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2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카잔차키스의 글 솜씨에 빠졌다면 <수난>을 읽으며 그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인간의 본성과 열정에 대한 생각, 그리고 신을 향한 인간의 고뇌와 어리석음. 그의 이야기에 빠져 흥분하고 분노하며 책을 읽었다. 달콤한 초콜렛의 맛을 맘껏 느껴보고 싶어 입에 넣어 녹여먹지 못하고 우걱우걱 씹어 먹든 이 책도 그렇게 읽어 내려간 것 같다.

그리스의 작은 도시 리코브리시에서는 성지 주일에 맞춰 그리스도 고난을 생각하며 공연을 준비한다. 예수와 12제자의 행보를 그린 공연의 주인공을 선정하기 위해 마을 유지들이 모이고 그리고리스 사제의 주도하에 주인공이 선정되고 공포가 된다.
막달라 마리아 역에 과부 카테리나, 예수 그리스도 역에 양치기 소년 마놀리오스, 야고보 역에 카페를 운영하는 코스탄디스, 베드로 역에 행상인 야나코스, 요한 역에 집정관의 아들 미켈리스, 유다 역에 석고먹쇠 파나요타로스로 정해지고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각자의 역에 맞는 삶을 살아가도록 그리고리스 사제의 당부가 이어진다. 그러나 석고먹쇠 파나요타로스는 자신이 맡은 역이 맘에 들지 않는다. 자신이 유다가 된다는 것이 그는 못마땅하다.
어느 날 터키인들을 피해 도망친 피난민들이 리코브리시에 와서 도움을 청한다. 성 게오르기우스 마을의 포티스 사제의 지휘하에 도망친 피난민들은 부유한 리코브리시에서 정착하기를 원하지만 그리고리스 사제의 계략에 마을 주민들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갈 곳 없고 배고픈 이들을 위해 마놀리오스, 코스탄디스, 야나코스, 미켈리스는 먹을 것을 걷어 그들에게 양식도 주고 쉴만한 곳을 안내한다. 그러나 이들의 선행은 리코브리시 사람들의 눈에 그리 좋게 보여지지 않는가 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마놀리오스는 자신이 가야할 길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계속적으로 피난민을 도와 줄 방법을 간구하게 된다. 그러던 중 터키 제국의 총독 아가의 애첩 유수파키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분노한 아가는 리코브리시의 유지와 사제를 가두고 범인 색출 작업에 나선다. 만일 범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옥에 갖힌 유지와 사제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 전부가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에서 마놀리오스는 자신의 희생으로 마을을 살리고자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며 나선다. 그러나 범인은 아가의 수행원 후세인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리고리스 사제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마놀리오스의 희생정신에 사람들은 감복해한다.
이런 마놀리오스의 행동이 사제와 마을 유지들에게 좋을 수는 없는 일. 그들은 마놀리오스를 처단할 방법을 간구하게 되고,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마놀리오스의 처형을 합법화하기에 이른다. 기독교인에 의한 기독교인의 탄합. 이것을 지켜보는 터키인 아가의 모습과 성경의 로마 총독 빌라도의 모습이 교차된다. 그리고 마놀리오스을 건네 달라던 리코브리시의 사람들의 요구에 그를 넘겨주는 아가. 그리고 마놀리오스의 죽음.

“문을 열어라. 그리고 얼른 교회 바닥을 씻어내. 오늘 밤 자정에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
전례부 직원에게 그리고리스 사제는 위와 같은 말을 남기고 교회를 나선다. 그리고, 성 게오르기우스 피난민들은 마놀리오스의 시체를 묻어주고 떠난다.

“헛되군요, 나의 예수님. 2천 년이 지났는데도 인간들은 여전히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언제쯤이면 당신은 다시 태어나 이번만큼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우리 가운데 영원히 사실 겁니까?”
소설의 마지막 포티스 사제가 마놀리오스 죽음을 탄식하며 말한 것처럼 우리의 예수그리스도는 또 다른 시대에 다른 형태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히어 죽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수난>은 그리스의 한 마을에 나타난 또 다른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그린 작품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같은 그리스 민족이고 기독교인인 두 마을 사람들이 벌인 유혈사태와 그로 인해 희생된 한 소년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 이념과 사상이 다르다고 외면하고 핍박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듯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의 생명쯤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회의 모습은 2000년 전부터 계속 되어온 인간의 본성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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