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 박은옥 -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박은옥 외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 TRACKS

1. 서울역 이 씨

2. 저녁숲 고래여

3. 강이 그리워

4. 꿈꾸는 여행자

5. 눈 먼 사내의 화원

6. 섬진강 박 시인

7.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8. 날자, 오리배... (Chrous By 강산에, 윤도현, 김C)

9. 92년 장마, 종로에서 (헌정트랙)

 

1CD / 40:54 Mins / 레이블: 삶의 문화, 유니버셜 레코드
 

 

"자. 이제 됐지?"


-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의 완성본을 박은옥에게 건네주고 정태춘이 한 말

 

 

어느 순간 정태춘은 침묵하고 있었다. 직접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꺼낸 한 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고향이었던 대추리가 미군 기지로 활용되어 마을 사람들이 내몰리기 시작했고 그 역시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전경들에게 제압당해 굴욕적으로 끌려갔다. 아니. 개인의 굴욕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자신의 고향이 기억 속에만 남게 생겼는데. 부부가 가수 활동을 시작한지 몇 주년을 기념하여 앨범을 낸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아마 이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을 좀 더 빨리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일본의 산리츠카 마을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대추리 마을 사람들의 투쟁은 실패했다. 그리고 정태춘 역시 침묵했다. 박은옥의 경우에는 그 자신의 바람도 있고 하여 다른 음악가와의 작업을 통해 솔로 앨범을 계획 중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모습을 본 그녀는 그의 마음과 고통을 같이 나누려는 듯 계획을 철회했고, 그 결과 청자들이 11집을 듣는데는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10년이란 시간은 막상 되돌아보면 짧은 것 같은데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보면 사실 굉장히 길다. 모든 시간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인생 초반부의 10년은. 갓난장이 애가 초등학교 3학년이고, 중 1 학생부터 시작이라 친다면 군 제대를 하고 나오니 앨범이 막 발매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시간의 경과다. 물론 음악계에서 아티스트가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런데 내게는 정태춘, 박은옥의 신보를 듣기까지의 시간이 어째 참 각별하게 느껴진다. 나는 신보가 나오면 그것을 바로바로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을 딱히 가진 적이 없다. 영화도 그렇고 만화도 그렇고 대부분이 그런 편인데, 그냥 어느 순간 내가 접할 때가 됐다고 생각할 때 접한다. 그런데 그것이 공개되자마자 바로는 아니다. 이것은 지금도 어느 정도 남아있는 내 삶의 태도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주로 듣거나 보거나 읽는 건 전체적으로 연식이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정태춘, 박은옥의 10집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는 발매된지 한 달만에 들었던 앨범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면 내게 있어 '동시간대'에 들은 앨범이나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동시간대의 신보를 하나 듣고, 차기작이 나올 때까지 같이 살아가고 기다리는 경험을 그 때 처음 해 본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당시 동시간대로 들었던 다른 아티스트들에 비해 그들을 기다리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음식에 비유해야 하나. 김치도 이 정도까지 묵히지 않을 것이고...이 정도면 술인가. 이것도 그만큼 묵은 술을 먹어보지 않았기에 그저 생각만 할 뿐이다. 그러나 아마 그 술맛을 상상한다면 아마 이 앨범을 들을 때의 기분이 되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레 상상하게 된다. 그나마 10집에는 정태춘의 '록큰롤'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오토바이 김씨'나 '정동진 3.' 같은 곡들이 있었지만 이번 앨범에는 그런 곡들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10집과 11집 사이에 놓여진 10년이라는 긴 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 때문일게다. 1번 트랙인 '서울역 이 씨'는 '서울역 신관 아래 차가운 돌 벤치에서 종일 뒤척이다' 결국 동사하고 만 노숙자의 이야기다. 이렇듯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가 이전 앨범에 비해 돋보이는 부분은 전체적인 톤이 상당히 가라앉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태춘이 음악과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준 박은옥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온전히 그녀를 위해 헌정하는 마음으로 앨범을 만든 것에서 비롯된다. 박은옥은 사실 '윙윙윙' 같은 곡을 제외하면 어지간해서 흥겨운 템포의 곡을 잘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 말하면 정태춘 본인도 빠른, 흥겨운 정서의 곡을 많이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그런 컨셉으로 인해 이번 앨범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차분하다.

 

술맛을 거론한 것은 아마 현재의 내가 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절대 '달다'는 인상이 아니라서다. 비애를 아는 사람이 술맛을 안다고 하듯, (이 말에 관해 나는 '그래서 꽐라 될 때까지 술 마시냐, 이것들아!?' 라고 현재까지는 반문하고 있지만.) 이 앨범에서의 정태춘의 목소리는 예전에 박은옥과 함께 부르던 '사랑하는 이에게' 같은 달달하고 감미로운 목소리, '정동진 3'에서 막걸리 한 잔 마신 듯 장쾌하게 이야기 들려주듯 이어가는 방식이 아니다. 앨범 발매 당시 인터뷰에서 그가 말한 표현을 인용하자면, '절망의 밑바닥까지 다녀온 사람의 목소리' 다. 박은옥의 권유와 이어지는 간청으로 그가 다시 곡을 쓰기 시작했던 것은 2005년 12월이었다. 그 때 써진 것이 '서울역 이 씨'였고, 이전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이었던 '92년 장마, 종로에서' 를 다시 부른 것을 제외하면 수록된 나머지 일곱 곡들은 모두 2010년에 쓰여졌다. 

 

요 근래 젊은 음악인들의 작업은 주로 재기발랄한 표현이나 노랫말에서 나오는 편인데, 이것은 주로 데뷔 앨범에서 드러나는 편이다. 이후부터는 그것을 극복하는 또다른 재기발랄함을 찾곤 하지만 대부분은 이 순간을 잘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혜성과도 같은 발견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청자는 이전 앨범의 거품을 빼 버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아티스트 본인도 지난 앨범의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고민을 시작해야만 한다. 나름의 특색을 가지긴 했지만 그것이 그냥 겉치레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충분히 내실이 있는지를 판단하게 되는 기준은 결국 음악을 만든 아티스트가 얼마나 세밀하게 세상이나 자신의 머리 속을 관찰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갈린다. 그 점에서 볼 때 정태춘과 박은옥이 청자에게 음악 한 번 들을 맛 난다고 느끼게 해 주는 것이, 그들은 끊임없이 음악으로 옮기기 위한 관찰을 지속하고 있어서다. '서울역 이 씨'를 써 두고, 이들 부부는 하나의 앨범으로 만들어질 때를 기다렸다. 그 때 곡을 쓴 것을 보아하니 사실상 마음만 먹었으면 다음 앨범을 꽤 빨리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으면서 조급함에 휘말려 서두르는 것은 위험하다. 앨범의 모티브가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1번 트랙은 앨범에 담겨지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9번 트랙을 제외한 나머지 7개의 트랙은 모두 2010년에 쓰여졌다.

 

정태춘이 쓴 앨범의 북클릿에 있는 글에는 그가 직접 곡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짤막하게 써둔 것이 있다. 사실 그는 예전부터 이렇게 곡을 만들어왔던 사람이었다. (박은옥은 자신의 간청에 앨범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한 번 마음 먹으니 뚝딱뚝딱 곡을 써 내는 것이 자신의 남편이지만 참 신기하고도 부럽다고 얘기했다.) '서울역 이 씨' 같은 경우엔 어느 겨울에 서울역에서 죽은 한 노숙자를 생각하면서 쓴 것이고, 2번 트랙인 '저녁 숲 고래여'는 비 내리는 초겨울 저녁에 부부를 울주 반구대로 데려다 줬던 백무산 시인을 생각하며 썼으며, 3번 트랙인 '강이 그리워'는 가을에 지리산에 사는 이원규 시인의 집에 다녀와서 썼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총체적인 견해에서 쓸 곡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들은 피상적이지 않고 손에 잡힐 듯 세밀한 가사와 듣는 것만으로도 단박에 곡의 정서를 파악할 수 있는 명확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이 점 때문에 이들 부부의 음악은 절대 다른 일 하면서 한 귀로 듣고 흘리게 되지 않는다. 물론 그러지 말란 법도 없지만, 노래에 관해 무언가를 생각하려면 결국 멜로디와 곡의 내용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의 노래가사는 절대 함부로 넘길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 노래 가사.. 가사야말로 이번 앨범의 가장 큰 장점이다. 냉정히 보자면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는 <정동진 / 건너간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가 보여준 멜로디 구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얼후, 록 기타, 현악, 신디사이저 등의 다채로운 구성을 가졌던 지난 앨범들과 달리 이번 11집은 딱히 전작들을 뛰어넘거나 차별되어 다룰만한 개성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일단 10년동안 앨범을 기다려왔던 청자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실망스러울 법도 하다. 그러나 정태춘과 박은옥은 적어도 이번 앨범에선 이전 앨범을 뛰어넘는 것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보인다. 사실 '서울역 이 씨' 는 소재로 따질 때는 이전 앨범에 더 어울리는 편이지만, 가사 자체는 이전 앨범들이 보여줬던 시의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2번 트랙인 '저녁숲 고래여'는 현실에 발을 대고 있지만 거의 신화적인 성격을 띄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이것은 음악적 퇴보라기 보다는 이들 부부가 오히려 과거로 돌아갔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예전부터 부부의 곡을 만드는 사람은 정태춘이었고, 각자 솔로 활동을 할 때도 박은옥의 곡을 정태춘이 만들어 줬었으니 그의 솔로 1집이었던 <시인의 마을>이나 2집인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의 감성에 더 가깝게 되돌아 갔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다시 음악 세계의 원점으로 되돌아 가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토양을 다시 일궈내고자 한다. 무언가에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고향 / 원점으로 되돌아 오려는 것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되돌아 온다면 그것은 그저 위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이다. 적어도 인터뷰를 통해서 '절망의 밑바닥까지 갔다온 심정'을 느꼈다는 정태춘에 한해서라면, 그는 이 앨범과 관련된 어떤 인터뷰나 콘서트를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지만 박은옥의 부탁으로 결국 한 것을 보면 아주 조금은 그러한 의사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앨범은 적어도 내 생각에 한해 얘기하자면 부부가 여태까지 불러 온 모든 곡들을 능가하는 아름다운 가사를 가진 곡들로 포진해 있다. 멜로디 역시 딱히 새로운 부분은 없을지라도 언제나 그렇듯 평균은 한다. 박은옥이 부르는 3, 4번 트랙인 '강이 그리워'나 '꿈꾸는 여행자'에 이르면서부터 앨범은 이전 앨범들의 매력이었던 지역과 일상을 세세하게 드러내는 것에서 다소 탈국적화된 모습을 보이는데, 거기서 보여주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무시무시할 정도의 전율을 안겨준다. 이것은 사실 이전 앨범과 이번 앨범의 경계에 서 있음을 명확히 나타내주던 1번 트랙인 '서울역 이 씨'부터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한데, 적어도 그 앨범의 가사에 따르면 '마지막 객차 빈자리에 깊이 파묻혀 / 어느 봄날 누군가의 빗자루에 쓸려 / 소문도 없이 사라져 주듯이' 로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음의 냉랭함도 다루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강이 그리워'에서 박은옥은 이렇게 노래한다. '너는 가늘게 반짝이며 밤바다로 가고 / 네가 떠나간 여울목에 다시 네가 있는데 / 산은 여기저기 상처 난 길들을 지우고 / 가난한 시인네 외딴 빈 집 개만 짖는데' 라고. 부부는 이원규 시인의 집에 놀러가서 본 풍경을 굳이 아름다운 쪽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부부는 지리산에서 살고 있는 한 시인의 유유자적한 삶을 보며 같은 예술가로서 느끼는 로망과 더불어 그렇게 살아가는 것으로 인해서 감내해야 하는 순간들을 모두 봤을 것이다.

 

이는 독특하다. 사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트랙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를 부르기 전까지 박은옥은 정태춘이 부르는 성향의 곡에 어지간해서는 동참하지 않았다. 사실 이 부분에 관해선 박은옥 본인은 언제든지 동참할 의사가 있었지만, 남편의 입장이기도 한 정태춘은 아내가 괜히 더 무거운 짐을 질까 염려되었던 것이 커서 일부러 피하게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침내 박은옥이 사회를 향해 발언하는 정태춘의 또다른 음악세계에 동참했을 때, 그녀의 목소리도 더이상 서정미에 기반한 기쁨과 슬픔만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부르는 곡에도 어떤 피상적인 무언가보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 무언가를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앨범에서 그리 크게 선호하는 곡은 아니지만 '꿈꾸는 여행자' 같은 경우에도 곡 자체는 샹그릴라 (제임스 힐턴의 소설인 <잃어버린 지평선>을 통해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현재 중국 윈난성 정부가 디칭 티벳 자치주를 그 곳이라 주장하기는 했지만 소설 속에서는 히말라야 산맥에 있고 불로불사의 생명을 살 수 있는 이상향 같은 곳으로 그려진다.) 에 관한 이야기지만 곡 자체에서 명확하게 '고비 사막'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박은옥이 노래를 부르는 곡은 대개 현실적인 삶의 무게보다는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성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해내곤 했었다. 그래서 만약 그녀가 부르는 곡에 현실적인 지명이 등장한다면 그로 인해 두려운 부분이 하나 생기게 된다. 그녀의 노래 속 인물들과 이야기가 현실에 대입되면 과연 그것이 아름다운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현실의 지리멸렬함이고, 그로 인해 노래가 아름답다기 보다는 이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고려해서일까. 멜로디도 비슷하고, 박은옥의 목소리도 예전과 다를 것이 없지만 가사는 아름답고 시적인 표현 중에도 어둠을 담고 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그로 인해 마냥 위안이 되려 하지 않는 시도가 이전 앨범보다도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2번 트랙인 '저녁숲 고래여'에 관해서도 정태춘은 옆에다 묵묵히 써 놓는다. 우리는 그 날 고래를 찾지 못했다고. 이전과는 다른 흐름의 앨범을 만들어냈지만, 적어도 우리가 느끼고 본 것을 청자에게 속이지는 말자. 아름다움에는 어느 정도의 가장, 혹은 과장이 필요한 법일 수 있지만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는 오히려 담백해지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이것은 격렬했던 부부의 지난 10년을 거의 완전히 청산하게 되는 의미가 된다.

 

이 앨범의 압권은 7번 트랙인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부터 9번 트랙인 '92년 장마, 종로에서' 까지 이어지는 순간들이다. 정태춘이 온전히 박은옥만을 생각하며 만든 헌정곡이라던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는, 버스라는 요소 때문에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와 이어지는 곡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반대로 이 트랙은 모든 상황이 끝이 나고 막차를 타고 돌아온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기분 좋게 돌아온 것일까? 박은옥의 목소리 톤을 생각하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멜로디 역시 패배와 비애의 감정을 다루고 있다. 박은옥에 대한 헌정곡이라지만 정작 그녀는 곡을 녹음할 당시,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을 생각하며 불렀다고 한다. 그와 정 반대로 정태춘이 부른 8번 트랙이자 윤도현, 강산에, 김C가 코러스를 도운 '날자, 오리배'는 말 그대로 오리배가 하늘을 나는 곡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의 곡은 사물과 지역을 세세하게 관찰하는 정태춘 특유의 시선과 어우러져 마치 토착신앙으로 여기는 것 수준의 무게감을 얻는다. 아마 나물 먹고 소주 마시면서 지랄지랄 외치고 부를 수 있는 노래인 6번 트랙인 '섬진강 박 시인'이 있긴 하지만 그 곡도 처연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 반대로 사뭇 비장해 보이는 이 곡은 어찌하다 보니 이 앨범에서 가장 흥겹게 들을 수 있는 곡이 된다. 그리고 전혀 다른 성향과 정서를 가진 이 두 곡은 마지막인 9번 트랙, '92년 장마, 종로에서'로 완전히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인상적인 것은 왜 10년만에 돌아온 부부의 신보에서 마지막 트랙을 8집인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수록곡으로 했는가 하는 것이다. 정태춘, 박은옥 부부는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를 발표하기 전에 <20년 골든 앨범>을 발표하면서 이전에 발매했던 모든 앨범들을 절판시킨 바 있다. 그 앨범들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는 것이 이유에서였다.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정태춘, 박은옥 7집' 대신 '정태춘 5집'으로서 발표한 <아! 대한민국> 이었고 이 앨범의 곡들은 골든 앨범에 수록되지 않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살려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순 없다. 꺾이고 쓰러져도 항상 다시 일어나서 위험한 선두로 나가서던 사람이 어느 순간 탈진해 있으면, 그것은 그 사람이 정말 힘들어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8집에 수록됐을 때의 곡에서 정태춘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고 사실상 박은옥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11집에서 다시 녹음된 곡에서 그의 목소리는 미약하고 회한을 느낀다는 느낌마저 준다. 사실 이는 곡 자체의 연출적인 면이기도 하다. 다시 녹음된 곡은 중반부부터 마치 다시 기운을 차리겠다는 듯이 감정을 격앙시킨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8집의 녹음분과는 다르게 박은옥의 목소리가 정태춘의 목소리만큼 명확히 들려온다는 것이다. 정태춘은 이 노래를 다시 녹음한 이유에 관해서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이 땅의 순정한 진보 활동가들과 젊은 이상주의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또 부르게 된 것이라고.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정태춘 본인에게도 다시 기운을 내게 하기 위해 어떤 위로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전과 다르게 중반부 이후로 실질적으로 곡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박은옥이다. 맑은 목소리의 그녀는 이 곡에선 본의 아니게 정태춘의 목소리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저음이 된다. 꼭 이 앨범에서 '시의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전 앨범과 같은 시의성'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는 그 주제를 노래하는 주체가 정태춘이 아닌 박은옥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곡은 정태춘이 쓰고 노래는 부부가 같이 부르지만 이번 앨범이 유독 독특하게 느껴지는 건, 단지 간만에 나와서가 아니라 앨범 전체에 박은옥의 시선이 느껴지고 부부의 노래 포지션이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박은옥을 위해 만들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래서 이 곡은 사회적인 면보다는 '포크음악'으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는 전작들과 꼭 같다고 볼 수 없고, 분명 나름의 변화를 모색한 앨범이다. 그리고 지금 정태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작업을 계속 하는 것에 환멸을 느낀 그를 다시 '음악인'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볼 때 동반자이자 스스로를 정태춘의 음악적 팬이라고 지칭하는 박은옥의 역할이 참 크다. 언제나 함께 서로를 끌어안고 가던 부부였지만 그만 남편이 탈진하고 말았다. 하지만 남편이 쓴 '시'는 지금도 그 힘이 유효하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그 가능성을 믿고 있다. 이제는 그녀가 손을 잡고 부축하며 갈 것이다. 남편을 다시 음악인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는 11집이자 동시에 1집이다.

 


* 꿈꾸는 여행자 *


고비 사막에서 날아온 엽서 한 장
메마른 글씨들만 흩날리고
어린 낙타를 타고 새벽길을 떠나
그대 모래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창의 커텐을 열고 잠시 묵상 중이예요
여긴 너무 멀고 먼 샹그릴라
치즈와 차와 술과 노래 소리들
더 이상 외로운 여인들은 없죠


어느날 여행자들이 찾아와
구슬픈 바닷 새들의 노래를...


사막이 끝나는 높은 모래 언덕, 멀리
황홀한 설산들이 손짓해도
부디 그 산을 넘지 마, 넘진 마세요
그 너머에도 바다는 없죠
 
어느 밤, 차가운 별들의 시내를 건너시면
그 푸른 빛을 여기 띄워주시고
행여 별빛 따라가다 바달 만나도, 부디
거길 건너지는 마세요


또 어느날 여행자들이 몰려와
또 다른 세계의 달빛 노래를...


그대의 샹그릴라는, 음 어디
지상에서 누구도 본 적 없고
세상 끝 바닷가 작은 모래톱 만나면
거기 누워 길고 긴 꿈을 꾸세요


여기 다시 돌아오시지는 마세요
꿈꾸는 그대, 그리운 여행자

 

 

 


* 날자, 오리배...*

 

새벽 옅은 안개 걷히기 전, 보문호에 가득하던 오리배들 떠나갔다

벌써 영종도 상공 또, 단둥 철교 위를 지나 바이칼 호수로 간다

길고 아름다운 날개짓, 부드러운 노래로 짙푸른 창공을 날며

거기서 또 수많은 오리배 승객들과 인사하고 멈추었다 날아간다

비자도 없이 또, 국적도 없이 그 어디서라도 그 언제라도

얕은 물 가에 내려, 그 땅 위에 올라가 일하고 그 이웃들과 하나 되리라

 

굳센 바이칼의 어부들, 인근의 유목민들이 그들 오기 기다리리라

이젠 거길 그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의 오리배로 에게해로 떠나리라

자작나무 숲의 어린 순록들이 작은 썰매를 끌고 와 그들을 영접하고

저녁 호숫가 잔디 위 따뜻한 모닥불 가 유쾌한 만찬이 있으리라

비자도 없이 또, 국적도 없이 그 어디서라도 그 언제라도

맑은 물 가에 내려, 그 땅 위에 올라가 일하고

거기 경건한 숲들과 하나 되리라

 

해질 녁, 에게해 진흙 바다 오래된 말뚝들 사이 그들이 또, 내리리라

오후 내내 레이스를 뜨던 여인들과 귀가하던 남정네들 그 바닷가로 나오리라

그날, 거기 일군의 오리배들 탕가니카로 떠났고 집시의 선율들은 남아

마을에 저녁별 질 때까지 그들의 창 가에 와인 향처럼 흐르리라

비자도 없이 또, 국적도 없이 그 어디서라도 그 언제라도

얕은 물 가에 내려, 그 땅 위에 올라가 일하고 그 별들과 하나 되리라

 

그들 또, 아프리카 호숫가 작은 샛강에 내려 거대한 일출을 보리라

주린 채 잠들지 않고 총성에 그 잠 깨지 않고 아이들, 새벽 강물을 마시리라

늙은 기린들도 뚜벅뚜벅 그 물가로 모이고 밀림의 새들은 날고

세계 어디에도 이들보다 흠, 덜 행복한 사람들은 없으리라

비자도 없이 또, 국적도 없이 그 어디서라도 그 언제라도

맑은 물 가에 내려, 그 땅 위에 올라가 일하고 그 대지와 하나 되리라

 

그날 또, 일군의 오리배들 티티카카 호수에 내리리라

그 수초의 섬 위로 오르리라

거기 또, 오리배들

정오의 하늘에 가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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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10, 26 / 2012, 11, 3)

 

~ TRACKS

1. Catch Me

2. 인생은 빛났다

3. Destiny

4. 비누처럼

5. I Don't Know (Korean Version)

6. 꿈

7. How Are You

8. Getaway

9. I Swear

10. Gorgeous

11. Good Night

 

1CD / 41:30 Mins / 레이블: SM 엔터테인먼트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용산구에 사는 김용산입니다. 야아~ 이태원 프리덤!"
"안녕하세요. 종로구에 사는 마종팔이에요."

 

- 2012년 10월 22일 마봉춘 FM4U 유세윤 & 뮤지의 <친한 친구>에 4000번으로 전화연결 해서 신상을 속인 동방신기. 그러나 하자마자 DJ에게 "감히 나를 속이려고 그래?", "야.. 이거.. 분명 못 웃기는 개그맨들일텐데.. 누군지 알아내야 되는데.." 라는 얘길 들었음.

 

...

 

언젠가 샤이니의 '누난 너무 예뻐'의 음악방송 공연분을 다시 보면서 아이돌 (보이 밴드, 걸 그룹) 의 음악을 듣는 것은 다른 음색과 외모를 가진 여러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노래와 춤을 구사하는 것을 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까지 뒷받침 되면 더 좋고. 물론 여러명이 하나의 음악을 작업하는 것을 보고 싶다면 록 밴드, 성가대 등이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록 밴드는 보컬리스트가 따로 있고, 성가대는 모두 일률적이거나 그 수가 너무 많아 각각의 목소리를 듣기가 힘들다. 최소 두 명, 많으면 두 자리 이상 넘어가는 멤버 수에 경악하고, 솔직히 20여분의 곡들을 부르는 것도 아니고 주로 2~3분 분량의 곡들을 불러서 한 명당 몇 소절 부르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미 인순이 누님이 'Ring Ding Dong'을 혼자 다 부르고 춤춰서 '샤이니 대학살'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팬덤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그런 이유들이 아이돌만의 큰 고유 특성이 아닌가 싶다. 물론 지금은 더이상 예전처럼 마음 편하게 립싱크를 하지 못하고, (예전 김비서 방송국에서 <가요 톱 10> 해 주던 시절에는 아예 화면 위에 아날로그 테이프가 돌아가는 애니메이션을 삽입함으로 인해 대놓고 립싱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지만.) 아무리 짧은 소절일지라도 그 순간의 가창력을 평가하는 시대가 왔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동방신기에 관련된 포스트인데 왜 샤이니 얘길 한 거지.. 으음..

 

한 달 전에 5집인 <Keep Your Head Down> 리뷰를 끄적거리긴 했지만, 그 앨범은 2011년 1월과 3월에 각각 발매된 것이고 이번 앨범은 1년 6개월여만의 복귀였다. 1년은 커녕 5~6개월 만에 신보를 내기도 하는 아이돌 음악계에서 정규앨범을 발매하기 위한 이 정도의 공백기는 꽤나 큰 편이다. 심지어 지난 앨범은 2년 3개월만의 복귀 아니었던가.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아이돌들이 출현하는 상황에서, 미디어에 어떻게든, 그리고 가능하면 좋은 인상으로 노출되는 것이 길지 않은 아이돌로서의 인생에서 어떠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수단이다. 노래해야 할 가수임에 분명한 그들은 절박할 정도로 무리한 라디오와 TV 가요, 예능 프로그램, 드라마와 영화의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다. 그것이 메이저에서의 인기를 얻는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음악인의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포부를 품고 기획사의 연습생으로 들어간 이들에게 과연 장기적으로 볼 때 도움이 되는지는 여전히 회의적이란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실제로도 끼친 영향이 썩 좋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눈에 띄는 매력의 앨범들도 있지만, 사실상 아이돌 음악은 아예 그 장르의 범위를 좁혀버림으로 인해서 대부분이 천편일률적인 인상을 주고 말았다. 아이돌의 비극은 그 좁은 범위 안에서 정원초과를 막기 위해 기획사가 만들어낸 인상으로 자신을 투영하며, 상대를 밀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쟁 속에서 그들은 아이돌로서의 인생 즉, 그 시간을 '흐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야 한다'. 이건 뭐, 정치판이다. 동방신기는 그 아이돌 시장에서 10여년에 가까운 시간을 '견뎌오고' 있으며 중간에 멤버의 변동이 있기까지 했다. 4~5년에 한 번씩 앨범 내는 아티스트도 있는 판에, 사실 아무리 강산이 한 번 변한다쳐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싶지만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기획사가 형성한 인상과 실제의 자신을 넘나들며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6집 앨범의 타이틀곡인 'Catch Me' 를 듣고 처음 느낀 것은 당황스러움이었다. 첫 인상은 곡이 그냥 기본 정도는 한다는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러나 안무가 굉장히 멋졌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뮤직 비디오를 보고 나서 이걸 어떻게 라이브 무대에서 할까 궁금했는데, 거의 위화감이 없다는 점 때문에 보고 나서 또 깜짝 놀랐다. 본인들이 창작한 안무는 아니겠지만, 그것을 소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들은 거의 전문 안무가나 다름없다. 그런데 의외로 그 안무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예상 외로 뭔가 웃음을 유발하는 반응도 많이 이끌어 냈다. 하다못해 UV와 한 번 붙어볼만 하겠다는 댓글도 봤었는데 (UV의 음악적 역량은 분명히 수준 있고, 또 내가 그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방신기가 UV처럼 안무에 유머를 담아내는 쪽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안무를 보고 굉장히 감탄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이 꽤 당황스러웠다.

 

동방신기의 'Catch Me' 의 안무는 샤이니의 곡인 'Sherlock (Clue + Note)', f(x)의 곡인 'Electric Shock', 그리고 EXO-K의 곡인 'History' 등을 생각하면 그들의 소속사인 SM의 안무가들이 의도인지 아니면 재활용을 한 결과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확실해 보인다. 꾸준히 보여주고 연구해온 '연결'의 안무 방식이 다다를 수 있는 현재까지의 거의 최종형태에 가깝다는 것이다. 위에서 거론한 곡들 중에서 'Electric Shock', 'History' 같은 곡에서 연결은 사실 거의 곡의 본격적인 모티브라고 하기에는 사실 일부를 표현하고 멈춰버리는 경향이 강했다.

 

 * 조수현이 감독하고 샤이니가 부른 'Sherlock (Clue + Note)' 의 뮤직 비디오 중에서 *

 

여기서 주목할만한 결과물은 'Sherlock (Clue + Note)' 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셜록은 실제로 탐정인 셜록 홈즈의 스타일에 가까운 이야기였고, 안무는 탐정이 수사를 위해 단서를 '연결' 하고, 사건이 벌어진 공간 (아이돌이기 때문에 폭행, 강간, 살인 같은 시각적으로 자극적인 범죄는 아니겠지만.) 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샤이니의 곡은 단서의 연결과 더불어 탐정이 이곳저곳을 오가는 순간들도 표현한다는 느낌을 줬기 때문에 연결의 범위를 외적으로 잡을 필요가 있다. 물론 멤버 수의 차이로 인해 주는 느낌도 있을 것이다. 다섯명이 쾌활하게 발걸음 하듯 앞으로 뛰어오는 안무 같은 것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는 얘기다.

 

반면 'Catch Me'는 멤버 두 명을 비롯하여 그들을 보조하는 다수의 백댄서들이 웬만해서는 잘 거리를 두지 않으며, 심지어는 거의 달라 붙다시피 해서 하나의 신체부위를 표현하곤 한다. 샤이니의 곡과 달리 동방신기의 곡은 개인적 감정을 많이 다루고 있다. 그 근원은 모든 노래의, 동시에 아이돌 음악의 기본 레퍼토리인 사랑인데 오히려 표현 방식은 샤이니의 것보다 더 복잡하다. 거기에는 단서, 혹은 수사로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두 남녀의, 혹은 남남의, 여여의 희로애락의 감정 (홍준호는 개방적입니다.) 을 모두 다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간에 마치 백댄서와 동방신기 멤버들의 팔이 뒤엉켜 하나의 거대한 팔이 움직이듯 하는 순간, 각 멤버들이 백댄서의 손에 이끌려 뒤, 혹은 앞으로 넘어지듯 쓰러질 때의 순간들이 등장할 때는 거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안무는 단순히 가사와는 상관없는 군무를 넘어서서 곡 자체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사랑하는 상대방과 소통이 되지 않아 느끼는 상실감을 맥 없이 쓰러지는 것으로 표현할 때, 가지 말라고 소리칠 때 다시 일어나는 순간, 그리고 격앙된 감정으로 무언가를 말해보라고 할 때 남근처럼 솟아오르는 팔까지. 전 앨범의 타이틀곡이었던 '왜'의 안무가 두 멤버가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을 서로 보완해가며 채우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앨범의 안무는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결국 가수의 결판은 본인이 만든 앨범에서 난다고 생각하는지라, 안무를 빼고 들으면 타이틀곡인 'Catch Me'는 어딘가 심심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실 예전의 동방신기가 불렀던 'Hug'나 'Tri-Angle', 'My Little Princess' 같이 부담스럽지 않고 담백하다는 것이 지금 현재의 미덕이지만, '주문'처럼 기괴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것만은 알고 가'처럼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인상적이지 않다. 아니.. 그.. 팔 올릴 때 괴물의 괴성처럼 들리는 그 괴이한 괴음은 뭐냐는 거지. 정말.. 유영진 작사 + 작곡가는 심창민에게 계속 샤우팅을 요구하고, 곡을 몰아부치듯 진행하며 덥스텝 비트를 이용한 브릿지 부분은 길다. 나쁘지는 않은데 평소에 해 왔던 것들과 하지 않았던 것들, 트렌드였던 것들을 뒤섞어 덕지덕지 붙여놨달까. 동방신기를 생각하면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다. 곡은 안무에 기대며 살아남아 버렸다.

 

 

  * 박준영, 손영이 감독하고 동방신기가 부른 'Catch Me'의 뮤직 비디오 중에서 *

 

그래서 'Catch Me' 라는 곡보다는 <Catch Me> 라는 앨범 자체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곡으로서의 'Catch Me'는 단독으로 들었을 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하지만, 앨범 전체로 봤을 때는 유달리 떨어지거나 튀지 않은 채 전체 구성에 무난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미덕이 존재한다. 형식적인 댄스 팝 음악 몇 곡, 형식적인 발라드 몇 곡을 넣어 부조화를 일으켰던 대다수의 아이돌 앨범들처럼 이 앨범 역시 기본 구성은 그런 식이지만 그것이 부조화스럽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전 앨범인 <Keep Your Head Down> 에 관해 내가 리뷰에서 토로했던 아쉬움은 어떤 곡들은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고, 동떨어 졌다는 점에 잇었다. 사실 이건 리패키지 앨범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기존 앨범으로 이야기해도 사실 사운드트랙 앨범에 있어야 할 '아테나'가 뜬금없이 정규 앨범의 마지막에도 포함되어 있던 것은 조금 의아했다. 물론 <Catch Me> 도 일본에서 발매된 앨범, <TONE>의 곡 중 하나인'I Don't Know' 가 한국어 버전으로 실려있긴 한데, '아테나' 보다는 앨범에 훨씬 잘 어울리게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앨범 역시 비교적 좋게 느꼈다고 썼지만, <Catch Me>의 경우에는 아이돌의 정규 앨범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거의 벗어났다는 점에서 그보다 큰 가치를 지닌다. 흔히 아이돌 기획사는 타이틀곡만 포함된 싱글, 혹은 간소한 구성의 EP 앨범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막상 정규 앨범을 발매할 순간이 오면, 먼저 발매된 싱글이나 EP 앨범의 곡들을 그대로 포함시켜 버리거나 혹은 비슷한 스타일의 다른 곡들을 대충 만들어 배치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심하게 말하면 그냥 CD의 용량만 채우려는 속셈이다. 심하게 말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안일한 앨범은 음악을 듣고 나면 그 안일한 작업풍경이 다 보이는 법이다. 철저한 기획 하에 만들어지는 아이돌 음악 산업에서 가수들이 제 역량을 발휘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아니면 애초에 그런 역량 자체를 발휘할 수 없는 이들을 가수로 만들었거나.) 구조 탓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최종 결과물에 동정만을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좋은 타이틀 곡 몇몇에 용량 채우기 식으로 만들어진 곡 대다수.

 

헌데 <Catch Me>는 41분 30초의 시간동안 전곡이 모두 상당히 안정적인 품질을 보장하고 있다. 어떤 곡들은 그저 안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놀라움의 감정마저 전해주기도 한다. 이는 멤버의 수가 줄고 나서 오히려 아이돌 그룹 특유의 퍼포먼스보다는 멤버 개인의 음악적 역량을 생각해주게 만들었던 지난 앨범부터 느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앨범이 지난 앨범보다 더 유리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첫째는 대중은 예전만큼 멤버 불화설 등의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현재 이들이 퍼포먼스와 함께 활동하는 곡이 'Catch Me' 와 'I Don't Know' 정도라는 것이다. 첫번째 요소를 이용하는 능력이 있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이슈를 만들고 이득을 취하는 쪽은 기획사이지 동방신기의 두 멤버가 아니다. 그래서 대중들이 예전만큼 그 이슈를 거론하지 않는 것은 이 앨범을 바라보는 시선의 왜곡을 최소화 시킨다. 그리고 두번째 요소를 보며 대중의 시각적 잔상은 그만큼 약해지며, 동시에 앨범이 지닌 청각적인 면에 더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1번 트랙부터 2번 트랙인 '인생은 빛났다' 까지는 일단 기본은 하고 담백하다는 인상이다. (대신 '인생은 빛났다'는 정윤호로 하여금 흑역사로 취급될 수 있는 '인생의 진리' 랩을 생각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3번 트랙인 'Destiny' 부터는 뭔가 재밌다는 인상을 준다. 1, 2번 트랙을 지배했던 덥스텝 비트가 가라앉고, 미성숙했던 초기 앨범에서는 구현하지 못했던 정욕적인 달콤함이 이 트랙에 있다. 사랑에 관련한 곡을 예전처럼 일부러 더 센 느낌으로 불러서 부족했던 남성성을 보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윤호와 심창민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하모니를 이뤄 곡을 진행하는데, 여기서 이상하게 아카펠라를 애용하던 초기 시절과는 다르게 성적인 기대감과 긴장감이 충만하게 느껴진다. 허나 그것이 자극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4번 트랙인 '비누처럼'이나 7번 트랙인 'How Are You' 같은 류의 말랑말랑한 감성을 가진 발라드곡과 위화감을 가지지 않는다. 동방신기는 이제 2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더이상 10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더이상 말랑말랑한 감성의 사랑이야기를 노래할 수 없다. '하루만 네 방의 침대가 되고 싶다'는 말도 더이상 동화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육체적 매력만을 키운다고 해서,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줘 가며 없는 무게 짜 낸다고 해결될 문제 역시 아니다. 이런 현실적인 점이 기획사인 SM으로 하여금 더이상 예전처럼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없게끔 만들었을 수도 있다. 기묘하게도, 그런 통제의 손길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진 것이 이 아이돌에게 더욱 쾌적한 숨통을 트이게 해 준 것이 됐다.

 

가장 의외인데, 그래서 좋은 곡은 5번 트랙인 'I Don't Know' 와 8번 트랙인 'Getaway' 다. 전자의 경우에는 작년에 일본에서의 싱글로 먼저 공개된 적이 있는데, 어감 상 한국어가 더 잘 어울리며 펑키한 느낌의 기타리프가 있는 록 사운드가 어떤 선입견을 버리고 음악에 몰입하게 해준다. 인피니트가 '다시 돌아와'로 데뷔했을 때를 생각나게 만든다고나 할까. 록 사운드가 아이돌 음악을 좀 더 세련되게 보이게 만들어주는 대안책이 되는 듯하다. 날카롭지만 흥겨운 'I Don't Know' 와 달리 'Getaway'는 몇 배는 더 육중하다. 그러니까 이 쪽은 거의 헤비 메탈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멤버 수가 많을 때는 당연히 대인원이 하나의 곡을 잘 꾸려가기 위해서 하나의 기계부속처럼 역할을 맡아 빈틈없이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감탄을 일으킬 수 있지만, 동시에 개개인의 능력을 그만큼 제한하는 원인이 된다. 그런데 수가 적어진 만큼, 다른 멤버들이 하던 역할도 모두 감당해야 하고, 그 결과로 댄스 팝, 혹은 발라드 정도에만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멤버들이 록 보컬리스트의 가능성도 충분히 갖고 있다는 발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저음의 목소리가 인상적인 정윤호가 의외로 그로울링 록 보컬리스트로 칭해줄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UV의 멤버이기도 한 '건방진 도사'의 말에 따르면 여태껏 '고음과 분노를 맡아 왔었던' 심창민의 샤우팅은 이전 곡에서는 하이라이트로 넘어가기 위한 의무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여기서는 의무가 아니라 이 메탈 장르의 곡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팬들에게조차 이전과는 다른 인상을 새로이 심어주는데 성공한다.

 

생각해보니 예전 앨범인 <"O"-正.反.合.> 에서 이런 시도를 먼저 듣기는 했었는데, 그 시기의 음악은 사실상 지금에 비교하면 멤버들의 역량 부족에 SM 특유의 오버 액션이 과한 편이었다. 앨범과 타이틀곡의 제목은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정반합 개념을 야심차게 패러디 해 놓고, 그걸 감당 못한 셈이다. 지금. 지금이 딱이다.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이 딱. 그렇다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멈춰버린다면 결론적으로 퇴화하는 꼴이 되겠지만, 들으며 이리도 간절하게 생각해 본 것도 간만이다. 지금이 딱 좋다는 생각. 공백기라도 있으면 모를까. 어떻게든 인기로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식의 퀄리티의 음악으로라도 끊임없이 얼굴을 보여서 그런지, 아이돌 음악이 이 정도에 이르기 전까지 꽤나 그 시간이 참으로 감상자로서는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앨범은 11번 트랙인 'Good Night' 으로 마무리된다. 'Catch Me' 에 이은 유영진의 곡이지만 이 곡이 훨씬 인상적이다. 보통은 현악기로 이런 식의 곡을 만들 것이고, 이미 다른 트랙에서 그런 방식을 했지만 이 곡은 일렉트로니카다. 하지만 이 곡은 앨범의 다른 곡들이 갖고 있지 않았던 '음미'를 갖고 있고, 그래서 CD가 끝이 난 뒤에도 강한 여운이 남는다.  

 

솔직히 내게는 지금 이 앨범이 현재의 동방신기에게 최고작으로 다가온다. 지난 앨범보다 더 말이다. 타이틀곡만 듣고 뭔가 좀 밋밋하다고 생각했던 건 완벽한 기우였다. 설마했는데 하나의 '앨범'으로 놀라게 할 줄이야!  그러나 <Catch Me> 로 복귀한 이후에 사실상 동방신기의 음원 성적은 그리 좋지 않다. 처음 복귀할 때야 높았지만 11월 초인 현재, 가온차트를 기준으로 할 때 타이틀곡인 'Catch Me' 는 지난주보다 14위가 내려가서 47위에 머물고 있다. 다른 기획사에 스스로 걸어들어간 싸라는 성을 가진 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이미 국가 단위로 휩쓸고 있고, 또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방영하면 그 음원이 강세이니 꼭 그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앨범이 대중적으로 성공을 하고 있지 못한 것은 조금 안타깝게 느껴진다. 앨범성적은 그나마 팬덤에 의한 것인데, 정확히 이제는 이들을 아티스트로 칭해도 손색이 없음에 불구하고 그러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아이돌 쪽으로 치우쳐진 현재의 음악계에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아이돌인 동방신기가 언제부터인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일게다. 물론 자꾸 시장현실, 기획사 등을 예로 들어가면서 마냥 동정하는 식의 표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런 표현을 쓰는 건 기획사에 의해서 앞으로 이런 앨범에서 더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어 생긴 걱정 때문이기도 하다. 자본의 논리. 그것이 지금 앨범의 빛나는 성취를 다음 앨범에서 꺼지게 만들까하는 그런 걱정. 그런 걱정을 하게 만들 정도로 이번 앨범은 내게, 동방신기라는 아이돌을 생각할 때 있어 감히 지금까지는 최고라고 치켜세울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이번 앨범 좋다.

 

 

p.s.1 - 2번 트랙인 '인생은 빛났다'를 듣고 있으면 좀 재밌게 느껴지는 어감이 있습니다. '다들 떠들어댔지 / 댔지 / 거기까지라고 / 그 때 난 맹세했지 / 했지' 라는 가사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그냥 듣고 있으면 '떠들어댔지 / 댔지', '맹세했지 / 했지' 가 '떠들어댔제', 혹은 '맹세했제' 처럼 들립니다. 경상도 사투리, 혹은 전라도 사투리로 된 곡을 듣는다는 느낌이랄까요. 동방신기 멤버 중 정윤호가 전라도 광주 출신이니 그것이 반영된 것인가 하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꼭 DC 인사이드에서 어떤 갤러들이 프레디 머큐리 님의 가창력을 찬양하며 '프레디 성님은 터질듯한 화산이셨제' 라고 말하는 느낌도 들더군요. 문제가 있다면 DC에서는 그것이 게이 비하 발언으로 이어지면서 '하지만 뒷구멍도 터지셨제' 따위로 흘러가기도 했다는 것이지만.

 

p.s.2 - 커버 사진을 저것으로 골랐습니다만, 실제 앨범이 생긴 건 저것과 다릅니다. SM의 장삿속에 입각하여 검은색과 붉은색 버전으로 발매됐고, 커버나 내부가 홀로그램 처리가 되어 있어요. 홀로그램은 직접 봐야 멋있지, 사진 찍으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저 커버로 했습니다. 저것도 디자인이 괜찮지요.

 

p.s.3 - 제게 이 앨범을 선물해주신 펑크졲님께 끄적임을 바칩니다.

 

 

* Good Night *

작사: 유영진

작곡: 유한진, 유영진

 

1, 2 잠을 청해요 이제 그 눈물은 닦고 두려워도 하지 말고
밤새워 그대 곁을 내가 지켜 줄게요 내 공주님 이제 깊은 잠에 빠져요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하루였나요? 상처가 될 말을 누군가가 했겠죠
아프지만 잊게 될 테니

 

아마 내일은, 내일은, 내일은 모든 게 다 오늘보다 괜찮아질 거라 약속해
이제는 걱정 말고 내 품에 안겨 Baby, 아이처럼 깊게 잠이 들어요
Baby, Dreamin' Dreamin' Dreamin' 오늘밤엔 행복하게 웃는 꿈만 가득할 테니
미소 짓는 그대 모습 내일은 더 잘 될 거예요 Have a good good night
(Sleep Tonight!)

 

3, 4 뒤척이는 그대 모습 안쓰러워 더 따듯하게 이불을 덮어주고
숨을 죽이며 사각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게

상상도 못할 만큼 복잡한 이 세상이 여리고 착한 그댈 무섭게 만들겠죠
괜찮아요 내가 앞에 설게요

아마 내일은, 내일은, 내일은 모든 게 다 오늘보다 괜찮아질 거라 약속해
이제는 걱정 말고 내 품에 안겨 Baby, 아이처럼 깊게 잠이 들어요
Baby, Dreamin' Dreamin' Dreamin' 오늘밤엔 행복하게 웃는 꿈만 가득할 테니
미소 짓는 그대 모습 내일은 더 잘 될 거예요 Have a good night

 

그댄 절대 약한 사람이 아닌걸, 세상도 알겠죠
옆을 지켜주고 응원할게, 힘을 내줘요. With My Love

 

아마 내일은, 내일은, 내일은 모든 게 다 오늘보다 괜찮아질 거라 약속해
이제는 걱정 말고 내 품에 안겨 Baby, 아이처럼 깊게 잠이 들어요
Baby, Dreamin' Dreamin' Dreamin' 오늘밤엔 행복하게 웃는 꿈만 가득할 테니
미소 짓는 그대 모습 내일은 더 잘 될 거예요 Have a good good night

1, 2, 3, 4. 1, 2, 3, 4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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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반양장)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관심 밖이다' / '참석한 적이 없다' / '행복한 세월이었다'..

이 작품은 어울리지 않는 문장들이 한데 배치되어 있고, 또 어울려 있다. *

 

 

출판사: 휴먼앤북스

발행년도: 2004년 (초판), 2007년 (양장판)

 

 

오지랖 넓은 사람이 많다. 누구 걱정해 주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단언하건대, 한국은 그 오지랖이 너무 심하게 와전되어 있다. 싫든 좋든, 자의든 타의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누군가가 잘못된 길로 빠질까 걱정해 주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개성이라 불리는 그 누군가의 '남들과 다른 그것'은 곧 위험이 된다. 모두가 한 마음이라면 이 시스템은 별다른 급격한 변화 없이 기분 좋게 한 방햐으로 완만하게 흘러갈텐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이 되길 자처하는 부속물들은 '걱정'이 되어 '다른 것'을 하려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틀 안에 넣으려고 애쓰거나, 아님 명줄을 끊어버리려 한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그렇지만 한국에서 보통 이런 숙명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예술가들이다.

 

어떤 분야의 예술이든 남들과는 다르게, 그리고 때가 되면 변화해서 끊임없이 살아있다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 예술이다. 모든 것이 곧 창작의 과정이라 할만한 예술이 살아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본모습을 평가받을 수 있는 순간을 상실해 버린다. 이미 김춘수 시인이 한 번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키고 지나가서 인용해 보는 것인데, 예술이 없다면 우린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지 못하고 그저 몸짓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기계의 부속품이 되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몸짓을 행하고야 마는 것이다.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지 못한 채..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김영갑 사진작가가 찍은 아름다운 사진들과 직접 쓴 글이 담겨져 있는 에세이집이지만, 일반적으로 에세이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잘 비껴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함정이란 에세이 특유의 피상적인 부분들 (아무리 피상적이라도 이건 정말 별다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잡생각만을 기록한 듯한) 을 말한다. 왜냐면 작가가 에세이를 쓰면서 보여주는 태도와 실로 극적이다 싶은 인생사 때문이다. 인생에 관한 것은 모두가 그처럼 살 수 없고, 솔직히 본받아 살고 싶기에도 좀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남들과 차별화된 개성의 에세이집을 만들어 내는데 '공헌' 했다고 평하자면? ...어쩌면 그것은 너무 잔혹한 발언일런지도 모르겠다. 공헌이라니.

 

책 제목과 흰색 커버와 사진 세 장으로 이뤄진 산뜻하고 간결한 디자인으로 이뤄져 있지만,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볼 것은 다름아닌 작가가 찍어 조그맣게 축소한 세 장의 파노라마 사진들이다. 아름다운 제주도의 하늘과 자연요소들을 담고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돌과 여자, 그리고 '바람'이 많다는 제주도의 특성을 살려내기 위한 작가적 의도가 담겨져 있는 작품일 것이지만 굳이 자신의 에세이집에 이것을 집어넣은 건 지리적 특성보다도 더 많은 것을 봐 달라는 의미가 있는 것일게다. 격함. 그것은 김영갑의 인생이자 제주의 역사를 은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태풍이라는 것은, 그가 남들의 오지랖을 애써 무시하고 '다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노력과 그로 인해 감내해야 할 상황들이다. 내가 읽으면서 압도당한 것은 서문이 시작되자마자 그것이 느껴져서다. 김영갑 작가는 루게릭병에 걸려 있었다. 정확히 이 작품을 써내려가기 전부터 대외적으로 그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런데 잘 알려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의 작품 속에서 그것을 드러내려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에도 모자란 판에 굳이 자신의 어두운 면까지 자청해서 보여줄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런데 작가는 본문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서문의 몇 페이지 안에서 두 일부분 만으로 독자에게 쐐기를 박는다.

 

'...외로움 속에 며칠이고 나 자신을 내버려둔다. 그래도 모자라면 등대 밑 절벽 끝에 차려 자세로 선다. 아래는 30미터가 넘는 수직 절벽이고, 바닥은 절벽에서 떨어진 바위 조각들이 날카로운 이를 번뜩인다... (중략)' -> p.25 <시작을 위한 이야기> 중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호흡 곤란으로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 지금 나의 모습이다. 침을 삼키다가, 물을 마시다가, 이야기하다가, 잠을 자다가, 수시로 호흡 곤란에 빠져 눈물을 흘린다. 어쨌든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 p.26 <시작을 위한 이야기> 중에서

 

그는 죽어간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서문이 이렇게 소개됐으니 에세이의 전개방향도 어찌보면 쉽게 예측되는 것이다. 그는 거의 없는 살림상태로 제주도와 마라도로 건너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필름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순간부터의 기록은 사실상 일반인들은 경악할만한 수준이다. 그의 프로필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더라는 고리고리짝 시절의 허구가 가미된 이야기가 아니라 김영갑, 그에게는 실재하는 인생이었다. 거의 다 쓰러져가는 폐가에서 살고, 임시로 허름한 천막을 만들어 곰팡이가 피어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찍어놓은 필름들을 그 곳에 보관하고, 못 쓰게 되면 태워버리는 잔혹한 행동의 반복. 그리고 걱정하는 부모와 형제들, 친구들과의 연락을 모두 끊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전화마저도 꺼 두고 사는 행동들.

 

내가 바라보는 김영갑이란 인물은 예술에 매혹된 나머지 그것에 자신의 자아가 먹혀버리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다. 물론 이것은 인생을 살면서 나에게 맞추느냐,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것에 맞추느냐로 고민하며 그 무게를 어디에다 두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전자와 후자 중에서 어떤 인생이 좀 더 험난하냐고 한다면 후자 쪽에 답이 기울어지곤 한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 있을지언정, 무언가를 먹고 최소한 지붕이 있고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는 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본능이자 조건이 아닐까? 아무리 좋아도 그것들까지 포기하다시피 해야했을까? 이 개인적인 물음에 관해 김영갑 작가는 책을 통해 대답한다. ...그래서 자신이 루게릭병에 걸린 것 같다고 말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병은 서문에서 암시를 주는 정도이고, 177쪽부터 시작되는 2장의 글부터 구체적으로 병명과 여러가지 증상들, 점점 굳어가는 육체들이 언급된다. 그 사이에 언급되는 것은 한국사회와 '제주' 사회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예술을 하기 위해 작은 시도들을 지속해 온 작가의 노력이다. 그로 인해 알 수 있고, 또 작가 스스로도 생각하는 것은 예술가란 족속이 얼마나 이기적인지에 대한 것이다. 어느 누구가 평화의 섬이라 이름 붙였고, 또 관광지로도 유명하지만 제주 사람들은 한 집 건너면 모두가 죽음의 경험을 알고 있거나 겪고 있을 정도로 제주는 '육지사람'들이 일으킨 4.3이라는 잔혹한 역사와 그로 인한 슬픔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육지사람'인 김영갑 작가는 제주의 정신을 알아내고자 그들처럼 생활하고, 노인들의 말상대가 되어주면서 그들에게서 아픈 과거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듣는다. 어버이같은 마음으로 끼니를 굶고 사는 그를 걱정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그의 존재는 '빨갱이' 이다. 1장 52 페이지부터 시작되는 '고향이 어디꽈? 빈 방이 없수다'에서 그를 사납게 대하는 주인집 할머니가 그렇다. 다소 냉정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어느 시골 마을의 할머니는 아픈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그의 집념은 사람을 잃게 만든다. 마라도에 갔을 때도, 예술에 정신이 팔려있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작품의 대상'으로 생각해 온 한 소녀의 마음을 얻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병을 앓아서 고생하게 됐을 때 도와주겠다는 형제들의 말을 들었다면 적어도 그들의 마음을 그만큼 아프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산소에 제사라도 지내줬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제주 사람들도 다 같은 한국인인데 육지와 거리를 둔 채 자신들만의 경계를 설정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책임을 물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받을 것 같아 오히려 자신들을 숨기고 살아간다. 그들이 억울하게 받은 오해는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에 이어져 내려오는 일종의 '금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금기에 대한 저항을 사람의 직접적인 강요로 끌어내는 건 부당한 일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에게 불쾌감만을 심어줄 뿐이다. 이에 비교하여 예술이 위대한 점은 존재 자체로도 강렬하지만, 사람의 손에서 창조됐다고 생각하면 그의 생각이 일종의 필터처럼 거쳐져 간접적으로 접근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불쾌감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적다. 예술은 그 자체로 사유할 거리를 만들어주고, 그 때문에 호응이 있으며 사람이 직접 뭔가를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그래서 예술은 금기를 돌파하는데 아주 유용하고, 그 때문에 저항적이다.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그것을 알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혹은 자신의 개인적 의도로 뭔가를 만든다면 두 대상에게 사려 깊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은 밝음과 어두움을 포용해야 한다.

 

그래서 예술가가 누군가와 어울렸을 때 잘 풀리는 광경을 그리 보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고, 가지 않은 길을 향해 한 발자국 씩 내딛어야 한다. 안정이라는 것을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김영갑 작가가 자신의 사진을 위해 제주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면 근현대사였던 4.3의 기억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이고, 세계를 알아가는 건 결코 단기간 내에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족이라는 존재는 예술가에게 얽매임의 대상이다. 그것을 뿌리쳐야만 자신이 탐구하고자 하는 것에 몰입할 수 있다. 책의 표현대로라면 '수도승'인 셈이다.

 

결국 최종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예술은 충분히 이기적이다. 세계를 알기 위해선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고, 자신과 연관된 사람들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내쳐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것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게 고백한다. 이것을 읽고 이후 루게릭병 이야기가 등장하면 기어이 눈물이 난다. 결국 이것은 한 예술가의 화려한 소멸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병에 걸린 자신을 동정해 달라는 의사도 없고, 사진예술과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맞바꾼 것을 늘어놓고 후회하지만 그것 역시 독자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이것을 숙명처럼 이야기한다. 자칫 보면 예술가로서의 삶이 얼마나 후회되는 것인지에 대한 고백일지 모른다. ]

 

그러나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진 예술가의 삶을 사는 것은 얼마나 신성한 일인지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다. 사적인 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같다고 생각한 풍경이 실은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러나 '카메라만 좋은' 대부분의 얼치기들은 예술로 향하는 여정에 대해서 일말의 인내도 갖고 있지 못하다. 참고로 김영갑 작가는 더 잘 살 수도 있었다. 그가 개인전을 열 때 눈여겨 본 바깥쪽에서 여러가지 청탁들과 제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찍고 싶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거부했었다. 그로 인해 끝없는 빈곤에 시달려야 했고, 갤러리를 세워서 마침내 돈을 벌게 됐지만 이미 자신의 몸이 병들어간 후였다. 그는 그런 모든 상황들을 풀어놓는다. 자신의 삶이 존중받을만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두지만, 글 중간중간과 더불어 말미를 향해 가면서 그는 자신이 봤던 세상이 어떤 것인지만큼은 독자에게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애쓴다. 제주의 세상을 알아가면서,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특권들 (그 특권에는 가족과 친구들을 갖고 있다는 것도 포함되겠지.) 을 포기하면서 무엇을 보려고 했는지. 그는 단언한다. 나는 '이어도'를 봤고, 체험했다고. 현실의 이어도는 공중에서 부감으로 봐야만 포착할 수 있는 납작한 바위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어도는 보는 순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섬이다. (현실의 이어도 역시 그렇다. 요즘이야 헬기를 이용하면 볼 수 있지만 옛날에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이어도를 봤다면, 그건 그 사람이 풍랑을 만나 파도를 이용해 높게 떴을 때의 얘기일 것이다. 그러면 아무래도 살아남기 희박하겠지.)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너무나 징글징글하다. 아름다운 사진 속에는 '이 풍경을 보고 싶다, 놓치고 싶지 않다' 라는 세차고 끈질기게 들러붙는 악마적인 욕망이 숨겨져 있다. 그의 삶의 방식은 그저 이 책을 인상깊게 남기려는 데 쓰이는 부가요소일 뿐, 작품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꼭 느껴보고 싶은 아름다운 자연의 예술이었다. 이 책은 꽤 오래 전부터 출판이 되어 있었다. 작가 생전에 출판됐었으니 당연할 것인데, 나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에는 책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사람의 인생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돈을 주고 책을 사는 것은 관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어떤 명성과 시류의 흐름에 따라 책을 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저자라면 책의 내용과 작가를 믿고 돈을 내어 사 주는 독자의 기대치를 만족시켜줘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내가 순전히 독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 생각은 확고하지만 당시에는 더 그랬고, 또 그래서 '에세이'를 믿고 살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에세이가 개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볼 수준인데 이름값으로 부당하게 돈을 받고 파는 것 같다는 불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난 막 고등학생이 되어있었고, 입학하자마자 둘러본 교내 도서실에서 이 작품이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봤지만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가치를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 때 이 작품을 읽었으면 어땠을까. 어느새인가 학교 밖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관성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고등학생 생활을 한다는 것은 군대와 더불어 거의 기본적인 인간의 생활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던가.) 별다른 변화는 없었겠지만 아마 김영갑 갤러리에 가 보지 않았을까. 그 때는 작가도 생존해 있었으니 말이다. 이 에세이는 순백의 고결함과 순결함이 내면의 끈적한 타르같은 예술을 향한 검은 욕망과 만나 조화를 이뤄내고 있다. 그리고 그 조화를 통해 내가 느끼는 것은 '박력' 이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것을 느끼기 위해, 자신의 인생마저 내던진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인생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여기는 확신 하에. 그래서 남자는 인생의 말미가 되면 자연스럽게 하는 후회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주 오름을 응시하고 있다. 흔히 대부분의 에세이집은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해.' 라든가, 아니면 '너도 나처럼 살 수 있어.' 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김영갑 작가의 이 작품은 읽으면 절대 그처럼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연히 나 역시 그의 인생을 본받을 생각은 없다. 내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 그가 살았던 인생을 내가 또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런 진솔한 태도가 이 작품에 하나의 가치를 부여한다. '김영갑 작가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작품.' 그는 이런 삶을 살 수 있다. 나는 이런 삶을 살 수 없다. 이것은 제주의 땅 위에 뼈가 뿌려지고, 영혼은 이어도로 훌훌 떠나간 '김영갑 작가만의 작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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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불어 좋은 날 - 한국영화 마스터피스 컬렉션 #3
이장호 감독, 안성기 외 출연 / 블루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감독: 이장호
주연: 김성찬, 이영호, 김보연, 안성기, 유지인, 최불암, 김희라, 박원숙, 이향, 조주미, 김영애, 추석양, 임진택, 임예진
음악: 김도향
촬영: 서정민
18세 관람가 / Color, Black & White / 113분, 112분 (1980년 개봉판)

 


이장호 감독의 작품은 리뷰를 하기가 힘들다. 내게 그것에 대한 큰 이유가 있다면 이것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리뷰에는 캡쳐가 같이 동반되어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발매된 DVD도 거의 대부분 TV 방영본을 리핑한 가짜들이며, (가령 '한국영화 마스터피스 콜렉션' 이란 이름으로 발매된 게 그렇다.) 그의 작품을 필름이나 VHS를 제외하고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었던 영상자료원의 VOD 서비스가 플래시 방식으로 재생되기 전까지는 클립보드 캡쳐마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론은 순전히 캡쳐를 할 수 없어서 미뤄왔다는 얘기다. 이제는 가능하니까 그의 작품들에 관해서 조금이나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80년대 한국영화를 논할 때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이두용같은 감독들은 필히 거론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동생인 이영호의 대학등록금을 들고 지인인 소설가 최인호의 집을 찾아간 이장호 감독이 그 집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는 방법으로 기어이 얻어내고 만 <별들의 고향>의 판권. 감독은 그 작품을 영화화하여 무려 46만 5천명의 관객을 동원한다. 이 기록은 '영상시대' 동인인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가 개봉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이장희, 동방의 빛이 맡은 사운드트랙이 대히트를 쳤고, 그 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출품되는 등의 성과로 이장호 감독은 화려하게 영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 뒤로 몇 편의 작품을 더 만든 이장호 감독에게 큰 시련이 찾아오게 된다. 정녕 새로운 예술혼은 고통을 동반하여 찾아오는 것인가. 참.. 그것이 겪는 당사자에게는 죽을만치 힘든 일일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새로운 예술적 감흥이 피를 쏟는 듯한 고통 속에서 새롭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내 철학 중 하나가 행운의 찬스는 불행한 얼굴로 온다는 거야. 대마초라는 불행한 얼굴로 와서 나를 의식화시킨 건데 난 그것도 하나님이 만든 죄라고 생각해. 자칫하면 한국영화계 주류의 속물로 흘러가다가 자연도태 될 수 있었는데 그 때 의식에 변화를 가졌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저술한 책인 <이장호 VS 배창호>에 저술된 이장호 감독의 말이다. 정확히 <별들의 고향> 이후, 이장호 감독이 만든 작품은 데뷔작을 포함하여 네 편이고 활동기간은 2년이었다. 위에서 말한 그 유명한 시련은 다름아닌 1976년에 벌어진 대마초 파동이었다. 졸지에 '왕초'가 되어버린 신중현을 비롯하여 당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약쟁이'로 낙인찍혀 사회적으로 퇴출되다시피 했는데, 이장호 감독 역시 휩쓸려서 4년동안 백수 신세가 되어버린다. 스스로도 유년 시절을 살만하게 보냈다고 얘기했던 그는 이 때 처음으로 생활고를 체험했는데, 그 경험과 더불어 반체제 문화운동을 행하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이전과는 다른 영역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다른 영역'이란 가령 당시 막 농촌생활을 시작한 이문구, 송기원 소설가를 만나서 농촌생활의 실상을 체험한 것도 해당된다. 마냥 충무로 안에서 살면서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직접 본 셈이다. 그는 '의식화' 되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던 10.26 사태 이후, 규제에서 자유로워진 그는 동아수출공사와 계약해서 1980년에 <바람불어 좋은 날>로 화려하게 영화계에 복귀하게 된다.

 


새삼 문화라는 것이 돌고 돈다는 생각을 한다. 굳이 말하자면 패션만 봐도 1970년대에 이미 유행했던 것들이 다시 재유행 중이라며 김추자와 이효리의 코디를 비교하는 것이 그렇다. 70년대의 전유물이라고 느꼈던 나팔바지를 부츠 신고 그 위에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니는 풍경과 LP 복각의 활성화..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짓는 것은 내게 분명 위험한 일이지만, 시대의 상징들이 21세기까지 이어질 때 이 시대는 이랬겠거니 하는 추정을 할 수 있게 된다. 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 역시 내가 경험하지 못한데다 영원히 갈 수 없는 과거의 시대를 연결해보고자 하는 관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70년대의 풍경은 상당히 담백해 보였다. 그 담백함은 아마도 너무나도 많은 금지로 인해 비롯된 '건조함'(= '과한' 담백함) 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80년대의 시작을 알리는 해에 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추정하는 80년대는 '과잉' 이다. 입는 옷부터 시작해서 먹는 음식까지 모든 것에 기름을 발라놓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당대의 외식의 상징과도 같았던 짜장면의 번들거림, '함박' 스테이크의 번들거림, 과잉이라 할 만큼 솟아오른 펌 헤어, 록과 디스코의 혼재, 커피에 타 먹는 과한 양의 설탕과 프림, 요란한 디자인의 쟁반, 그리고 원색. 얼기설기 섹스 장면을 이어가며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진 에로 영화들. 정권의 치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면 80년대는 70년대에 비해 규제가 완화되던 시기였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고, 작품은 그런 시대의 영향이 어느정도 반영되었는지 모른다.

 

* 파란색 바탕의 거친 화풍이 더해진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서 흑백으로 진행되는데, 출연진과 제작진의 이름은 노란색 궁서체 폰트로 보여지는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단 서울의 도시 풍경은 컬러로 보인다. 희한한 점은 카메라가 도시의 높은 빌딩들을 비춰주다 시장통을 비춰줄 때 녹색 톤의 단색조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주인공이 일하는 곳은 다시 흑백으로 완전하게 변해버린다. 의도적 연출이다. *


주인공인 세 청년이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자리잡기까지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가 끝난 뒤에 나오는 장면들만 봐도 그렇다. 파란색 체육복을 입은 안성기가 연기한 말 더듬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가 대놓고 으리으리하게 지은 검은색 양옥집에 그릇을 되찾으러 간다. 들어가보니 외국품종 개가 그릇에 남은 음식을 핥아먹고 있다. 덕배가 접근하려 하자, 개가 그르렁거리기 시작하고, 머리 좀 심하게 볶은 집 주인은 그 상황이 마냥 재밌다는 듯 깔깔 웃는다. 우리 '란도'가 그릇을 깨끗하게 해 줬다면서 말이다. 주인의 머리, 화장, 의상, 그리고 목소리 톤 모두가 기름막이 두껍게 끼어있는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눈에 기름이 끼어 있으니 대변인지 된장인지 분간을 못하고, 사람 먹는 음식의 남은 것들을 개에게 먹이는 행동은 본인들의 입장에서 재미나는 장난거리 같다. 그 그릇과 접시를 씻어서 새로 음식을 담으면 또다른 누군가가 먹을텐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밑에도 없는 법인데 작품의 어떤 인물들은 아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 같다. 덕배는 겨우겨우 그릇을 회수하며 개 짖는 소리를 낸다. 부잣집 사람들에게 덕배의 존엄성은 개와 같다. 아니. 개만도 못하다. 작품은 그걸 도입부부터 바로 보여준다.


<바람불어 좋은 날>의 전체적인 정서는 이미 전부터 거의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장호 감독이 공백기동안 여러번 꾸준히 읽었던 책은 염무웅이 쓴 평론집인 <민중시대의 문학> 이었고, 최인호 말고도 영화화할 원작소설은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리고 처음 복귀작으로 점찍어 놨던 것은 건설회사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황석영의 소설인 <객지> 였다. 비록 틀어지기는 했지만 은연 중에 정해져버린 사회적 계급에 관한 함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의 정서를 가지는 최일남의 소설인 <우리들의 넝쿨>을 영화화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마 그 때 느꼈던 것들의 영향일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이장호 감독도 자신의 연출 스타일을 포기하다시피 한다. 공백기 때 친해진 소설가, 송기원이 영화를 위한 각색에 동참했고, 생전 처음으로 철저하게 콘티를 만들어 작업에 임한다. 그리고 작품에 필요한 세부묘사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감독은 직접 서울역과 남대문 시장 주변의 인력시장에서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

 


이장호 감독에게 이런 방식은 사실 다소 놀랍다. 왜냐면 그의 실질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영화감독들은 그런 철저한 준비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장호 감독의 '현장에서의 스승'은 신상옥 감독이었고, <월간좆선> 에 의해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과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정신적 스승'은 이만희 감독이었다. 그림 그릴 때의 작업방식을 도입하긴 했지만 타협도 잘 할 줄 알았고, 그 때의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멀티플레이어적 순발력이 뛰어났던 신상옥 감독, 그리고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처럼 이야기 전개, 대사, 그리고 전체적인 미장센을 모두 자신의 머리 안에 저장해두고 작업에 임했던 이만희 감독은 분명 콘티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이장호 감독은 이 두 사람의 기운을 받아 <별들의 고향>부터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까지의 네 작품을 정말 철저히 즉흥적인 연출력으로 다 만들어냈다. 물론 그는 이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것이 현재까지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천재선언>까지 중에서 몇 편의 걸작을 더 만들어내는 데 공헌하지만 동시에 작품의 기복이 심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바람불어 좋은 날> 만큼은 그런 특유의 방식으로 만들지 않았다. 이 작품을 이장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많은 상징과 무게를 더하게끔 거론하는 이유는 아마 개인, 혹은 한국영화계 전체에 거의 극적이다 싶은 순간들을 만들어내서일 것이다. 이장호 감독에게는 제 2의 영화인생을 선사했고, 학업과 군복무 때문에 잠시 영화계를 떠났던 안성기가 성인배우로 복귀한 작품, 그리고 명보극장에서 개봉할 당시, 그리고 독특한 마케팅 방식 때문에 평론가와 감독 지망생들이 이 작품으로 인해 자신의 꿈을 밀고 나가기로 굳히기로 했다는 얘기만 들어도 그렇다. (당시 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감독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강우석, 장선우, 김동원, 김홍준, 박광수 등이었다. 배창호의 경우에는 이장호 감독를 만나기 전부터 영화인의 길을 꿈꾸고 있었다니까, 뭐...)


<바람불어 좋은 날>은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세 청년과 주변 사람들이 겪고 저지르는 여러가지 일들을 블랙 코미디의 화법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안성기가 연기한 덕배 외에 김성찬이 연기하고 여관에서 일하는 길남, 이영호가 연기하고 이발소에서 일하는 춘식이 등장하며, 이들은 각자 올라와서 타향살이 중에 서로 알고 나이와 상관없이 친해지게 된다. 정확히는 시골에서는 더이상 뭔가를 할 수 없어 서울로 상경해 식모가 되거나 호스테스가 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남성들로 변환시킨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이야기들은 가혹한 현실을 부각하기 보다는 에로틱함만을 추구하는 식으로 변질되곤 했다. 혹여 <바람불어 좋은 날>도 이런 류의 수난극의 형식을 따라 세 주인공들을 남창으로 만들면 충격적이었을까? 하지만 감독은 그런 쇠퇴보다는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사회적 함의와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 그보다 더 깊게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10.26 사태 이후 짤막하게 왔다던 이른바 '서울의 봄'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임예진이 연기한 춘식의 동생, 춘순이 서울로 상경했을 때 그녀를 식모 등의 뻔한 레퍼토리로 가게 하지 않고 구로공단의 여공으로 만든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된 이야기는 바로 세 남자가 일하고 있는 주변에서 발생하는 로맨스로부터 진행된다. 작품이 한 시간 즈음 넘어가면 그 로맨스가 어느 정도 정리 되고, 이후부터는 씁쓸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식이다. 이 중 실질적으로 애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길남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길남과 그의 애인인 춘옥은 데이트를 도시에서 멀리 벗어나 산 위에까지 올라가서는 왕릉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다. 거기도 사실상 묘지인데, 대명천지에 젊은 남녀가 무덤가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다니! 춘식 역시 김보연이 연기하는 '미스 유'와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적인 이야기들을 나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연인관계라고 볼 수 없다. 미스 유는 내심 눈치는 채고 있지만,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모른 체 하며 춘식 역시 고백할 마음이 나지 않아 짝사랑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춘식과 미스 유는 왕릉은 아니지만, 대형 송전탑 밑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춘식은 마치 곧 떨어져 죽을 듯한 위태로운 몸짓으로 세차게 바람이 부는 날에 송전탑 위로 올라간다.


길남은 춘옥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길남의 꿈은 호텔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모두가 '평등' 하게 들어올 수 있는 호텔. 코쟁이도 OK, 나카무라 상도 OK, 왕 서방도 OK 라 말하며 들일 수 있는 그런 곳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미스 유는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춘식에게 꿈을 가져보라고 충고하며,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말해준다. 외국의 어떠한 나라를 거론하면서 그 곳에서는 이 곳보다 더 많은 사회적 혜택이 주어진다는 이야기다. 작품 속에서 미스 유는 춘식과 같은 이발소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평생을 머물지 않겠다고 각오라고 한 듯이 매사 언제나 똑부러지게 이야기한다. 춘식에게 세계의 복지혜택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어떻게 보면 평생을 이발소에서 (이후에 등장하긴 하지만 사실 일하는 곳이 퇴폐이발소에 가깝다.) 머물지 않겠다는 다짐하에 나름대로 익힌 지식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병을 앓고 있는 나이 든 아버지와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남동생을 포함해 돌봐야 할 사람들이 많지만, 언제나 씩씩하다.

 

 
* 황량한 동네를 제 맘대로 돌아다니는 인간들은 바로 '가진 자들' 이다.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게 진행되지만 작품은 순간순간 차갑게 극단을 오간다. 유지인이 연기한 부잣집 여주인 명희와 하룻밤 섹스를 즐긴 후, 따라다니는 다른 2:8 가르마의 부잣집 남자가 차를 타고 가면서 다투는데 속력을 줄이지 않아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가던 꼬마아이가 길바닥에 넘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이가 애초에 신경 쓰이지도 않는 듯 내버려두고 차를 몰며 사라져 버린다. 덕배 역시 배달 가던 중 이 차들에 치여 중국음식들을 다 쏟게 된다. *


허나 엄혹한 검열이 영화 속과 바깥의 세계에 적용되었던 시절, 인물들의 모든 주장들은 참으로 왜곡되기 좋은 소재가 된다. 노동자들의 인권을 외치면 빨갱이가 되는 시대였다. 하물며 미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한국의 영원한 친구'와 한국을 식민지배 한 국가,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호텔을 만들겠다는데 이것을 당시에 문제 삼고자 하면 온갖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갖다붙여 레드 컴플렉스의 테두리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 국가의 혜택을 이야기하는 미스 유의 장면도 충분히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부정하고 나쁘게 말한다는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고. 그 말도 안 되는 사유들이 실제로도 통했던 시기였다. 잠깐 숨통이 트였던 시기에 감독과 작품은 이 상황을 비꼬는 것 처럼 보인다. 고작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들은 도시를 떠나 독재정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지극히 순수하고 사적인 행복을 즐기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장호 감독에게 질문한 적 없으니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 눈에 이런 류의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장면들마저도 작품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상징들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배치한다. 
 
 

* 존 레논이 '이매진'이란 노래를 만들 정도로 많은 영감을 준 그의 음악적 뮤즈, 임예진. (뻥)
아. 그리고 안성기의 바지 뒷주머니에 나무젓가락을 꽂아 넣은 디테일에도 주목하시라. *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감독이 작품을 대체적으로 아름답게 찍을 수 있는 역량을 의도적으로 절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장면들은 상당히 아름답고 정갈하게 찍혔다.) 이장호 감독은 초기의 세 작품을 장석준 촬영감독과 연달아 작업했다. 장석준 촬영감독이 이장호 감독에게는 서울고, 홍익대, 신필름 선배인 인연도 있지만, 사실 그는 초창기 감독의 작품들에서 매혹적인 영상을 구현해내어 매력을 상승시켰던 일등공신이었다. 그런 그가 점점 건강이 좋아지지 않다가 결국 <바람불어 좋은 날>이 촬영되던 1980년에 사망하게 된다. 장석준 촬영감독과의 작업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대신 이장호 감독은 이 작품을 서정민 촬영감독과 함께 작업하게 된다.


그렇다면 서정민 촬영감독은 누군가? 그는 바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마의 계단>, <물레방아> 등 전성기 시절의 이만희 감독과 상당수의 작품들을 같이 작업한 사람이었다. 특히 시각적 미장센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만희 감독과 작업을 했으니, 그 영향이 어느 정도 있을까 기대할만도 하다. 그러나 이장호 감독이 보여주는 서울은 조금의 과장을 더해 마치 6.25 직후를 연상케할 정도로 피폐하다. 건물이 몇 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연적으로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폭격을 맞은 듯 땅은 죄다 파헤쳐져 있다. 피폐해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지역이 신흥개발지역이라서다. 누군가가 일궈놓은 논과 밭을 다 파헤치고 그들을 쫓아내고 얻은 결과물이다. 그래서 작품은 대부분의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거기서 시네마스코프의 구도를 한껏 살린 촬영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점은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하다가 2년 뒤 데뷔한 배창호 감독이 정광석 촬영감독과 작업한 <꼬방동네 사람들>과 많이 대비된다. 그 작품은 달동네를 배경으로 했지만 아름다운 미장센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가령 음악을 맡은 김도향이 가장 기세등등하게 느낄법한 안성기와 유지인의 디스코텍 춤 장면이 있다. 작품에서 딱 두 번 나오는 주제곡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고, 동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박진감 넘치는 순간들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록달록한 원색적 조명과 인테리어로 이뤄진 공간에서 섹시한 시절의 안성기가 사물놀이 춤을 추고 70년대 트로이카 중 한 명인 유지인이 디스코 춤을 추고 있는데! 실제로 유지인이 빙글빙글 돌 때 입은 치맛단이 같이 돌고 있는 것과, 춤추고 있는 안성기를 한 앵글 안에 잡아낸 쇼트는 분명 인상적이다. 그러나 작품은 이들의 춤을 멀리서 보여주거나, 혹은 천장에 반사되는 식으로 촬영해낸다. 어떤 미학적 조합은 별로 고려하지 않은 듯한 실로 자유분방한 카메라워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결국 작품은 시네마스코프의 넓은 화면을 이용해서 다 갈아엎어 버린 황량한 공사지대만을 보여줄 뿐이다. 신흥개발지역은 땅부자들에게나 오아시스일 뿐,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황무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연경관과 조화시켜 작품의 모국을 미화하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밤이 되어 세 주인공이 신세한탄을 하고 꿈을 다짐하는 장면이 나오면 작품은 인물들 주위에만 빛을 허용하고 주변 풍경에는 무심한 듯 전부 어둡게 처리해 버린다. 그 곳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현실을 푸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푸념은 곧 없는 자들이 가지는 신분상승으로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1980년에 개봉할 당시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 판정을 받았다.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이 아이들이 쉽사리 느낄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은근한 노출 수위가 있기 때문이다. 7~80년대 한국에서는 오지랖 넓은 정부 덕에 원래 심하긴 했지만, 특히 본국 작품인 '한국영화'와 중화권 작품들은 거진 위의 등급을 판정받아 미성년자들의 전유물이 되지 못했다. 사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장호 감독의 상업적 감각이 빛을 발해 작가적인 의도와 조화롭게 어울렸다고 볼 수 있다. 흔히 '호스테스 영화'라 통칭되어 불려지던 작품들은 위에서 얘기했듯 기본적인 이야기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오직 섹스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지곤 했다. <바람불어 좋은 날>의 이러한 장면들은 서울로 상경한 세 남자의 나이를 고려하여 혈기왕성한 시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으로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조연 중에서 덕배와 같은 중국집에서 일하는 조 씨가 있다. (김희라가 연기했다.) 박원숙이 연기한 중국집 여주인은 남편의 건강이 원인 모를 병으로 좋지 않은 탓에 밤마다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조 씨의 육체에 몸을 맡긴다. 그리 해서 여주인의 총애를 받은 것일까. 조 씨는 덕배와 다른 일꾼들과는 달리 중국집에서 지배인 일을 하고 있다.


문제는 조 씨도 덕배와 다른 사람들처럼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라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는 이미 결혼해서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골의 아내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면서 소식을 알리며, 동시에 여주인에게 자신의 몸을 바친다. 그런데 그것은 여주인에게 신임을 얻어 뭔가 한탕 챙겨보려고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추진력을 얻기 위함인 것이다. 

 


덕배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닥친다. 작품이 덕배에게만 유일하게 춘순과 명옥을 붙여줘 삼각관계(!) 를 허용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덕배와 부잣집 여주인인 명옥과의 관계는 연애라고 볼 수 없다. 그릇이 깨져 음식값을 물어주기로 한 계기로 명옥의 집에 초대받은 덕배는, 오히려 자신의 남루한 모습이 명옥으로 하여금 관심을 끌게 하는 효과를 거둔다. 이후, 덕배는 그녀에게서 얻은 스카프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화장실에서 혼자 자위를 한다. 평생 같이 어울릴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여인이 자기에게 먼저 다가와 주니, 집에 있을 때는 뻘쭘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성적 욕망을 품는 것이다. 이후, 그는 그녀에게서 데이트 제안을 받게 되고 간만에 큰 돈 쓰며 자신을 치장하여 함께 데이트 장소로 나가게 된다.
 
또다른 비슷한 경우는 김보연이 연기한 미스 유다. 미스 유와 춘식이 일하는 이발소는 최불암이 연기하는 김 회장이 애용하는 곳이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채소를 팔며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가 우연찮게 뛰어든 부동산 투기가 땅값 호황으로 인해 크게 성공하면서 부자가 됐다. 작품 속의 배경인 그 황량한 땅에는 원래 사람들이 살면서 농지로 쓰던 곳인데, 그로 인해 다 쫓겨나고 재개발 되고 있는 것이다. 김 회장은 미스 유를 사랑하게 되지만, 어차피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돈으로 그녀를 유혹한다. 춘식과 함께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미스 유지만 자신에게 지금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돈이다. 그래서 그녀는 정말 내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김 회장의 요구에 맞춰준다. 그리고 결국 어느 날 밤, 김 회장과 함께 모텔에 들어가 섹스를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그의 사랑을 얻고 돈을 받으면 아버지를 병원에서 치료받게 할 수 있고, 남동생을 대학에 보낼 수 있을테니까. 이장호 감독이 작품 속에서 묘사하는 섹스란 결국 사회비판 적인 것이다.

 


* <바람불어 좋은 날>은 신상옥 감독의 <만종>과 더불어 최불암의 흔치 않은 악역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 양촌리 이장 아저씨는 자신의 연기인생에 길이 남을 '졸부 스타일'의 극치를 보여준다. 백주대낮에 병맥주를 세 병 따는 것도 모자라서 고기까지 구워먹는 느끼한 남자! *


사실 여기서 유지인과 안성기 즉, 명옥과 덕배의 관계는 이야기 구조로 보자면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일종의 구멍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닥 현실적으로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부잣집 아들과의 불장난스러운 섹스도 일상다반사처럼 여기는 여자가 어떻게 거들떠 보지도 않을 듯한 비루한 인상의 배달부를 연인 삼아 놀러다니는가.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그에게 빠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가의 문제가 그렇다. 아마 이것은 일종의 대위법적 연출을 지향하는 점에서 오는 일종의 결함으로 이해해야 할 듯 싶다. 덕배는 자신도 꼭 상류층의 사람이 된 것처럼 주변의 사람들에게 없는 거드름을 피우며 그녀의 집으로 간다. 호숫가에 앉아 명옥의 펄럭이는 치마 속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춰지는 팬티를 보며  키스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만, 그녀가 자신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작품이 영상을 비롯하여 영화적으로 중시하는 것은 현실적, 그보다 더 상징적인 디테일에 있다. 중국집 여주인과 조 씨가 한창 섹스를 하고 있을 때, 덕배와 같이 일하는 아이가 그 광경을 보고 욕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있다. 유사한 쪽으로 자신의 괴로운 과거가 떠오르는 것이 이유였다. 그 때 덕배가 아이를 말리면서 하는 말은 '우리와는 상관 없는 일' 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이후, 중국집 여주인의 남편이 입원한 병실에 찾아가 그에게 모든 것을 고해바친다. 하지만 그는 아이에게 역시 덕배와 비슷한 말을 한다. '잘못 본 걸로 해.' 미스 유는 조 회장을 찾아가는 것이 죽을만큼 괴롭지만 당장 돈이 없고, 그를 거부하여 일터인 이발소에서도 쫓겨날까봐 어쩔 수 없이 치장하고 그를 찾아간다. 걱정되어 찾아온 춘식에게 그녀는 우습다는 듯 이야기한다. '고맙고 싶군.' 이라고. 걱정만 해준다고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안이 없다는 듯 말을 하자 '갈보' 라는 소릴 듣게 되고, 미스 유는 울면서 그의 뺨을 때린다. 조 회장과 명옥은 자신의 부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짓눌리게 만들고 또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등 노리개처럼 조종한다.
 
"나..나도 처음부터 말을 더듬은 건 아니여.. 서울 와서 하고 싶은 말 다 못하고 그러다보니께 이렇게 된거여..."


작품 속에서 인상적인 대사가 하나 있다. 초반부에 춘식과 길남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덕배가 그것을 말리는 와중에 두 사람을 향해 위의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의 전개와 인물들의 구조는 1980년이라는 시대와 연관지어 지면서 더욱 깊은 의미를 표출한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전두환의 군부세력은 최규하라는 허수아비 대통령을 앉혀놓고, 독재 타도를 외치던 서울과 광주를 문제삼는다. 하지만 서울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아마도 본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고, 청와대가 거기 있으니까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광주는 달랐다. 군부세력은 광주에서 벌어진 5.18 민주항쟁을 총과 칼로 억압했다. 그것은 해방 이후 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6.25, 제주 4.3 항쟁과 더불어 대한민국 현대사를 피로 물들이는 악행이었다. 그러나 군부정권은 5.18 민주항쟁을 광주 외부로 알려져 나가는 것을 철저하게 검열했고,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언론인들은 전부 해직되거나 처벌받았다. 결국 남은 것은 권력에 아첨하는 자들이었고,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입을 다물기에 바빴다. 그래서 5.18 민주항쟁은 한국보다 독일, 미국, 일본 등의 외국에서 먼저 널리 알려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못 본 걸로 하자는 이야기들은 그런 현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겁먹은 사람들은 우리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말하고, 본 걸 잘못 봤다고 이야기 하자고 한다. 그래서 고마워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한다. '고맙고 싶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작품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군부독재에 몸을 판 갈보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권력자들이 만든 이런 모멸감과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민초가 민초다워졌을 때다. 조 씨는 시골에서 아내가 올라와서 위기에 처하지만, 곧 넉살좋은 웃음으로 뻔뻔스럽게 상황을 해결한다. 비록 일하던 중국집에서 옷까지 찢겨지며 내쫓겨나기는 했지만 그는 기술이 있는데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며 웃으면서 덕배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간다. 길남은 자신의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명옥에게 놀아나던 덕배는 호수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 이 여자가 자신을 갖고 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보통 냉수 맞고 속 차리는 것을, '냉풍 맞고 정신 차린' 셈이다. 덕배는 이후에 챔피언을 목표로 권투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제 남은 것은 춘식이다. 그는 한 정신나간 노인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며 자신이 할 일을 깨닫게 된다.
 

 한국영화계의 원로 배우인 이향이 연기한 이 노인은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가장 강렬한 인물이다. 물론 그는 이 작품만큼 만만찮게 강렬한 다른 작품들에도 여럿 출연했다. 떡 먹이는 그룹이 결성되기 이전에 이미 '의지'를 몸으로 실천한 책 외판원을 연기했던 김기영 감독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윤인자와 키스했던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 같은 작품이 그렇다. 하지만 이 모든 역이 <바람불어 좋은 날>의 노인 역처럼 사람 마음을 울리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노인은 작품의 초반부터 시작해서 중, 후반까지 조금씩 조금씩 긴장감을 불어넣을 만한 시점에 등장한다. 세 명의 주인공이 크게 싸우고 화해하던 날, 이들은 한 중년 남자에게 업혀가는 노인의 모습을 본다. 이 중 춘식은 이전부터 노인의 사연이 궁금했나본지 어느 날 밤에 혼자 용기를 내어 노인을 업고 가는 남자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춘식과 관객은 지금 그들이 서 있는 헤집어진 땅이 한 때 노인이 밭을 일구고 살아갔던 터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김 회장은 고리대금업을 통해 그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모두 빚을 지게 한 다음 모두 몰아내 버린다. 그런 수법을 통해 상가를 비롯하여 새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김 회장의 멱살을 잡지만, 돌아오는 것은 미친 사람 취급하는 주위의 시선이다. 결국 노인의 마지막 항거는 막 개장한 상가 건물의 화장실에서 목을 매는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들에게 그의 시신은 '좋지 못한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결국 노인은 거적에 말린다.


1983년에 만들어진, 그리고 독재정권의 상황을 최대한 이용한(?) <바보선언>에 김명곤과 이희성이 이보희의 장례식을 치뤄주는 장면이 있다. 굉장히 아방가르드적이고 전위적인 영상과 편집을 보여주던 작품은 그 순간, 상당히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거기서 사운드트랙으로 삽입된 음악은 다름아닌 국악이었다. 이장호 감독이 민초들의 죽음에 국악을 사용해야 겠다고 판단한 것은 아마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였던 것 같다. (70년대 시절의 그는 이장희, 임형주, 동방의 빛 등 당대의 청년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석양 아래로 만가가 울려퍼지면서 자기 것을 찾고자 하는 노인의 죽음을 치뤄주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은 80년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런 죽음의 풍경을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이 무언가를 일깨웠는지도 모른다. 더이상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것 말이다.


 

 * 이장호 감독의 75년작인 <어제 내린 비>에서는 상당히 연약하고 감성적인 미남으로 나왔던 배우이자 감독의 동생, 이영호는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극단적인 감정을 오가는 역을 잘 연기한다. *


아. 상징적인 장면 하나를 하나 더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슬로우 모션의 범위 안에서. 춘식이 미스 유를 구하기 위해 살인미수를 저지르는 시퀀스다. 이 시퀀스에서 슬로우 모션이 사용된 지점은 재떨이를 들어 방어하려는 김 회장을 면도칼로 그어버리는 춘식의 쇼트에서다. 죽은 건 아니지만, 김 회장은 곧 힘 없이 쓰러져 버리고 미스 유는 춘식의 품에 안겨 운다. 자신의 아버지는 병원에 가 보지도 못 하고 죽어가고 있다면서.


이 쇼트는 내가 본 1980년의 한국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세 편의 '슬로우 모션' 중 하나다. 다른 한 편은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 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리는 총성과 날아가는 새들, 뛰어가는 사람들의 쇼트였다. 그리고 또다른 한 편은 내가 보지 못한 작품인데, 바로 임권택 감독의 <짝코>의 한 장면이다. 장면 묘사에 따르면 한숨을 쉬는 듯한 김영동의 스코어 음악이 울리며 빨치산인 짝코가 자신의 애인과 함께 토벌대를 피해서 산 아래로 뛰어내려가는 장면인데, 이 장면이 슬로우 모션 처리 되어졌다고 한다.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의 후반부 살인 장면도 빼놓을 수 없고, 그 작품은 내가 본 작품이기도 한데 극장개봉을 1981년 1월 1일에 한 관계로 뺐다.) <바람불어 좋은 날>의 살인미수 장면은 위에서 거론한 두 편과 동일한 위치에 놓을만하다. 세 작품은 모두 마지막을 감당 못하긴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리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인들이 상처입긴 하지만 적어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무시무시한 상황들을 바꿔보려고 한다. <최후의 증인>의 오병호는 기어이 누군가의 누명을 벗기고 범인을 검거하며, <짝코>의 짝코와 그를 검거하려고 일생을 쫓아다닌 송기열은 마지막에 함께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다. 비록 당시 검열에 의해 잘려나가긴 했지만, 임권택 감독은 그들이 TV를 통해 서로가 품게 되었던 증오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되는 장면을 삽입했었다고 한다.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춘식의 포효는 사실 좌절스러운 세상을 향한 절규에 가깝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 것이고, 자신은 결국 징역살이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이대로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감옥에 가더라도 그는 아마 떳떳할 것이다. 그래서 사실 다른 두 작품에 비하면 이 작품은 희망적인 편이다. 적어도 오병호, 짝코, 송기열에 비해 춘식은 징역살이를 살고 다시 세상을 살아갈 가능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단히 깊은 철학적 삶의 목표는 없을지라도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잡초처럼 버티겠다는 근성이 있다.


작품은 길남이 입대 영장을 받아서 덕배와 춘순의 배웅을 받으며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가고, 덕배는 흠씬 두들겨 맞지만 만족한 얼굴로 쓰러져 있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삼총사는 마지막까지 모양 빠진다. 누구는 감옥 가고, 누구는 고향에 들렸다 입대하겠다며 양복 쫙 빼 입었는데 폼 안 나게 삶은 계란을 양복 주머니에 넣으려 든다. (앞 주머니에 지갑 넣어도 모양이 살지 않는다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멋있게 포장할 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진짜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엄혹한 독재시대로 인해 벌려지기 시작한 양극화의 현실 속에서, 그렇게 자존감을 유지하며 버틴다는 건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웃기면서도 씁쓸하기 그지 없는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어떤 일말의 기대를 하게 만든다. 바람불어 좋은 날, 적절한 제목 아닌가! 과연 뭐가 좋은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찬 인생의 바람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으면서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버티어낼 수 있다는 것. 김도향의 록 스피릿이 느껴지는 주제가가 다시 한 번 울려퍼지며 누군가가 로드워크를 한다. 이 순간의 바람은 아마도 굉장히 시원할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을 볼 때도 그랬지만 가끔 이장호 감독과 배창호 감독을 같이 놔 두고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때로는 스승과 제자가 뒤바뀐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배창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꼬방동네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최근작인 <여행>까지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균일한 완성도와 아름다운 영화적 매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이장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장선우 감독 만큼이나 자유분방하게 튀며, 엄청난 걸작과 졸작이 혼재하고 있다. 조선희 전 한국 영상자료원장 / 소설가의 <클래식 중독>의 표현을 일부 인용하자면 '그 누가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와 <Y의 체험>이 1987년 한 해에 한 감독에게서 나온 작품이라고 믿겠는가' 다.


그는 스승인 신상옥 감독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스승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많이 얻어낸 것 같다. 작가적인 세계를 유지하자니 흥행에 대한 압박과 욕망 역시 거부할 수 없었고, 동시에 한국영화계에 화두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도 같이 안고 있었다. 그런 야망은 많은 부침을 이끌어냈다. 스승인 신상옥 감독이 초기 몇 년을 제외하면 문 닫기 전까지 자신의 제작사인 신필름을 빚과 싸우며 이끌어 갔던 것처럼, '이장호 워크숍' 역시 순탄하게 운영되지 못했으며 직접 만든 출판사도 잘 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스승들이라던 이만희 감독이나 신상옥 감독 역시 실생활을 잘 살아낸 건 아니었으니 그들을 따라 '인생을 영화처럼' 살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올 운명을 지녔거나. <바람불어 좋은 날>의 세 주인공과 이장호 감독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 위치해 있는 데뷔부터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가 있는 87년까지의 이장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주목할만한 작품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너무나 다른 듯하고 불균질한 성향들은 모아져 일종의 '이장호 스타일'로 통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어떤 때는 이상한데 , 어떤 때는 놀라울 정도로 부릅뜬 눈으로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리는 것은 천재처럼 보일 정도니까 말이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젊은 영화인들을 충무로로 불러와 후반 시기부터 이어지는 '코리안 뉴웨이브'의 태동을 알렸다. 젊은 영화인들은 고인이 된 하길종 감독이나 꾸준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장르와 정치적 메세지를 뒤섞는 것을 자신과 같이 호흡하고 살고 있는 선배 감독이 하는 것을 보고 열광했다. 작품은 단 한 장면을 제외하고는 검열에 걸리지 않은 채 상영됐고, 이장호 감독은 임권택 감독, 배창호 감독과 더불어 지망생들이 밑에 들어가 가장 배우고 싶은 감독이 되었다.


2012년 현재까지도 이 작품의 강렬함은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것은, 냉정히 보자면 작품이 나온 해로부터 시작해서 바뀐 것이 거의 없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언젠가 조세희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1978년에 초판으로 발간된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팔리고 거론되고 있는 것이 괴롭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것은 작품에서 묘사된 것이 지금까지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춘순은 구로공단에 들어갔다.

 

 

훗날 구로공단의 여공들이 부당한 처우에 반발하여 노조를 결성했을 때, 언론은 구로 공단을 비롯하여 다른 회사의 노조라는 개념을 이런 식으로 다룬다. 이상한 촛불 의식 장면을 보여주며 노조를 이도교 집단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파업 장면을 붉은 톤으로 처리해 버림으로서 레드 컴플렉스를 자극한다. 부당한 현실에 반대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빨갱이'가 되는 것이다. 이 때가 1982년이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 이 때 개봉되었다면 작품은 절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작품은 그 위기가 닥치기 직전에 개봉했고, 이후 매춘을 소재로 한 작품이 판을 치던 한국영화계가 나름의 작가적 세계를 간신히 유지하게 만드는 선봉장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바람불어 좋은 날>의 소재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처럼 지금까지 낡지 않았다는 것은 비극이다. 시대'만' 20세기에서 21세기로 바뀌었을 뿐, 아직까지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았다. 바람은 여전히 그 때의 바람이며 명옥과 김 회장은 그대로다. 길남, 춘식, 춘순, 덕배같은 젊은이들도 역시 그대로다. 언젠가 이 칼날 같은 바람이 시원해질 것도 같다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 다른 바람이 불어 그것이 시원하다고 느껴지면, <바람불어 좋은 날>은 '과거의 작품'이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바라는 바일지도 모른다.

 

 

 

 


p.s.1 - 작품이 거의 잘리지 않은 데는 검열위원회에 속해있었던 박완서 소설가 님의 지지 덕분이었습니다. 거의 결사적으로 막은 덕에 장시간 검토 끝에 딱 한 장면 빼고 잘리지 않았다고 하네요. 잘린 장면은, 현재는 볼 수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볼 수 없던 장면이었습니다. 길남이 춘식과 덕배를 데리고 밤중에 술에 취해 푸념하다가 집창촌으로 가자고 꼬드깁니다. 그 때 혼자 노래를 부르는데요, “영자를 부를거나, 순자를 부를거나, 영자도 좋고, 순자도 좋다. 땡까댕! 땡까댕!” 라고 합니다. 훗날 체육관에서 영부인이 되어버리는 여자를 창녀로 비유해 버리는 패기! ...과연 의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장면은 개봉 당시에 잘려 나갔다고 합니다.


p.s.2 - 배창호 감독님이 이 작품의 조감독이었을 때, 작품 촬영이 끝나고 기념 파티를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영화평론가인 정영일 님이 배창호 감독님에게 <바람불어 좋은 날>의 상영시간이 몇 분 정도 되는지 물어봤다고 했대요. 배창호 감독님이 "글쎄요.. 1시간 50분 조금 넘을걸요.." 라고 했다가 혼났다고 하네요. 조감독이고 작품 제작에 참여했으면 정확히 몇 분 몇 초인지까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 혼난 이유였습니다.


p.s.3 - <바람불어 좋은 날>의 마케팅 중 주목할만한 것은 관객을 상대로 '혹평집'을 공개 모집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수 혹평'에 당선된 학생 중에 황규덕 감독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p.s.4 - 각색을 담당했던 송기원 소설가님은 당시 수사기관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크레딧에서는 이름을 뺐습니다. 후에 구속되어 국가보안사범으로 수감되지요.


p.s.5 - 춘식 역을 맡은 김영호 님은 몇 년 뒤부터 점점 시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시력을 모두 잃어버렸지요. 그리고 길남 역의 김성찬 님은 김비서 방송국의 <도전! 지구탐험대>에 출연했다가 오지 탐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사고였지요.


p.s.6 - 현재 이 작품은 한국영상자료원에 의해 디지털 복원 됐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 VOD 서비스를 통해서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720p, 1080p 해상도로 보실 수 있다는 얘기지요! 가능하면 서플먼트, 내실있는 책자라도 추가해서 (SD 해상도일지라도) 새롭게 DVD로 나와주면 좋겠는데.. 판권 문제가 있는가봐요. 어째 동아수출공사 작품, 화천공사 작품은 복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참 보기가 힘들군요. 아.. 이명세 감독님 초기작품들도 추가해서요.  한국영화 마스터피스 콜렉션의 질은 너무 형편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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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10집 -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정태춘. 박은옥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 TRACKS

1. 봄 밤

2. 동방명주 배를 타고

3. 압구정은 어디

4. 선운사 동백꽃이 하 좋다길래

5. 오토바이 김씨

6. 빈 산

7. 아치의 노래

8. 리철진 동무에게

9. 정동진 3.

10.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1CD / 45:24 Mins / 레이블: 유니버셜 레코드, 삶의 문화

 

 

"...이게 여러분들의 노래지, 우리 부부만의 노랜가요? 모두 고마워요."

 

- 앨범 북클릿에 담긴 정태춘, 박은옥의 감사말 중 일부

 


집에는 6집인 <무진 새 노래>의 LP와 8집인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CD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집을 먼저 끄적이는 건 6집과 8집은 내 자취방이 아니라 집에 있기 때문이며, 그 중에서도 6집의 경우엔 턴테이블이 집에 있기 때문에 여기로 가지고 와도 들을 수가 없다는 이유가 있다. 10집은 내가 처음으로 완전하게 들은 이들 부부의 앨범이다. 여섯살? 아니면 일곱살 때 이 부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는데 (이상은과 같이 들었으니 일곱살 때가 맞을 것이다.) 그건 바로 아버지의 자동차 오디오에서였다. 그 당시 우리 집 자가용이었던 대우 에스페로가 카세트 테이프 재생만 가능했기 때문에 따로 녹음해서 컴필레이션을 만든 것이었다. 그 후로 잊고 있다가 2002년 겨울에 이 앨범을 처음 들었다. 열 네살이었다. 동시에 이 때는 전혀 관심없던 아버지의 CD와 LP 장에서 정태춘과 박은옥의 앨범을 '발견' 하기도 했던 시기였다.

 

군 제대한 후, 1978년에 <시인의 마을>이란 이름의 앨범으로 가수로 데뷔했던 정태춘은 같은 음반사에서 역시 가수 활동을 하고 있던 박은옥을 만나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앨범이기도 하고 1980년에 발표된 박은옥의 2집에는 정태춘이 그녀의 음악작업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해에 그들은 결혼을 한다. 한국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정태춘과 박은옥의 공동앨범 작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정태춘과 박은옥, 각각 발표한 1집 앨범인 <시인의 마을>과 <회상>은 한 편의 수묵화를 음악으로 표현한 듯한 기분을 주는 간결하고도 아련한 수묵화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곡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 중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에 관해서는 슬픈 사연이 있는데, 바로 제작 당시 선곡과 가사가 음반사와 공연윤리위원회의 간섭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곡이야 아티스트의 입장에서 음반사와의 조율, 혹은 강요를 당하더라도 '적어도' 다음의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허나 공연윤리위원회의 경우에는 달랐다. 위원회는 정태춘의 가사쓰기 방식이 방황과 불건전한 요소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여러번 개작을 강요했다. 이 곳에 '다음의 기회'는 없다.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천년만년 지속될 것 같았고, 음반사를 통해 앨범을 내지 않으면 전방위 발표와 판매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정태춘은 그 모순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인의 마을> 앨범의 타이틀곡인 '시인의 마을' 속 화자는 '방랑자'에서 '수도승'으로 바뀌었고, 그 외에 노랫말 몇몇을 바꿔야만 했다.

 

물론 그런 방해들로 인하여 예술적 의도가 일부 손상당했다 할지라도, 신기하게 정태춘과 박은옥의 음악적 역량에 손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물론 예외도 있다. 군부정권 시기의 음악의 나쁜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건전가요 수록의 경우, 그 곡들은 본인들이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들으면 굉장히 뜬금없고, 앨범의 전체적 흐름을 볼 때 분명한 흠이다. (들국화 같은 경우에는 건전가요를 본인들이 직접 불러서 군부정권의 족쇄를 자기네들의 록 스피릿으로 부숴 버렸다. 아. 물론 이것은 LP 때의 얘기고 CD로 재발매 했을 때는 원 의도에 맞게 건전가요 트랙은 빠졌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을 제외하면 어떤 방해공작이 있어도 정태춘과 박은옥의 목소리에서 울려퍼지는 그 아름다운 세계는 손상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가진 개성이 워낙에 확고해서 그럴 것이다. 덕분에 정태춘과 박은옥의 앨범은 1984년, 부부의 이름으로 첫 앨범을 낸 이후에 의외로 쏠쏠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긴 세월동안 가수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그 명성은 10집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의 1번 트랙인 '봄 밤' 과 6번 트랙인 '빈 산' 을 아름답게 노래하는 박은옥의 목소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가 되어서야 느낀 것이기도 했지만 정태춘의 목소리가 지극히 한국의 토양에서만 나올 수 있는 판소리같은 목소리라면, 박은옥의 목소리는 1번 트랙의 전체적인 정서를 담당하는 서양 관악기의 목소리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앨범을 만들 때 가사쓰기는 전체적으로 정태춘이 담당하고 있고 그녀는 거의 보컬리스트의 자세로 음악을 해 왔다. 따라서 그런 가사쓰기 덕분에 자신의 2집 앨범인 <사랑하는 이에게>의 1번 트랙으로 수록된 '트로트' 장르의 곡인 '양단 몇 마름' 같은 곡을 위화감없이 불렀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 곡 역시 정태춘이 썼다.) 조금 과하게 단순하고 얄팍하고 차별주의적으로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나 이들 부부가 이토록 목소리 속에 다른 정서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생활과 음악적 환경이 달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태춘은 본인 말로도 지긋지긋해서 벗어나고 싶었다던 고향인 대추리에서의 생활 속에서 주변의 사물들을 뛰어나게 관찰했으며, 박은옥은 집에서 LP로 팝 장르의 음악을 들으며 음악적인 감성과 해석을 키워 왔다. 그리고 정태춘은 음반사에서 재니스 이안의 'Jesse'를 부르고 있는 박은옥의 모습을 보며 그녀에게 반하게 된다.

 

'봄 밤'은 서양식 관악기와 피아노, 어쿠스틱 기타로 이뤄진 편성이며 어찌보면 정태춘이 부를 수 없는 정서를 가진 곡이기도 하다. 2번 트랙인 '동방명주 배를 타고'는 정태춘이 불렀고, 동시에 이 곡은 박은옥이 부를 수 없는 정서의 곡인 셈인데 두 곡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서 이들 부부가 어떤 면에서 최적인지를 엿볼 수 있다. 박은옥은 많은 중년 남자들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던 '봉숭아' 식의 분위기를 부활시키고 있는데, 그 곡은 소식 없는 누군가를 기약없이 기다리면서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갈한 기품을 유지하려는 듯 봉숭아물을 들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곡 자체의 진행이 봉숭아물을 들이는 과정에 기본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부르는 박은옥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그녀는 '별 사이로 맑은달 구름거쳐 나타나듯 고운내님 웃는 얼굴 / 어둠 뚤고 나타나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전에' 같이 하나의 순간에 마주하며 느끼는 수많은 상념들을 어떻게 이야기로 표현할 것인지를 궁금해한다. 그래서 '봄 밤'과 '빈 산' 이란 곡은 사실 제목만 들었을 때부터 굉장히 추상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광활하고 거대한 외적 형상이 있는 것과 다르게 내적인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박은옥은 그 마음이 하늘의 밤과 지상의 산처럼 거대하다고 믿고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 부분은 정태춘이 부르지 못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봄 밤'은 '봉숭아'처럼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빈 산'은 말 그래도 거대한 산을 기점으로 해가 지고 뜨는 하루동안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곡에는 혼자된 사람의 인생을 보는 듯한 쓸쓸함이 담겨져 있다. 박은옥의 솔로곡은 전체 10곡 뿐에서 2곡 뿐이다. 녹음 당시의 그녀는 몸이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 많은 곡을 부를 수가 없었고, 또 후에 본인이 직접 인터뷰에서 몸 상태 때문에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밝혔다. 허나 '그 덕에'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가늘게 떨리고, 그것이 애잔한 감성을 넘어 어떠한 위태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그래서 '봄 밤'은 기다림의 정도가 더 애잔하고, '빈 산'은 쓸쓸함의 정도가 더 심하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에서 박은옥의 목소리는 여지껏 불렀던 것 중, 이후에 나오는 11집인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에 수록된 동명곡,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와 8집인 <92년 장마, 종로에서>에 수록된 '비둘기의 꿈'과 더불어 가장 구슬픈 감성을 담고 있다. 이것은 이후 정태춘과 함께 부르는 곡에서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반면 정태춘은 박은옥처럼 거대한 추상을 노래하기 보다는 세세한 디테일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시를 만든다. 역시 이 부분은 박은옥이 현재까지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현재 지점에서 노래 부르는 것에 충분히 만족해 하는 것 같다.) 그의 노래들을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어떤 식으로 설명하면 좋을까. 마치 모든 곡들이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 같다고 할까. 그런 감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묘사하는 능력이 대단하다는 의미에서다. 그리고  내용이 밝든 우울하든 이 앨범에서의 곡의 리듬은 그의 여태까지의 작업 중에서는 드물게 대부분 흥이 넘치는데, 그가 가는 곳은 국내든 세계든 어디든지 모두 음악을 하는 마당이 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중국대륙 올로케(?) 인 듯한 '동방명주 배를 타고' 가 그렇지만, 사실 정태춘의 진가는 국내를 무대로 하여 박은옥과 함께 부른 '압구정은 어디', 되게 신나는 '오토바이 김씨', 단독으로 소화한 8분 10초의 대곡, '정동진 3' 에서 발휘된다. 강제 월드 스타가 된 후배가수와는 다른 시각으로 서울 강남 압구정을 바라보는데, 중요한 것은 그 가사쓰기다. '한명회가 놀던 그 정자는 거기 없고 푸드득 / 비둘기 떼 흐린 하늘 낮게 날면 / 지난 여름 장마에 흙탕물을 뒤집어쓴 / 미류나무 한 그루 여기 강 건너 바라보고 / 압구정은 어디, 압구정은 어디' , 혹은 '정동진 3'의 이런 가사들. '강릉 시내 들어와 중앙시장 골목을 헤매다 마른 오징어를 한 축 샀지 / 또 한 골목을 돌아 좌판에서 생선 내려치는 무쇠칼, 가장 큰 칼을 하나 샀지 / 후두둑 소나기 노점 천막을 후려치고 지나간 뒤 / 중앙로 철길 너머 먼 하늘 위 쌍무지개도 나는 봤지' 실로 숨막히는 디테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면 그냥 넋두리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는 이런 넋두리로도 음악을 만들고 리듬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그리고 그것이 흥이 난다.

 

이 두 곡에는 하나의 의의가 있다. 바로 박은옥과의 연관성이 많다는 것이다. 어차피 부부 음악가이고, 어떤 트랙은 두 사람이 같이 부르기도 하는데 그게 뭔 상관이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시인의 마을> 시기와는 다르게 8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정태춘과 박은옥은 점점 민중가수의 색채를 띄게 된다. 시기가 군부독재정권 시기이고 정태춘의 경우에도 그 검열에 피해를 본 적이 있으니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86년에 청계피복 노조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들의 요청으로 일일찻집에 출연해준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들 부부는 몇 번의 공연을 가지게 되는데 그 이후 정태춘은 앨범 속에 저항의 말을 담은 노래들을 조금씩 부르기 시작한다. 허나 이런 테마를 박은옥과 같이 부른 적은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이들 부부의 작업으로 치면 7집 앨범인 <아, 대한민국> 에서였다. 당시까지는 영화와 더불어 음반에도 사전 검열이 존재했는데, 정태춘은 그 검열을 거치지 않으면 음악을 낼 수 없는 환경에 저항하여 직접 자비로 '비합법음반'을 제작해 배포했다. 박은옥은 이 때 내심 정태춘의 작업을 도와주고 싶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태춘은 이번엔 혼자서 해 보는 것이 낫겠다며 박은옥의 참여를 말렸다. 그들은 서정성의 시인들이다. 아마 정태춘은 자신의 아내가 사회의 뇌관을 마구 건드리는 위험에 동참시키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 대한민국>은 부부의 이름이 아닌 '정태춘의 5집'으로 발매됐다. 그래서 데이터베이스 정리를 하면 이 앨범은 취향에 따라 분류되기도 한다. 부부의 앨범으로. 혹은 정태춘의 앨범으로. 이후의 앨범들에서도 이런 테마에 박은옥은 참여를 꺼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앨범에서는 정태춘이 박은옥과 음악으로 맺지 못했던 관계를 맺는다. 가령 그가 부른 '정동진 3'는 박은옥이 부른 '정동진 1', '정동진 2'의 후속이다. 정동진 기차역 대합실에서 소나기가 지나간 뒤, 창문 밖으로 무지개가 펼쳐지는 박은옥의 정동진과 난데없이 바하 캘리포니아를 넘나들면서 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노래하는 정태춘의 정동진. 그러나 너무나 다른 이들 부부의 노래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통일성을 갖는다. 정태춘은 정동진은 내가 만든 상징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민주화를 노래했고 피를 봤던 80년대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정동진을 바라봤던 것이다. (물론 그는 그 공간의 열풍을 불러왔던 드라마인 <모래시계>는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박은옥이 바라보는 세상은 실은 겉으로는 고요하게 보여도 실상은 처절하고 슬픈 투쟁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정태춘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역사에 맞서 싸우거나, 혹은 상처받고 떠나온 사람들이다. 부부는 20세기가 도래하기 2년 전에 발표된 9집 앨범, <정동진 / 건너간다> 에서 한국 현대사의 테마를 마침내 공유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아내를 보호하고자 혼자서 감당해왔던 '환멸의 90년대' 앞에서 그는 점점 지쳐갔는지도 모른다. 그를 지켜보던 박은옥은 마침내 지쳐가던 남편을 돕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은 이 앨범의 마지막 트랙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에서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정확히 '아치의 노래'와 '리철진 동무에게'는 80년대 후반부터 봐 왔던 정태춘의 익숙함 그대로다. 그리고 '리철진 동무에게' 에서 전교조 합법화 운동과 연관지어 보여주는 정태춘의 한탄은 암울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신명나는 록큰롤로 풀어냈던 '오토바이 김씨'와는 다르게 순수하게 슬픔만을 다루고 있다. 적나라하게 현실을 고발하던 그가 흐느끼듯 현실을 말할 때, 듣고있는 청자마저도 이것은 크게 잘못됐음을 느낀다. 80년대와 2000년대.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외쳤는데 도대체 달라진 게 무엇이란 말인가. 허나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부른다. 이번엔 아내도 함께다. 박은옥은 여지껏 이런 테마를 남편과 함께 부른 적이 없었다. 지난 8집 앨범에 있었던 '비둘기의 꿈'이 입시지옥을 견디다 못해 건물 밖으로 몸을 던진 열아홉 고등학생의 실화와 그 유서를 토대로 만들어진 노래였으니, 현실과 맞닿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런 곡들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그녀의 노래는 현실보다는 서정성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었다. 지난 앨범에서 함께 불렀던 '수진리의 강' 같은 곡도 그랬다. 그런데 마치 남편을 도우려는 듯, 이 곡에서 그녀는 바뀌지 않는 현실과 정면으로 부닥친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란 곡은 참 아름답다. 직접적으로 시대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들으면 이것이 8~90년대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이것이다. 그 시대를 이렇게 아름답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들 부부가 서정시인들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투쟁의 길에 접어들자는 것인지에 관해 단순한 이분법 안에서 논의하게 만든다. 정확히는, 어쩌면 뻔한 설명인지 모르겠지만 그 두 개가 조화롭게 혼합됐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박은옥이 이런 곡에 참여했다는 것이 어쩌면 그런 변화를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참여는 정태춘의 목소리가 시대에 대한 성난 외침이 아니라 그래도 희망을 노래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위치에 서 있게 만든다. 그것은 박은옥의 목소리가 굉장한 비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박은옥의 노래부분이 끝나갈 때 쯤, 그녀는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라고 부르며, 무언가를 향해 계속 나아가겠다고 말한다. 정태춘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 나아가려는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어찌보면 남편에 대한 아내의 배려이리라.

 

그래서 정태춘은 박은옥을 대신하여 희망을 노래한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 첫 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 어둠 걷혀 깨는 새벽 길모퉁이를 돌아 /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라고. 정확히 정태춘과 박은옥을 무엇을 향해 나아가려는 것일까. 하필 어둠이 걷혀 깨는 새벽 속에서 첫 차를 타러 나가는 것은 21세기가 되어서 이들 부부가 응시하고, 또 외쳐야 할 대상들이 남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위에서 했던 이상한 은유로 대신하자면, '서양 악기'와 '한국 악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으면서 나이가 들어도 다시 전에 해 왔던 것처럼 첫 버스를 기다린다. 여기에는 음악적 성취와 더불어 사회를 바라보고자 하는 시각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태춘과 박은옥의 음악에는 외국 악기들이 어떤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으며 ('동방명주 배를 타고'에는 얼후가, 박은옥의 솔로 음악에는 바이올린과 관악기, 피아노, 정태춘의 몇몇 솔로에는 아코디언과 록큰롤이 동반된다.) <정동진 / 건너간다>가 나올 때부터는 한국 정치 역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졌었던 시기였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시대, 그리고 21세기의 도래. 그것이 이 앨범으로 하여금 마지막에 희망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현재 2012년이 어떤 상황으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씁쓸하지만, 이 곡만큼은 감동적이다.

 

2003년에 겨울방학이 거의 끝나갈 즈음, 밤에 이 노래를 듣다 혼자 방 책상 의자에 앉아서 흐느낀 적이 있었다. 그 때 부터 본격적인 공부지옥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꿈은 점점 불확실해지기 시작했고, 타의로 입시학원에 다니고, 영어는 잘 되는데 수학은 더럽게 풀리지 않고, 공부를 못하면 각목과 물 먹인 신문지 말이로 엉덩이를 맞고 발바닥과 허벅지를 단소로 얻어맞던 시기였다. 다들 그렇게 개 처럼 맞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시기였다. 군사정권 시기의 폭력이 체벌이란 이름으로 그렇게 되물림 되었던 것일게다. 그리고 밤 11시가 넘어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로 그리 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로 그리 했다. 그 사이에 내 꿈은 비누거품처럼 사라졌다. 차라리 마구 놀 걸 그랬나. 아니면 그냥 순응하는 게 나았나. 아니면 죽는 것이 더 편했을까. 지나고 생각해보니 군대 만큼이나 어떻게 견뎌와서 이렇게 살아있는지 신기했던 시기였다.       

 

언제나 힘들지만, 그럴 때 위로가 되었던 건 투철한 문화적 의식으로 만들어진 이런 예술품들 덕일 것이다. 여교사와 여선생은 연주하라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비싼 단소로 허벅지에 피멍이 들 때까지 학생들을 때렸다. 비록 이 앨범에 단소가 활용되지는 않았지만, 그 때 눈물을 흘렸던 것은 그러한 악기들은 사람을 두들겨 패는 도구가 아니라 아름다운 노래에 이용되는 것이라는 걸 이들 부부가 다시 한 번 일깨워줬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흐느꼈다. 엉엉 울면 맞은편이 부모님 주무시는 큰방인지라 오해를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흐느낌을 멈추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잠을 자야 한다. 그래야 내일이 오고, 하루라도 더 살아야 이길 것 같았다. 그 뒤로 집에 있는 몇 개의 앨범들을 더 들었다. 8집과 6집이 있었고 지구 레코드가 아티스트와의 논의 없이 막 갖다 낸 베스트 앨범 LP도 있었다. 들으면서 이들의 다음 앨범이 꼭 나와줬으면 하고 기다렸다. 그 때가 10집 앨범 나온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말이다. 그 때는 아티스트들도 아이돌 같아서 한 몇 개월 기다리면 바로 다음 앨범 내는 줄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인 이상은이 거의 2년마다 꾸준히 신보를 발표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들은 쉽사리 다음 앨범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앨범 들은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정태춘이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취소했음을 알았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였던 시절에 친근했다는 정도였다.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정치에 많은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당시에는 더했는지라 소식도 우연찮게 뉴스에서 보고 '아. 그런가보다' 하며 넘어갔다. (뒤에 알게된 것이었지만 정태춘은 노무현이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 협상을 했다는 사실을 듣고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2003년이 되어 이들은 20주년 골든 앨범을 발매하고, 이 앨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이전에 발매된 앨범들을 모두 절판시킨다. 2002년에 정규 신보를 발표한 이들 부부는 그 이후로 10년동안 소식이 없었다. 신보가 발매되길 기다렸던 열네살 소년은 스물네살 청년이 되어, 군 제대를 하고 나서야 그들 부부의 신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 시간동안 개인적으로도 몇몇 상황들을 겪으면서 의문을 가졌다.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느 날, 어떤 사진작가가 그들 부부에게 질문을 했다. 새 노래를 기다리는 팬들이 많은데 왜 앨범을 내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정태춘과 박은옥은 웃기만 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고 얘기한 뒤, 한 장의 흑백사진을 보여줬다. 그것은 정태춘이 만신창이가 되어 전경들에게 연행되어 가는 사진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정태춘의 고향인 대추리에 미군기지를 지으려 했고, 그는 그것을 막으려 대추리 농민들과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박은옥은 솔로 앨범을 낼 기회가 있었지만, 남편을 위해 마음을 접었다. 일말의 기대를 갖고 첫 차를 기다렸던 이들 부부가 느꼈을 상처를 약간이나마 함께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은 몇 년은 견딜만했다. 결국 대추리에는 미군기지 건설이 진행되고 있고, 나는 스물넷이 되었다. 그리고 부부는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앨범이 곧 첫 차이니까. 

 

p.s.1 - '봄 밤'은 무려 1982년에 써 둔 것을 2002년에야 불러서 노래로 만든 것입니다. 마치 황병기 님의 앨범이 그런 긴 시간에 걸쳐 곡을 모아 한 장의 음반으로 내듯,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앨범도 그러한 것이죠. '정동진 3'의 경우에는, 왜 뒤에 3이 붙었냐면 이전 앨범인 <정동진 / 건너간다>의 트랙 중에 '정동진 1', '정동진 2'가 있었거든요. 후에 박은옥 님이 말했는데, '정동진 3'은 1과 2를 지었을 때 같이 지었던 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앨범에 싣지 않고 놔 뒀다가 이 앨범에 실었어요. 나왔을 당시에 북클릿을 보다가 곡을 쓴 년도, 그리고 노래로 옮긴 년도를 보며 시간의 격차를 바라보며 많이 놀랐습니다. 사실 저는 묵혀두는 것을 잘 못하거든요.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닙니다만.) 오히려 끄적였으면 바로바로 올려보고 싶어하지요.

 

하여간 그 때 처음으로 노래란 것은 바로바로 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숙성시키고 시간을 기다리며 탄생의 시기를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때문에 황병기 님,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앨범 외에도 10년 째 신보를 내지 않고 있는 장필순 님과 한영애 님도 기다려 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전자의 사람들은 각각 13년, 10년만에 앨범을 발표했고 후자의 사람들은 현재까지도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있지요.) 물론 생각만 했지, 적응하는 과정은 쉽지가 않더군요. 너무 안 나오니까 말이죠.

 

p.s.2 - 이 앨범이 발매됐을 당시,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캐백수 방송국의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TV로 직접 봤었는데 방청왔던 젊은 관객들의 표정은 다들 애매하더군요. 다들 이 아티스트들을 모르는 듯 했습니다. 그거야 그러려니 하지만 이후의 방청후기 게시판에 올라왔던 것이 보면 참 한숨 나오지요. 제 기억으로는 아마.. '옆에서 노래부르는 아주머니, 뭔가 부자연스럽고 꼭 북한 여자 같아요 ㅋㅋ' 뭐.. 이런 거였거든요. 북한 여인분들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들으라는 노래는 안 듣고 얼굴만 보는 것이 그 후기 남긴 사람의 수준을 생각케 했습니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박은옥)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막차는 생각보다 일찍 오니
눈물같은 빗줄기가 어깨 위에
모든 걸 잃은 나의 발길 위에
 
싸이렌 소리로 구급차 달려 가고
비에 젖은 전단들이 차도에 한 번 더 나부낀다
막차는 질주하듯 멀리서 달려오고
너는 아직 내 젖은 시야에 안 보이고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너 어느 어둔 길모퉁이 돌아 나오려나
졸린 승객들도 모두 막차로 떠나가고
 
(정태춘)
 
그 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긴 긴 어둠 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너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다시 올 봄의 화사한 첫 차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내 영혼 비에 젖어 뒤척였고
 
뒤척여, 내가 오늘 다시 눈을 뜨면
너는 햇살 가득한 그 봄날 언덕길로
십자가 높은 성당 큰 종소리에
거기 계단 위를 하나씩 오르고 있겠니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첫 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어둠 걷혀 깨는 새벽 길모퉁이를 돌아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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