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저곳을 전전하다 거지로 전락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여유롭고 부귀하던 시절에 허투루 보낸 수많은 시간이 되돌아와 그의 뺨을 호되게 후려갈기는 듯했다. - P107

그렇게 엉거주춤하게 서 있자니 가느다란 실 같은 난감함이 소리 없이 그의 피부와 머리카락, 손가락에서 가닥가닥 뿜어져 나와 신들의 초상과 함께 온 집안을 휘젓는 것 같았다. - P110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그가 아는 모든 장사꾼은 예술을 하찮게 여겼다. 그들은 현실적인 이익이 없는 엉뚱한 상상력을 무시했고 감정과 연관된 것은 전부 경시했다. 늘 독선적으로 삶의 감성을 말살하면서 입만 열면 돈 이야기뿐이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 P127

여성에겐 남성보다 더 강한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모성애와 자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여성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더 세심하고 복잡한 것인지도 모른다. - P152

그는 만약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각자의 무너진 폐허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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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의 상처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한쪽이 칼로 찌르면 다른 한쪽은 피로써 되갚는 법이니까. - P14

이른 새벽의 해가 머리 높이 걸려 있었는데 마치 술병에 너무 오래 담근 청매실처럼 푸르뎅뎅했다. - P70

어찌나 끔찍한 이야기인지! 순간 공기 중에서 뭔가가 부서지면서 중생들 사이에 반짝이던 자비의 빛이 사라지는 듯했다. 이제 남은 거라곤 들어갈 땐 흰색이던 칼이 나올 땐 살육으로 시뻘게진 것뿐이었다. - P77

지금 샤오줘는 사원이 바깥세상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똑같이 화려하고 똑같이 허무하며 똑같이 잔혹했다. - P82

샤오쥐는 청정심의 느낌을 꽤 오래 경험하지 못했다. 경당에서 공부할 때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 공부가 끝나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타인을 구제한다고? 지금 자기 자신조차 구제하지 못하고 있는데? 예전에 배웠던 것도 전부 무용지물 같았다. 이미 혼란에 빠진 샤오줘는 자기 자신조차 설득하지 못했다. - P82

선조들이 말씀하시길 ‘용서하라. 그리하면 자손들의 복이 늘어날 것이다. 양보하라. 그리하면 좁은 길도 쉽게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말 한마디를 참으라. 그리하면 분란이 일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의 분노를 가라앉히라. 그리하면 건강한 마음을 기를 수 있다‘고 하였다. - P85

소년의 검은 머리가 얼마 나기도 전에 흰머리로 뒤덮이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축하객이 오자마자 조문객이 뒤따르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이를 생각하면 무상할 따름이다. - P85

사실 그에겐 아무 죄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파고들어 결과만 놓고 얘기하자면 피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 이어지므로 무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97

 얽히고 설킨 인연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면 속세의 인연을 벗어날 수 있다. 마음에 아무 근심이 없으면 어디서든 초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자유와 여유를 얻을 수 있다. 떠돌이 수행자들의 전설도 아마 그렇게 탄생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 누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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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 - 5인의 기록으로 재구성한 있는 그대로의 대한제국사
김태웅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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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 동안 한국인 관리들이 올바른 통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도 한국인 관리들이 올바른 통치를 하리란 징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약 한국이 가난하고 지독히 성가신 나라라면, 이 세계는 한국을 내버려 두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과 진보는 한국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운 나라가 언제까지나 잘못된 정부 밑에서 아무 쓸모없이 방치되는 것을 허용할 리도 허용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의 서민들은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더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의 관리들은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더 혐오하게 됩니다. 일본이 여기서 하려는 일을 이 세계는 승인할 것입니다. 황제는 일본의 요구에 반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황제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 P579

오늘 새벽 1시에서 2시쯤 서명을 통해 조용히 한국의 독립은 포기되었다. 모든 일이 꿈처럼 보인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알 수 없었고 그 일이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결론임을 알았다. - P582

대체로 그 조약은 인준해도 망하고 인준하지 않아도 망할 것입니다. 어차피 망할진대 차라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할지언정 단호하게 딱 잘라 거절하여 우리 역대 임금님께서 폐하께 맡기신 중임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 P589

 이들은 일본이 20만 명의 생명과 수억 엔의 돈을 희생시키면서 획득한 것을 소리만 요란한 몇 장의 상소문으로 취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붓의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에 붓이 강철과 화약에 맞먹는다고 믿는 것 같다. 욕조와 칼이 일본 문명의 원천이라면, 붓과 한문은 한국의 정신과 희망의 무덤이다. - P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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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 - 5인의 기록으로 재구성한 있는 그대로의 대한제국사
김태웅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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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이라니요! 한국이 어디서 자신의 독립을 얻었습니까? 한국이 독립을 위해 싸우기라도 했습니까? 한국이 독립을 위해 지불했습니까? 아닙니다. 일본이 독립을 한국에 주었습니다. 만약 한국의 독립이 일본의 안보와 관계없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할 수 있는 방종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면, 한국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네 나라는 지난 10년 동안 독립할 가치가 있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네 나라는 단지 독립을 악용했을 뿐입니다.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일본은 한국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때 일본이 아무런 발언권도 갖지 못한다면, 일본이 어떻게 한국의 독립을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당신의 황실을 믿을 수 없으며 다시 당신의 황실에 기만당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 P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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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 - 5인의 기록으로 재구성한 있는 그대로의 대한제국사
김태웅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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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습 공격과 도발 주체에 대한 기만 선전은, 한국의 식자층이 러일전쟁의 성격이 무엇이고, 진정 동양 평화를 깨는장본인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혼선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보도 통제가 심한 가운데 식자층이 입수할 수 있는 것은 일본 정부가 발표한 자료였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기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저 일본이 제공하거나 공지하는 자료에 입각하여 기술했을 뿐이다. 심지어 대한제국 정부마저 일본 정부의 기만전술에 무기력했다. - P442

일본인은 명목상으로는 구매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의 논밭, 임야,
가옥을 강탈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마치 개처럼 한국인을 차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한다. 한국인에게는 보호해 달라고 호소할 곳이 전혀 없다. 일본인은 한국의 안위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공언하지만, 한국인을 노예로 만들겠다는 의도와 정책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다. - P452

전 세계 열강의 무리에 뛰어든 일본이 ‘국가 사이의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독립국가로서 한국의 목숨은 실낱같이 유지되고 있다. 또 한국의 북부 지방과 서부 지방은 전쟁과 기근으로 완전히 황폐해졌고, 한국의 남부 지방은 억압받는 사람들에 의해 사실상 버려졌다. - P453

무엇보다 슬픈 일은 황제에게서도, 비굴하고 부패한 신하에게서도, 아니면 세 번이나 죽은 대중에게서도 한국의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 P457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당사자 어느 한편의 패배 가능성이 아니라, 어느편이 전쟁에서 승리하든 한국이 부흥할 가능성은 없으리라는 철저한 절망감이다. - P459

일본 정부는 2월 8일 오후에 일본 함대가 기습한 사실을 알면서도, 이날 밤 8시 신문기자들을 불러놓고 동양 평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러시아의 무력 증강으로 교섭 과정이 매우 어렵다고 토로했다.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2월 8일 인천항 중립지대에서 포격한 것이 국제법상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처럼 사실을 은폐한 것이다. - P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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