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 로봇이 낳아드립니다 - 교유서가 소설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정은영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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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 로봇이 낳아드립니다

정은영 작가의 <임산부 로봇이 낳아드립니다>와 <소년과 소년> 두편의 단편 소설이 담겨 있다.

미래의 모습을 전문적으로 하는 작가인가 보다. 다양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미래 사회의 모습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 SF 장르를 좋아해 마음이 가는 소설들이었다. 그저 미래만 담았다기 보다는 윤리적 문제라던가 사회 이슈가 될 수 있을만한 내용을 함께 다루고 있어 더욱 재미있다. 정말 이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내용들이 많았고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문제들이어서 더 좋았다.

얼마전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정이>의 내용과 닮아 있는 요소들이 많아 또한 흥미로웠다. SF 미래 사회와 더불어 감정을 소유한 로봇이라는 설정도 닮았고, 복제 인간을 다뤘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다.


임산부 로봇이 낳아드립니다

첫번째 소설

미래 사회 임산부가 태아를 잉태했다. 그런데 이 임산부는 로봇이다. 태아를 위해 시를 낭송하고 정서적 태교를 위해 성심 성의껏 임산부의 역할에 충실한다. 임산부 로봇 헐스와 태아 행복이는 문제없이 잘 자라는 듯 했다. 하지만 안면장애 판단을 받은 태아는 장애아 출산률 0%를 위해 유산되어야만 했다. 유산되면 임산부 로봇의 기억은 지워진다. 이로인해 로봇은 버그가 생겨난다. 버그는 어렴풋한 기억의 파편으로 떠오른다.

"행복이를 위한 일은 내가 더 잘 알아. 넌 이제 리셋될 거야. 임산부 로봇은 임산부가 아니라 로봇이라는 걸 잊지마."

"저는 행복이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않겠습니다. 행복이를 살릴 겁니다. 함께한 38주도 저장할 겁니다. 그것만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p29

유산 작업을 처리하는 고물상 역시 안면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이 매우 아이러니하게 비춰진다. 장애를 가진 태아를 유산시키는 윤리적 문제와 로봇의 감정이라는 상상을 더해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AI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는 현 상황에서 언젠가 정말 임산부 로봇이 세상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소년과 소년

두번째 소설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단숨에 읽었다. 그저 미래를 배경으로 한 중2 문제아 김선호와 뇌 전문 의사 아빠와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다. 선호는 위험하게 플라잉카를 타다 사고를 당한다. 뇌 전문 의사인 아빠의 병원에서 선호는 깨어난다. 심하게 다쳤지만 미래 기술로 인해 수술을 받고 완쾌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선호는 가상담배를 찾고 정신을 차릴 여지가 없다. 또한 아이들을 괴롭혀 강제전학을 당할 처지다.

일기장의 첫 장을 잘 못 썼다면? 일기를 새로 쓰고 싶다면?

p51

미래를 배경으로 한 신선한 소재들이 등장해 흥미로운 점도 잠시 선호에게 새로운 자아가 나타난다. 마치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처럼 다른 자아가 활성화되어 착한 선호가 된다. 하지만 선호의 반항 기질은 바뀔 줄 모른다. 폭주 비행을 하자는 말에 당장 플라잉카를 몬다. 그러다 다시 사고가 나고 아빠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다. 이번엔 저번보다 더 크게 다쳤다. 옆에는 다른 소년이 누워있고 무언가 자신에게 이식된다. 수술이 끝나고 선호는 더이상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마지막 반전의 내용을 적지는 않았다. 그저 반항아의 자아 분열과도 같은 내용이라 생각했는데, 뇌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일기장을 새로 쓴다는 광기어린 내용이었다. 미래의 기술은 어디까지 발전할지 알수 없고 가늠조차 하기 어렵지만 그만큼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음식 맛을 최상으로 끌어 올리기는 무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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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 교유서가 소설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송지현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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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송지현 작가의 <김장>과 <난쟁이 그리고 에어컨 없는 여름에 관하여> 두 편의 단편 소설이 담겨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소소한 에피소드들 사이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김장>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서 보냈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죽음과 삶의 연속성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난쟁이 그리고 에어컨 없는 여름에 관하여>는 청년의 불안감과 불안정한 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즐거운 파티 속에 있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사람들의 현실의 혼란을 느낀다.


김장

첫번째 소설

뭔가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동시에 점점 그 정이 사라져감을 느낀다. 함께 김장을 하고, 이웃과 김치를 나눈다. 김치를 받은 이웃은 그냥 보내지 않고 손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이런 모습은 더이상 도시의 삶에서 보기 힘들다. 예전보다 수위가 낮아진 냇가의 물도 점점 말라간다. 점차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정이 비유적으로 표현된게 아닌가 싶다.

할머니가 올해는 팔이며 허리가 아파 혼자 김장을 할 수 없다고 했다며 엄마가 덧붙였다.

"외가를 통틀어 회사고 가게고 아무데도 안 가는 사람은 너네뿐이다." 별수 없이 동생과 내가 가겠다고 했다.

p17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잉여 인력이라는 이유로 김장 노동 현장에 발탁된다. 짧은 소설 안에 이런 저런 에피소드가 결합되어 있는데, 할머니는 몇 차례나 죽음을 마주한다. 캔 뚜껑을 모으다가 캔 무덤 속에서 시체를 발견했다. 동네 다리에서 우연히 이웃의 손자의 목메단 시체를 봤다. 할머니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하고 동요가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토록 쉽사리 무너질 수 있으나 그마저도 초월한 할머니의 모습이 초연하다.

옆 집 가게와 실랑이를 벌이던 엄마의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가게의 주차 문제로 쉽사리 갈등이 해결되지 않을 듯 싶어 보였는데, 손주의 귀여운 모습을 칭찬한 이 후로 관계가 스르르 풀렸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갈등 안에서 직접적인 칭찬이 아닌 손주를 칭찬했는데도, 관계는 극적인 우호를 맺는다. 참 사람사는 모습이 재미있고 정이 모든 것을 감싸주지 않나 생각해 본다.


난쟁이 그리고 에어컨 없는 여름에 관하여

두번째 소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떠오르는 제목이다. 소설 안에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에이컨이 설치되지 않은 집에 살며 집 외벽의 에어컨 구멍으로 작은 사람의 형태가 보인다. "...엔 날개가 없다. ...은 추락"이라는 목소리의 울림도 들려왔다. 불안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일까. 마치 그 난쟁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안하게 껴있는 자신의 모습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가늠해 본다.

우리는 버선을 신고 맘껏 미끄러졌다.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에서 어떤 음악이 나오든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나는 미끄러지면서 문장을 만들었다. 슬픔엔 날개가 없다. 인간은 추락. 아니 더 큰 단어로. 감정엔 날개가 없다. 생명은 추락. 다시 작은 단어로. 가위엔 날개가 없다 가윗날은 추락.

작은 슬픔들이 모여서 나를 만들고 있다. 작은 슬픔이 모인 것이 나다. 나는 작은 슬픔이다.

p63

제이라는 인물은 소아암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머리가 듬성듬성하다. 캐나다 교포 2세다. 파티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버선을 모으는 게 취미란다. 별난 취미도 다 있다 싶다. 버선을 타고 미끄러지는 매력에 빠졌다나.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미끄러져봐"라는 그녀의 말에 묘한 위로를 받는다.

g라는 인물은 남편과 이혼하고 고양이를 유기했다. 홀로 아이를 키운다. 술에 취해 아이에게 죽으라고 소리를 지르는 엄마다.

돌아갈 곳이 없다. 제이는 자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g는 아이의 엄마로 돌아간다. 불안하고 어디하나 발 붙이기 힘든 느낌의 현실이 느껴진다. 사진기에 파티에서 사람들을 담는다. 그들과의 대화와 만남을 통해 불안한 그들의 삶을 목도한다. 청년의 어지러운 삶, 불안하고 불면증이 솟아나는 현실을 보여주는 듯 하다. 신나는 파티의 현장에 서 있지만 어디 발 붙이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그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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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 이해하는 사이 - 교유서가 소설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김주원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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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 이해하는 사이

코믹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 장르의 웰메이드 단편 소설

김주원 작가의 <십분 이해하는 사이>와 <우주맨의 우주맨에 의한 우주맨을 위한 자기소개서> 가 한 권에 담겨 있다. 정말 오랜만에 완성도 있는 단편을 만난 느낌이다. 짧지만 결코 모자람없는 구성과 내용이었다. 두 편의 소설은 서로 정말 다른 이야기지만 옥상이라는 공간에서 발생한 한 사건에 의해 빛을 발한다.

코믹이 가미된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 장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내용을 모두 읽고 한 동안 멍해 있었다. 감탄과 함께 그래, 단편은 이렇게 써야하는 거지!


십분 이해하는 사이

첫번째 소설

옥상에서 고등학생 두 명이 실랑이를 한다. 처음엔 뭔가 싶었다. 둘이 뭔가 의견이 맞지 않는 듯 한데. 그러다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데 한 명이 뛰어내리려나보다. 그걸 다른 한 사람이 막으려 회유하는 모습이다. 그런 실랑이를 벌이는 대화에 약간의 개그를 넣어가면서 지루할 틈 조차 주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회유에 성공하고 둘은 내려온다.

그래, 나는 지금 네 마음이 어떤지 몰라. 하지만 나는 이런 것도 이해라고 생각해. 바로 옆에 앉아서 너의 마음이 어떨지 헤아려보는 거 말이야.

p24

간단한 줄거리만 들었을 때는 그냥 단순한 내용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반전의 내용을 접하게 되면 상황이 급변한다. 지금까지 읽었던 이 짧은 단편을 한 번 더 읽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파급력있는 반전이다. 다시 읽다보니 와, 정말 대단하다. 처음 읽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다시 읽으니 다른 소설로 다가온다. 주고 받는 대화 속에 숨겨진 단어들을 발견하면서 소름이 돋는다.

'단편이 이렇게 써야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짧아서 아쉽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읽고 싶은 그의 소설이다. 얼른 다음 소설을 읽고 싶어 다음 소설로 넘어갔다.


우주맨의 우주맨에 의한 우주맨을 위한 자기소개서

두번째 소설

이 소설도 옥상이 나온다. 전혀 다른 소재이지만 옥상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은 비슷하게 구성했다. 약간의 무기와 같은 이 장치가 참 마음에 든다. 이 옥상에서의 일로 꼬마는 우주맨이 된다. 옥상에서 만난 형이 준 선물로 지구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된다.

집에서 뒹굴거리는 청년 실업은 아니고, 잠시 휴업 중인 김세종. 누나 김서희씨 빌라에 빌붙어 살면서 은행 청원 경찰 지원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려 한다. 이를 초등학생 조카 김한솔 군이 도와주고 있다. 김서희씨는 욕받이로 김세종을 집에 데려와 각종 욕을 퍼붇는다. 이를 애정표현으로 여기는 김세종은 똘똘한 김한솔 군과 함께 미래를 도모한다.

꼬마야. 우주맨에게 중요한 건 바로 포지다. 이렇게 멋지게 가슴에 딱 갖다대는 거야. 그런데 사실은 이거 안 해도 돼. 그냥 폼이야. 넌 그냥 두 눈을 감고 '전화기 나와라' 마음속으로 외치기만 해도 된다고. 그리고 네가 마음속으로 말해도 상대방은 너의 말을 다 듣는다.

p70

조카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조카의 행방을 뒤쫓는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조카의 행방을 찾아내고 경찰에 신고한다. 우주맨의 기술을 활용해 무사히 조카를 구한다. 그리고 조카를 위해 우주맨을 포기하면서 까지 마지막 우주맨의 기술을 사용해 조카를 보호하게 된다.

미스터리 소설답게 우주맨의 능력을 얻는 과정부터 우주맨에서 일반인이 되는 과정까지 범상치 않은 내용이다. 하지만 정말 있을 법하게 잘 버무린 내용이 정말 재미있었다. 작가는 코미디와 미스터리, 스릴러를 적절하게 섞어 맛있는 비빔밥으로 만들었다. 나는 이 비빔밥을 맛있게 즐겼다. 강력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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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 교유서가 소설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김이은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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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김이은의 2편의 소설 <산책>과 <경유지에서>가 담겨있다. 짧은 소설이지만 매우 짜임새있고 공감되는 내용으로 여운이 남았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뭔가 실제 인물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생생하게 인물을 잘 표현했다는 의미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내용이다. <산책>에서는 도심지의 삶과 도시 외곽 신도시의 삶, 비슷하지만 다른 두 삶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그 고민의 방식과 생각이 매우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경유지에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물렀다고 얘기하는 이화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아온 에릭의 모습을 통해 사람 간의 관계와 삶의 모습을 들여다 본다.


산책

첫번째 소설

윤경과 여경은 자매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무언가 부정적 언행을 입에 달고 사는 서울 사람인 윤경과 경기도 외곽의 신도시에 살며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 여경이다.

윤경은 서울 하늘 아래 오래된 아파트에 리모델링해 들어가 살고 있다. 작은 평수지만 자가라는 사실에 나름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이자를 값아야 하는 처지이며 아이의 엄마로 뭔가 여유가 없는 날이 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여경은 경기도 외곽의 신도시의 여유를 느끼며 살아간다. 쾌적한 새 아파트의 환경에서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강아지를 산책시킨다. 자연의 맛이 한껏 느껴지는 환경에서 쾌적하며 나름 삶에 만족하는 모습이다.

여경도 처음에 놀랐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그랬다. 처음엔 어색해서 어쩔 줄 몰랐다. 지음은 여경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인사를 건넨다. 서울에 살 때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 중 하나였다.

p29

이 둘은 서로 살아가는 모습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윤경은 신도시의 너른 공원이 공간 낭비로 여겨지고 여경은 팍팍하고 좁은 아파트에서 사는 서울 살이가 당장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미룬 모습처럼 여겨진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쉽사리 대답하기는 힘들다.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갈 뿐이다. 어느 삶이 더 낫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저 우리는 그 때의 상황에 맞게 하나의 삶을 선택해 살아갈 뿐이다. 나의 삶은 어떠한 모습인지 되돌아 보게 된다.

경유지에서

두번째 소설

이화와 에릭에 이야기다. 영어 학원에 간 이화는 영어 초급반 수업을 듣게 된다. 그곳에서 에릭을 만났다. 무슨 용기에서인지 에릭에게 연락처를 건네고 둘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이런 저런 에릭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에릭은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에릭은 이화의 집에서 지내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점차 깊어지는 듯 오묘해진다. 에릭은 집에 머물면서 이화의 보살핌을 받게 되고, 이화는 에릭을 돌보는 형태가 되어 갔다. 에릭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그저 떠날 때가 온 것인지 훌쩍 작별을 고한다.

이화는 애초에 뜨내기 갔았던 에릭의 첫인상을 새삼 상기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갈 사람. 이화는 역시나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흡족해했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제 집에서 더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63

이화는 에릭은 선택했다는 표현에서 이 모든 것이 의도적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에릭이 떠날 사람인 줄 알고 선택했다는 말이다. 그 정확한 이유와 감정에 대해서 백프로 공감하기는 어려웠으나 뭔가 이화가 지내온 삶이 궁금해졌다. 엄마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들이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아 더욱 궁금했다.

이화의 집이 에릭의 경유지인지 에릭이 이화의 경유지인지 중의적 느낌으로 다가왔다. 추측컨테 자신의 엄마의 삶을 잠시나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엄마는 이화 자신을 돌보다 훌쩍 떠나버렸고 뭐든 괜찮다 말하시는 엄마의 삶을 잠시나마 살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엄마는 이 삶을 잠시 경유해 가시면서 이화를 보살폈다. 이화도 엄마처럼 잠시 경유해 갈 사람이 필요해 에릭은 선택했을 것이다. 사실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잠시 경유하는 경유지에 불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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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 - 교유서가 소설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백건우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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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

백건우 작가의 <검은 고양이>는 유명한 소설 '에드거 엘러 포'의 '검은 고양이'와 동명 소설이다. 참고로 내용은 전혀 관련이 없다. 소설 안에서 작가도 의식했는지 에드거 엘런 포의 검은 고양이를 언급한 부분도 있다.

두 편의 소설 <검은 고양이>와 <쥐의 미로>가 담겨 있다. 고양이와 쥐가 상반되듯 두 이야기는 닮은 듯 전혀 다른 느낌을 풍긴다. 우아하면서도 고풍스럽게 진행되는 <검은 고양이>의 이야기 흐름이 인상깊었다. 또한 쥐에 쫓기듯 긴박하면서도 조이는 듯한 압박감을 지닌 <쥐의 미로>는 소설이 펼친 영상미와 미스터리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검은 고양이

첫번째 소설

그림 속의 고양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습은 조금씩 달라 보였다. 그림 속의 고양이는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언제나 조금씩 달라보였다. 기분이 좋아서 방을 들어설 때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완용 고양이로 앉아 있었고,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서 방에 들어설 때면 섬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p19

주인공이 우연히 구입한 검은 고양이 액자는 뭔가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고양이 액자를 구입한 이후로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이웃들의 말에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액자의 뒷면엔 1941년이 그리고 액자 안쪽에서는 한 주소를 발견한다. 뭔가 궁금증이 샘솟는다. 전라도 광주에 호남서원이 이 고양이 그림과 무슨 관련이 있을지 그 꼬리를 밟아본다.

朝鮮光州府本町1丁目 湖南書院 電話350番

(조선광주부본정1정목 호남서원 전화350번)

주인공은 시간을 내어 전라도 광주를 찾는다. 헌책방에 들러 호남서원에 대해 묻는다. 1945년 광복 이전의 1941년의 독서회와 검은 고양이 액자의 관련성은 알 수 있고, 공산주의자 조직으로 들어갔던 그 한 사람의 행방과 연결된다.

해방 이전 희생된 이들의 이야기는 안타깝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희생임에 분명하다. 그들의 이야기가 좀 더 세세하고 생생하게 후대와 세상에 알려져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은 명백하다.

추리의 형태로 하나씩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나름 흥미로웠다. 검은 고양이 액자에 정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면 조금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또한 뭔가 좀 더 많은 실마리 혹은 구체적 이야기를 얻을 수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좀 더 구체화된 확장된 장편 소설이 나왔으면 하는 기대를 살짝 해 본다.


쥐의 미로

두번째 소설

소설이 참 오묘하고도 섬뜩했다. 악몽, 불면증이 시달리는 한 집안의 가장의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지며 자못 불편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설정이 매우 독특하고도 흥미로웠다. 쥐로 의심되는 소리에 시달린다. 사각사각 소리다. 고층 아파트에 쥐가 있을리 만무하지만 쥐의 존재가 느껴진다.

CCTV속의 사람의 표정을 관찰하고 표정을 기록하는 일을 10년간 해왔다. 어느 미래의 한 시점 혹은 현재 누군가에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미묘한 사람의 표정까지 AI가 인식하지 못하기에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약간의 설득력을 갖춘 설정이다. 아무튼 나쁘지 않은 보수에 누군가를 감시하고 관찰하는 일을 하는데 자신이 누군가를 감시하듯 자신도 누군가의 감시와 관찰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감시하는 CCTV 속 사람들도 자신이 감시받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심지어 화장실의 모습도 보여진다.

손끝이 쥐의 몸에 닿자 소름이 송곳처럼 돋았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하지만 나는 웃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공포의 웃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제 잠시 후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나는 손으로 쥐를 움켜쥔 다음, 서서히 입으로 가져갔다. 쥐는 저항하지 않았고, 입에서 목구멍까지 한 번에 통과했다.

p66

자신이 감시 일을 하는 와중에 남자와 만나는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세상은 무너진다. 꿈 속의 정체를 알 수 없던 쥐의 존재가 자신의 눈 앞에 쏟아져 나온다. 화면 속에서도 상사의 손에서도 심지어 자신의 아내가 자신에게 싸준 도시락 안에서도 쥐가 튀어 나온다. 그 쥐를 삼키고 자신은 자신의 눈을 포기한다.

짧지만 강렬한 소설이 가진 화면이 매우 선명하게 다가온다. 괜히 몸이 근질거리는 듯하다.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할 수 있겠으나 소설이 가진 느낌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주인공의 모습에 나를 투영해 소설을 읽다보니 쳇바퀴 도는 듯 일 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과도 닮아 있어 괜히 측은하고 보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신 착란으로 스스로 매몰되는 주인공이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은 미로의 막다른 곳에 다다른 쥐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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