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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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 살바도르 아옌데... 이 두사람의 이름은 1973년 구테타에 의해서 처참하게 짓밟힌 칠레 민중 정권의 아련한 상실감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대학 시절 우연히 읽게된 '21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 라는 시집을 낸 이 칠레의 시인이 사회주의 실현의 위한 실천적 투사였다는 이야기는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전선' 이야기 등과 함께 남미 역사의 하나의 전설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네루다라는 이름은 민중 혁명을 위한 투사의 이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 20년이 지난 지금,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통해 나는 '파블로 네루다'라는 시인의 180도 다른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칠레의 사회주의 혁명이 무자비하게 박살나던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네루다는 예의 그 실천적 사회주의자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나, 소설 초반부에는 혁명가가 아닌 부둣가로 낙향한 나이 든 여타 시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실 사회주의 실천가들의 모습이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이라는 이미지는 왜곡된 바가 많다. 그들 또한 사랑에 열광하고 유머 감각이 넘쳐나며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감동하는 그냥 어디에나 존재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에도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장벽은 투사적인 하나의 이미지로 그들을 잘 못 인지시키고 각인시키고 있다. 

이 소설에는 그런 인간적인 네루다가 등장한다. 마리오와 베아트리스의 사랑을 중재하고 마리오에 충고하는 네루다. 그는 그냥 우리 주변에 흔히 존재하는 푸근한 삼촌 같은 네루다. 때로는 짓굳고, 장난스럽고 어린 마리오의 사랑을 지켜보며 흐믓한 미소와 안타까운 걱정으로 가득한 네루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빼 놓을 수 없는 재미이다. '그렇지 그 때 읽은 그 시집을 쓴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랬겠지...' 

유머가 넘치는 네루다와 해학이 넘치는 남미 식의 사랑 이야기를 읽어 나가는 재미는 소설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든다.(그래서 책을 잡고 하루만에 회사에서 일하면서 짬짬히 다 읽어 버렸다) 네루다는 마을에서 유일한 고객인 자신에게 편지를 배달해 주는 우편배달부인 마리오와 우정을 쌓아 간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사회주의의 승리와 쿠테타외 이어지는 비극적인 죽음들... 칠레의 비극은 소설 전반에 존재하는 유머와 해학으로 인해 더욱 비장하고 참혹하게 느껴진다. 

마리오에게 넘어가기 직전에 있는 딸 베아트리스에게 과부 엄마는 이런 말을 던진다. "넌 지금 풀잎처럼 촉촉해. 후끈 달아올랐을 때에는 약이 딱 두가지 밖에 없지. 교미나 여행'. 이런 표현이 넘쳐나는 일상과  네루다의 장례식장에서 울려 퍼지는 '인터내셔날'가(국제 노동자들의 단결을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노래). 이 소설의 두가지 인상은 단편적으로는 이 두가지 장면일 것이다. 이 후 암시되는 피노체트에 의해 살해되고 실종된 수천명의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비장한 이유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 검은 섬)라는 이름이 암시하는 바도 네루다의 죽음 이후 30년 가까이 지속된 칠레의 운명일지도... 

이런 참혹한 역사의 비장함을 해학과 유머가 가득한 이야기로 풀어낸 스카르메타의 작업이 참으로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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