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는 내내 이건 자전소설이구나 싶었다. 사실 2020년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것만 알고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책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그냥 딱 알겠더라. 이건 작가의 실제 경험을 소설화 한 것이고 제목이자 소설 속 인물인 셔기 베인은 작가의 분신이구나 하고.

소설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의 작가의 감사의 글까지 읽어보니 작가는 실제로 알콜 중독 어머니가 있었고 헌신적인 형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인터뷰도 잠깐 찾아서 읽어보았다.

작가 더글라스 스튜어트는 실제로 글래스고에서 알콜중독인 어머니 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랐던 그는 늘 놀림과 괴롭힘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소설 속 셔기 베인이 호모라고 놀림받고 아이들 사이 폭력적인 상황에 내몰리듯이 말이다. 16살에 어머니는 결국 알콜중독으로 죽었고 고아가 된 그는 고등학교를 계속 다니기 위해 밤에 일하면서 어렵게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글래스고를 떠나 대학을 가게 된 후 그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뉴욕 여러 유명 패션회사에서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게 되면서 성공한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디자이너로 일하면서도 자투리 시간에 늘 글을 썼던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한 1980년대가 배경인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이것을 32살 때부터 써서 42살에 완성했다고 한다. 처음 초안은 무려 A4용지로 900장이나 되는 엄청나게 긴 작품이었다. 그러다 주변인의 조언을 듣고 줄이고 줄여서 다시 쓴 것이 바로 이 소설 셔기 베인이다. 줄여도 한글판으로 거의 600장에 육박한다. 그는 이 소설로 소설가로 첫 데뷔를 했고 데뷔하자마자 2020년 부커상을 거머쥔다.

대단하지 않는가? 어린 시절부터 힘들게 열심히 살았던 것도 그렇고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틈틈이 쓴 소설이 바로 최고의 상까지 탄 것도 그렇고. 정말 인간승리의 한 장면이 아닐수 없다.

 


소설은 1980년대 대처 시대의 영국 그것도 글래스고의 워킹클래스 가족의 이야기다. 굉장한 미인이었던 애그니스는 첫 번째 결혼과 두 번째 결혼 모두 실패한다. 남자들에게 걸었던 인생은 모두 그녀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거기에 좌절하면서 점점 술에 의지하고 만다. 아이들은 셋이나 있다. 어머니가 알콜 중독자로 망가져 가자 집안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첫째 딸은 일찍 결혼을 해서 가족에서 빠져나갔고 둘째 아들은 그림에 재능이 있어서 예술 대학 합격증까지 받았으면서도 어머니에게 합격사실을 말하지도 못 하고 집에 남는다. 이제 가족 내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고 돈없이 대학을 갈 수도  집을 나갈 수도 없기에. 막내 셔기는 8살 나이에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알콜 중독자 어머니 곁에서 제대로 된 돌봄도 받지 못하며 자란다. 또래 남자아이들과 많이 달랐던 게이 소년인 셔기는 밖에서는 늘 괴롭힘을 당했고 성적이고 폭력적인 욕설을 보통으로 듣고 자란다.

복지수당으로 음식보다 술을 사는 게 더 중요했던 어머니는 돈이 떨어지면 술을 사기 위해 남자들까지 침대로 끌어들이기 일쑤였고 이러한 것들을 어린나이부터 일상적으로 보고 자란 셔기는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저 어머니가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하지만 둘째 형과 셔기는 가족 안에 있는 한은 어머니를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술을 끊지 못하는 어머니 때문에 집안은 점점 더 막장으로 치닫는다. 그 과정이 읽기가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 술을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어머니와 그걸 지켜보는 자식들의 무기력함과 슬픔. 이것들이 소설 전반을 채우고 있다.

애그니스의 자식들은 참 착하다. 어머니를 원망할 법 한데도 셔기는 끝까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 한다. 둘째도 결국에 집을 나가지만 늘 집안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가족이란게 다 이렇겠지. 괴롭고 힘들지만 외면할 수 없는 것. 이런 끈끈함이 이 책을 읽다보면 묻어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숨이 콱 막힌 듯 답답했다. 어머니를 떠날 수 없는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서.

제발 애그니스! 착한 아이들을 생각해서 정신 좀 차려! 하고 책 속에 들어가서 소리치고 싶었다. 설령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애그니스는 콧방귀도 안 뀔 캐릭터이긴 하지만 말이다.

 

소설 속 상황이 답답하고 우울하긴 하지만 그래도 결론은 희망적이다. 혼자된 셔기 베인은 앞으로의 삶을 잘 꾸려 나갈 것이라는 암시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이제는 성공한 작가가 된 이 책의 작가가 스스로의 삶을 반추했을 때 쓸 수 있었을 삶의 긍정이기 때문에 책을 덮고 나서 참 안심이 되었다. 결국 현실 속 셔기 베인은 삶을 잘 해쳐나갔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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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1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작품 1980년대 영국 대처 시대의 영 글래스고의 워킹클래스 가족 이야기 군요
글래스고 출신 배우 제임스 맥어보이가 그 시절 글래스고 엄청 암울했다고 했는데 소설 속 아이들 모습이 불쌍 ㅜ.ㅜ

망고 2021-12-11 12:03   좋아요 1 | URL
네 정말 암울하더라고요ㅠㅠ그래서 읽느라 힘들었어요ㅜㅜ제임스 맥어보이가 글래스고 출신이었군요 오 또 새로운 정보습득^^
 

토지 2권 시작하자마자 마음 아픈 대목이ㅠㅠ
1권에서 월선이 데리고 떠날 용기도 없고 강청댁한테 미안한 기색도 없는 용이가 약간 비호감^^;;이었는데 2권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어린시절 용이는 안쓰럽네ㅠ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이 행랑 뜰에서 놀았던 일이 생각났다. 노상 치수에게 두드려 맞았었다.
‘옴마, 내가 심이 더 센데 와 밤낮 얻어맞아야 하노.‘
모친은 잠시 용이를 바라보았다.
‘심이 세니께, 억울할 것 없다.‘
‘나도 때릴란다.‘
‘도련님이 몸이 약하니께 니가 참아야지, 셈 찬 성이 참더라고 니는 심이 세니께..‘
‘그라믄 머 심만 세믄 밤낮 맞아야 하나?‘
"그러니께 니보다 심센 놈을 만나거든 그때는 지지 말고 때리주라모,‘
‘심센 놈이 그라믄 나겉이 맞아줄 기가?‘
‘어진 마음이믄.‘
- P14

‘안 어지믄 난 또 맞아야 하게?‘
‘나쁜 놈 되는 것보다 어진 사램이 돼야제."
‘그라믄, 그라믄, 그래도 옴마.‘
‘...‘
‘심이 세도 맞고 심이 없이도 맞고 맞고만 살라 카나?‘
말문이 막혔던지 모친은 말이 없었다. 한참 후 먼 산을 보면서.
‘상놈이 우찌 양반을 때릴 것고.‘
그 말을 듣고 용이는 울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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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4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전 토지 9권에서 멈춘지 수년 째
!
2021년 완독을 꿈꿨지만 ㅎㅎㅎ

망고님! 행복 가득 !
메리 크리스마스!!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 ∩  / ̄`>O
  い_cノ (ニニニ)
 c/・・ っ (>∀<* )
 (˝●˝ )___とと )
  ヽ  ⌒、 |二二二|
  しし-し ┻━┻

망고 2021-12-24 11:57   좋아요 1 | URL
저 토지 진짜 천천히 읽고 있어요 완독을 언제 할 수 있을지...ㅎㅎㅎ
스콧님 맛있는거 많이 드시고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집 감나무에서 수확한 감과 책사진)



사실 작년에 나온 패니 플래그의 책을 읽어볼까 하다가 그 책이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속편이라고 해서 내려놓았었다. 아직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도 읽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읽게 되었다. 90년대에 나온 영화도 있어서 제목을 많이 들어봤는데 그동안 왜 읽을 생각은 안 했을까 몰라^^

책은 따뜻한 이야기였고 재미도 있었다. 근데 이 책을 읽고나니 굳이 그 속편까지 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서 작년에 나왔다는 그 책은 읽지 않기로 했다. 

그냥 완벽하게 이 책으로 모든 이야기가 완성된 느낌이라 속편이 궁금하지가 않다. 


책을 읽었다는 기록은 인상적인 문장들을 옮겨 놓는것으로 하겠다. 




"있잖아요, 나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요. 만약 누가 루스를 해치려 한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당장 죽여 버릴 거예요."

"오, 이지, 말만 들어도 끔찍해"

"아뇨, 그렇지 않아요. 증오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사랑 때문에 죽이는 편이 낫지 않아요?"

(119쪽)



늘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점차 사랑을 느끼게 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루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지가 환하게 웃으며 벌꿀이 든 병을 건네주려 했을 때, 그토록 억제하려 했던 감정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이지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안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날 울음을 터뜨렸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터였다.

(121쪽)



슈퍼마켓에서 그처럼 심한 욕설을 들은 뒤, 에벌린 카우치는 능욕당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말로 당한 강간이었다. 완전히 발가벗겨졌던 것이다. 우발적 사건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었으나 불쾌한 남자들과 마주치면 늘 겁이 났고, 욕설을 듣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녀는 목장 울타리를 넘어와 치마를 들추어 대는 유의 사람들 주변에서는 늘 몸을 사리고 조심했다. 작은 빌미만 주어지면 언제라도 그런 상스러운 욕설들이 날아올 태세를 갖추고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313쪽)



머리를 겨누고 내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총, 그 힘, 그 음험한 위협......욕먹는 것에 대한 그 공포는 무엇일까?

에벌린은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라는 말을 들을까봐 순결을 지켰다. 노처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결혼을 했다. 불감증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오르가슴을 연기했으며,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아이들을 가졌다. 괴상하다거나 남성혐오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았고, 못된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바가지를 긁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을 실행해 왔음에도 그 낯선 사람은 화가 난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욕설을 던짐으로써 그녀를 시궁창 속으로 밀어 넣었다.

(314쪽)



그러다가 에벌린은 멈칫했다. 이전에는 결코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기에 두려웠다. 그러니까 에벌린 카우치는 대부분의 여자들보다 20여 년 늦게 분노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에벌린은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다. 그처럼 뒤늦게 찾아온 분노는 낯설고도 특이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에벌린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남자였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남자들이 그토록 중히 여기는 이런저런 특혜를 누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절대로. 단지 남자가 가진 힘만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슈퍼마켓에서 욕을 하던 그 못된 아이를 흠씬 두들겨 패 주었으면 싶었다. 물론, 그녀가 남자였더라면 애초에 욕설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315쪽)



하지만 불알을 두고 호들갑을 떠는 남자들을 보노라면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맙소사, 에드는 아들의 그것이 적당한 모양으로 발육하지 않자 걱정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의사 말로는 모양이 그렇더라도 아이를 갖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에드는 마치 무슨 비극이라도 생긴 것처럼 행동했고 아들을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아들이 스스로 남자도 아니라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벌린은 당시에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어처구니가 없군......성장기때 내 가슴은 절벽이었지만 누구도 나를 어디론가 보내서 어떤 도움을 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어'

(361쪽)



한때 에드는 바로 그 여직원을 칭찬했다. 그녀가 사장에게 과감히 맞서는 걸 두고 베짱이 두둑한 불알 달린 여장부 같다고 떠벌이던 게 기억났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의아했다. 그 여자의 힘과 에드의 해부학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봐, 그 여자는 대단한 난소를 갖고 있어"라고. 그는 분명히 그 여자가 어떤 불알을 가졌는지 말했다. 난소에는 난자가 있다. 난자는 정자만큼 중요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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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1-30 0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영화가 인상깊었습니다 ^^

망고 2021-11-30 05:56   좋아요 2 | URL
아직 안 봤는데 조만간 꼭 보려고요^^ 근데 이지와 루스를 그냥 우정으로만 묘사했다고 해서 영화 보기도 전에 섭섭한 느낌이 들어요😁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 개정판
데이비드 콰먼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동물에서 사람으로 전염되는 인수공통감염병에 대해 전공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게 쉬운 문장으로 설명해 주는 책. 생생한 실제 사례들을 들어 전염병 이야기를 풀어 놓는데 마치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글솜씨가 너무 좋아서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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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블러드 - 테라노스의 비밀과 거짓말
존 캐리루 지음, 박아린 옮김 / 와이즈베리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손가락에서 채취한 피 몇 방울로 200가지가 넘는 질병을 미리 검사해 볼 수 있는 획기적인 진단기기를 발명해냈다는 회사가 있다. 힘들게 주사바늘로 다량의 혈액을 채취할 필요 없이 단 몇 방울의 혈액만으로도 질병을 알아낼 수 있고 거기에다가 기기의 크기가 작아 휴대까지 간편해서 집에서도 쉽게 진단을 받아볼 수 있는 혁신적인 의료기기를 만들어내는 회사. 그것은 바로 19살의 스탠포드 중퇴생 엘리자베스 홈즈가 세운 스타트업 테라노스.

엘리자베스 홈즈의 첫 시작은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것은 맞다. 공상 과학 같은 생각이었지만 만약 정말로 피 몇 방울로 미리 병을 알아낼 수 있는 기기가 나온다면 그야말로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게 할 수도 있는 혁신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테라노스는 거창한 아이디어만 있고 기술은 없는 거대한 사기였다. 엘리자베스 홈즈는 테라노스를 세우고 약 15년 동안 기기를 발명했고 기술이 있다고 뻥을 쳐왔지만 실제로는 엉성한 오류투성이 기계만을 만들어 냈을 뿐이고 혈액 몇 방울만으로는 200가지가 넘는 질병을 검사할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금발에 파랗고 커다란 눈을 가진 매력적인 젊은 여성 엘리자베스 홈즈가 놀랄 만큼 낮은 목소리로 테라노스의 장밋빛 미래를 발표하면 사람들은 그대로 그녀를 믿었다. 그녀에게 설득당했던 이름만 대면 알만한 쟁쟁한 투자자들은 테라노스에 앞다투어 투자를 했다. 결국 테라노스는 기업가치가 10조원에 달하는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성공한 스타트업이 되었다.

진짜 기술도 없이 그저 엘리자베스 홈즈의 매력적인 이미지와 말발과 그럴듯한 거짓말로 테라노스는 승승장구했다. 이런 일이 이렇게 쉽게 가능하다니 참 기가 막혔다.

 

투자자들의 면면을 보면 자신의 커리어에서 정점을 찍은 굉장히 경험 많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던데(루퍼트 머독,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등등) 이런 사람들도 이렇게 쉽게 속는구나 싶어서 놀랍기 그지없었다. 하긴 속이는 사람이 나쁘지 속는 사람이 나쁜가 뭐......

그렇다하더라도 테라노스를 끝까지 놓지 못 했던 투자자들은 자신이 일단 믿기로 결정한 일은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속성이 공통적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좀 생각해 볼 문제다. 자신의 결정은 틀릴 리가 없다는 과신으로 주변의 옳은 소리를 차단해 버리는 모습들 말이다.

일례로 조지 슐츠는 테라노스에서 일하다 그만둔 손자가 그 회사는 불법을 저지르고 있고 할아버지가 속고 있다며 증거를 아무리 얘기해도 손자 말을 안 듣고 자신이 처음부터 믿기로 한 엘리자베스 홈즈를 끝까지 믿는다.

이런 것들을 보면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의 성공적인 커리어와 그로 인한 자기 확신이 오히려 어떤 상황에선 독이 되는 경우. 그러니 절대 과신하지 말지어다...라지만 말이 쉽지 어디 그게 그렇게 쉽나?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때까지 탄탄대로를 걸어오던 사람이라면 특히나 더. 그러니 인생은 역시 쉽지 않은 것 크흐~

 

 

쟁쟁한 이사진들, 정치인들과의 친분, 위협적인 변호사 군단을 거느리고 거짓의 모래성을 쌓아가던 테라노스는 이 책의 저자가 폭로한 기사로 드디어 그 민낯이 드러나고 만다. 기사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테라노스에서 일하다 그만둔 양심적인 직원들의 진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라노스 측은 기밀유지 문서에 직원들의 사인을 받아두고 퇴사한 후에도 회사에 관한 어떤 말도 못 하게 협박해 왔다. 무언가 낌새를 보이면 최강의 변호사들을 보내 퇴사자들에게 소송을 건다고 협박해서 입막음을 시도했지만 내부고발자들은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했고 테라노스는 드디어 무너졌다.

이 과정이 정말 짜릿하고 긴장감이 넘쳐서 마치 영화를 한편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그래도 제니퍼 로렌스 주연으로 영화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현실이 픽션보다 더 하다는 걸 또 이렇게 새삼 깨닫는다.

 

 

엘리자베스 홈즈는 스티브 잡스를 똑같이 따라했다고 한다.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다녔고 애플이 맡겼던 광고회사에 테라노스의 광고를 맡기고는 매주 수요일마다 회의를 하는 것도 스티브 잡스를 따라한 거였다. 그녀의 남자 같은 바리톤의 낮은 목소리도 실제의 목소리가 아닌 꾸며서 낸 목소리라고 하니 아무래도 스티브 잡스를 목소리까지 베끼고 싶었던 게 아닐까하는 의심도 든다. 겉모습은 따라했지만 진짜로 중요한 알맹이는 전혀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그녀는 계속해서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고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협박하며 성공한 기업인이라는 역할을 연기했다.

불안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거짓말로 살아 갈 수 있을까? 19살부터 시작해서 30중반까지 그렇게 살았다는건데 어휴~ 간도 크다. 

여러모로, 안 좋은 의미로 참 대단한 인간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근황을 보니 코로나와 출산으로 연기 되었던 재판이 요즘 다시 열리고 있는 모양이다벌써 감옥에 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재판도 안 했다니 또 한 번 놀랐다. 그녀는 실패한 것이지 사기가 아니라고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동안 공개적으로 했던 그 많은 거짓말들은 다 뭐야? 

아무튼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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