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일본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수도인 도쿄가 불바다가 되었는데도, 일본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패배가 거듭될수록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자. 정신력으로 위기를 극복하자"라는 프로파간다가 국민들의 더 큰 지지를 받았다. 당시일본 정부가 선전에 능수능란했다고 해도,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맹목적인 지지는 불가사의했다. - P106

일본 사회에서는 집단주의가 내부적인 동기에 의해 구동되는 측면이 있다. 그 문화에서는 집단에 대한 충성심 그 자체가수치스럽지 않은 삶의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즉, 충성심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부끄럼 없이 살고 싶다는 나를 위한 마음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국화와 칼은 일본 문화의 근저를 이루는 정서가 수치심이라고 분석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남 보기에 당당한 삶을 살겠다는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동기야말로 일본의 집단주의를 부양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P108

즉, 혼네는 아무도 모르게 꽁꽁 숨겨두는 속마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들켜야 하는 속마음이다. 달리 표현하면 다테마에는 속마음을 감추는 수단이 아니라, 속마음을 들키기 위한 수단이다.
다테마에로 혼네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다테마에로 혼네를 에둘러 드러낸다는 해석이 더 어울린다. 그런 점에서 다테마에와 혼네의 문화는 속내를 감추는 이중성과는 거리가 멀다. 정반대로 간접적이나마 속내를 분명히 드러내는 능동적인 방법이라고 할 만하다. - P130

공적인 의사 표명의 장에서는 오히려 역작용을 부른다. 우회적인 의사 표명이 적절한 강도의 비판과 다양한 의견 수렴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다테마에의 조화로움을 추구하다 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외면하게 될 뿐 아니라 권력에는 비판을 비껴갈 명분을 줄 수도 있다. 갈등과 불협화음을 피하기 위한 문화적 관행이 정치적으로는 부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P133

분명한 것은, ‘하이테크 사회‘를 자부하는 일본이지만, 아날로그 방식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는 점이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초고령화 사회라는 사실이 그 원인 중 하나이다. 행정이나 금융 등 공공 부문을 포함해 다양한 사회적 서비스의 이용자는 주머니는 넉넉하고 아날로그가 훨씬 편한 노년층이다. 그렇다 보니 젊은이보다는 노년층이 살기 좋은 생활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었다. 디지털화를 서둘러 대다수에게 불편한 세상을 부채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P136

공직자를 뽑는 선거는 일본 사회가 아날로그 원어민의 감성에 얼마나 충실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투표 용지에 후보의 이름을 자필로 쓰는, 반세기 전 방식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후보자 이름의 한자를 잘못 쓴 무효표가 적지 않게 나온다. 디지털 미디어의 자동 변환 기능을 활용한 글쓰기에 익숙한 젊은이에게는 투표용지에 한자로 이름을 쓰는 방식이 어렵고 어색하다. 디지털 원어민에게 더없이 불편한 선거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으니, 젊은층의 투표율이 낮다고 탓할 것만은 아니다. - P139

이런 간사이 사람에게 간토 사람의 차분함은 위선적이고 의뭉스럽게 보인다.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외골수라는 혹평도 따라붙는다. 물론 간토 사람도 간사이 사람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 간토사람이 볼 때 간사이 사람은 풍류를 아는 멋쟁이와는 거리가 멀다. 여과 없이 자기 의견을 들이미는 사귀기 피곤한 부류이다. 서로에 대한 가혹한 평가는 피차 일반인 것이다. - P143

에스컬레이터의 어느 쪽 줄을 비워놓을까 하는 문제는 도시의 역사나 자연환경 등 지역 특성이 영향을 미칠 만한 사안은 아니다. 그보다는 도쿄와는 다른 방식을 고집하는 오사카 사람들의 반골기질에서 굳어진 사회적 관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동일한 한자를 굳이 다르게 읽거나, 혹은 서로 다른 주파수의 전력을 고집하는 일 등도 불편함과 혼란을 감수하더라도 도쿄와는 다른 노선을 고수하겠다는 지역사회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간사이 사람들에게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도쿄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뚜렷한 자부심과 정체성이 있다. ‘우리는 도쿄와는 다르다‘라는 암묵적 정서에 기반해서, 간토와는 다른 생활양식과 습관을 의도적으로 실천해 온 역사가 있는 것이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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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집단주의가 강한 한국 사회에 비해, 일본 사회는 사적인 영역에서는 개인의 선택과 취향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성향이강한 편이다. 개인이 누구에게 성적 호감을 느끼는가 하는 문제는 지극히 사적인 사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공적인 판단을 개입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인권침해라는 생각에 공감하는 일본인이 많다. LGBT와 관련한 사안이 곧잘 동성애에 대한 찬반 논란으로 번지는 한국 사회보다는, 당사자가 감당해야 하는 심리적 장벽이 조금은 낮다. - P66

결혼이나 출산을 ‘안‘ 하겠다는 이들을 문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사적인 결정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아기를 낳고 기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만큼, 오로지 결혼만이 연애의 종착역이 아닌 사회, 출산이 결혼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 P76

관점만 달리하면 젊은이들의 소극적인 소비 성향은 기후변화나 환경 파괴 등 이 시대의 당면 문제를 의식한 적극적인 행동 전략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젊은이들의 절제된 소비 행동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문화적 가치가 싹터 부지런히 자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자면, ‘소비가 미덕‘이라는 생각은 고도성장과 버블 시대를 경험하면서 만들어진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해서 기성세대의 관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험 속에서 고착화된 관념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가리는 장애물이 된다. 구시대의 고정관념을 걷어내지 않으면, 젊은이들의 새로운 소비 취향과 전략을 제대로 파악하고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다. - P83

일본은 고령 인구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다. 그렇다 보니 고령화가 진행 중인 다른 나라는 겪지 않은 사회문제가 앞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8050 문제‘ 역시 사회 부적응자의 고령화가 앞으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고령화가 진행되는 속도는 일본보다 더 빠르다고 한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10여 년 뒤에는 일본보다도 고령 인구 비율이 높아진다니, 그때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상천외한 사회문제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앞서는 것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 P90

‘로봇은 친구‘라는 일본의 낙관적인 ‘로봇‘을 서양 사회는 이질적으로 받아들인다. 서양적 사고방식에서는 로봇이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거나, 인간을 구원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는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이 있다 보니,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에 대한 저항이 크다. 로봇에 대한 이미지는 친근함보다는 공포에 가깝다. 실제로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많은 SF 영화에서 로봇은 높은 확률로 위험한 존재로 묘사된다. - P96

일본 사회는 한 번의 ‘사라진 올림픽‘, 한 번의 ‘성공한 올림픽‘을 경험했고, 2021년 또 한 번의 ‘실패한 올림픽‘을 경험했다.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성찰할 것인가? 일본 사회의 큰 숙제이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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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태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지나친 애국주의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 자기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우선시하다가 다른 나라나 타 문화에 대한 혐오나 공격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탈바꿈하는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중략)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사회도 애국주의의 부작용을 단단히 경험했다. "전쟁에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심"이라는 프로파간다가 대대적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국민으로서 자격이 없다"라는 비난을 견뎌야 했다. - P23

정치적 우경화는 아니지만, 사회적·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인 권위와 질서를 중시하는 이런 상황을 ‘이데올로기 없는보수화‘라고도 한다. - P26

‘이데올로기 없는 보수화‘는 젊은 세대가 우경화하는 징조라기보다는,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기성세대의 정치적 감각이 젊은이들에게는 아무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한일을 막론하고 기성세대들이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는 지점이다. - P27

패전 이후 줄곧, 일본 사회는 ‘어떻게 다시 국제 무대에 자리매김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주요 어젠다로 삼아 왔다. 정부의 정책과제도, 시민사회의 비판 의식도 외교나 국제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중략)
그 결과, 일본 사회 내부의 모순과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방치되어 왔다. 복잡한 사회문제를 단순한 경제적 과제로 치환하거나 외교적 문제인 양 해결하려는 사고방식도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 도쿄 올림픽을 유치하자는 식의 무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관심이 들끓는 ‘미투 운동‘이나 디지털 정부 등의 움직임에 대해 일본 시민사회의 대응이 둔감하고, 심지어는 전근대적인 모습을 ‘일본 고유의 문화‘라고 옹호하는 의아한 태도도 이런 경위와 관련이 있을것이다. - P34

무엇보다 가업을 계승하듯이 정치권력을 세습하는 것은 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의 본분과는 거리가 멀다. 국회의원의 세습 관행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이 관행이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일본의 현역 국회의원 중 무려 3분의 1이 부모를 잘 ‘뽑은‘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세습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 P38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일단 사회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는데, 일본의 기성세대는 사회적 모순을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젊은이들이 입시나 취업 등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고 하면, 이를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하는 사안으로 보기보다는, 젊은이들이 노력해서 극복해야 하는 개인적 고민으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 P40

 벡은 말한다. 누구도 안전할 수 없는 시대에는 ‘불안‘이야말로 사람들의 연대를 이끌어 내는 힘이라고.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후쿠시마의 교훈은 결코 작지 않다. - P48

일본에서는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성역할을 남녀 간 신체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경력단절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한국에서는 성차별적이라고 성토할 만한 상황이지만 일본에서는 당사자조차도 어쩔 수 없는 남녀의 차이라고 온건하게 정당화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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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로니컬하게도 두 나라 사이가 나쁘면 정보에 대한 수요가 폭발한다. 한국의 정치인에 대한 낮뜨거운 스캔들이 일본의 웹사이트에 속보로 올라오고, 일본 기업이 뇌물을 주었다는 특종이 한국의 포털사이트에 실시간으로 등장한다. - P10

 다른 문화에 대한 탐구는 작은 곤충을 관찰하는 듯한 인내심과 섬세함을 요구하지만, 자기 문화에 대한 성찰에는 미지의 우주로 떠나는 듯한 겸손함과 대담함이 필요하다. 흥미롭지만 까다롭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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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산업 프로젝트들이 외국 전문가의 철수로 지연되었다 하더라도 이 시점에서 중국 경제는 이미 깊은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편리하게도 중국 경제의 붕괴를 소련 탓으로 돌리며, 기근에 관한 가장 끈질긴 허구, 즉 굶주림은 부채를 갚으라는 소련의 압박으로 야기되었다는 허구를 만들어 냈다. - P172

기근이라는 인위적 차원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기 위해 자연의 위력을 들먹이는 것은 추가적 이점이 있었다. 무역 협정은 보통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는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발생 시 계약의 일부나 전부가 해지될 수 있다는 표준적인 면제 조항 33조가 있었다. 33조는 이제 무역을 줄일 때뿐 아니라 일련의 협정 전체를 취소하는 데 이용될 수 있었다. - P176

중국은 소련 전문가의 철수에 대한 처벌이 아닌 파산 상태라는 이유로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멀어졌다. - P176

마오쩌둥은 재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지만 세계를 책략과 음모로 이해하는 편집증에 사로잡힌 지도자답게 문제의 원인을 적성 계급에게 돌렸다. 부농과 반혁명 분자들이 반우파운동을 이용하여 슬그머니 권좌로 기어들어와 계급 복수 행위를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주석은 자신이 꼭대기에서 만들어 낸 테러 정권이 당의 위계질서를 따라 모든 층위에서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 P189

헌신적인 당 사람인 류사오치는 고향 마을에서 본 처참한 상황에 진심으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깨어나서 눈을 뜨고 있는 순간을 모조리 당에 헌신해 왔지만 그가 봉사하겠다고 한 인민에게 당이 광범위한 혹사와 궁핍, 기아를 가져왔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가 발견한 또 한 가지는 인민과 당 사이 완전한 연결의 부재였다. 그한테 고의적으로 실상이 비밀로 부쳐졌다--아니 그는 그렇게 주장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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