.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어,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돕고 있다. 단순하게 니체의 글만을 인용했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저자의 설명이 함께 있으니 니체의 철학 세계를 전문 가이드와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이 책을 통해 니체의 철학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그리고 니체의 철학에 환호했다.



세가지 이기주의

나쁜 이기주의 -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이익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는 태도

니체의 건강한 이기주의 -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추구하며 나를 위하는 태도

사이비 이기주의 - 나를 위한다고 여기지만 나다운 길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남을 위하는 태도

들어가는 글 -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p17)

이기심이라는 단어만 봤을 때 부정적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니체가 말하는 건강한 이기주의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니체의 철학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이기주의가 아닌 건강한 이기주의에 대해 말한다. "이기심은 고귀한 영혼의 본질이다.(p22)"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는 별처럼 멋진 이기주의자가 되는 길로 안내하는 니체의 철학은 스스로를 더욱 사랑하고 나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길잡이와 같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까닭은 그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감정을 위해서다. 우리는 착하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게 아니라 이기적이기 때문에 돕는다. 스스로를 겁쟁이라고 느끼지 않기 위해 혹은 남에게 겁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굴욕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남을 돕는다.

세 번째 마음 수업 '동정' (p86)

정말 재미있는 내용이다. 니체의 철학에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다. 나의 감정을 위해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한다는 말이 자칫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아이를 구하지 않았을 때 오는 죄책감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 가정을 하고보니 결국 나를 위해 그 아이를 구한다는 관점이 결국 맞다. 이기심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발휘 되는 순간이다.


니체를 만났다면 이제 싫은 인간은 마음껏 미워해도 된다. 양심의 가책? 니체의 심리학에서 배제되는 언어가 바로 양심이다. 선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니체가 선한 마음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했을 리 없다. 그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감정을 억누르면 정신병에 걸린다고 경고했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미운 사람은 미워하는 편이 낫다.

여섯 번째 마음 수업 - 미움 (p161)

니체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 진정으로 나를 위한 철학이다. 미워하는 마음을 억누르면 나에게 병이 생기니 마음껏 미워해도 좋다는 이 말이 어쩌면 현대인들에게는 치유와도 같은 조언이자 철학이다. 심지어 누구를 미워할 거라면 훌륭한 적을 두라고 말한다. 적에 대한 경외심은 나의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를 증오하는 사람은 멀리하고,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스스로 무너지면 안된다 말한다. 사랑했던 이와 헤어졌다고 미워하지도 말라 한다.



우리가 초조한 이유는 돈이 느리게 쌓인다고 밤낮 끔찍하게 '조급해하고' 또 돈이 쌓이기를 끔찍하게도 '열망하기'때문이다. 그런데 과도한 조급함과 열망은 희생물을 필요로 한다. 예전에는 신을 사랑해서 일했고 지금은 돈을 사랑해서 일한다.

아홉 번째 마음 수업 - 불안 (p234)

현대인에게 돈은 불안과 초조함의 원인이다. 부자가 되고 싶어 돈을 모으고 싶어 열망하고 조급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냥 지금 살고 있을 뿐이고 되도록 즐겁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p240)" 목적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지금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데 이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 듯 하다.

"꿈이 삶을 위해 존재할 뿐이지 삶이 꿈을 위해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p245)." 꿈은 그저 꿈일 뿐이고 나의 삶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어쩌면 흔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 흔한 진리를 잊고 살아간다. 삶의 의의를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돈을 위해 아등바등 하지말고 과정을 즐기면서 살아가야 하겠다.



책을 읽고나니 관심이 가는 책들이 참 많다. 이미 읽은 책도 있지만 읽지 못한 책이 태반이다. 읽었더라도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며 읽지 못한 책도 많다. 그만큼 어려운 책일지도 모르겠다. 참 신기하게도 어려운 상대일수록 정복하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 니체 - <선악의저편>,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침놀>

  • 헤르만 헤세 - <데미안>

  • 니코스 카잔차키스 - <그리스인 조르바>

  •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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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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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스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입장에서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읽었다. 140페이지 남짓하는 짧은 분량, 고작 9편의 에세이가 담겨 있는 책이기에 사실 조금 의아했다. 지금까지 읽었던 에세이들은 상당한 분량과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책 한 권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에세이집이라 하면 다양한 즐길거리를 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첫 에세이 '걱정 없이 사는 기술'을 읽자마자 놀랐다. 이 작가가 보통의 흔한 작가가 아니구나. 첫 에피소드에서 그 내공을 단숨에 느낄 수 있었다. 그닥 어렵지 않은 단순한 문장과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에세이에 담긴 메세지가 상당히 깊이 있고 철학적이며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을 아우르고 있음에 감탄했다.

시대를 관통한다는 의미를 체감한다. 1940년대에 씌여진 이 글들은 지금 읽어도 우리의 삶과 시대에 그대로 적용이 가능하다. 저자의 통찰력과 식견이 시대를 불문하고 통한다는 의미이기에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한 자질을 이미 갖춘 작가라 여겨진다.

때때로 사소하고 어리석은 돈 걱정이 들 때면, 나는 당장 단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을 원하지 않아 늘 여유롭고 태평하게 살 수 있는 이 남자를 떠올린다. 허름한 홋차림의 그를 여러 차례 보았다. 그는 늘 한결같이 쾌활하고 태평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상호 신뢰의 비결을 배운다면, 경찰도 법원도 교도소도 돈도 필요 없을 거라고. 필요한 만만 대가를 받고 능력이 닿는 한 힘껏 돕는 이 청년처럼 모두가 산다면, 부조리가 반복되어 '사회문제'가 되는 우리의 복잡한 경제 시스템도 어쩌면 해결될지 모른다.

p22


첫 에세이는 '안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당장 단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을 원하지 않고 늘 여유롭고 태평하게 살아가는 안톤은 언제나 당당하고 여유롭다. 주변 사람들이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던 이 남자 안톤을 통해 저자는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에 대한 해답을 보고 있다.

이런 진짜를 알아보는 저자의 식견 또한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라면 안톤과 같은 사람을 보고 그저 좀 특이한 사람이라고 치부했을 것만 같다. 오히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주제넘는 조언을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치열하게 돈의 굴레 아래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안톤과 같은 삶의 자세가 어쩌면 정말 필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스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첫 에세이를 읽자마자 나는 '스테판 츠바이크'에 대해 궁금했다. 내가 잘 모르는 작가이기도 하고 시대적으로 오래된 인물이기에 그 당시의 상황과 작가가 처했던 당시 시대를 이해하면 그의 글을 이해하기가 더 수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극작가, 전기작가로 다양한 작품활동을 했다.

  • 전기: <조제프 푸셰>,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스튜어트>, <에라스무스>, <마젤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발자크>

  • 중,단편 소설 : <체스 이야기>, <아모크>, <낯선 여인의 편지>, <감정의 혼란>, <연민>

  • 회고록 : <어제의 세계>

유대인으로 나치의 압박을 받았다. 나치에 의해 자신의 책이 금서로 지정되었다. 자유를 갈망하고 평화주의를 주창했다. 9개 에세이 중에서 마지막 '거대한 침묵', '이 어두운 시절에', '하르트로트와 히틀러'를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빈과 베를린 대학에서 독일 및 프랑스 문학을 전공, 1901년부터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1942년 '자유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떠난다는 유서를 남기고 아내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비록 돈에 실패했지만, 삶의 용기와 기쁨을 잃지는 않았다. 오히려 돈의 가치가 떨어질 수록 삶의 오랜 가치(일, 사랑, 우정, 예술, 자연 등)가 더욱 중요해졌다.

p42

사상 초유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스테판의 일화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한다. 돈이 가진 가치가 사라진 세상이 끔찍하게 변할 것이란 우려와는 달리 사람들은 다른 더 중요한 가치들의 소중함을 보게 된다. 돈에 얽메어 돈을 바라보고 돈을 벌기 위해 아둥바둥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일화는 멈칫 뒤를 돌아보게 한다.

그저 묵묵하게 삶을 살아가는다는 표현이 맞을까. 모두가 해냈다. 시인과 작곡가는 계속해서 작품을 창작했고, 젊은이들은 산으로 하이킹을 가고, 댄스홀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새로운 기업과 공장의 집이 빠르게 늘었다고 한다. 돈의 미친 죽음의 춤이 3년간 지속되었고 정상화되었지만 사람들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돈이 주인이 아니며, 우리 삶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작업실에서 머물렀던 그 한 시간에 나는 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배웠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 이후로 나는 인간의 모든일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선하고 유효할 수 있는지 알았다. 자기 자신과 모든 목표 및 목적을 완전히 잊고, 오직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 목표인 완벽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p77

천재 조각가 로댕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데 로댕을 만난 경험 역시 남다르다. 자신이 존경하는 로댕을 직접 만나볼 수 있었고, 로댕은 약속을 다시 잡아서 친절히 자신의 작품을 보여준다. 어느 한 순간, 로댕은 작품에 몰입하여 스테판 츠바이크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 그 시간과 공간에 게의치 않고 오로지 작품 완성에 약 한시간 가량 빠져있었다.

로댕은 작품 세게에서 빠져나와 스테판을 보고 놀란다. 작품을 완성하는데만 온 정신이 몰두해 있어서 다른 모든 요소를 잊은 것이다. 천재의 집중력이 이러한 걸까. 어쩌면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오히려 스테판은 인생 최대의 교훈을 얻는다. 작품에 완성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몰두하고 몰입하는 그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에술이 아닐까.

스테판에게 로댕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영광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나의 모습을 봤을 때, 이렇게 자리에 앉아 스테판의 귀중한 책을 읽는 것이 나에게는 크나큰 영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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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흐르는 대로 - 영원하지 않은 인생의 항로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해들리 블라호스 지음, 고건녕 옮김 / 다산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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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흐르는 대로

The In-Between



호스피스 간호사가 된 지금 나는 응급실에서 겪은 일과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어떤 신을 믿든 신 자체를 믿지 않든 환자들은 영혼과 만나는 일을 경험하고 있었고, 나는 이런 현상을 차마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모두들 나와 인연을 맺고 점점 가까워지면서 믿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처럼 이 문제가 흑과 백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점차 깨닫게 됐다. 삶과 죽음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중간 세상 In-Between이, 분명 존재했다.

p101

해들리 블라호스는 호스피스 간호사 9년차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응급실 간호사로 근무를 하던 과거에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환자들을 치료하고 살리는데 온 신경을 썼다면, 호스피스 간호사의 입장에서는 환자들의 평안을 주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 되었다.

그녀는 호스피스 간호사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곁에 있어주며, 환자가 편안하게 돕는 것이 중요한 임무임을 깨닫는다. 환자들은 치료를 중단하고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이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을 준비한다.

정말일까? 사실 아직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나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의심이 많다. 죽음 이후의 세계 즉, 사후세계에 대해 믿지 않는 나로서는 저자의 호스피스 환자들을 만나며 경험했던 일들이 그저 그들이 죽기 전 헛것을 보는 일종의 착란증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도 역시 나처럼 처음에는 그러했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죽은 언니가 보인다는 글렌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의 신념을 흔든다. 착란증상에 대해 좀처럼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피부암, 암세포의 위장 전이 등은 착란증상과 전혀 관련이 없다. 또한 할머니의 의식이 명료하고 스스로 호스피스를 선택한 경우다. 어맨다의 말로는 누구나 그렇다고 하니 호스피스의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증언들이 거짓일리 만무하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면 '정말 존재할지도?' 라는 생각으로 살짝 마음이 기둔다. 그러다 책을 다 읽을 때 즈음해서는 '존재했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이 생겨난다. 머리로는 아니라 하지만 마음으로는 간절해지는 스스로 납득이 안되는 지경에 이른다.




나는 내가 마흔에 죽게 될 줄 몰랐거든요. 항상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지 못해서 아쉬워요. 그때 그 빌어먹을 케이크를 그냥 먹어버릴 걸 그랬나 봐요.

p168

다섯 번째 에피소드 '꼭 케이크를 먹어요'는 엘리자베스와의 이야기를 담았다. 요가를 가르치던 마흔의 비흡연자가 원인 미상의 폐암으로 이른 나이에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다. '케이크를 먹어요' 라는 이 말이 기억에 남아 여운이 오래 갔다.

나 역시 마흔에 접어들어 앞으로 살 날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미래를 위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아끼며 투자하려 노력하고 있다. 가끔 이렇게 사는게 맞는건가 생각을 하곤 한다. 엘리자베스처럼 내가 당장 암이 생겨 손을 쓰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지금 눈 앞의 케이크를 먹지 않고 미뤄두고 있는 지금이 맞는가란 생각을 한다.

사실 정답은 없다. 그저 내게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판단은 나의 몫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쌓고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 함을 항상 기억해야겠다.



"어떻게 낙관적으로 바라보죠?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 끔찍하게 싫어요. 환자는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세상을 떠나는 데다, 퇴근하고 바베트를 만나러 가면 그냥 보기만 해도 자꾸 누군가의 죽음이 떠올라요.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긴 여행도 가지 않은 지 오래됐어요. 인생이 멈춘 거 같아요." (중략) "그런 감정이 드는 게 당연하단 거, 알죠?" 스티브 목사님이 부드럽게 물었다.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p219

억눌러 왔던 감정이 한 순간 폭발하며 나온 그녀의 말은 사실 좀 의외였다. 호스피스 간호사로 죽음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잘 보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도 편치는 않았던 듯 하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감정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위안이 되면서도 호스피스 간호사가 가지는 필연적 직업의 고충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되는 것만 같아 착잡한 마음도 함께였다.

여섯 번째 에피소드에 이디스의 '불이야' 소동은 가히 신기한 일이다. 중증 치매 환자인 이디스를 더 이상 간병하기 힘든 존 할아버지는 해들리의 도움으로 요양 병원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이디스는 갑자기 침대에서 불이 났다고 소동을 피운다. 해들리는 선배에게 조언을 구해 침대를 옮기는 방법으로 상황을 수습했다. 그런데 이디스가 떠나고 몇 달이 지나 실제 그 방에서는 불이 났다. 다행히 존 할아버지는 다친 곳은 없었다. 이디스의 '불이야' 소동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여기서 더 놀라웠던 사실은 이런 일을 선배 간호사 린다에서 말했는데,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에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나는 환자가 집에 편히 머물 수 있도록 도우면서 그들의 인생과 가족과 반려동물을 더 잘 알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다. 앞으로도 환자가 인생의 마지막 나날을 평화로운 환경에서 보내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기 때문에, 그들이 내 삶에 들어오도록 기꺼이 마음을 열어두고 싶기 때문에 반드시 나 자신을 잘 보살펴야 했다.

p389

이 책이 소중한 이유는 죽음에 대해 미처 생각치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호스피스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죽음을 잘 맞이하도록 돕는 호스피스의 중심이 해들리가 있다. 그녀에게도 시어머니 바베트의 죽음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장례 처리 절차부터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의 관계까지 삐걱거린다.

많은 에피소드들은 돈 문제가 얽혀있다. 수혈이 필요한 호스피스 환자 프랭크 (두경부암 환자)의 상황이 그러했다. 여러 상황들로 인해 수혈 비용을 지원 받을 수 없고, 비용 지불 금액이 예산 범위를 넘어 퇴직금에서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수혈을 한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살 날을 며칠 연장 시킬 뿐이다. 돈을 모두 사용하고 나면 남아있는 가족은 빈털터리가 될 게 뻔하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지만 이런 일들은 먼훗날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깊이 다루지는 않지만 그저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밀려온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떠나는 이에게도 남는 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저 한번쯤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는 자체만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다시금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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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뷰 -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우신영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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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뷰

살고 싶은 도시, 살아남고 싶은 도시




한국 소설의 부흥기 & 제 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한국 소설의 부흥을 기대하며

2024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인해 한국작품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졌다. 한국 사람은 한국 소설을 읽을 때 가장 편하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적확하게 이해하고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아무래도 외국 소설은 한 번 번역을 거치기 때문에 번역가의 성향이나 사용하는 단어에 따라 그 뜻이나 미세한 감정이 달라질 수 있기에 그 감흥이 덜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한국 소설은 언제나 우리의 소울 메이트처럼 우리의 영혼을 터치한다.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에 궁금증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나는 감히 이 수상작 타이틀만 보고 이 책을 선택해도 좋다고 말한다. 상을 수상했다는 의미는 쟁쟁한 경쟁작들 중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의미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왜 혼물문학상을 수상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된다.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스토리 진행과 가독성이 좋아 술술 읽힌다.

부부란 서로에게 얼마나 무지한 관계인가, 사람은 얼마나 만용을 부리는 존재인가. 주니는 어쩐지 철학적인 사색에 빠져 병원 문을 나섰다.



작가 우신영

1985년생

작가 우신영은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박사 출신, 인천대에서 부교수로 재직했다.

  • 동화 <언제나 다정 죽집>으로 제30회 비룡소 황금도깨비상 수상(2024)

  • <시티뷰>로 혼불문학대상(2024)을 수상

국어교육 전공으로 교육론과 관련된 책을 몇 권 출간했다. 집필한 동화 및 소설은 아직 몇 권 되지 않음에도 상을 수상했다는 점이 앞으로 집필할 소설들이 기대가 된다. 1984년생으로 기안84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앞으로 더 많은 집필 활동으로 소설 출간을 더 하지 않을까 기대가 되며,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작가다.

추후에 우신영 작가의 소설을 만나면 고민없이 집어 들 것 같다. 가독성이나 서서히 젖어 드는 치밀함, 예상치 못한 반전, 대비를 이용한 서사, 극중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인생의 질문들 까지 정말 책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벌써 팬이 되어버렸다.

의사 선생님은 죽고 싶을 때가 없어요? 난 내가 비정상이라고 생각 안 해요. 깨어 있을 때 가끔 졸린 것처럼 살아 있을 때 가끔 죽고 싶은 것도 정상 아닌가요.

p166



등장 인물과 줄거리

4명의 등장인물 : 석진, 수미, 유화, 주니

필라테스 센터를 운영하는 수미는 어려서 발레를 했고 두 아이의 엄마이자 워킹맘으로 당당한 삶을 살아간다. 의사인 석진과는 보통의 부부로 평온하게 살아가지만 수미는 남편 몰래 헬스 트레이너인 연하 남자친구와 관계를 이어간다.

주니는 헬스 트레이너로 싹싹해 단골 회원도 많고 나름 인정 받는다. 여자 친구와 함께 동거하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그러다 수미를 만나게 되고 자신과 다른 수미의 삶의 모습과 궁금증이 올라 몰래 석진의 병원을 찾는다.

면도날을 집어 삼켜 스스로 내과를 찾아 내시경을 받는 유화는 요거트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족 여인이다. 5만원 더 높은 가격때문에 비수면으로 내시경을 해달라는 유화. 내과 페이 닥터 석진은 좀처럼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섬에서 열심히 노력해 의과대학에 진학해 서울로 상경한 석진. 자신에게는 과분한 수미를 만나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다. 페이 닥터의 삶을 정리하고 송도에 내과를 개원한다. 손님이 늘지 않아 고심하다 아내의 추천으로 주말에 의료 봉사를 나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유화와 재회한다.


석진은 자신이 꿈꾸었던 궁전에 대해 생각했다. 최고급 대리석이 깔린 미진 내과, 먼지 한 톨 없이 반짝이는 우아미 필라테스,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뭘까. 수미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뭘까. 진지해진 석진을 방에 버려두고 수미는 또다시 헬스장으로 갔다. 칵테일과 함께 나온 프레츨을 집어 먹었기 때문이라나. 하루에 두세 번씩 운동하는 자신을 짐 래트라 부르면서도 멈추질 못했다. 쿠토가 운동으로 바뀌었을 뿐 강박적 제거 행위라는 점은 같았다. 칼을 먹는 유화가 섭식장애일까, 남의 시간을 먹는 수미가 섭식장애일까.

p228



석진에게 내 자신을 투영하다

그의 부정한 모습까지도 보듬다

처음엔 네 명의 등장인물 모두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유화는 면도날을 삼키는 걸까. 수미는 남에게 보여지는 것에 왜 저리 강박적인가.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석진이 왜 저리 답답해 보이는 걸까. 주니는 무슨 연유로 석진을 찾아갔던 걸까. 이런 궁금증이 점점 쌓여가다가 하나씩 숨겨졌던 사연들을 알고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소설을 읽다가 멈칫하게 하는 구절이 많았다. 그간 크게 생각치 않았던 부분에 대해 인생을 관통하는 허를 찌르는 대사가 종종 등장한다. 그럴 때마나 감탄과 헛헛한 웃음이 났다. 등장 인물들 모두 힘들었던 과거와 바닥의 역경이 숨겨져 있다. 그 과거는 현재의 모습에 어떤 식으로든 투영되어 발현되고 있다.

과거 발레를 했던 시절 가졌던 수미의 정신적 고통, 참을 수 없는 고통에도 소리 한 번 지르지 않는 독한 여성으로 변모해 분투하는 삶을 영위하는 수미는 고상한 가면 아래 상처를 감추며 살아간다.

석진의 취미는 클라이밍이다. 유화의 남자친구는 인천의 높은 빌딩에서 창문을 닦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이 둘을 교묘하게 교차시킨다. 석진은 시간이 흘러 유화의 표정에 숨겨져 있던 당혹스러움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유화가 왜 면도날을 삼키는지. 총기없는 유화의 눈동자는 어디를 바라 보는 것인지 소설을 읽고 나니 이제는 이해가 된다.

<시티뷰>라는 제목이 아주 절묘하다. 인공 도시 송도는 항구 도시 인천의 한 도시로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항구와 공항이 있다. 새로운 신도시로 국내외 많은 이들이 부푼 꿈을 안고 유입되는 도시다. 석진의 고향인 섬마을과도 비슷한 바닷가에 인접하고, 신도시의 느낌도 물씬 포함한 도시다.

부도덕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느낌은 사뭇 독자의 입장에서 껄끄럽다.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지만 들키지 않으면 전혀 문제없다는 듯한 수미의 태도가 껄끄러웠고, 이상하게 유화에게 끌리는 석진의 부도덕한 행동도 초조함을 더한다.

물론 석진이 이 소설에서 가장 주요한 인물로 극을 이끌어 간다. 그런 이유와는 별개로, 나는 개인적으로 석진의 입장에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을 투영하며 소설을 읽었다. 가난하고 불행했던 과거의 섬마을에서 벗어난 석진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새로 개원하는 병원의 내부 인테리어를 아내와 장모의 의견대로 할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모습에도 측은함을 느꼈다. 그런 부분이 참 무서웠다. 나도 모르게 석진의 행동들의 당위성에 대해 동의해버렸고,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을 읽으며 소설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들로 인해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시티뷰>를 읽으며 요동치는 이 여정의 여운이 참 오래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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