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그것들이 자신과는 영원히 무관한 얘기라는 걸 막연히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일은 신 바깥의 일이었다. 이불로 덮으면 신조차도 볼 수 없었다. - P137

쓰치는 또래 남학생들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마다 과거의 일기가 자기 피부 밑에서 스멀스멀 스며 올라와 문신처럼 살갗에 새겨지고 지도 같은 흉터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 남학생이 선생님의 말을 훔치고, 선생님을 모방하고 습작하고 선생님의 뒤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쓰치는 선생님의 등 뒤에 퇴화를 거부한 꼬리처럼 매달려 있는 욕망을 보았다. 그건 사랑이 아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랑은 알지 못했다. - P138

그의 말에는 마침표가 많았다. 자기 말이 옳다는 뜻이었다. 선생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마침표는 그녀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우물이었다. - P142

그녀는 신이 고통이라는 이름의 칼로 이미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이성을 잘게 잘라 아무렇지 않게 입에 넣고 씹어 삼키는 걸 보았다. 신의 입가에서 피처럼 과즙이 흘렀다. - P159

이 세상을 암흑으로 만든 건 바로 선생님이었다. 그녀의 몸에 난 상처가 험난한 골짜기처럼 그녀와 세상 사람들의 사이를 벌려놓았다. 그녀는 방금 전 길가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살하려고 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 P162

이원의 미소가 한없이 순수했다. 그건 인간 세상의 통계학에서 태생적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미소이자 한 번도 상처 받은 적 없는 사람의 미소였다. - P178

"가장 사악한 건 아무것도 모른 채 스스로 추락하는 걸 내버려두는 걸 거예요."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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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함이란 이처럼 평범한 것이고, 평범함이란 이처럼 쉬운 것이다. - P94

 그가 그녀에게 무엇을 주는 건 다시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가져가는 건 격정적으로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 P103

"우리 둘 다 미안하다고 하지 말자.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야." - P109

그 후 20여 년 동안 리궈화는 자신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여학생들이 세상에 널렸다는 걸 알았다.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분위기가 그에게는 최고의 방패였다. 여학생을 강간해도 세상은 그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죄책감은 아주 오래된 순수 혈통의 양치기 개였다. 어린 학생들은 온전히 걷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일어나 뛸 것을 강요당하는 어린 양이었다. 그럼 그는 무엇일까? 그는 그 어린 양들이 제일 좋아하고, 또 그 어린 양들을 제일 좋아하는 절벽이었다. - P123

쓰치가 식어버린 음식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팅, 난 이미 오래 전부터 나 자신이 아니야. 그건 나 자신을 향한 향수야."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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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 - 5인의 기록으로 재구성한 있는 그대로의 대한제국사
김태웅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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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는 독립협회의 위세가 커져 각 부(府)와 군의 수령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수탈을 감히 저지를 수 없어지자, 수령 모두가 독립협회를 마치 원수처럼 바라보았다고 자평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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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식이 한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정의하는 건 여자의 외적, 내적 아름다움이 결혼과 함께 내리막길을 걷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는 나중에야 알았다.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자신의 성적 매력을 자발적으로 판도라의 상자에 넣어 봉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 P56

 한 남자를 향한 최고의 존경은 그를 위해 자살하는 것이다. 그를 위한자살인지, 그로 인한 자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P72

리궈화를 결심하게 만든 건 팡쓰치의 자존심이었다. 이렇게 정교하게 다듬어진 아이는 절대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을것이다. 너무 더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종종 남과 자신을 찌르는 바늘이 된다. 그녀의 자존심은 그녀의 입을 꿰매는 바늘이 되었다. - P74

 똑똑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리면 남들보다 더 흐리멍덩해지곤 한다. - P81

 처음에는 다른 남자들이 그러듯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맴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메뉴판이 없는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판을 보고 싶어하는 프티브루주아처럼 군침을 흘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이상했다. 리궈화의 눈빛은 단순한 탐닉이 아니라 관찰하고 연구하는 눈빛이었다. 이원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리궈화가 그녀의 얼굴에서 쓰치가 장차 짓게 될 표정을 찾아내 미리 감상하려 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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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 - 5인의 기록으로 재구성한 있는 그대로의 대한제국사
김태웅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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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독립협회 일부 인사들이 주도한 민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다. 훗날 이 모임을 ‘만민공동회‘라 불렀다. 그 배후에는 이완용과 서재필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완용은 친러파 이전에 친미파였던 것이다. 당시 윤치호는 대중들이 규율이 없어 과격해질까 봐우려했다. 이에 서재필은 조선인들은 권위에 대항하여 나설 용기가 없다고 대답했다. - P198

윤치호가 보기에 서재필은 "약삭빠르고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의사는 매달 그렇게 큰 액수의 돈을 벌지 못했다. 당시 윤치호는 일기에서 서재필은 그 돈이 자신이 그렇게 소리 높여 동정을 드러냈던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의 주머니나 피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고 기술했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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