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이야기라고 해서 혹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다. 제대로 발견한 건 '다시 이상'이라는 것. 선생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건 모조리 다 해설해버리고 말겠다,라는 마음인지 아니면 이상의 팬으로서 가진 마음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간까지 읽으면서 아무래도 선생으로서의 한계가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지고 있다. 배움 하나가 깊어지면 세상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높아져 좋은 것이다,라고 스승이 이야기했다는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그래서 어느 정도의 해상도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 시선의 깊이가 참으로 궁금했는데 막상 실망에 실망만 더해지다보니 선생으로서는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인간이라는 역할 자체로 따지고 들자면 그닥, 이라는 생각이 왜 더해졌는지는 모르겠다. 이건 어쩌면 가르치기 좋아하는 이들의 바운더리인가 싶기도 했지만.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면 그저 가르침만을 행할 일이지, 그 이상의 다른 영역은 넘보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 이 이야기는 이 소설 이야기는 아님. 이십대 초반에 권영민의 책으로 공부해본 학생 시절을 거쳤으니 선생으로서의 틀을 넘어 자신이 바라보는 이상을 창작이라는 틀을 이용해서 세상에 더 가볍게 내놓고자 하는 의도는 꽤 훌륭하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역으로 시인으로서의 한계라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 속에 있는 이상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그런 의문도 품어보았으나 그 안에서 다시 머무는 동안 고요하게 파도치는 소리에 귀기울였다. 이상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가 교복 입던 시절이었는데 수십년이 지나고도 파도를 치게 한다는 게 좀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야기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평범하기만 한 일상들뿐이라고 노상 툴툴대던 소녀들은 이제 중년에 접어들어가면서 자기가 하고픈 이야기를 마음껏 지면에 펼쳐놓는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건 흥미롭다. 딱히 선생질할 생각도 그들에게는 없으니 더 이야기가 잘 나오는지도 모르겠고. 만일에 더 배우고픈 생각이 든다면 그건 '민낯'으로 되어가는 수많은 과정들 중 하나의 스텝일지도. 그렇다고 해서 그 배움의 끝에 모두가 '민낯'으로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걸 주변의 여러 이들을 보면서 알게 되고. 그래도 이제까지 하품하면서 페이지를 넘기지는 않았으니 완독 후 다시. 오랜만에 읽는 한국 소설. 정말 한국 소설을 읽지 않고 사는구나 이땅에서 살면서 다시 느낌. 권영민의 이상을 읽는 동안 아 내가 이상의 민낯을 제대로 보지 않았었구나, 그저 교복 입던 시절에 알았던 이상의 낯을 그의 민낯으로 잘못 알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이 소설을 다 읽고난 후에 내가 할 일이란 명확하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을 믿고 이상은 수없이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위선이 싫으면서도 위선을 행했고 (좋은 게 좋은 것이니) 후에 그게 너무 못마땅해 억지로 위악을 내세웠다. 정직을 말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이상은 정직한 얼굴을 내보였고 과정은 그대로 행해졌다. 아 이래서 좋아한 거였나?! 허나 남성으로서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그냥 미성숙한 소년에 불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소설 안에서 그닥 별로,로 그려지는 이상이다. 하긴 글 좀 쓴다고 해서 인간성까지 훌륭하리라고 보는 건 과대망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카프카와 이상이 겹쳐지는 대목들을 번갈아가면서 읽는. 관계성 속에서 찾아지는 자아에 대해서 두 작가가 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얽히는 동안 오늘 저녁 메뉴는 까르보나라로 해줘, 라고 딸아이가 한 말을 떠올리며 냉장고에 없는 베이컨과 청양고추를 어디에서 사야 하나 하는. 선생으로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인을 더 잘 이해하고자 애쓰는 창작자로서의 필체에 조금 더 방점을 찍고 나머지를 읽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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