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넘게 이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다가 놓다가 했다. 오랫동안 읽느라고 더 그랬는지 마지막에는 이 책이 정말 지겨워져서 그만 읽고 싶기도 했다. 어쨌든 다 읽고 나서 속이 후련했다. 이제 다른 책 읽어야지 하고 있는데 자꾸만 이 책 생각이 나는 거다. 롤런드의 이야기가 뭔가 정리되지 못 한 개운하지 않은 맛으로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백자평으로 롤런드는 14살 때 피아노 교사와의 관계가 삶에 영향을 미친 건 맞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고 썼다. 롤런드는 너무 어릴 때 교사와 성적인 관계에 있다가 결국 학교를 그만둔다. 피아니스트가 되거나 문학적 재능을 뽐낼 수도 있었던 미래의 가능성을 저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변변한 직업 없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야망 없이 평생을 표류하며 살았다. 그 삶 속에서는 사랑했던 여자도 있고 아들도 있으며 원치 않던 이별도 있다. 말년에 가서는 확장된 가족을 이루어 가족의 사랑 안에서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다소 무기력하고 지루한 사람이지만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았던 한 사람을 따라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된다

피아노 교사에게 분명 상처를 받기는 했지만 인간의 삶 전체를 놓고 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인생이 다 그렇듯 엄청나게 행복하고 엄청나게 불행하기 보다는 그럭저럭 살다보면 살아진다. 나를 떠났던 사람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만나면 반갑고 서로 삶이 그리 쉽지 않았구나 이해하며 토닥토닥하다가 그렇게 평온하게 인생을 정리하는 노년을 맞고... 뭐 이런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지겹다 지겨워!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 하루가 지나면서 계속 생각해 보니 롤런드의 인생이 이렇게 흘러간 원인은 어린 시절 피아노 교사와의 그 사건 때문이었다고 이 긴 소설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롤런드는 피아노 교사 미리엄의 영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결국 그가 사진을 정리하면서 미리엄의 사진도 끼워 넣는 것도 그 이유라고

그러니까 평생을 간직한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냐면 롤런드가 한때 시를 쓰고자 노력했지만 끝내 쓰지 못 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써온 일기를 결국 다 태워버린다는 것에서 어쩌면 롤런드는 평생 미리엄의 영향 속에서 살고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롤런드는 자신이 겪은 그 경험을 고발할 수 없었다.

미리엄이라는 경험을 드러내지 않고 쓴 시는 모호하기만 할 뿐 예술적 성취가 될 수 없었다

앨리사가 롤런드를 떠나서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앨리사는 자신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남들을 불편하게 하고 설사 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게 진실이 아닐지라도, 예를 들어 앨리사의 어머니에 대한 앨리사의 관점이 모두 진실은 아닐지라도, 어찌되었든 앨리사는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며 끝까지 글로 밀어붙이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롤런드는? 과거 피아노 교사와의 관계를 계속해서 기억으로 불러내지만 그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일에 망설인다. 어린 시절 그루밍 성범죄에 해당하는 게 맞다고 남들은 생각할 테지만 롤런드 자신은 그 당시 그도 즐겼다고, 미리엄을 그때는 사랑했다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지 못 한다

만약 아들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는 당연히 분노할 테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도 당연히 분노하는 게 마땅하지만 그는 50년이 지나 노년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과거 그때는 자신도 미리엄을 사랑했노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이런 모호한 관점을 솔직히 드러내서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논쟁적인 글을 쓸 용기도 없다. 아니 그럴 생각 자체가 없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관찰자로 남겨진다.

이게 바로 피아노 레슨이 그에게 남긴 교훈이 아닐까? 미리엄은 그의 삶을 지배했고 그 강렬했던 지배력이 점점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끝까지 남아서 롤런드의 삶과 함께했다. 자신이 완벽한 피해자라는 인식을 거부하고 미리엄을 가해자의 위치에만 두지 않는다는 그 자체로만 봐도 미리엄이 롤런드의 삶에 끼친 영향력은 끈질겼다. 롤런드는 결코 과거의 상처로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거기서 자유롭지도 않았다.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미리엄에게서 도망친 후 그 상태에서 변화하지도 못 하고 멈춰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노년이 되어 찾은 평온은 그러한 삶에 그저 적응한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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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19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어서도 지난 일에 대한 통렬한 반성 없다면 그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교훈으로 느껴집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감싸고 정당화시킨다면 반성할 게 있을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