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흐르는 대로 - 영원하지 않은 인생의 항로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해들리 블라호스 지음, 고건녕 옮김 / 다산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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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흐르는 대로

The In-Between



호스피스 간호사가 된 지금 나는 응급실에서 겪은 일과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어떤 신을 믿든 신 자체를 믿지 않든 환자들은 영혼과 만나는 일을 경험하고 있었고, 나는 이런 현상을 차마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모두들 나와 인연을 맺고 점점 가까워지면서 믿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처럼 이 문제가 흑과 백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점차 깨닫게 됐다. 삶과 죽음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중간 세상 In-Between이, 분명 존재했다.

p101

해들리 블라호스는 호스피스 간호사 9년차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응급실 간호사로 근무를 하던 과거에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환자들을 치료하고 살리는데 온 신경을 썼다면, 호스피스 간호사의 입장에서는 환자들의 평안을 주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 되었다.

그녀는 호스피스 간호사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곁에 있어주며, 환자가 편안하게 돕는 것이 중요한 임무임을 깨닫는다. 환자들은 치료를 중단하고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이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을 준비한다.

정말일까? 사실 아직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나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의심이 많다. 죽음 이후의 세계 즉, 사후세계에 대해 믿지 않는 나로서는 저자의 호스피스 환자들을 만나며 경험했던 일들이 그저 그들이 죽기 전 헛것을 보는 일종의 착란증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도 역시 나처럼 처음에는 그러했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죽은 언니가 보인다는 글렌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의 신념을 흔든다. 착란증상에 대해 좀처럼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피부암, 암세포의 위장 전이 등은 착란증상과 전혀 관련이 없다. 또한 할머니의 의식이 명료하고 스스로 호스피스를 선택한 경우다. 어맨다의 말로는 누구나 그렇다고 하니 호스피스의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증언들이 거짓일리 만무하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면 '정말 존재할지도?' 라는 생각으로 살짝 마음이 기둔다. 그러다 책을 다 읽을 때 즈음해서는 '존재했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이 생겨난다. 머리로는 아니라 하지만 마음으로는 간절해지는 스스로 납득이 안되는 지경에 이른다.




나는 내가 마흔에 죽게 될 줄 몰랐거든요. 항상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지 못해서 아쉬워요. 그때 그 빌어먹을 케이크를 그냥 먹어버릴 걸 그랬나 봐요.

p168

다섯 번째 에피소드 '꼭 케이크를 먹어요'는 엘리자베스와의 이야기를 담았다. 요가를 가르치던 마흔의 비흡연자가 원인 미상의 폐암으로 이른 나이에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다. '케이크를 먹어요' 라는 이 말이 기억에 남아 여운이 오래 갔다.

나 역시 마흔에 접어들어 앞으로 살 날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미래를 위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아끼며 투자하려 노력하고 있다. 가끔 이렇게 사는게 맞는건가 생각을 하곤 한다. 엘리자베스처럼 내가 당장 암이 생겨 손을 쓰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지금 눈 앞의 케이크를 먹지 않고 미뤄두고 있는 지금이 맞는가란 생각을 한다.

사실 정답은 없다. 그저 내게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판단은 나의 몫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쌓고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 함을 항상 기억해야겠다.



"어떻게 낙관적으로 바라보죠?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 끔찍하게 싫어요. 환자는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세상을 떠나는 데다, 퇴근하고 바베트를 만나러 가면 그냥 보기만 해도 자꾸 누군가의 죽음이 떠올라요.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긴 여행도 가지 않은 지 오래됐어요. 인생이 멈춘 거 같아요." (중략) "그런 감정이 드는 게 당연하단 거, 알죠?" 스티브 목사님이 부드럽게 물었다.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p219

억눌러 왔던 감정이 한 순간 폭발하며 나온 그녀의 말은 사실 좀 의외였다. 호스피스 간호사로 죽음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잘 보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도 편치는 않았던 듯 하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감정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위안이 되면서도 호스피스 간호사가 가지는 필연적 직업의 고충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되는 것만 같아 착잡한 마음도 함께였다.

여섯 번째 에피소드에 이디스의 '불이야' 소동은 가히 신기한 일이다. 중증 치매 환자인 이디스를 더 이상 간병하기 힘든 존 할아버지는 해들리의 도움으로 요양 병원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이디스는 갑자기 침대에서 불이 났다고 소동을 피운다. 해들리는 선배에게 조언을 구해 침대를 옮기는 방법으로 상황을 수습했다. 그런데 이디스가 떠나고 몇 달이 지나 실제 그 방에서는 불이 났다. 다행히 존 할아버지는 다친 곳은 없었다. 이디스의 '불이야' 소동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여기서 더 놀라웠던 사실은 이런 일을 선배 간호사 린다에서 말했는데,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에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나는 환자가 집에 편히 머물 수 있도록 도우면서 그들의 인생과 가족과 반려동물을 더 잘 알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다. 앞으로도 환자가 인생의 마지막 나날을 평화로운 환경에서 보내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기 때문에, 그들이 내 삶에 들어오도록 기꺼이 마음을 열어두고 싶기 때문에 반드시 나 자신을 잘 보살펴야 했다.

p389

이 책이 소중한 이유는 죽음에 대해 미처 생각치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호스피스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죽음을 잘 맞이하도록 돕는 호스피스의 중심이 해들리가 있다. 그녀에게도 시어머니 바베트의 죽음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장례 처리 절차부터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의 관계까지 삐걱거린다.

많은 에피소드들은 돈 문제가 얽혀있다. 수혈이 필요한 호스피스 환자 프랭크 (두경부암 환자)의 상황이 그러했다. 여러 상황들로 인해 수혈 비용을 지원 받을 수 없고, 비용 지불 금액이 예산 범위를 넘어 퇴직금에서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수혈을 한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살 날을 며칠 연장 시킬 뿐이다. 돈을 모두 사용하고 나면 남아있는 가족은 빈털터리가 될 게 뻔하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지만 이런 일들은 먼훗날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깊이 다루지는 않지만 그저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밀려온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떠나는 이에게도 남는 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저 한번쯤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는 자체만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다시금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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