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흐르는 대로 - 영원하지 않은 인생의 항로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해들리 블라호스 지음, 고건녕 옮김 / 다산북스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이 흐르는 대로

The In-Between



호스피스 간호사가 된 지금 나는 응급실에서 겪은 일과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어떤 신을 믿든 신 자체를 믿지 않든 환자들은 영혼과 만나는 일을 경험하고 있었고, 나는 이런 현상을 차마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모두들 나와 인연을 맺고 점점 가까워지면서 믿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처럼 이 문제가 흑과 백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점차 깨닫게 됐다. 삶과 죽음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중간 세상 In-Between이, 분명 존재했다.

p101

해들리 블라호스는 호스피스 간호사 9년차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응급실 간호사로 근무를 하던 과거에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환자들을 치료하고 살리는데 온 신경을 썼다면, 호스피스 간호사의 입장에서는 환자들의 평안을 주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 되었다.

그녀는 호스피스 간호사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곁에 있어주며, 환자가 편안하게 돕는 것이 중요한 임무임을 깨닫는다. 환자들은 치료를 중단하고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이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을 준비한다.

정말일까? 사실 아직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나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의심이 많다. 죽음 이후의 세계 즉, 사후세계에 대해 믿지 않는 나로서는 저자의 호스피스 환자들을 만나며 경험했던 일들이 그저 그들이 죽기 전 헛것을 보는 일종의 착란증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도 역시 나처럼 처음에는 그러했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죽은 언니가 보인다는 글렌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의 신념을 흔든다. 착란증상에 대해 좀처럼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피부암, 암세포의 위장 전이 등은 착란증상과 전혀 관련이 없다. 또한 할머니의 의식이 명료하고 스스로 호스피스를 선택한 경우다. 어맨다의 말로는 누구나 그렇다고 하니 호스피스의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증언들이 거짓일리 만무하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면 '정말 존재할지도?' 라는 생각으로 살짝 마음이 기둔다. 그러다 책을 다 읽을 때 즈음해서는 '존재했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이 생겨난다. 머리로는 아니라 하지만 마음으로는 간절해지는 스스로 납득이 안되는 지경에 이른다.




나는 내가 마흔에 죽게 될 줄 몰랐거든요. 항상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지 못해서 아쉬워요. 그때 그 빌어먹을 케이크를 그냥 먹어버릴 걸 그랬나 봐요.

p168

다섯 번째 에피소드 '꼭 케이크를 먹어요'는 엘리자베스와의 이야기를 담았다. 요가를 가르치던 마흔의 비흡연자가 원인 미상의 폐암으로 이른 나이에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다. '케이크를 먹어요' 라는 이 말이 기억에 남아 여운이 오래 갔다.

나 역시 마흔에 접어들어 앞으로 살 날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미래를 위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아끼며 투자하려 노력하고 있다. 가끔 이렇게 사는게 맞는건가 생각을 하곤 한다. 엘리자베스처럼 내가 당장 암이 생겨 손을 쓰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지금 눈 앞의 케이크를 먹지 않고 미뤄두고 있는 지금이 맞는가란 생각을 한다.

사실 정답은 없다. 그저 내게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판단은 나의 몫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쌓고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 함을 항상 기억해야겠다.



"어떻게 낙관적으로 바라보죠?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 끔찍하게 싫어요. 환자는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세상을 떠나는 데다, 퇴근하고 바베트를 만나러 가면 그냥 보기만 해도 자꾸 누군가의 죽음이 떠올라요.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긴 여행도 가지 않은 지 오래됐어요. 인생이 멈춘 거 같아요." (중략) "그런 감정이 드는 게 당연하단 거, 알죠?" 스티브 목사님이 부드럽게 물었다.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p219

억눌러 왔던 감정이 한 순간 폭발하며 나온 그녀의 말은 사실 좀 의외였다. 호스피스 간호사로 죽음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잘 보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도 편치는 않았던 듯 하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감정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위안이 되면서도 호스피스 간호사가 가지는 필연적 직업의 고충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되는 것만 같아 착잡한 마음도 함께였다.

여섯 번째 에피소드에 이디스의 '불이야' 소동은 가히 신기한 일이다. 중증 치매 환자인 이디스를 더 이상 간병하기 힘든 존 할아버지는 해들리의 도움으로 요양 병원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이디스는 갑자기 침대에서 불이 났다고 소동을 피운다. 해들리는 선배에게 조언을 구해 침대를 옮기는 방법으로 상황을 수습했다. 그런데 이디스가 떠나고 몇 달이 지나 실제 그 방에서는 불이 났다. 다행히 존 할아버지는 다친 곳은 없었다. 이디스의 '불이야' 소동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여기서 더 놀라웠던 사실은 이런 일을 선배 간호사 린다에서 말했는데,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에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나는 환자가 집에 편히 머물 수 있도록 도우면서 그들의 인생과 가족과 반려동물을 더 잘 알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다. 앞으로도 환자가 인생의 마지막 나날을 평화로운 환경에서 보내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기 때문에, 그들이 내 삶에 들어오도록 기꺼이 마음을 열어두고 싶기 때문에 반드시 나 자신을 잘 보살펴야 했다.

p389

이 책이 소중한 이유는 죽음에 대해 미처 생각치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호스피스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죽음을 잘 맞이하도록 돕는 호스피스의 중심이 해들리가 있다. 그녀에게도 시어머니 바베트의 죽음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장례 처리 절차부터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의 관계까지 삐걱거린다.

많은 에피소드들은 돈 문제가 얽혀있다. 수혈이 필요한 호스피스 환자 프랭크 (두경부암 환자)의 상황이 그러했다. 여러 상황들로 인해 수혈 비용을 지원 받을 수 없고, 비용 지불 금액이 예산 범위를 넘어 퇴직금에서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수혈을 한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살 날을 며칠 연장 시킬 뿐이다. 돈을 모두 사용하고 나면 남아있는 가족은 빈털터리가 될 게 뻔하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지만 이런 일들은 먼훗날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깊이 다루지는 않지만 그저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밀려온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떠나는 이에게도 남는 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저 한번쯤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는 자체만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다시금 고민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티 뷰 -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우신영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티 뷰

살고 싶은 도시, 살아남고 싶은 도시




한국 소설의 부흥기 & 제 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한국 소설의 부흥을 기대하며

2024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인해 한국작품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졌다. 한국 사람은 한국 소설을 읽을 때 가장 편하고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적확하게 이해하고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아무래도 외국 소설은 한 번 번역을 거치기 때문에 번역가의 성향이나 사용하는 단어에 따라 그 뜻이나 미세한 감정이 달라질 수 있기에 그 감흥이 덜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한국 소설은 언제나 우리의 소울 메이트처럼 우리의 영혼을 터치한다.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에 궁금증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나는 감히 이 수상작 타이틀만 보고 이 책을 선택해도 좋다고 말한다. 상을 수상했다는 의미는 쟁쟁한 경쟁작들 중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의미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왜 혼물문학상을 수상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된다.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스토리 진행과 가독성이 좋아 술술 읽힌다.

부부란 서로에게 얼마나 무지한 관계인가, 사람은 얼마나 만용을 부리는 존재인가. 주니는 어쩐지 철학적인 사색에 빠져 병원 문을 나섰다.



작가 우신영

1985년생

작가 우신영은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박사 출신, 인천대에서 부교수로 재직했다.

  • 동화 <언제나 다정 죽집>으로 제30회 비룡소 황금도깨비상 수상(2024)

  • <시티뷰>로 혼불문학대상(2024)을 수상

국어교육 전공으로 교육론과 관련된 책을 몇 권 출간했다. 집필한 동화 및 소설은 아직 몇 권 되지 않음에도 상을 수상했다는 점이 앞으로 집필할 소설들이 기대가 된다. 1984년생으로 기안84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앞으로 더 많은 집필 활동으로 소설 출간을 더 하지 않을까 기대가 되며,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작가다.

추후에 우신영 작가의 소설을 만나면 고민없이 집어 들 것 같다. 가독성이나 서서히 젖어 드는 치밀함, 예상치 못한 반전, 대비를 이용한 서사, 극중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인생의 질문들 까지 정말 책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벌써 팬이 되어버렸다.

의사 선생님은 죽고 싶을 때가 없어요? 난 내가 비정상이라고 생각 안 해요. 깨어 있을 때 가끔 졸린 것처럼 살아 있을 때 가끔 죽고 싶은 것도 정상 아닌가요.

p166



등장 인물과 줄거리

4명의 등장인물 : 석진, 수미, 유화, 주니

필라테스 센터를 운영하는 수미는 어려서 발레를 했고 두 아이의 엄마이자 워킹맘으로 당당한 삶을 살아간다. 의사인 석진과는 보통의 부부로 평온하게 살아가지만 수미는 남편 몰래 헬스 트레이너인 연하 남자친구와 관계를 이어간다.

주니는 헬스 트레이너로 싹싹해 단골 회원도 많고 나름 인정 받는다. 여자 친구와 함께 동거하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그러다 수미를 만나게 되고 자신과 다른 수미의 삶의 모습과 궁금증이 올라 몰래 석진의 병원을 찾는다.

면도날을 집어 삼켜 스스로 내과를 찾아 내시경을 받는 유화는 요거트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족 여인이다. 5만원 더 높은 가격때문에 비수면으로 내시경을 해달라는 유화. 내과 페이 닥터 석진은 좀처럼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섬에서 열심히 노력해 의과대학에 진학해 서울로 상경한 석진. 자신에게는 과분한 수미를 만나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다. 페이 닥터의 삶을 정리하고 송도에 내과를 개원한다. 손님이 늘지 않아 고심하다 아내의 추천으로 주말에 의료 봉사를 나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유화와 재회한다.


석진은 자신이 꿈꾸었던 궁전에 대해 생각했다. 최고급 대리석이 깔린 미진 내과, 먼지 한 톨 없이 반짝이는 우아미 필라테스,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뭘까. 수미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뭘까. 진지해진 석진을 방에 버려두고 수미는 또다시 헬스장으로 갔다. 칵테일과 함께 나온 프레츨을 집어 먹었기 때문이라나. 하루에 두세 번씩 운동하는 자신을 짐 래트라 부르면서도 멈추질 못했다. 쿠토가 운동으로 바뀌었을 뿐 강박적 제거 행위라는 점은 같았다. 칼을 먹는 유화가 섭식장애일까, 남의 시간을 먹는 수미가 섭식장애일까.

p228



석진에게 내 자신을 투영하다

그의 부정한 모습까지도 보듬다

처음엔 네 명의 등장인물 모두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유화는 면도날을 삼키는 걸까. 수미는 남에게 보여지는 것에 왜 저리 강박적인가.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석진이 왜 저리 답답해 보이는 걸까. 주니는 무슨 연유로 석진을 찾아갔던 걸까. 이런 궁금증이 점점 쌓여가다가 하나씩 숨겨졌던 사연들을 알고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소설을 읽다가 멈칫하게 하는 구절이 많았다. 그간 크게 생각치 않았던 부분에 대해 인생을 관통하는 허를 찌르는 대사가 종종 등장한다. 그럴 때마나 감탄과 헛헛한 웃음이 났다. 등장 인물들 모두 힘들었던 과거와 바닥의 역경이 숨겨져 있다. 그 과거는 현재의 모습에 어떤 식으로든 투영되어 발현되고 있다.

과거 발레를 했던 시절 가졌던 수미의 정신적 고통, 참을 수 없는 고통에도 소리 한 번 지르지 않는 독한 여성으로 변모해 분투하는 삶을 영위하는 수미는 고상한 가면 아래 상처를 감추며 살아간다.

석진의 취미는 클라이밍이다. 유화의 남자친구는 인천의 높은 빌딩에서 창문을 닦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이 둘을 교묘하게 교차시킨다. 석진은 시간이 흘러 유화의 표정에 숨겨져 있던 당혹스러움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유화가 왜 면도날을 삼키는지. 총기없는 유화의 눈동자는 어디를 바라 보는 것인지 소설을 읽고 나니 이제는 이해가 된다.

<시티뷰>라는 제목이 아주 절묘하다. 인공 도시 송도는 항구 도시 인천의 한 도시로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항구와 공항이 있다. 새로운 신도시로 국내외 많은 이들이 부푼 꿈을 안고 유입되는 도시다. 석진의 고향인 섬마을과도 비슷한 바닷가에 인접하고, 신도시의 느낌도 물씬 포함한 도시다.

부도덕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느낌은 사뭇 독자의 입장에서 껄끄럽다.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지만 들키지 않으면 전혀 문제없다는 듯한 수미의 태도가 껄끄러웠고, 이상하게 유화에게 끌리는 석진의 부도덕한 행동도 초조함을 더한다.

물론 석진이 이 소설에서 가장 주요한 인물로 극을 이끌어 간다. 그런 이유와는 별개로, 나는 개인적으로 석진의 입장에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을 투영하며 소설을 읽었다. 가난하고 불행했던 과거의 섬마을에서 벗어난 석진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새로 개원하는 병원의 내부 인테리어를 아내와 장모의 의견대로 할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모습에도 측은함을 느꼈다. 그런 부분이 참 무서웠다. 나도 모르게 석진의 행동들의 당위성에 대해 동의해버렸고,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을 읽으며 소설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들로 인해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시티뷰>를 읽으며 요동치는 이 여정의 여운이 참 오래 갈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의 제한선 - 1% 슈퍼 리치는 왜 우리 사회와 중산층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가
잉그리드 로베인스 지음, 김승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의 제한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타파와 우리 사회의 회복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



가난은 가시화 되지만 슈버 부자의 부는 가시화되지 않는다는 부분이 매우 공감된다. 길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노숙자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슈버 부자는 높은 울타리와 그들만이 사는 지역에서 외부인이 차단되기에 일반 사람들에게는 접근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슈퍼 부자가 완전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슈퍼 부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부를 축적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그들에게 부를 더욱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한없는 부의 축적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라는 의문을 하곤 했지만 관련된 책이나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잉그리드 로베인스의 <부의 제한선>은 이런 나의 가려움을 해소해 주었다.

팬데믹이 정점이었던 2020~2021년에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억만장자 400명은 자산이 40%나 늘어 총 4조 5,000억 달러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소기업들이 도산하는 동안 가장 큰 테크 기업 여섯 개의 시장 가치가 4조 달러나 증가했고 천만장자 24명이 억만장자 대열에 들어섰다.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죽고 수십억 명이 고통받는 동안 가장 부유한 이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p239



1장 얼마나 많은 것이 너무 많은 것인가

슈퍼 부자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부터 논점이다. 나라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나라마다 돈의 가치가 상당히 다르며, 사회 보장 제도가 탄탄하게 뒷받침되는 나라는 개인적인 자산이 크게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사는 지역에 따라 달리질 수 있다. 도심 지역의 부동산 가격과 시골을 비교하면 그 차이가 단번에 느껴진다.

100만 달러(약 130억원) 혹은 500만 달러(약500억원)의 자산, 100만 유로(약15억원) 혹은 220만 유로(약 33억원)이 슈퍼 부자와 부자를 구분 짓는 선인 '부유선'의 한 예시로 볼 수 있다. 부자가 아닌 우리에게 체감되지 않는 금액이기에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다가도, 정부나 기관에서 어떠한 정책을 펼치고자 할 때 이 기준선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1000만 (유로/달러/파운드 여부는 중요치 않다) 을 부유선으로 제안하고 있다.

2장 극단적인 부는 불평등을 심화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빈곤에 묶어둔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의한 세계 경제의 성장은 전 세계의 부를 증가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부가 전 세계의 전 계층에 고루 퍼졌다고 주장하는 통계 수치를 우리는 믿었다. 그러나 이는 통계적 장난에 불과했다. 1달러가 전부인 최하위 계층의 사람에게 1달러의 수익은 100% 수익 증가지만 최상위 부자에게 1달러는 0.0001%도 되지 않는 미미한 돈에 불과하다. 이렇듯 퍼센트 결과만 놓고 부가 고루 증가하였다는 통계는 사기와 다름없는 눈속임이었다.

트리클다운 효과에 대한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부자 감세는 자본 증가를 불러오고, 자본 증가는 일자리 창출 및 부의 분배에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많은 연구 결과로 보아 현실에서는 부자 감세가 소득 불평등의 심화를 일으키고 경제 성장 및 실업률 감소에 효과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한다.

3장 극단적인 부는 부정한 돈이다

과거의 노예제에서 축적된 돈이 현재까지 이어져 부자들의 근간이 된다. 과연 도덕적으로 순수무결하다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친일로 부를 축적한 부분과 닮아있다. 독재적 지도자들의 부 역시 부정한 돈이다. 푸틴과 그의 측근들, 이탈리아 정치적 부패 등의 예시가 있다.

제약 회사의 비도덕적 부의 창출, 금융 위기에 정부의 지원을 요청한 기업들, 인도에서 발생한 보팔 참사의 예시, 유명한 노동 착취의 아이콘 기업 아마존, 늘어만 가는 기업들의 탈세 (조세 회피 및 조세 포탈) 등의 다양한 예시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4장 극단적인 부는 민주주의를 잠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정치의 연결고리는 떼어낼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부자들은 정치 후원금을 기꺼이 낸다. 우리는 모두가 안다. 그 후원금이 단순한 후원금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돈에 밝은 부자들이 아무런 대가없이 정치 후원금을 낸다는 사실은 모순이다. 정치와 언론에 영향력을 미치는 부의 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부자들은 차선책을 위해 영주권 구매한다. 돈이 없는 이들은 영주권을 얻기 위해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돈으로 쉽게 영주권을 얻는 일은 민주주의에 걸맞지 않다.

5장 극단적인 부는 지구를 불태운다

탄소배출 및 환경문제는 모두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기는 중대한 사안이다. 그러나 부자들은 겉으로 환경을 위하는 정책을 지지하고 관여한다지만 실제 부자들의 탄소배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수많은 세컨 하우스를 소유한 부자들, 개인 비행기며 헬기로 배출하는 탄소는 지구온난화를 가속화 시킨다.

탄소배출을 제한하기 위한 몇몇 아이디어가 제안된다. 개인당 탄소 배출 허용치 연간 1.5톤 제한을 두는 방식, 오염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 등이 있으나 불평등한 현재의 부의 상태에서 오히려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현재 부를 소유하고 있는 세대는 그 부의 대부분을 자신이 선택한 상속인에게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조세의 수많은 구멍, 몇몇 나라에서 상속세와 유증세 페지, 조세 피나처 및 국제적인 재무 조작 기법의 사용, 그리고 막강한 재산 방어 산업 모두가 노년의 슈퍼 부자들이 세금을 거의 내지 않고 재산을 물려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p206


6장 천만장자, 억만장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부의 불평등의 시작은 상속이다. 단순히 운으로 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부의 상속에서 상속세가 많다고 부자를 걱정하는 댓글을 볼 때면 참 아이러니함을 느낀다. 자유가 다른 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기회의 평등을 훼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제한을 가하도록 사회는 설계된다. 상속이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혀 있어 단순하지가 않다.

노동의 대가로 받는 돈의 적절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에 대한 내용은 그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많았다. 능력과 성과에 따라 보상이 높아야 된다고 믿는데,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보수의 차이가 일의 힘듦에 의해 결정되어야 맞을까.

7장 그 돈으로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팬데믹 시대에 더 가진 사람은 고통을 덜 겪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고통받았으나 부자들은 더욱 재산을 증식되었다. 그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분배되었다면 어떠했을까. 팬데믹의 상황에서 세상은 조금 덜 피해를 받지 않았을까. 빈곤층에 단순히 돈만 주는 것은 도둑 정치가의 배를 불리고 자칫 잘못 사용될 수있다. 돈과 더불더 더 많은 것을 해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명백한 방법은 조건없이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다.

슈퍼 부자들의 잉여 재산으로 정부가 다양한 좋은 일들이 아주 많다. 여기에 역인센티브론이 등장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거라는 주장이다. 일을 하는 것이 오로지 돈 뿐만이 아니라는 반론을 제기한다.

8장 자선은 해답이 아니다

부자들의 재산을 기부하는 방향성이 도덕성 회복의 측면에 관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탈세하지 않고 정당한 세금을 납부하는 방향, 노동 착취 혹은 환경 오염 측면의 회복을 위한 노력들이다. 저자는 자선 자체가 해답이 아니라 말한다. 부에 상한이 없지 않은 한 부자는 부를 쌓아두려 한다. 말미에 10% 규칙에 대해 말한다. 할 수 있는 만큼 기부하자는 슬로건에 소득의 10%를 기부한다는 규칙은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 실행 가능성의 여부는 미뤄두자.

9장 부자들에게도 이득이 될 것이다

심각한 불평등이 점차 심화된다면 작은 불꽃에 의한 폭동, 봉기 혹은 정권 교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부자들은 스스로 돈에 얽메어 살아가고 극단적 부를 포기하면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또한 극단적인 부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충분함을 알게 하는 것으로 행복에 가까워 질 수 있다. 자신과 가족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부의 축적은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함에서 온다. 양질의 사회적 의료시스템이 확보된다면 그러한 불안감이 해소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부의 제한주의가 실현된 사회는 더 나은 사회일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부에 제한을 두는 것이 정치적으로 가능하지 않더라도 위쪽을 눌러서 경제 불평등을 줄이면 세상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

p318

10장 우리 앞에 놓인 길

저자는 부의 제한주의를 완벽하게 시행하기는 어렵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으로 설정하고 단계적 장기적으로 조치를 해 나가면 그 목표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극단적 부와 빈곤은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러한 방향성은 대중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부의 제한주의가 필요로 하는 첫번째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기를 해체라 말한다. 두번째는 계급 간의 분리를 줄이는 것이라 한다. 세 번째는 경제 권력에 균형을 잡는 것이다. 네 번째 조세 재정 당국의 역량 회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섯번째 부정한 돈을 회수해 과거의 피해를 회복하는데 써야 한다.

부의 제한주의는 더 광범위한 형태의 경제 정의를 필요로 한다. 국제 경제 구조를 더 공정하게 만들어야 하며, 경영자의 보수를 제한해야 한다. 또한 세대간 부의 전승을 막는 것이다.

부의 제한주의로 실현되는 미래의 가능성을 볼 때, 이로 인해 이득을 볼 사람이 극단의 부를 가진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다는 데 희망이 있다.

우리는 불평등이 어느 범위 이상으로 커지지 않게 하고 부자들의 잉여 재산을 사회의 긴박한 필요를 해소하고 집합 행동의 문제를 다루는 데 사용하는 경제 체제를 지어야 한다.

p328

부의 제한주의에 대해 저자의 제안들은 갈길이 멀다. 어쩌면 유토피아와 같은 허무맹랑한 제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은 우리 모두가 피부로 느끼고 있으며 문제는 점차 심화되어 가고 있다. 문제를 하나씩 인식하고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는 부의 제한주의를 기반에 둔 사회적 제도 개선 및 세금 제도 개선, 포괄적 사회적 안전망 구축 등으로 인한 더 나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우리가 이미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흠뻑 젖어 있다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부의 제한주의, 부의 제한선에 대해 공통된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 것이다. 1인 피켓 시위를 하는 격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새로운 제안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는 우리의 노력이 부의 제한주의를 실행하는 작은 하나의 발걸음이 될 것이라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형의 주인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형의 주인

고딕 소설의 대가 / 6편의 단편들




조이스 캐럴 오츠

고딕 소설의 대가, 미국 대표 작가, 매년 노벨상 유력 후보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고딕 소설의 대가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다작 작가다. 50편 이상의 장편, 1000 여편의 단편으로 다양한 상을 받았다.

  • <얼음의 나라에서(1967)> 와 <사자(1973)> 오헨리상

  • <좀비(1996)>, <악몽(2011)>, <검은 달리아와 하얀 장미(2012)>, <인형의 주인(2016)> 브램스토커상

  • <그들(1970)> 전미도서상

  • <폭포(2005> 페미나상

  • 퓰리처상 최종 후보 다섯 차례

  • 2003년 커멘웰스상, 케니언리뷰상

  • 2006년 시카고트리뷴문학상

  • 2019년 예루살렘상

  • 프린스턴대학교 로저 S. 벌린드 석좌교수로 재직 중

내가 모든 공포 및 고딕 소설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읽다보니 '조이스 캐럴 오츠'만의 스타일을 느낄 수 있었다. 의뭉스러운 분위기, 어둡고 침울한 꺼림직한 느낌을 진득하게 이어간다. 작가만의 스타일이 묻어나기에 이런 류의 스타일을 좋아한다면 다양한 책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더 없이 좋을 듯 하다.


꼬마 농부 소녀는 우리 마을 기차역 뒤 쓰레기 더미에서 끄집어낸 것이었다. 기차역 뒤에는 사용하지 않는 낡은 철로들이 있고, 그 주위의 울타리는 오래전부터 파손된 상태였다. (중략) 이 꼬마 농부 소녀도 '가출한 아이'였을 것이다. 고된 삶에 쫓겨 소녀는 이곳에 왔고, 열차가 떠나고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의 평화롭고 쓸쓸한 휴지기에 내 눈에 띄었다고 생각하는 게 합당할 것이다.

인형의 주인 (p47)



고딕 호러 소설

공포, 호러

고딕 소설 장르라는 표현이 낯설었다. 쉽게 말해 공포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가장 큰 예시로는 '드라큘라'이다. 비밀 통로, 지하 감옥이 설치된 중세 성,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이 떠오른다. 소설을 접하기 전에 고딕 소설이 무엇인지 알고 읽기 시작하면 소설이 더 잘 보인다. 작가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고 소설 장르를 이해하고 읽기 때문에 내용을 받아들이기에 수월하다.

고딕 소설이 상업주의 문학의 일종이라 평가한다. 쉽게 말하면 독자들이 좋아하는 장르라 말할 수 있다. 자극적인 소재, 반전을 담은 스토리, 특유의 어둡고 괴기스러운 분위기 등이 특징인데 <인형의 주인>에도 그러한 특징이 잘 담겨 있다. 고딕 소설 장르와는 살짝 다르다고 하다면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로맨스 요소는 살짝 배제되어 있다.

반전 스토리 & 인간 내면의 근원적 공포

반전이 있긴 하지만 예측하기 힘든 반전은 아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 정도 뒷 내용이 그려진다.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사실을 완벽하게 감추는게 아니라 중간에 의도적으로 슬며시 보여준다. 독자 입장에서 처음에 믿었던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 주인공의 시각에서 바라보기에 주인공이 정말 믿고 있는 혹은 그 거짓말이 진실인 것처럼 믿게 한다. 그런 작가의 기교가 상당히 우아하고 영리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짜짠' 하며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을 던지기 보다 그 반전이 납득 가능하게끔 독자를 설득시키는 과정이 녹아있기에 반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 예상가능한 반전이기에 시시하게 느끼는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엄청난 반전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독자에게는 이 소설이 시시한 반전이라며 아쉬워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소설은 고딕 소설의 정수인 드라큘라처럼 SF/판타지 장르는 아니다. 귀신 유령과 같이 존재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공포가 때로는 단순히 이야기를 위한 공포적 소재로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반면 이 소설은 정말 현실 세계에 있을 법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공포로 다가온다. 정말 이럴 수 있겠다는 내 살갗에 직접 닿는 것만 같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공포를 선사한다.


T 삼촌은 말했다. 인종 전쟁은 이 나라에서 결코 끝나지 않을 전쟁이야. 이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건 정부도 몰라. 이건 다 사회복지제도에 투표하는 이민자들과 흑인들이 결탁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군인 (p84)

단편의 다양한 소재들, 사회적 문제를 결합시키다

첫번째 단편 <인형의 주인>의 제목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되었는데, 첫 단편 부터 임팩트가 상당하다. 인형을 수집하는 한 소년에 대한 내용인데 뭔가 수집해서는 안될 것만 같은 인형을 자신의 집의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 전시 보관한다. 사이코패스의 성향을 가진 소년이며 가족도 그런 부분을 눈치채고 G박사와의 상담을 진행하는 부분도 나온다. 뭔가 수집하는 인형의 존재가 들켜서는 안되는 것처럼 방어적인 소년의 모습이 긴장감을 더한다. 또한 얼굴을 볼 수 없는 친구의 존재는 정신 분열 혹은 소년의 또 다른 내면으로 그려진다. 긴장감을 더 해가면서 나중엔 인형들의 모습과 섬뜩하게 그려지는 결말까지 정말 완벽한 구성이어서 놀라웠다.

<군인>은 두 가지 주제를 잘 버무린 단편이다. 흑인과 백인, 인종간의 대립과 더불어 살인사건의 실상에 다가서는 과정이 잘 조화된 스토리다. 자신을 괴롭힌 상대에 대한 방어로 살인을 저지른 백인 소년은 흑인 인종들에 대항하는 마치 군인과도 같은 존재다. 살인의 동기 와 진위여부에 대한 사항은 뒷전이며 단지 가해자가 백인이며 피해자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의 말이 모두 진실이 것 같이 포장된다. 이 내용은 좀 더 발전시켜 장편소설로 나왔어도 참 좋았을 것 같다.

<총기 사고> 는 한 소녀의 과거 고백으로 시작된다. 총기 사고가 발생했고 그 과정이 조금씩 그려지는데 소녀의 시각에서 벌어진 진실과 세상에 알려진 포장된 진실의 차이는 극과 극이다. 허나 소녀의 정당 방위에 의한 사고는 다른 단편들과는 조금 다르게 충분히 납득이 되는 부분이었다. 진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상황을 피하고, 그럼에도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단어 선택에 주의한다. <군인>과 <총기 사고> 두 사건이 자칫 비슷하면서도 이 두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이렇게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고 놀라웠다.

"괜찮아, 바이올렛." 리타 메이는 바이올렛이 냄새 때문에 코를 찡그리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저건 네가 청소하지 않아도 돼. 넌 우리 가족이 아니잖아, 아직은."

빅마마 (p315)

<빅마마>의 한 부분인데 여기서 작가의 노련미를 엿볼 수 있다. 힌트를 살짝 넣어주면서 예측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아직은'이라는 단어를 뒤에 붙이면서 바이올렛이 이 가족의 구성원으로 될 것만같은 암시를 넣어준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가 마지막까지 읽고 나니 섬뜩하게 느껴졌다. 빅마마의 존재는 거대한 비단뱀이다. 비단뱀은 먹이를 산채로 삼켜 소화시킨다. 소설의 서두에는 아이들과 애완동물들의 실종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무언가 연관관계가 그려지지만 소설은 그 결말을 우리에게 던지고 마무리된다.

서평을 마무리 하며

조이스 캐럴 오츠 작가의 책을 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쾌거다. 다작 작가이며 상당히 유명한 작가임에도 몰랐기에 아직 내 자신이 한참 부족함을 또 느낀다. 상을 받은 다른 장편 소설에도 도전해 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상을 수여한만큼 선택지가 넓은 편이라 더욱 좋다.

고딕 소설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알았다는 사실도 하나의 수확이다. 몰라도 살아가는데 전혀 상관없겠지만 아는만큼 보이는 법이다. 다양한 책의 세상에서 고딕 소설 장르의 다른 책들을 만났을 때 조이스 캐럴 오츠가 떠오를 것이다. 또 하나 놀라웠던 부분은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이 고딕 소설 장르라는 사실이다. 알고나면 보이고 연결이 된다. 그전엔 왜 미처 몰랐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7개 단편 소설



클레어 키건

부커상 최종 후보



클레어 키건의 대표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2년 오웰상 소설 부문 수상작,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소설이며 이미 한국에서 2023년 발행되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라있다. 또한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2009년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했다. 영화화된 "말없는 소녀"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대표작인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익히 구매하여 내 책장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 책들에 있으나 아직 읽기를 보류하고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책보다 먼저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게 되었다. 타임즈에서는 클레어 키건을 "한 세대에 한 명씩만 나오는 작가"라 칭했고 이러한 추앙의 글들은 나로 하여금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을 모두 읽겠다는 의지를 심어주었다.


<푸른 들판을 걷다>는 이전 두 소설과는 다르게 단편 소설집으로 2007년작이며 2024년 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에지힐 단편 문학상 수상작이며, 소설가 최은영의 강력 추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수록된 단편작 중에서 [물가 가까이]를 추천했다하니, 귀가 얇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게에 충분했고 책을 펼쳐 들었다.





작별선물

첫번째 작품

문이 밀자 열린다. 당신은 환한 개수대와 거울을 지나친다. 누군가가 괜찮냐고 묻지만-정말 바보같은 질문이다-당신은 또 다른 문을 열었다가 닫을 때까지,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 문을 잠글 때까지 울지 않는다.

작별 선물 (p27)


첫번째 작품인 [작별 선물]은 나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클레어 키건이 준비한 그녀의 세상과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기에 나에게는 조심스럽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으며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새로운 세계로 다가왔다. 정말 섬세한 단어와 문장들이 사용되어 글을 구성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작별 선물]은 그 뒷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유난히 길게 여운이 남았다.


가부장적이며 성적 학대를 일삼는 아버지,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어찌할 수 없는 어머니, 현실에 순응해 농사일을 하는 아들, 그리고 이러한 가정과의 작별을 결심하는 딸. 그렇게 새로운 삶을 떠나는 딸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후련함, 기대감과 희망의 세세한 감정이 나에게로 온전히 전해졌다.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의 마음, 울음이 터져 나올 듯한, 이제 되었다는 안도감과 막막하면서도 기대가 되는 자신의 미래를 이토록 짧은 단편에 녹여 냈다는 부분에서 작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첫 소설에서 이미 나는 클레어 키건에게 반해버렸다.





푸른 들판을 걷다

두번째 작품

저 아래 강에서 갈색 물이 느른하게 흐른다. 단지 강이 아직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평화로워진다. 수면에 비친 반대편 강둑의 나무들 모습에 골이 진다. 구름 한 점이 하늘에 떠다닌다. 너무 창백하고 뜬금없어서 전날의 구름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는 주목에 걸린 신부의 베일을 가져온 것을 기억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느껴본다. 그런 다음 주머니에서 꺼내 떨어뜨린다. 베일이 수면에 닿기도 전에 후회하지만, 기회가 있었으나 이제 사라지고 없다.

푸른 들판을 걷다 (p56)


한 결혼식에 신부와 사제가 등장한다. 신부와 사제는 과거 서로 사랑했던 사이다. 사제의 길과 사랑하는 여인 중에서 결국은 사제의 길을 선택했고 이렇게 신부의 결혼식에서 신부의 베일에서 못다핀 미련을 가슴에 묻는다. 결혼식장을 떠나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어든다. 자신의 외로움에 직면한다. 양 한 마리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하늘의 별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러헤 사제는 길을 향해 들판을 다시 오르며 내일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사제라는 설정을 제외한다면 전여친의 결혼식장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찾아간 전남친의 이야기일 수 있다. 물론 사제는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지만 과연 그러했을까 싶다. 사제라고 하니 뭔가 그럴듯하게 포장되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금기된 성역을 넘는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하느님의 눈에도 정말 금기와도 같은 일일까 싶은데, 어찌되었든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미래를 내일을 어찌 살아갈까 현실로 돌아오는 마무리가 매우 현실적이어서 그 흥이 살짝은 깨졌지만 나름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물가 가까이

다섯 번째 작품

어머니가 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서 있다. 그는 어머니의 어머니를, 그렇게 먼 길을 가서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는데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던 할머니를 생각한다. 강에서는 수영을 그렇게 잘했는데 말이다. 그가 왜 그랬냐고 묻자 할머니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랬다고 말했다.

물가 가까이 (p160)


이 작품 역시 마지막의 여운이 크게 감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백만장자의 아들이자 하버드대 입학을 앞둔 스물한 살의 청년이 있다. 그에게 누군가에게 말못할 고민이 가득해 보인다. 순종적인 아들로 살아가고 있지만 공황과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그의 모습이 자신의 할머니의 모습과 대비된다. 강압적인 할아버지와 일평생을 살아왔다. 바다에 데려가 달라 조르던 색시는 일평생 돼지를 키웠고 할머니가 되어서야 바다에서 한 시간의 시간을 갖게 된다.


대비되는 이 두 명의 삶은 많은 생각을 자아낸다. 과연 누가 행복하고 누가 불행한가.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이 무용처럼 느껴지는 한 청년이 물가 가까이 서있고, 일평생 자유롭게 누리지 못했으나 그 짧은 한 시간 바다 앞에 선 할머니.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다. 이 짧은 작품이 나에게 무심코 던지는 질문으로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등장인물와 대비

단편 소설집의 특징

  • 매일 열심히 농장일을 하고 돈을 걱정하는 가부장적 아버지

  • 주눅, 결핍, 순응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어머니

  • 믿음직하나 우둔하고 현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아들

  • 똘똘하고 개척정신이 있으며 비밀을 가진 딸

이 소설집에 대체적으로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큰 맥락적으로 이런 비슷한 인물들로 묘사된다. 전혀 다른 가정이고 다른 인물들이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나중에 뭔가 연결되는 혹시 연작소설인가 싶은 정도로 비슷한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다른 소설을 아직 읽지 못해 작가의 특성인지 이 단편 소설집의 특징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소설집에서 형성한 세계는 너른 초원에 무뚝뚝한 농장의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묵묵하나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이런 상황을 이겨내고자 타개하고자 하는 인물은 대체적으로 딸이다. 같은 여성이지만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과 개척정신으로 현재를 타개하는 힘을 가진 딸의 모습이 대비를 이룬다. 어머니의 일탈은 영특한 딸을 얻게 했고, 우연히 생일 선물로 주워온 개는 어머니와 딸을 지키는 영민한 구세주였다.


다양한 삶이 등장한다. 적절한 대비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같은 상황 아래서의 아들과 딸, 전혀 다른 상황에서의 할머니와 아들. 자연스럽게 대비되는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의 깊이가 허를 찌른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