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제로 코로나‘ 정책이 14억 인구의 중국에서 전면적으로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국가 감시 체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이 체계는 과거 수십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현대 기술 통제 프로젝트를 포함하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대하고 노동 집약적인 스파이 네트워크가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 P44

현재 중국의 정권은 겉보기에는 1959년 당시 정권과 아주 다르지만, 실제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무한 권력의 정부이고 사회는 이에 어떠한 제약도 가할 수 없습니다. 제약을 가할 유일한 방법은 정권 내부의 권력 분배뿐입니다.
(중략) 최고 결정권자가 다른 의견을 들어줄 수 있다면 그래도 그 정권은 어느 정도 교정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 할 수있죠. 그러나 만약 최고 결정권자가 이견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강력한 대응을 동원해 한술 더 뜨는 방식으로 받아칠 겁니다. - P46

제가 따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중국의 정치 체제에서는 상부에서 좋은 정책을 내려보내면, 밑으로 갈수록 제대로 이행되지 않습니다. 왜냐? 이해관계자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죠. 위에서 내린 좋은정책이 밑에서는 5퍼센트만 실행되어도 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체제에는 몹시 나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만일 상부에서 나쁜 일을 저지르면, 밑으로 갈수록 폐단이 확대됩니다. 예를 들어 상부에서 어떤 안 좋은 정책을 내리려는데 이게 하부 관리에게도 유리하다면, 그는 차라리 좌로 갈지언정 우로는 가지 않죠(영좌물우). 즉 나쁜 일을 더 확대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고위층의 정책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이 밑으로 내려왔을 때는 최악의 정책이 되어버립니다. - P47

중국에서는 관리들이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건 괜찮아요. 나쁜 일을 저질러도 피해자가 일반 국민이라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부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 벌어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이 체제는 매우 도구화되어 있어서, 당신이 어떤 일을 처리하더라도 상부와 대가를 논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라는 말이 중국 관료들 사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그럼 그 말의 함의는 뭘까요? 이건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를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관리 자신더러 대가를 치르라고 한다면, 그는 아예 일을 안 할 테고요. 따라서 이런 ‘작악수권‘의 체제가 갖춰지면, 일반 국민만 괴롭습니다. - P48

수많은 나쁜 점이 증폭되어 나쁜 제도가 됩니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첫째, 좋은 일을 할 수 없어요. 둘째, 나쁜 일을 해도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는 ‘악의 평범성‘이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이 되게 합니다. - P49

이번 ‘제로 코로나‘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째, ‘제로 코로나‘는 일종의 대중운동으로, 동원된 인력 자원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기술에만 의지해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죠. 둘째, 가장 효과적인 감시 체제를 위해 촘촘한 조직 시스템에 첨단 과학기술을 더한 것이죠.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됩니다. - P51

 저는 현재 중국의 감시 시스템이 세계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가장 선진적이고 어떤 나라도 뛰어넘을 수 없는 경지에 달했다고 생각해요. - P52

수십 년 동안 중국공산당과 인민이 맺은 사회 계약은 경제 발전을 이룸으로써 정권의 합법성을 획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공산당이 나나 내 아이를 편히 살게 해주면, 개인의 권리를 탄압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고, 우리는 그저 조용히 돈이나 벌면서 살겠다는 거죠. 그런데 이번 ‘제로 코로나‘로 경제가 엄청난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까. - P52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의 사회 계약에는 경제적인 면 외에 다른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바로 정치적 권리는 원하지 않을지언정, 어느 정도 개인의 자유는 있어야 한다는 거죠. 내가 무엇을하든, 어떤 옷을 입든, 어디를 가든, 정치와 무관한 일을 할 때는 당이 관여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번 ‘제로 코로나‘는 순식간에 수많은 인민이 이제까지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던 개인의 자유마저 빼앗겼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했습니다. 중국이 민주국가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개인의자유만 주어진다면 민주국가인지 여부는 상관없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없다면 개인의 자유도 없고 그 무엇도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에 여실히 느꼈죠. 이러한 측면에서 말한다면, 아마 ‘제로 코로나가 공산당의 위신에 끼친 부정적인 충격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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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중국이 당내 민주화를 시작으로 장기간의 노력을 거쳐 마지막에는 입헌 민주주의 체제로 가길 바랐다. 하지만 최근에 그는 중국공산당이 반대 방향으로 가고있다는 것을 깨닫고 여러 차례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개인적으로 질의도 하고 공개적으로 이의도 제기하다가 정부의 훈계 처분을 받고 검열 대상이 됐다. - P22

차이샤는 다음의 질문에 답하려 한다.
시진핑은 어떻게 이토록 순조롭게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나? 중국공산당 체제와 시진핑 개인의 정치 수완에는 어떤 관계가 있나? 앞으로 시진핑의 권력을 제약할 요소들이 있을까? - P23

집중제는 고도의 의견 일치와 정해진 바대로 따르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때 따라야 하는 것은 지도자의 말이고요. 이 때문에 당 안에서의 ‘민주집중제‘는 반드시 지도자 일인 독재로가게 되어 있습니다. - P26

당의 지도자를 강조하는 것은 당이 국가보다 높다는 것이고, 일당독재는 국가권력을 이용해서 사회의 모든 반대 세력을 진압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당의 최고 지도자면서 국가권력을 가질 때, 그는 국가권력을 사회의 반대 세력을 진압하는 데 사용할뿐 아니라 당내의 반대 의견을 금지하고 억압하는 데 사용할 겁니다. 시진핑이 어떻게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을까요? 이렇게 된 데에는 그가 국가권력을 사용해서 모든 당원, 간부, 그들의 가족을 상대로 일종의 숙청을 감행한 것이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 P26

마오쩌둥이 집권한 시기, 그러니까 소위 신중국을 세운 후 그는 개인숭배를 통해 사실상 한 개인의 독재 권력을 만들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공산당에 특별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바로 개인권력을 제약하지 못한다면, 덩샤오핑이 말했듯이, 마오쩌둥 같은 위대한 지도자도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덩샤오핑 자신이 정치 일선으로 복귀했을 때도 개인의 권력 집중을 방지하는 데에 상당히 신경을 썼습니다. 그는 더는 누구도 일인 독재를 할 수없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오쩌둥에게서 교훈을 얻었다고 할 수 있죠. - P27

시진핑은 집권하자마자 매우 명확하게 태도를 바꿉니다. 태도를 바꿀 때 그가 내세운 논거는 이랬습니다. 후진타오 시기의 ‘구룡치수‘와 ‘정령불출중남해‘ 때문에 기득권 세력 및 부정부패 세력이 커졌고, 바로 이러한 권력 분산이 당 중앙을 연약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체제를 강화했어요. 그가 집권하고 나서 자기한테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찾아낸 나름 정당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근본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왜냐고요? 그가 운운한 권력 분산은 거짓 명제니까요. 민주 정치를 한다면 반드시 권력을 나누고 상호 제어해야 합니다.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켜 독재하도록 두면 안 됩니다. - P29

분권과 상호 제어가 가능한 민주국가의 권력 분산은 법치의 궤도에 따라 운행됩니다. 권력은 오직 이 궤도를 따라서만 운행되고, 궤도를 벗어나면 사람들은 책임을 묻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내 관할 구역 안에 있기만 하면, 그 권력을 어떻게 쓰든 내 마음인 거예요. - P30

겉으로는 권력 분산과 권력 나눠먹기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게 보면 이 둘은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해결해야 할 것은 권력 분산의 문제가 아니고 권력 나눠먹기의 문제입니다. 권력나눠먹기를 해결하는 방법은 권력을 한 사람의 손에 모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고, 분권과 상호 제어를 확립하고 권력이 법치의 테두리에서 작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중국공산당 내부의 여러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어요. - P31

시진핑의 부패 척결은 이를 구실로 공산당 전체에 본때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패 척결을 시작점으로 삼고 권력을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낙마한 사람 중 일부는 정말로 부패 세력이었지만, 일부는 그와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P32

부패 척결을 통해 시진핑은 당내에 위신을 세웠을뿐더러 당심과 민심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알아버리죠. 그의 부패 척결은 선택적이었고, 사실은 날강도 같은 수단으로당 전체를 장악했다는 것을요. 모두 깜짝 놀랐죠. - P33

그가 권력을 장악한 후 공산당 전체가 입을 닫았고 아무도 목소리 내지 않았어요. 그는 당내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고, 그런 그가 첫 번째로 한 것이 바로 2018년의 헌법 개정입니다. 당시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감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시진핑이 조폭 두목이고, 중국공산당은 이미 정치 좀비가 되었다고 말했죠. - P39

 과거 시진핑이나 중국공산당은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고 중국에 전 세계 공급망이 자리하고 있으니 세계가 중국을 떠날 수 없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지금은 거대 자본이나 외국 기업이 중국에서 철수하거나 다른 나라로 이전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세계를 떠날 수 없지만, 세계는 중국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됐죠.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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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 우리 군대에는 월급이나 휴일, 하루 여덟 시간 근무 따위는 없었다. 일반 사병으로 우리는 모두 똑같았다. 진짜 공산주의 정신은 거대한 인민 군대를 일으킬 때 찾아온다. (......) 우리는 군사 전통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 - P99

생산대 대장이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가운데 노동력은 흔히 적절한 보상 없이 인민공사에 의해 전유되었다. 마청의 장셴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한테는 공사가 있으니까 요강을 빼면 모든 것이, 심지어 인간도 집산화된다." 이것은 가난한 농민 린치에게 <간부가 시키는 것은 뭐든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 결과 임금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 P100

가장 급진적인 인민공사에서는 개인 소유의 밭, 무거운 연장, 가축을 모두 공사에 넘겨야 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극히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었다. <똥도 집산화되어야 한다!>는 쓰촨성 성장 리징취안의 말 그대로였다. 이에 맞서 주민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최대한 건지고자 애썼다. 가축을 도살하고 곡물을 감추고 자산을 팔았다.(중략) 광둥에서는 <내가 먹는 것은 내 것이고 내가 먹지 않는 것은 누구 것이든 될 수 있다>라는 말이 흔했다. - P102

한때는 구두쇠였던 이들은 저축액이 몰수될 것을 걱정해 갑자기 과시적 소비에 빠져들었다. 평범한 노동자는 값비싼 브랜드의 담배와 여타 사치품을 구입했다. 일부는 심지어 호화로운 연회에 돈을 펑펑 썼다. 풍문들이 집단적 공포에 불을 지폈다. 일부 마을들에서는 한 사람 앞에 담요 한 장 빼고 모든 게 공동 소유가 되었다는 말이 돌았다. - P103

쓰촨 성 단장 현에서는 열한 명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수백 채의 초가집에 불을 질렀다. <하루 저녁에 초가집을 없애고 사흘 안에 거주지를 짓고, 100일 만에 공산주의를 건설하자>가 대표 구호였다. - P104

새로운 시설들이 마을에서 가져온 식량과 가구, 자금으로 세워진 것이기에 일단 공동 식당에 자리를 잡자 주민들은 작정하고 진탕 먹어 대고 더 열심히 물자를 써댔다. - P105

스탈린은 살인적인 물자 징발로 농촌의 모든 부(富)를 빨아먹는 식으로 농업을 희생시켜 공업 자본을 확충했다. 마오쩌둥은 소련 모델의 대안으로서 그 반대로 공업을 농촌으로 가져오고자 했다. - P107

 부르주아 전문가들은 보수 우파라고 비판을 받은 대신 순박한 농민들의 세속적 지혜는 높이 추켜세워졌다.(중략) 외국의 전문 기술보다는 직관적 지식과 토착적 창의성이 중국의 농촌 마을들에 소련을 뛰어넘게 할 저렴하고 효과적인 혁신을 도입하리라. - P107

진짜 기준점은 강철이었다. 여기 사회주의를 대표할 만한 자재가 있었다. 단단하고 번쩍거리며, 산업적이고, 현대적이고, 노동자 계급적인 자재가. - P108

 강철은 사회주의연금술에서 성스러운 요소였다. 철강 생산량은 사회주의 나라들이 종교적 열의를 띠며 되뇌는 마법의 숫자였다. 철강 생산량은 인간 행위의 모든 복잡한 차원들을 마법처럼 증류하여 한 나라가 발전의 척도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 보여 주는 단 하나의 정확한 숫자로 환원했다. - P109

목표량을 달성하려는 미친 듯한 시도에 사고도 빈번했다. 마구잡이로 베어진 나무들이 사람들 위로 쓰러졌다. 채굴할 땅굴을뚫기 위해 경험 없는 노동자들이 사용한 폭발물도 인명을 앗아 갔다. - P111

당 활동가 집단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흔히 가재도구나 농기구를 징발해 가는 식으로 고철을 수집했다. 충분한 열성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폭언을 듣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심지어 줄에 묶여사람들 앞에서 조리돌려졌다. - P112

결국 지도부는 그들이 원하는 기록을 얻었다. 비록 그 대부분은 광석을 제련한 후에 남은 찌꺼기거나 불순한 원광, 아니면 그저 통계적 발명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농촌 인민공사에서 나온 괴철은 너무 작거나 잘 부서져서 현대적 압연 공장에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어디에나 쌓여 있었다. 야금부 자체에서 나온 한 보고서에 따르면 많은 지방들에서 토법고로에서 생산된 철 가운데 3분의 1도 사용하지 못했다. - P114

 모범 공사인 롄탄에서는 수천 명의 농민들이 가을 추수기 동안 7헥타르 경지를 깊이 갈기 위해 징발되었다. 작물을 수확할 인력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만 톤의 곡식이 들판에 방치되었다.
그러나 국가에 넘기는 곡물은 현지 간부들이 공식적으로 밝혔던 수확량에 따라 넘겨야 했다. 1958년 실제 곡물 생산량은 2억 톤을 갓 넘겼지만 작황이 풍년이라는 온갖 주장들을 토대로 지도부는 4억 1000만 톤에 가깝다고 추산했다. 순전히 허구적인 숫자를 바탕으로 한 가혹한 곡물 적출은 주민들 사이에 분노와 두려움만 자아낼 뿐이었다. 곡물 징발로 온 나라를 인류 역사상 최악의 기근으로 몰아넣을, 인민을 상대로 한 전쟁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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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가하는 목표치들로 가득한 도표들은 다양한 색깔로 아름답게 도해되어 킬링필드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곡물 생산량과 철강 생산량부터 시골에 판 우물 숫자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목표치가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구호의 세계와 지상의 현실 사이 어두컴컴한 간극이 생겨났다. 이러한 간극을 만들어 낸 압력 뒤에는 마오쩌둥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 P77

결국 삼중이 된 계획은 다음처럼 굴러간다. 중앙에는 반드시 달성해야 할 일단의 목표치들이 있고, 제2차 계획 역시 당연히 달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두 번째 계획이 성으로 전달되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달성해야 할 지방의 첫 번째 목표치가 된다. 각성은 그다음 그들이 예상하는 달성 목표치를 반영한 제2차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구받고 결국에는 다 합쳐서 세 가지 목표치가 나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현까지 전달되어 현 단위에서 사실상 네 번째 생산 계획까지 추가되었다. 전국적 목표치들이 당 모임에서 끊임없이 수정되어 올라가면서 정해진 목표량과 희망 목표량으로 이루어진 시스템 전체가 꼭대기부터 밑바닥 마을 단위까지 광란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목표량에서 대약진을 낳았다.
더욱이 모방과 경쟁의 과정은 정치적 긴장을 더했다. 마오쩌둥은 그들의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소심한 동료들을 폄하했을 뿐 아니라 더 극단적인 동료들을 칭찬했고, 경쟁의식을 높이기 위해서 누구든 또 무엇이든 항상 비교하는 경향이 강했다. - P80

온 나라가 규정량, 할당치, 목표량의 세상이 되었고, 확성기가 구호를 쏟아 내고 간부들이 작업을 체크하고 평가하고, 위원회가 주변 세상을 끝없이 등급을 매기고 평가하는 상황에서 그런 숫자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개인성과 등급은 갈수록 그들이 받는 처우의 종류를 좌우하게 된다. 굶주림의 시기에 공동 식당에서 국자로 퍼주는 죽의 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처우를 말이다. - P81

토양에 양분을 공급하는 주된 방법은 진흙과 볏짚으로 지은 건물을 허무는 것이었다. 외양간처럼 동물이 살았던, 특히 가축이 방뇨를 한 건물의 벽은 유용한 비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낡은 담과 폐가가 헐렸지만 증산 운동이 탄력을 받으면서 줄줄이 늘어선 가옥들 전체가 체계적으로 철거되었다. 흙벽돌이 산산조각 나 들판에 흩뿌려졌다. 후베이 성 다볘 산맥 남쪽에 아늑히 자리 잡은 마청에서는 비료를 모으기 위해 가옥 수천 채가 철거되었다. - P83

1957년 이래로 줄곧 반우파 운동을 목격해 왔기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약삭빠르게도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삼갔다. 이 책을 위해 인터뷰에 응한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말을할 수 없었다. 만일 내가 무슨 말이든 하면 그들은 두들겨 팰 것이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 - P85

방문은 세심하게 연출되었다. 마청에서 주민들은 방문객들 앞에서대약진 운동에 관한 나쁜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중략) 시찰 때 마오쩌둥을 수행한 의사 리즈쑤이는 엄청난 풍년이 들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주석이 시찰하는 경로를 따라 벼를 옮겨 심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이 의사는 "중국 전역이 무대였고, 인민 모두가 마오쩌둥을 위한 초대형 구경거리의 연기자였다"고 지적했다. - P-1

섬을 폭격한 진짜 이유는 국제 관계와 관련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집산화를 독려하기 위해 긴장감을 고조시키길 원했다. <긴장 상황은 인민을, 특히 뒤떨어진 자들, 중도파들을 동원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민공사는 의용군을 조직해야 한다.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이 병사다.> 타이완 해협 위기는 국가 전체의 군사화에 최종적 근거를 제공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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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이라는 표현은 1957년 하반기에 시작된 치수 사업 맥락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15년 안으로 영국을 추월하려고 작정한 마오쩌둥은 자본을 노동으로 대체하는 데서 급속한 공업화에 대한 열쇠를 찾았다. - P67

지도층은 북서부를 특히 강조하기는 했지만 대형 관개 사업은 거대증에 사로잡힌 나라에 여기저기서 등장했다. 비판적 목소리는 드물었다. 마오쩌둥은 지식인을 불신했고 1957년 여름에 백화 운동 기간 동안 비판적 의견을 표명한 수십만 명의 지식인을 탄압했다. - P68

1961년 여름이 되자 공사는 중단되었고 1962년 3월에 프로젝트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관개 토지 총면적은 0헥타르, 국가가 치른 비용은 1억 5000만 위안, 노동 일수는 60만 일, 인민들이 치른 비용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공사 절정기에는 16만 명 정도가 프로젝트에 동원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농사일에서 전용된 주민들이었다. 최소 2,400명이 사망했는데 일부는 사고로 죽었지만 훨씬 많은 수는 갈수록 높아지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예처럼 일하도록 강요한 잔혹한 정권에 의해 죽었다. 간부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주민들을 닦달한 결과 프로젝트의 심장부에 위치한 산악 지대의 궁핍한 퉁웨이 현이란 곳은 중국에서 가장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게 된다. - P70

치수사업에서 목표량은 한 지방이 옮길 수 있는 흙의 톤수로 측정되었다. 그다음 이 마법의 숫자-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의 실제 유용성과는 완전히 무관한-는 경쟁심에서 전국적으로 비교되었고, 한 지방의 정치적 영향력을 좌우했다. - P70

로빈스키는 양민들을 착취했다고 비난받은 황제들도 만리장성과 대운하, 명대 황릉을 건설할 때 유사한 전술을 썼으리라는 것을, 즉 그들도 유사한 전술로 장비라고는 대나무 장대밖에 없는 수만 명의 일꾼들을 고분고분하나 능률적인 노동력으로 혼연일체가 되게 만들었으리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중략)
프로젝트가 서둘러 수행되다 보니 커다란 계산 착오를 낳았고, 1958년 4월 저수지에 누수 현상이 발생했다.(중략) 잘못된 곳에 건설된 탓에 저수지는 몇 년 뒤 물이 말라 버리면서 버려졌다. - P72

우파로 낙인찍힐까 두려운 당 간부들이 주민들을 심하게 몰아붙이면서 중국 전역에서 농민들은 거대한 관개 사업에 끌려 나와 아사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었다.(중략)  관개 사업 계획에서 대중 동원은 줄어들지 않고 수년간 계속되면서 굶주림으로 이미 허약해지고 기력이 쇠진한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크메르 루주 치하 캄보디아의 오싹한 전조처럼 간쑤 성 칭이 현 주민들은 이 공사 프로젝트들을 <킬링필드>라고 불렀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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