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계획 경제에 의해 돌아가면서 농민들은 수확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 1953년 농민들은 잉여 곡물을 전부 국가가 정한 가격에 국가에 팔아야 한다며 법령으로 곡물에 대한 독점이 도입되었다. 독점의 목적은 중국 전역에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고, 투기를 없애고, 도시 인구를 먹여 살리고 산업 성장을 촉진할 곡물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 간신히 생계를 이어갈까 말까 한 나라에서 <잉여 곡물>이란 무엇일까? - P199

달리 말해 잉여라는 개념은 농촌에서 곡물 징발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한 정치적 구성물이었다. 농촌 주민들이 자신의 최저생활에 필요를 충족시키기 전에 곡물을 팔게 강제함으로써 국가는 또한 그들을 공사에 더 의존하게 만들었다. 기본 배급량 이상의 추가적 곡물은 주민들이 노동 점수를 가지고 국가한테서 되사야 했고, 노동 점수는 집단 노동에서 성과를 바탕으로 배분되었다.(중략) 시장이 제거되고 돈이 구매력을 잃으면서 곡물이 교환 화폐가 되었고 그 대부분은 국가의 수중에 있었다. - P200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곡물 생산량 달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압력은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절정에 달했다. 경쟁적으로 더 높은 목표량을 약속하는 광풍 속에서 마을 단위부터 성에 이르기까지 당 관리들은 서로를 능가하고자 갖은 애를 썼고 선전 기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록을 발표하면서 더 조심스러운 간부들까지 숫자를 부풀렸다. 1959년 초에 당이 일부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억제하려고 한 뒤에도 생산량에서 상당한 약진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은 <우경 보수주의>로 해석되었고 루산 총회 이후 숙청 기간 동안에는 특히 심했다. - P201

마오쩌둥, 류사오치, 덩샤오핑과 여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겹겹이 왜곡된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고 그들의 해법은 농촌 현장 시찰을 통해 현장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 P203

정발된 곡물의 일부는 농민들에게 되팔렸지만-할증금이 붙어서-긴 대기 목록의 맨 끝에 있었다. 10장과 15장에서 본 대로 당은 농촌의 필요를 무시하는 일단의 정치적 우선순위를 발전시켰다. 지도부는 외국과의 계약 사항을 준수하고 국제적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곡물 수출을 늘리기로 결정했고 1960년에는 <수출 제일> 정책이 채택될 정도였다.
우방국들에 대한 해외 원조를 늘리기로 해서 알바니아 같은 나라들에게 무상으로 곡물을 보냈다. 우선순위는 또한 베이징, 톈진, 상하이 같은 인구 성장 도시들과 랴오닝 성-중공업의 심장부-에 주어졌고일반적인 도시 주민들의 필요가 그 뒤를 이었다. - P207

 마오쩌둥은 그 생각을 다른 식으로 표현했다. <먹을 게 충분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굶어죽는다. 인민의 절반을 죽게 내버려 두어 나머지 절반이 그들 몫을 먹을 수 있게 하는 게 낫다.> - P209

계획 경제에서 또 다른 문제는 현장의 관리들이 자신들이 무슨 일을하고 있는지 언제나 잘 알고 있지는 않고 따라서 나중에 가서 참사로 드러나게 되는 결정들을 강제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대약진 운동 절정기에 배게 심기와 깊이 갈기 농법이 정권에 의해 어떻게 강요되었는지를 살펴봤다. 이것은 농사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현지 간부들의 변덕스러운 개입으로 더 악화되었다. - P210

운송 체계는 대약진 운동 정책들의 영향으로 처참한 상태가 되었다. 철도 체계는 대약진 운동 계획들이 중국의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으로 보내도록 지시한 막대한 화물 물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1959년 초에 마비되었다. 대형 트럭들은 연료가 급속히 바닥났다. 나라 전역에서 곡물이 철도 측선에서 썩어 가고 있었다. - P213

대중은 입을 옷이 별로 없게 되었다. 곡물이 수출 시장을 국내 수요보다 중시하는 정치적 우선순위에 따라 분배된 것처럼 높은 비율의 면화가 직물 산업에 공급되어 국제 시장에서 팔려 나갔다. 남은 분량은 잘 확립된 순서에 따라 아주 조금씩 배급되고 분배되었다. 이 위계질서에서는 당과 군대가 맨 꼭대기를 차지했고 그다음 도시 주민이 뒤따랐으며, 이러한 범주들 각각은 내부적으로 더 미세 조정되어 정교한 위계서열을 이루었지만 모두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면화 생산자, 즉 농촌의 인민은 일반적으로 이 순서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 P216

쟁기, 써레, 낫, 괭이, 삽, 들통, 바구니, 거적, 손수레, 온갖 도구들이 집산화되었지만 과연 어떤 집단이 실제로 그것들을 소유했을까? 생산대와 생산 대대, 인민공사 사이에 상호 비난과 제멋대로 회수가 난무하며 주도권 다툼이 시작되지만 그 결과 결국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일부 주민들은 하루가 끝나면 쟁기와 써레를 그냥 밭 옆에 내버려 두었다. 과거에 좋은 농기구는 10년씩 쓸 수 있었지만-일부 쟁기들은 세심하게 수선하면 60년을 버티기도 했다-이제는 1. 2년 이상을 가지 않았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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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아름답고 따스한 이유는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의 힘 때문이다. 소극적인 죽음은 늑대보다 무섭고 쥐 떼보다 무섭다. 하지만 결국 그런 죽음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긴 것은 죽음의 적극적인 수용이다.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가 자신들보다 더 무력한 옥수수 한 그루를 살리기 위해 취한 모든 행동의 이면에는 또 다른 생명을 위한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이 일관되어 있다.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겨낸 것이라 할 수있다. - P183

소설은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하룻저녁에 다 읽어서는 안 되는 열독물이다. 작품에 담긴 서사와 수사, 리듬, 다양한 배경지식을 함께 호흡하고 흡수하며 천천히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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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대한 문학은 반드시 한 사람의 생명의 역참에 놓인 책상이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 P7

그 순간 그는 온몸을 떨면서 마을을 통틀어, 산맥 전체를 통틀어 일흔두 살 노인 하나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은 한없이 공허해졌다. 죽음 같은 적막과 황량함이 깊은 가을처럼 그의 온몸 위로 내려앉았다. - P21

어망을 거둘 때 나는 청백색 물방울 튀는 소리가 났다. 셴 할아버지는 이 소리가 물소리도 아니고 나무 소리도 아니고 수풀 속의 벌레 소리도 아니라는것을 잘 알았다. 이는 광활하고 허무한 밤이 극도의 정적 속에서 응집해내는 적막의 소리였다. - P34

눈먼 개가 할아버지가 가는 방향으로 멍한 눈길을 던졌다. 낙담에 젖어 칠흑 같은 눈빛 속에 진한 눈물 냄새가 처연하게 고여 있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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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딱 2010년대 초반에 중국에서 그랬는데... 타오바오에서 옷 파는 샵 들어가보면 죄다 상품명에‘한국식‘이라고 붙여놨던 시절...ㅎ

요즘 일본의 SNS에서한국풍)는 최고로 인기 있는 해시태그이다. 실제로는 한국이나 한국 문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가장 ‘핫‘하다는 장소, 요리, 패션 등에 관한 정보에 어김없이 이 해시태그가 붙는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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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을 넘나드는 한일 언론의 ‘캐치볼‘이 몇 차례 반복되더니 급기야는 일본 신문들이 "국내의 혐한 분위기를 우려한다"라는 사설을 게재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사이엔가 혐한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일 양국의 언론은 우려의 뉘앙스로 언급함으로써 혐오의 정서가 잦아들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극우 세력에 이 상황은 오히려 세를 불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혐한을 거론할수록 사회적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혐한은 극우 세력의 단골 구호가 되었고, 이제는 그 세력이 구심이 되어 혐오 발언이나 반인권적 행동을 해나가고 있다. - P273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천황‘이야말로 신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은 나라의 주인이며, 그를 위해 적과 싸우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라고 선전해 왔다. 항복을 선언하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일본 대중들은 그 역시 자신과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다고 한다. 불과 70여 년 전에 일어났다고 믿기 어려운 기이한 이야기지만,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은 이성보다 광기에 가까운 법이다.
항복이 선언된 이날을 ‘패전일‘이 아니라 ‘종전일‘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침략 전쟁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특히 과거사에 대한 관점이 현저하게 우경화되는 상황에서 ‘종전일‘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우려스럽다. - P303

일제가 전쟁을 자행하던 당시 일본 사회는 전근대적인 군주제에 머물러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첫발도 내딛지 못한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학기술과 군수산업만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즉, 일제의 침략 전쟁은 어떤 정당성도 부여되지 않은 무법적 만행이었다. 시민이 참여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체제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전쟁의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규명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정권이 가해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본의 민중도 폭주하는 권력으로 인한 피해자라는 정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 P304

일제의 무법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의 시민이 명명백백한 전쟁의 주체라고 단언하기에 애매하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민사회가 이 문제를 방관해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전쟁은 과거의 일이지만, 그 전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패전이든 ‘종전‘이든 혹은 ‘해방‘이 되든, 과거 침략 전쟁의 과오를 직시하고 대내외적으로 성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전쟁이 끝난 지 75년이 되도록 일본 시민사회가 풀지 못한 숙제가아니겠는가.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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