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의 데뷔작

나는 파란 눈을 가진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고, 그러자 반감이 일었다. 슬픔이 담긴 친구의 목소리가 동정을 바라는 투라서 동정을 꾸며 보이긴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구가 그런 훼손을 원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서 그애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때까지 난 예쁜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 멋진 사람, 추한 사람을보며 살아왔다. 그리고 ‘아름답다‘라는 단어를 당연히 사용하기도 했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인지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 충격의 강도는 아무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 그것을 소유한 사람조차, 아니 본인이라 특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맞먹었다.
내가 그때 살펴보았던 그 얼굴만의 문제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 이른 오후 거리에 깃든 적막, 빛, 그 고백을 듣던 순간의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때가 내가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알게된 순간이었다. 나 혼자 상상해왔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은 그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본인이 실행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가장 파란 눈]은 그런 문제를 두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자 했던 시도다. 그애는 어째서 자신이 소유한 것을 체험하지 못했는지, 혹은 영원히 체험하지 못할 것인지에 대해서. 또한 그애는 어째서 그렇게 근본적인 변화를 원했는지에 대해서. 그애의 욕망에는 인종적 자기혐오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후 스무 해가 지났지만 그런 것이 어떻게 습득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누가 그런 말을 했을까? 자기 본연의 모습보다 괴물이 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누가 그애에게 심어주었을까? - P9

그애를 보며 모자란다고, 아름다움의 저울에 올려보니 너무 빈약하다고 여긴 이는 누구였을까? 이 소설은 그애를 단죄하는 시선을 쪼아 없앤다.
1960년대에 인종적 아름다움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켜, 나는 그런 주장의 필요성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남들에게매도당할지언정, 공동체 내에서는 이 아름다움이 왜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못했을까?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어째서 광범위한 대중적 발화가 요구되었을까? 그 대답은 금방 자명해졌고 지금도 그러하니, 총명한 질문들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을 시작한 1962년과 이것이 한 권의 책을 이루게 된 1965년에는 그렇게 자명하지 않았다. 인종적 아름다움의 주장은 모든 집단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문화적·인종적 약점에 대한 자조적이고 익살스러운 비판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부 시선에서 유래하는 절대불변의 열등함이라는 가정을 내면화하는 해로운 과정에 대한 반대였다. 따라서 나는 한 인종을 통째로 악마화하는 기괴한 현상이, 아이라는 사회의 가장 연약한 구성원이자 여자라는 가장 취약한 구성원인 인물 속에 어떻게 뿌리박게 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무심한 인종적 멸시로도 초래될 수 있는 인간성의 황폐화를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난 전형적이 아니라 독특한 상황을 선택했다. 페콜라의 사례가 지닌 극단성은 평균적인 흑인 가족이나 화자의 가족과 달리 구성원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력한 가족에서 기인한다. 페콜라의 삶이 비록 남다르지만 그 취약성의 몇몇 면모는 모든 여자아이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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