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TRACKS
1. 몰라주고 말았어
2. 가버린 사람아
3. 태양의 빛
4. 내 곁에 있듯이
5. 춘천의 하늘
6. 고독한 마음
7. 하늘을 바라보소
8. 그리고
9. 그대는 나를
CD 개수 : 1
러닝 타임 : 36:59 Mins
레이블 : ESP 엔터테인먼트, 포니 캐년 코리아
.....
말레피센트의 귀환
1.
최근에 안젤리나 졸리 여사가 출연한 <말레피센트>라는 작품이 있다. (비록 본편의 완성도가 좌절스럽다는 평가가 많지만, 마녀 말레피센트를 맡은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풍문이다. 풍문이라 하는 것은, 내가 아직 작품을 못 봤기 때문이다.) 말레피센트는 월트 디즈니 사의 1959년작인 클라이드 제로니미 감독의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악역으로 등장했던 마녀다.
사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그녀가 그렇게 사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잠자는 당사자인 오로라 공주의 부모가 말레피센트도 파티에 초대해 줬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것 아닌가. 현실세계였으면 사실 악역들도 세금 내고 사는 엄연한 시민인데. 암만 생각해봐도 말레피센트가 오로라 공주에게 저주를 건 이유는 출생 파티 때 초대를 해주지 않아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면, 말레피센트도 사람이다. 상처받은 그녀는 오로라 공주에게 열여덟살 생일이 되기 전, 물레 바늘에 찔려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지리라고 선언하고 사라진다.
* 사람 혼 쏙 빼놓는 김추자의 '저무는 바닷가' 뮤직 비디오.
참고로 이 곡, 박찬경 감독의 다큐멘터리 <만신>에도 잠깐 나왔었다. 알아채신 분 계시려나.. *
김추자, 이봉조의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 앨범 리뷰 (-> 보러가기) 를 끄적일 때, 그녀를 '말레피센트' 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과 차이점이 있다면, 팬의 입장에서는 김추자는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었다고 보인다는 점일게다. 물론 이건 철저히 팬으로서의 생각이다.
김추자는 1981년에 박경수 동아대 교수와 결혼식을 올린 뒤, 1986년에 잠시 TV에 출연하여 무대를 가진 뒤에는 33년간 철저히 가정주부의 삶을 살았다. 소주병에 얼굴을 난자당하고, 안무가 북한에게 보내는 수신호라는 모함에 시달리는 파란만장한 연예계 인생을 살았어도 오뚝이처럼, 1978년에 복귀 공연을 가졌던 그녀였다. 그래서 사실 복귀 3년 만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점이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나 김추자는 유명인으로서 활동했을 때도 말수가 많지 않았고, 자신의 분장실을 따로 쓰기를 주문했던 만큼 폐쇄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을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김추자가 벌이는 행동, 그녀에 관한 소문들은 모두 갑자기 주문을 거는 마법 같다. 갑작스러운 은퇴선언도 당시 대중들에게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녀는 결혼을 함으로써, 당사자로서는 재밌게 살았다지만 (가수로서는) 죽음과도 깊은 잠에 빠졌다.
솔직히 몇 개월 전에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 리뷰를 끄적였을 때 내 마음은 일종의 분노에 가까웠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심이야 어찌됐든 김추자는 끊임없이 번복을 해댔기 때문이다. 돌아오겠다는 소리는 사실 2000년부터 들려왔었고, 나는 그녀의 복귀 시도 소식을 2007년에 처음 들었다.
사실 말만 그렇게 하는 거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원래 십몇년 걸려 작품 발표하는 예술가도 많다. 그러다 보니 팬들의 입장에서는 예술가가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도 언젠간 새로운 작품을 낼 거라는 기대를 가지며 살 수 있다. 예술가가 얼마나 이기적이든,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팬들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헌데 김추자는 단순히 침묵을 넘어서서 뭔가 준비를 하다가 꼭 그 결정을 뒤집었다. 2000년에 복귀하기 위해 몸매를 가다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시월애>, <푸른 소금>을 만든 이현승 감독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자신의 인생을 뮤지컬 화 시키려 했을 때도 결국 뒤집혀서 끝끝내 좌초되지 않았던가.
물론 나 스스로도 최근에 어떤 일을 겪으면서, 예술과 관련된 분야는 여러모로 계약이 참 불공정한 구석이 있구나 싶어 김추자가 당한 일에 대해 공감을 할 수는 있었다. 이 슈퍼스타에게마저도 불공정한 약속과 계약을 오는구나..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겪어가면서 일을 하는 거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끊임없는 번복을 저지르는 행동은 용서가 되지 않았지만.
김추자는 그 옛날 자신을 가리키는 소문대로 '구름 같은 김추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나 역시 차라리 그녀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항상 돌아온다 돌아온다 말하다 지난게 10년이 넘어가고, 나도 그 소문을 들은지가 7년이 됐으니 말이다. (게다가 올 해 같은 경우에는 김추자의 복귀 소식을 관심 갖고 전한 방송사 중에 'TV 조선'이 끼어있어서.. '쩝. 이 방송사를 믿느니..' 하는 마음도 있었고. TV 조선 믿느니 차라리 <환단고기>를 믿겠다.)
올 해도 복귀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앨범 커버마저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던 시간.. 툭!! 김추자는 정말 갑작스럽게 돌아왔다. 삐딱함은 가시지 않았다. 재작년부터 노장 예술가들이 단체로 회춘이라도 했는 듯 새롭게 복귀하길래 거기에 묻어가려고 돌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내게 김추자는 13년만에 <Chinese Democracy> 앨범을 낸 건스 앤 로지스의 한국판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까지는.
2.
2000년에 김추자가 내려했던 앨범의 구상과 좌절된 이유는 2007년에 6월에 월간지인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최영철 기자 (인터뷰어) : 2000년 각 신문에 다시 음반을 내고 복귀한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결국 안 나왔으니 오보가 되고 말았네요.
김추자 : 만회해야죠, 뭐. 그 때 음반을 내려고 작곡가도 자주 만나고 재즈 발레도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몰라요.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을 했죠. 헬스장에 가서 매일같이 몸매를 가다듬고 그랬는데...
최영철 기자 : 그런데 어쩌다 음반 작업이 중단됐습니까.
김추자 : 음반을 내고 공연도 하기로 기획자와 계약을 했는데, 그 사람은 음반보다는 공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죠. 그게 돈이 되니까. 좀 지켜보니 음반은 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눈에 보이는 거에요. 그 때 저는 음반 취입에 비중을 더 두고 있었거든요. 지금처럼 음반시장이 어렵진 않았으니까.
약속한 녹음 날짜는 다가오는데 데모 테이프도 가져오지 않고 시간만 끌기에 계약이 자연스럽게 깨졌는데, 글쎄 그 기획자가 나 모르게 거액의 손해 배상 소송을 낸 거에요. 음반을 내기 위해 각종 비용이 들었다며 그걸 나보고 물래요. 계약서에도 분명 쌍방간에 이해 관계가 맞지 않으면 자동으로 파기한다고 돼 있었는데, 결국 제가 이겼지만, 소송이 2년을 넘게 끌면서 소금에 절어 시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속앓이를 좀 했죠.. (중략)
최영철 기자 : 어떤 음반을 낼 계획이었나요.
김추자 : 새로운 곡은 몇 곡만 하고 내 히트곡을 다시 부를 계획이었어요. '빗 속의 여인', '미련' (<신동아> 본문에서는 '비련'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비련'은 조용필 곡이잖아.), '마른 잎' 같은 노래들 말예요. 옛날엔 신중현 선생님 밴드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밴드에 맞춰서 새롭게 하면 또 다른 느낌의 노래가 나올테니까.
(중략)
최영철 기자 : 은퇴하신 적은 없으니, 음반 다시 내셔야죠.
김추자 : 당연하죠. 그런데 요즘 음반시장이 너무 죽었어요. 사실 지난해 10월 (이 인터뷰가 실린 해에서 생각해보면 지난 해는 2006년) 부터 음반을 내려고 '김추자 & 컴퍼니' 라는 기획사를 설립하고 작곡가를 만나러 다녔어요. 사업자 등록도 제 이름으로 했어요. 지난 10년 넘게 많은 음악을 들어온 덕에 직접 음반 제작을 하려고 했던 거죠. 내게 맞는 작곡가를 찾으려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났는데, 음반시장 상황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저는 그 사람의 작품을 들으면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수 있어요.
그런데 대다수의 작곡가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의욕 상실이라고나 할까. 작곡을 해서 음반이 팔려야 먹고 사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음반을 내려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저를 참 많이들 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면에서 팬들에게 빚이 많아요. 1982년에 신중현 선생님에게 받은 곡이 열 곡 정도 있습니다. 신 선생님이 젊을 때죠. 그 데모테이프와 악보가 아직 있어요.
이 인터뷰에서 김추자는 1982년에 신중현에게 받은 열 개의 데모 테이프와 악보가 있다는 언급을 한다. 받기만 했지, 본격적으로 앨범에 쓰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1982년이면 그녀의 은퇴 후의 일이다. 독특했다. 비록 은퇴는 했지만 언젠가 돌아올 마음이 있으니까 이후에 곡을 받은 건가?
이 때 언제 나올지 모를 김추자의 신보에 대해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신곡과 예전 곡을 다시 부르는 방식을 취하겠구나.. CD 시대인데 러닝 타임이 좀 길었으면 좋겠네. 후자는 틀렸지만, 전자는 맞았다. <It's Not Too Late>. 김추자의 이 앨범에 비견될 수 있는 앨범은 뭐가 있을까. 아마도 조니 미첼이 57세가 되어 20대 시절 자신이 부른 곡들을 다시 부른 2000년작, <Both Sides Now> 앨범 정도만이 맞설 수 있을 것이다.

* 조니 미첼 *
사람에 따라서 일찍 데뷔해 폭죽 터지듯 화려하게 빛을 내다 사그러지는 경우도 있는 반면, 대기만성형이라고 나이 들어 꽃피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생물학적 전성기'는 결국 마흔 이전에 끝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이런 이유로 무엇보다 힘이 넘치고 창작욕이 왕성해지는 젊은 시절의 걸작들을 다시 부르는 시도는 자칫 가수 당사자에게 위험한 시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조니 미첼은 과거의 영롱함과 달라져 버린 자신의 허스키한 현재의 목소리를 원숙함으로 무기 삼아 느린 톤으로 여유롭게 돌파하는 방법을 택했다.
모든 곡들이 다 새롭게 들리고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Both Sides Now' 를 다시 부른 것은 정말 대단한 선택이었다. 아무리 살아봐도 인생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그 곡을 60이 다 되어가는 여인의 음성으로 들을 때는, 젊은 시절의 영롱함은 상대가 될 수 없는 깊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가수가 나이 들어 자신의 곡을 리메이크하는 행위를 두고 헛짓거리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잘만 해주면 말이다.
* 조니 미첼의 1969년 앨범 <Clouds>에 수록된 'Both Sides Now'.
6~70년대 한국에서는 포크 음악 연주자와 가수들의 단골 레퍼토리 곡이었다. 양희은도 자신의 첫 독집 앨범인 <양희은 고운 노래 모음 1집> 에서 이 곡을 번안하여 불렀다. *
* 조니 미첼의 2000년 앨범 <Both Sides Now>에 수록된 'Both Sides Now'.
한국에는 리차드 커티스 감독의 <러브 액츄얼리>의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되면서
다시 많이 알려졌다. *

* <It's Not Too Late> 기자회견에서의 김추자 *
김추자의 <It's Not Too Late>를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에 비교하자니, 사실 이 앨범이 완전한 리메이크 앨범은 아니라서 공정할까 싶기도 하다. 이 앨범에서 리메이크곡은 다섯곡이기 때문이다. 네 곡은 신곡이다. 물론 이 신곡들도 대부분 과거에 받아 놓은 것이긴 하지만서도. 그래도 무작정 비견해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먼저 궁금해지는 것은 신곡이다. 첫 인상은 아무래도 세월의 흐름이 있다보니 김추자의 목소리가 굵어졌다는 것이다. 그녀도 한결같이 목소리가 유지되는 이미자나 조용필 같은 체질은 아닌가보다. 그러나 굵어진 보컬은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운 점은 김추자의 공연을 직접 본 사람들의 말을 나도 느낄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흔히 김추자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열정, 광기 등 육감적인 감흥이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냉정히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현 세대가 6~70년대 김추자의 실제 공연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져 있다. 자료 보존에 관해 무지해던 당시의 인식 때문이다.
그나마 팬들이 열악한 화질로 녹화한, 80년대에 공백기를 깨고 잠시 노래를 부르러 나왔을 때의 모습정도만 볼 수 있다. 그 정도만으로도 김추자의 다이너마이트적인 매력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지만 아무래도 아쉬운 것이다. 김추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가수로서 청각적인 면 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면에서도 같이 볼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사람이다.
허나 당시의 앨범으로 들으면 김추자에게 사르르 녹는 교태가 있지만, 아무래도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잘 없었다. 그건 비단 김추자와 연주를 담당한 연주자들만의 문제라 볼 수는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한계에서 온 것일게다. 딥 퍼플의 'Highway Star' 도 발표 당시에는 가장 '빠른 곡' 이었다 하지 않는가.
클래식이 클래식이 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시대적 한계를 뚫고 시퍼렇게 날을 발하는 에너지에서 비롯된다. 김추자는 청각적인 면 만큼이나 시각적인 면에서의 평가도 강하게 요구되는 사람이었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녀의 진면목을 알 수 없었다. 마치 무용가인 이사도라 덩컨이,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영상자료가 하나도 없어 춤을 어떻게 췄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야의 신화로 추앙받듯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신중현이 만든 신곡인 1번 트랙 '몰라주고 말았어'는 김추자에 대한 영상자료적 괴리를 거의 대부분 메꿔주는 마력을 자랑한다. 어느 정도냐면, 음악만 들어도 춤을 추는 김추자의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질 정도다. 설사 그녀의 전성기를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물론 그 이전에 먼저 음악가로서의 신중현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가를 체감하게 되어 감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2번 트랙인 '가버린 사람아'는 김추자의 1969년 데뷔 앨범인 <늦기 전에 /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에 수록됐던 곡이다. 또, 6번 트랙인 '고독한 마음'은 김추자가 당대의 인기 록 밴드였던 '검은 나비'와 콜라보를 한 앨범인 <김추자와 검은 나비> 의 수록곡이다. 그리고 '고독한 마음'은 후대에 들어와 사이키델릭 여제로 추앙받는 김정미가 불러 유명한 곡이기도 하다.
* 신중현의 '마른 잎'을 각자 자신의 앨범에 수록한 김추자와 장현.
80년대에 이렇게 TV에 같이 나와 듀엣으로 노래 부른다. *
개인적으로 신중현에게 느낀 재미와 불만은, 똑같은 곡을 다른 가수들에게 여러번 부르게 했다는 점이다. 솔직히 한 가수가 신보를 낼 때마다 똑같은 곡을 여러번 부르게 한 건 좀 심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신중현은 가요를 클래식처럼 바라본 것 같다. 동일한 클래식곡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개성을 만나 다르게 해석되듯, 일명 '신중현 사단'이라 불렸던 김추자, 김정미, 장현, 이정화, 박인수 등등의 쟁쟁한 보컬리스트들이 부른 버전들은 각기 새로운 해석이 됐다.
<It's Not Too Late> 에는 몇십년이 지나도 낡지 않은 신중현의 곡을 소화하기 위해 송홍섭, 한상원, 정원영 등 한국의 최고 연주자들이 동원됐다. 그 결과, 오히려 사반세기가 넘은 신중현 음악의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솜씨는 그의 아들들과 맞먹거나 오히려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이것은 신중현과, 혹은 앨범의 곡들을 작곡한 이봉조, 김희갑 같은 사람들과 비슷한 시기를 거쳐왔다면 거쳐왔다고 할 수 있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송홍섭은 '사랑과 평화'의 베이시스트이며 한상원은 자신의 이름으로 만든 밴드를 이끌고 있지 않은가. 이들의 손길에 의해 탄생한 '몰라주고 말았어' 의 둔탁한 키보드 사운드, 원곡보다 메탈에 가까운 방식으로 탈바꿈한 '가버린 사람아'는 가히 감동적이다. 청자로 하여금 듣다가 전율을 일으키게 만들 정도다.
앨범에서 신중현과 이봉조의 손길이 닿지 않은 (참고로 '하늘을 바라보소'와 '그리고'는 전에 리뷰한 바 있었던 음악가 이봉조의 작곡집인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 의 수록곡이다.) 두 곡 중 하나인 5번 트랙 '춘천의 하늘' 역시 또다른 놀라움을 맛보게 된다. 여기에는 피아니스트인 정원영의 솜씨가 주효했다. 그녀의 연주로 인해 나는 김추자가 재즈 풍의 음악을 부르는 모습을 처음 듣게 되었다.
사실 이 말은 확실치 않다. 김추자가 발표한 앨범의 개수는 대충 잡아도 50개가 넘는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복각이 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혹시 모른다. 그녀가 재즈 앨범도 냈을런지는. 그래서인지 <It's Not Too Late>도 정확히 김추자의 몇 번째 정규 앨범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딱히 구분은 했는지조차도 모르겠고.

* 김추자가 발표한 '수많은 앨범들 중 하나'. <어디로 가야하나>.
앨범 커버 오른쪽 위에 남자의 성기처럼 보이는 그림이 있어
천박하게로는 '김추자 자지 앨범' 이라고도 불린다.
김추자 앨범이 대개 비싸지만,
이 앨범도 몇 년 전에 가장 비싸게 거래되던 앨범 중 하나였다고 한다.
아마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
3.
사실 '노래를 부르기만 하는' 가수들을 싱어송라이터보다 낮게 바라보는 시선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이런 시선으로 폄하하거나 한 적은 없으니, 차별한다기 보다는 그냥 얘는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런가보다 하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는데, 여튼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김추자를 논할 때는 이 관점이 다소 이상해진다. 세션 연주자들은 모르겠지만, 김추자의 경우에는 보컬 녹음을 과거의 아날로그 원 테이크 방식으로 진행했다.
사실 당사자에게는 더 익숙한 방식일 수 있겠지만, 요즘 관점으로 볼 때 이 방식은 굉장히 불편하다. 한 곡 전체를 끊어서 녹음하여 좋은 부분만 골라내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다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딱히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작가적 의도로 했다기 보다는 당시 기술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김추자의 경우에는 예외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적 세계를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느낌 그대로 나온다고 정의한 바 있다. 사이키델릭 음악을 체화하는 방식이나 소울 장르도 신중현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생래적으로 익혔다고 말을 할 정도니까! 자칫 투박할 수 있지만 이런 나름의 방식으로 김추자는 독보적인 아티스트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딱히 노래를 직접 만든 것도 아닌데 말이다.
<It's Not Too Late>의 발표기자회견에서 김추자는 자신의 노래 연습 과정을 '응접실에서 라디오 틀어놓고 춤추기' 로 설명했다. 솔직히 그 말 듣고 좀 웃었다. 요새 음악계가 기획사 차려놓고 하루의 대부분을 연습생들의 훈련에 집중하는데 그러고도 모자랄 판에.. 아무리 잔뼈 굵은 가수라도 그렇지, 강산이 세 번 넘게 바뀐 공백을 메우는 방법이 '고작' 라디오 틀어놓고 춤추는 건가 싶었으니 말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김추자는 에둘러 자신이 끊임없이 음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그런 식으로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앨범을 들으며 음악은 뭐니뭐니해도 창작을 최고로 우선 쳐 줘야 하지 않냐는 오래된 생각이 잠시동안 바뀌었다.
3번 트랙인 '태양의 빛'은 김추자가 신중현의 그림자를 아예 지워버린 경우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콘서트 개최와 정규 앨범 발매가 미뤄졌을 때 김추자는 문득, 이 곡 자체가 추모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태양의 빛'은 새롭게 편곡 과정을 거친다. 과거의 버전이 어땠는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지만 여기서 김추자는 '절규'로 노래 부르는 '봄비'의 박인수마냥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1, 2번 트랙에서는 록커였고 3번 트랙에서는 짐승처럼 운다. 그러다 4번 트랙에서는 몽환적인 발라더가 되기도 한다. 무절제하고 통제가 되지 않는 느낌이라 33년 공백의 한을 한 번에 다 풀겠다는 패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춘천의 하늘' 부터 마지막 9번 트랙인 '그대는 나를' 에서는 김추자는 시침 뚝 떼고 자신을 절제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김추자는 주체 못하는 에너지를 안에 넣어두고, 능숙하게 보컬리스트로서의 자신을 억제한다.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부족함이 있다면 그건 아마 라이브 무대에서 시각적으로 보여주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김추자에게 있어서 '얌전' 할 수 있는 음악들의 선곡은 오히려 내게 참 반가운 경우였다. 나는 최근에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 앨범을 리뷰하면서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의 관점으로 바라봤는데, 그건 바로 신중현과 달리 이봉조 작곡가와 그녀의 합이 꼭 잘 맞지는 않다고 생각이 들어서였다. 리뷰를 남길 당시, 그 앨범에 있는 '무인도'와 '아침'은 굉장히 강렬한데, 다른 곡들이 두 곡을 못 따라간다는 식으로 써내려 갔었다.
그런데 <It's Not Too Late>에서 김추자가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당시의 곡들 중 두 곡을 다시 부른다. 그게 7, 8번 트랙인 '하늘을 바라보소'와 '그리고' 다. '그리고'는 당시 들을 때도 독특한 허밍 때문에 그나마 괜찮게 들었는데, 원곡의 빈곤함을 탓하기 이전에 해당 곡이 밋밋하게 들렸다면 가수의 책임도 분명 있다. 두 곡은 김추자가 소화할 수 있는 곡의 스펙트럼의 한계를 증명하는 경우였다. 해당 곡을 만든 이봉조의 화려한 관악 사운드에 발 맞춰 가기에 당시의 그녀가 가진 목소리는 끈적하고 요사스러운 매력은 있되, 무게가 별로 없었다. 관악기에 달라붙을 접착력은 떨어졌달까.
사실 두 곡은 김추자의 커리어에서 딱히 유명한 곡이라 볼 수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모든 곡이 다 소중하겠지. 하지만 처음 트랙 리스트에서 두 곡의 이름을 봤을 때 나는 임진모 음악평론가가 말한 의문과 감탄 섞인 '그만큼 공백기를 가졌으니 우리가 모두 아는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의 김추자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런 실험을 했다' 를 이해했다.
김추자의 음악적 세계관은 그대로다. 그러나 그녀의 성대에 두터운 세월의 막이 쳐지면서 어딘가 밋밋했던 이봉조의 두 곡은 마침내 행복하게 가수와 다시 만났다(고 생각한다). 앨범의 후반부는 이렇듯, 곡 자체의 완성도보다도 청자의 관심을 오로지 김추자의 보컬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김추자는 노래를 짓지 않았지만, 온전히 그 노래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체화해 낸다. 김추자는 정말 조니 미첼도 울고 갈 아티스트 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순간이다. 아. 참고로 '그리고'는 이번 버전의 연주도 참 좋다. 오니시 유카리의 앨범인 <직격! 한류부인권> 도 생각나고 블루지하기도 하면서 펑키한 느낌도 난달까?

"나는 늦었다, 나가려면 일찍 나갔어야 했다고 그랬더니 제 딸이 "엄마. 지금도 늦지 않았어." 하더니 둘이 같이 거울을 보면서 "엄마, 나랑 같이 늙어가잖아. 엄마 늙지 않았고 주름도 없어. 엄마. 노래해." 라고 하더군요."
자. 이제 끝내야 하나.. 이 앨범에 가지는 유일한 불만이 있다면 언제나 간만에 복귀한 가수들이 LP 시절 감성을 못 버려서 CD 러닝 타임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분량으로 앨범을 발매한다는 것 정도? 이렇게 생각하면 누구든 어쩔 수 없이 세월이라는게 내려앉게 마련이다. 김추자에게 <It's Not Too Late> 는 '첫 CD 앨범' 이다. 그런데 정작 앨범 전체 길이를 보면 CD 를 바이닐 레코드로 생각한 듯하다. 조용필도 그랬지만 항상 이 놈의 길이가 아쉽다. 그리고 커버 디자인 같다. 내게는 오히려 CD 라벨 디자인이 더 좋아보인다. 김추자 앨범들이 대체적으로 인물 사진 치고는 앨범 커버들이 독창적이고 재밌는게 많은데, 이번 앨범의 커버 디자인은 어째 좀 밋밋해 보인다.
끄적이고 보니 리뷰가 호평일색이다. 이건 정말 내가 감동 받아서 그렇다. 이 정도로 전율한 것도 간만이다. 바로 위에 언급한 이 사소한 불만을 제외하면 <It's Not Too Late>는 올 해를 넘어 앞으로도 회자될 앨범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다.
그녀의 귀환이 전국적인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녀에게 사과해야 한다. 혼자서 이렇게 미루고 또 미룰거면 차라리 돌아오지 말라고 생각했으니까. 김추자는 그런 싸늘한 시선을 비웃듯 시간의 간격을 완벽하게 좁히는 작품을 들고 왔다. 더불어 김추자는 여전히 도도하고 자신의 이름에 대한 자존심이 있어 보인다. 이런 자신감이 음악을 소비하는 주요 층의 취향을 완벽하게 흡수해서는 아니다. (나미 같은 경우에는 신곡 'Voyeur' 를 통해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여전히 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세월이 흘러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또 변해도, 김추자는 자신의 모습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앨범을 보니 그녀는 공백기를 너무나 잘 견뎌냈다.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망, 앨범을 내고 싶다는 열망이 김추자를 지금까지 버틸 수 있게 했나보다.
이 앨범은 실로 감동적이다. 마지막으로, 복귀하시기 전까지 팬으로서 잠시 나쁜 마음을 가져서 정말......
미안하다~! (고승덕 톤으로)
.....
"예로부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이죠. 그러느라고 다들 썩지 썩어.
농담이고요, 그런 심리도 있죠. 하지만 제가 제 관리를 못해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에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제 관리를 하고 있거든요. 정말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저도 참 독한 사람이에요. 인터뷰도 영원히 안 하겠다는게 아니라 어떤 작품, 뭔가 건수를 갖고 나서겠다는 겁니다.
- 2007년 6월, <월간 신동아>와의 전화 인터뷰 중에서 "인터뷰를 거절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게 언젠가 다시 무대에 설 때를 위해 자신을 신비화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요" 라는 최영철 기자의 질문에 대한 김추자의 답.
.....
p.s.1 - 제가 산 것은 초판입니다. 초판 물량에 한해서 김추자 님이 저렇게 사인을 하셨죠.
p.s.2 - 김추자 님 콘서트가 이번 달 28일부터 29일까지 코엑스 D 홀에서 열립니다. 아흐.. 보고 싶네요.
p.s.3 - 본문에서 은퇴에 관해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표현을 썼는데, 정말 궁금하더군요. 이 분이 왜 그렇게 미련 없이 은퇴하셨는지. 기자회견 글을 읽다가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연예계 생활할 때 간첩이다 뭐다 그런 이야기 너무 많이 들어서 연예계 생활이 하기 싫더라고요. 1969년에 춘천 좁은 데 살다가 넓은 데 와서 히트라고 쳤는데, 간첩이다 CIA가 왔다갔다 그러는데 그때는 정말 노래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결혼생활이 제게는 참 행복한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다시 마음먹은 건 이젠 그런 것도 다 소화할 수 있으니까 더 늦기 전에, 목소리 더 망가지기 전에 들려주고 싶은 생각인 거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
p.s.4 - 이번 앨범 발표에 발맞춰 김추자 님의 앨범 두 개가 LP로 복각되어 발매되더군요. 그보다 의문인게 '이 앨범은 LP 발매 안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막상 CD 사고 보니 언젠가 음반사 측에서 한 번은 LP로 우려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김추자 님이 보컬 레코딩은 아날로그로 하셨다고 하니까, LP 발매도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디지털 레코딩 한 것은 CD로 들어야지, LP로 들으면 별 의미가 없지 않겠냐는 생각이 있어서요. 레코딩을 아날로그로 다시 하지 않는 한 말이죠. 가수의 동의가 있어야 겠지만 음반 작업하면서 누락된 곡들을 보너스 트랙 삼아 두 장짜리 LP로 나오거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몰라주고 말았어 *
작사 + 작곡 : 신중현
사라져 버릴까봐 떠나가 버릴까봐
그림자 같이 너를 내 곁에 두었어
꿈이 사라질까봐 모습 사라질까봐
싫다고 말을 해도 놓지를 않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모두 너를 좋아하고 너의 말을 할 때면
질투한 마음 나는 버리지 못했어
맴도는 너의 모습을 버리려 애를 써도
그림자같이 너는 떠나지 않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사라져 버릴까봐 떠나가 버릴까봐
그림자 같이 너를 내 곁에 두었어
꿈이 사라질까봐 모습 사라질까봐
싫다고 말을 해도 놓지를 않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몰라주고 말았어 너는
너는 몰라주고 말았어
몰라주고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 그리고 *
작사 + 작곡 : 이봉조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리고 돌아서 갔네
생각하면 무엇하리 떠나 버렸네
사랑하고 사랑했네 너는 떠나갔어도
그날따라 바람이 불고 있었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리고 돌아서 갔네
생각하면 무엇하리 떠나 버렸네
사랑하고 사랑했네 너는 떠나갔어도
그날따라 가랑비 오고 있었네
그리고 눈을 감았네
그리고 혼자 울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