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 박은옥 -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박은옥 외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 TRACKS

1. 서울역 이 씨

2. 저녁숲 고래여

3. 강이 그리워

4. 꿈꾸는 여행자

5. 눈 먼 사내의 화원

6. 섬진강 박 시인

7.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8. 날자, 오리배... (Chrous By 강산에, 윤도현, 김C)

9. 92년 장마, 종로에서 (헌정트랙)

 

1CD / 40:54 Mins / 레이블: 삶의 문화, 유니버셜 레코드
 

 

"자. 이제 됐지?"


-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의 완성본을 박은옥에게 건네주고 정태춘이 한 말

 

 

어느 순간 정태춘은 침묵하고 있었다. 직접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꺼낸 한 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고향이었던 대추리가 미군 기지로 활용되어 마을 사람들이 내몰리기 시작했고 그 역시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전경들에게 제압당해 굴욕적으로 끌려갔다. 아니. 개인의 굴욕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자신의 고향이 기억 속에만 남게 생겼는데. 부부가 가수 활동을 시작한지 몇 주년을 기념하여 앨범을 낸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아마 이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을 좀 더 빨리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일본의 산리츠카 마을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대추리 마을 사람들의 투쟁은 실패했다. 그리고 정태춘 역시 침묵했다. 박은옥의 경우에는 그 자신의 바람도 있고 하여 다른 음악가와의 작업을 통해 솔로 앨범을 계획 중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모습을 본 그녀는 그의 마음과 고통을 같이 나누려는 듯 계획을 철회했고, 그 결과 청자들이 11집을 듣는데는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10년이란 시간은 막상 되돌아보면 짧은 것 같은데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보면 사실 굉장히 길다. 모든 시간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인생 초반부의 10년은. 갓난장이 애가 초등학교 3학년이고, 중 1 학생부터 시작이라 친다면 군 제대를 하고 나오니 앨범이 막 발매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시간의 경과다. 물론 음악계에서 아티스트가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런데 내게는 정태춘, 박은옥의 신보를 듣기까지의 시간이 어째 참 각별하게 느껴진다. 나는 신보가 나오면 그것을 바로바로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을 딱히 가진 적이 없다. 영화도 그렇고 만화도 그렇고 대부분이 그런 편인데, 그냥 어느 순간 내가 접할 때가 됐다고 생각할 때 접한다. 그런데 그것이 공개되자마자 바로는 아니다. 이것은 지금도 어느 정도 남아있는 내 삶의 태도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주로 듣거나 보거나 읽는 건 전체적으로 연식이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정태춘, 박은옥의 10집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는 발매된지 한 달만에 들었던 앨범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면 내게 있어 '동시간대'에 들은 앨범이나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동시간대의 신보를 하나 듣고, 차기작이 나올 때까지 같이 살아가고 기다리는 경험을 그 때 처음 해 본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당시 동시간대로 들었던 다른 아티스트들에 비해 그들을 기다리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음식에 비유해야 하나. 김치도 이 정도까지 묵히지 않을 것이고...이 정도면 술인가. 이것도 그만큼 묵은 술을 먹어보지 않았기에 그저 생각만 할 뿐이다. 그러나 아마 그 술맛을 상상한다면 아마 이 앨범을 들을 때의 기분이 되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레 상상하게 된다. 그나마 10집에는 정태춘의 '록큰롤'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오토바이 김씨'나 '정동진 3.' 같은 곡들이 있었지만 이번 앨범에는 그런 곡들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10집과 11집 사이에 놓여진 10년이라는 긴 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 때문일게다. 1번 트랙인 '서울역 이 씨'는 '서울역 신관 아래 차가운 돌 벤치에서 종일 뒤척이다' 결국 동사하고 만 노숙자의 이야기다. 이렇듯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가 이전 앨범에 비해 돋보이는 부분은 전체적인 톤이 상당히 가라앉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태춘이 음악과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준 박은옥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온전히 그녀를 위해 헌정하는 마음으로 앨범을 만든 것에서 비롯된다. 박은옥은 사실 '윙윙윙' 같은 곡을 제외하면 어지간해서 흥겨운 템포의 곡을 잘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 말하면 정태춘 본인도 빠른, 흥겨운 정서의 곡을 많이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그런 컨셉으로 인해 이번 앨범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차분하다.

 

술맛을 거론한 것은 아마 현재의 내가 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절대 '달다'는 인상이 아니라서다. 비애를 아는 사람이 술맛을 안다고 하듯, (이 말에 관해 나는 '그래서 꽐라 될 때까지 술 마시냐, 이것들아!?' 라고 현재까지는 반문하고 있지만.) 이 앨범에서의 정태춘의 목소리는 예전에 박은옥과 함께 부르던 '사랑하는 이에게' 같은 달달하고 감미로운 목소리, '정동진 3'에서 막걸리 한 잔 마신 듯 장쾌하게 이야기 들려주듯 이어가는 방식이 아니다. 앨범 발매 당시 인터뷰에서 그가 말한 표현을 인용하자면, '절망의 밑바닥까지 다녀온 사람의 목소리' 다. 박은옥의 권유와 이어지는 간청으로 그가 다시 곡을 쓰기 시작했던 것은 2005년 12월이었다. 그 때 써진 것이 '서울역 이 씨'였고, 이전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이었던 '92년 장마, 종로에서' 를 다시 부른 것을 제외하면 수록된 나머지 일곱 곡들은 모두 2010년에 쓰여졌다. 

 

요 근래 젊은 음악인들의 작업은 주로 재기발랄한 표현이나 노랫말에서 나오는 편인데, 이것은 주로 데뷔 앨범에서 드러나는 편이다. 이후부터는 그것을 극복하는 또다른 재기발랄함을 찾곤 하지만 대부분은 이 순간을 잘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혜성과도 같은 발견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청자는 이전 앨범의 거품을 빼 버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아티스트 본인도 지난 앨범의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고민을 시작해야만 한다. 나름의 특색을 가지긴 했지만 그것이 그냥 겉치레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충분히 내실이 있는지를 판단하게 되는 기준은 결국 음악을 만든 아티스트가 얼마나 세밀하게 세상이나 자신의 머리 속을 관찰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갈린다. 그 점에서 볼 때 정태춘과 박은옥이 청자에게 음악 한 번 들을 맛 난다고 느끼게 해 주는 것이, 그들은 끊임없이 음악으로 옮기기 위한 관찰을 지속하고 있어서다. '서울역 이 씨'를 써 두고, 이들 부부는 하나의 앨범으로 만들어질 때를 기다렸다. 그 때 곡을 쓴 것을 보아하니 사실상 마음만 먹었으면 다음 앨범을 꽤 빨리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으면서 조급함에 휘말려 서두르는 것은 위험하다. 앨범의 모티브가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1번 트랙은 앨범에 담겨지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9번 트랙을 제외한 나머지 7개의 트랙은 모두 2010년에 쓰여졌다.

 

정태춘이 쓴 앨범의 북클릿에 있는 글에는 그가 직접 곡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짤막하게 써둔 것이 있다. 사실 그는 예전부터 이렇게 곡을 만들어왔던 사람이었다. (박은옥은 자신의 간청에 앨범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한 번 마음 먹으니 뚝딱뚝딱 곡을 써 내는 것이 자신의 남편이지만 참 신기하고도 부럽다고 얘기했다.) '서울역 이 씨' 같은 경우엔 어느 겨울에 서울역에서 죽은 한 노숙자를 생각하면서 쓴 것이고, 2번 트랙인 '저녁 숲 고래여'는 비 내리는 초겨울 저녁에 부부를 울주 반구대로 데려다 줬던 백무산 시인을 생각하며 썼으며, 3번 트랙인 '강이 그리워'는 가을에 지리산에 사는 이원규 시인의 집에 다녀와서 썼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총체적인 견해에서 쓸 곡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들은 피상적이지 않고 손에 잡힐 듯 세밀한 가사와 듣는 것만으로도 단박에 곡의 정서를 파악할 수 있는 명확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이 점 때문에 이들 부부의 음악은 절대 다른 일 하면서 한 귀로 듣고 흘리게 되지 않는다. 물론 그러지 말란 법도 없지만, 노래에 관해 무언가를 생각하려면 결국 멜로디와 곡의 내용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의 노래가사는 절대 함부로 넘길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 노래 가사.. 가사야말로 이번 앨범의 가장 큰 장점이다. 냉정히 보자면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는 <정동진 / 건너간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가 보여준 멜로디 구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얼후, 록 기타, 현악, 신디사이저 등의 다채로운 구성을 가졌던 지난 앨범들과 달리 이번 11집은 딱히 전작들을 뛰어넘거나 차별되어 다룰만한 개성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일단 10년동안 앨범을 기다려왔던 청자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실망스러울 법도 하다. 그러나 정태춘과 박은옥은 적어도 이번 앨범에선 이전 앨범을 뛰어넘는 것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보인다. 사실 '서울역 이 씨' 는 소재로 따질 때는 이전 앨범에 더 어울리는 편이지만, 가사 자체는 이전 앨범들이 보여줬던 시의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2번 트랙인 '저녁숲 고래여'는 현실에 발을 대고 있지만 거의 신화적인 성격을 띄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이것은 음악적 퇴보라기 보다는 이들 부부가 오히려 과거로 돌아갔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예전부터 부부의 곡을 만드는 사람은 정태춘이었고, 각자 솔로 활동을 할 때도 박은옥의 곡을 정태춘이 만들어 줬었으니 그의 솔로 1집이었던 <시인의 마을>이나 2집인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의 감성에 더 가깝게 되돌아 갔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다시 음악 세계의 원점으로 되돌아 가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토양을 다시 일궈내고자 한다. 무언가에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고향 / 원점으로 되돌아 오려는 것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되돌아 온다면 그것은 그저 위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이다. 적어도 인터뷰를 통해서 '절망의 밑바닥까지 갔다온 심정'을 느꼈다는 정태춘에 한해서라면, 그는 이 앨범과 관련된 어떤 인터뷰나 콘서트를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지만 박은옥의 부탁으로 결국 한 것을 보면 아주 조금은 그러한 의사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앨범은 적어도 내 생각에 한해 얘기하자면 부부가 여태까지 불러 온 모든 곡들을 능가하는 아름다운 가사를 가진 곡들로 포진해 있다. 멜로디 역시 딱히 새로운 부분은 없을지라도 언제나 그렇듯 평균은 한다. 박은옥이 부르는 3, 4번 트랙인 '강이 그리워'나 '꿈꾸는 여행자'에 이르면서부터 앨범은 이전 앨범들의 매력이었던 지역과 일상을 세세하게 드러내는 것에서 다소 탈국적화된 모습을 보이는데, 거기서 보여주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무시무시할 정도의 전율을 안겨준다. 이것은 사실 이전 앨범과 이번 앨범의 경계에 서 있음을 명확히 나타내주던 1번 트랙인 '서울역 이 씨'부터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한데, 적어도 그 앨범의 가사에 따르면 '마지막 객차 빈자리에 깊이 파묻혀 / 어느 봄날 누군가의 빗자루에 쓸려 / 소문도 없이 사라져 주듯이' 로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음의 냉랭함도 다루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강이 그리워'에서 박은옥은 이렇게 노래한다. '너는 가늘게 반짝이며 밤바다로 가고 / 네가 떠나간 여울목에 다시 네가 있는데 / 산은 여기저기 상처 난 길들을 지우고 / 가난한 시인네 외딴 빈 집 개만 짖는데' 라고. 부부는 이원규 시인의 집에 놀러가서 본 풍경을 굳이 아름다운 쪽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부부는 지리산에서 살고 있는 한 시인의 유유자적한 삶을 보며 같은 예술가로서 느끼는 로망과 더불어 그렇게 살아가는 것으로 인해서 감내해야 하는 순간들을 모두 봤을 것이다.

 

이는 독특하다. 사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트랙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를 부르기 전까지 박은옥은 정태춘이 부르는 성향의 곡에 어지간해서는 동참하지 않았다. 사실 이 부분에 관해선 박은옥 본인은 언제든지 동참할 의사가 있었지만, 남편의 입장이기도 한 정태춘은 아내가 괜히 더 무거운 짐을 질까 염려되었던 것이 커서 일부러 피하게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침내 박은옥이 사회를 향해 발언하는 정태춘의 또다른 음악세계에 동참했을 때, 그녀의 목소리도 더이상 서정미에 기반한 기쁨과 슬픔만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부르는 곡에도 어떤 피상적인 무언가보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 무언가를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앨범에서 그리 크게 선호하는 곡은 아니지만 '꿈꾸는 여행자' 같은 경우에도 곡 자체는 샹그릴라 (제임스 힐턴의 소설인 <잃어버린 지평선>을 통해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현재 중국 윈난성 정부가 디칭 티벳 자치주를 그 곳이라 주장하기는 했지만 소설 속에서는 히말라야 산맥에 있고 불로불사의 생명을 살 수 있는 이상향 같은 곳으로 그려진다.) 에 관한 이야기지만 곡 자체에서 명확하게 '고비 사막'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박은옥이 노래를 부르는 곡은 대개 현실적인 삶의 무게보다는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성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해내곤 했었다. 그래서 만약 그녀가 부르는 곡에 현실적인 지명이 등장한다면 그로 인해 두려운 부분이 하나 생기게 된다. 그녀의 노래 속 인물들과 이야기가 현실에 대입되면 과연 그것이 아름다운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현실의 지리멸렬함이고, 그로 인해 노래가 아름답다기 보다는 이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고려해서일까. 멜로디도 비슷하고, 박은옥의 목소리도 예전과 다를 것이 없지만 가사는 아름답고 시적인 표현 중에도 어둠을 담고 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그로 인해 마냥 위안이 되려 하지 않는 시도가 이전 앨범보다도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2번 트랙인 '저녁숲 고래여'에 관해서도 정태춘은 옆에다 묵묵히 써 놓는다. 우리는 그 날 고래를 찾지 못했다고. 이전과는 다른 흐름의 앨범을 만들어냈지만, 적어도 우리가 느끼고 본 것을 청자에게 속이지는 말자. 아름다움에는 어느 정도의 가장, 혹은 과장이 필요한 법일 수 있지만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는 오히려 담백해지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이것은 격렬했던 부부의 지난 10년을 거의 완전히 청산하게 되는 의미가 된다.

 

이 앨범의 압권은 7번 트랙인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부터 9번 트랙인 '92년 장마, 종로에서' 까지 이어지는 순간들이다. 정태춘이 온전히 박은옥만을 생각하며 만든 헌정곡이라던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는, 버스라는 요소 때문에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와 이어지는 곡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반대로 이 트랙은 모든 상황이 끝이 나고 막차를 타고 돌아온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기분 좋게 돌아온 것일까? 박은옥의 목소리 톤을 생각하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멜로디 역시 패배와 비애의 감정을 다루고 있다. 박은옥에 대한 헌정곡이라지만 정작 그녀는 곡을 녹음할 당시,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을 생각하며 불렀다고 한다. 그와 정 반대로 정태춘이 부른 8번 트랙이자 윤도현, 강산에, 김C가 코러스를 도운 '날자, 오리배'는 말 그대로 오리배가 하늘을 나는 곡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의 곡은 사물과 지역을 세세하게 관찰하는 정태춘 특유의 시선과 어우러져 마치 토착신앙으로 여기는 것 수준의 무게감을 얻는다. 아마 나물 먹고 소주 마시면서 지랄지랄 외치고 부를 수 있는 노래인 6번 트랙인 '섬진강 박 시인'이 있긴 하지만 그 곡도 처연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 반대로 사뭇 비장해 보이는 이 곡은 어찌하다 보니 이 앨범에서 가장 흥겹게 들을 수 있는 곡이 된다. 그리고 전혀 다른 성향과 정서를 가진 이 두 곡은 마지막인 9번 트랙, '92년 장마, 종로에서'로 완전히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인상적인 것은 왜 10년만에 돌아온 부부의 신보에서 마지막 트랙을 8집인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수록곡으로 했는가 하는 것이다. 정태춘, 박은옥 부부는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를 발표하기 전에 <20년 골든 앨범>을 발표하면서 이전에 발매했던 모든 앨범들을 절판시킨 바 있다. 그 앨범들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는 것이 이유에서였다.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정태춘, 박은옥 7집' 대신 '정태춘 5집'으로서 발표한 <아! 대한민국> 이었고 이 앨범의 곡들은 골든 앨범에 수록되지 않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살려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순 없다. 꺾이고 쓰러져도 항상 다시 일어나서 위험한 선두로 나가서던 사람이 어느 순간 탈진해 있으면, 그것은 그 사람이 정말 힘들어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8집에 수록됐을 때의 곡에서 정태춘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고 사실상 박은옥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11집에서 다시 녹음된 곡에서 그의 목소리는 미약하고 회한을 느낀다는 느낌마저 준다. 사실 이는 곡 자체의 연출적인 면이기도 하다. 다시 녹음된 곡은 중반부부터 마치 다시 기운을 차리겠다는 듯이 감정을 격앙시킨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8집의 녹음분과는 다르게 박은옥의 목소리가 정태춘의 목소리만큼 명확히 들려온다는 것이다. 정태춘은 이 노래를 다시 녹음한 이유에 관해서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이 땅의 순정한 진보 활동가들과 젊은 이상주의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또 부르게 된 것이라고.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정태춘 본인에게도 다시 기운을 내게 하기 위해 어떤 위로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전과 다르게 중반부 이후로 실질적으로 곡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박은옥이다. 맑은 목소리의 그녀는 이 곡에선 본의 아니게 정태춘의 목소리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저음이 된다. 꼭 이 앨범에서 '시의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전 앨범과 같은 시의성'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는 그 주제를 노래하는 주체가 정태춘이 아닌 박은옥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곡은 정태춘이 쓰고 노래는 부부가 같이 부르지만 이번 앨범이 유독 독특하게 느껴지는 건, 단지 간만에 나와서가 아니라 앨범 전체에 박은옥의 시선이 느껴지고 부부의 노래 포지션이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박은옥을 위해 만들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래서 이 곡은 사회적인 면보다는 '포크음악'으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는 전작들과 꼭 같다고 볼 수 없고, 분명 나름의 변화를 모색한 앨범이다. 그리고 지금 정태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작업을 계속 하는 것에 환멸을 느낀 그를 다시 '음악인'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볼 때 동반자이자 스스로를 정태춘의 음악적 팬이라고 지칭하는 박은옥의 역할이 참 크다. 언제나 함께 서로를 끌어안고 가던 부부였지만 그만 남편이 탈진하고 말았다. 하지만 남편이 쓴 '시'는 지금도 그 힘이 유효하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그 가능성을 믿고 있다. 이제는 그녀가 손을 잡고 부축하며 갈 것이다. 남편을 다시 음악인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는 11집이자 동시에 1집이다.

 


* 꿈꾸는 여행자 *


고비 사막에서 날아온 엽서 한 장
메마른 글씨들만 흩날리고
어린 낙타를 타고 새벽길을 떠나
그대 모래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창의 커텐을 열고 잠시 묵상 중이예요
여긴 너무 멀고 먼 샹그릴라
치즈와 차와 술과 노래 소리들
더 이상 외로운 여인들은 없죠


어느날 여행자들이 찾아와
구슬픈 바닷 새들의 노래를...


사막이 끝나는 높은 모래 언덕, 멀리
황홀한 설산들이 손짓해도
부디 그 산을 넘지 마, 넘진 마세요
그 너머에도 바다는 없죠
 
어느 밤, 차가운 별들의 시내를 건너시면
그 푸른 빛을 여기 띄워주시고
행여 별빛 따라가다 바달 만나도, 부디
거길 건너지는 마세요


또 어느날 여행자들이 몰려와
또 다른 세계의 달빛 노래를...


그대의 샹그릴라는, 음 어디
지상에서 누구도 본 적 없고
세상 끝 바닷가 작은 모래톱 만나면
거기 누워 길고 긴 꿈을 꾸세요


여기 다시 돌아오시지는 마세요
꿈꾸는 그대, 그리운 여행자

 

 

 


* 날자, 오리배...*

 

새벽 옅은 안개 걷히기 전, 보문호에 가득하던 오리배들 떠나갔다

벌써 영종도 상공 또, 단둥 철교 위를 지나 바이칼 호수로 간다

길고 아름다운 날개짓, 부드러운 노래로 짙푸른 창공을 날며

거기서 또 수많은 오리배 승객들과 인사하고 멈추었다 날아간다

비자도 없이 또, 국적도 없이 그 어디서라도 그 언제라도

얕은 물 가에 내려, 그 땅 위에 올라가 일하고 그 이웃들과 하나 되리라

 

굳센 바이칼의 어부들, 인근의 유목민들이 그들 오기 기다리리라

이젠 거길 그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의 오리배로 에게해로 떠나리라

자작나무 숲의 어린 순록들이 작은 썰매를 끌고 와 그들을 영접하고

저녁 호숫가 잔디 위 따뜻한 모닥불 가 유쾌한 만찬이 있으리라

비자도 없이 또, 국적도 없이 그 어디서라도 그 언제라도

맑은 물 가에 내려, 그 땅 위에 올라가 일하고

거기 경건한 숲들과 하나 되리라

 

해질 녁, 에게해 진흙 바다 오래된 말뚝들 사이 그들이 또, 내리리라

오후 내내 레이스를 뜨던 여인들과 귀가하던 남정네들 그 바닷가로 나오리라

그날, 거기 일군의 오리배들 탕가니카로 떠났고 집시의 선율들은 남아

마을에 저녁별 질 때까지 그들의 창 가에 와인 향처럼 흐르리라

비자도 없이 또, 국적도 없이 그 어디서라도 그 언제라도

얕은 물 가에 내려, 그 땅 위에 올라가 일하고 그 별들과 하나 되리라

 

그들 또, 아프리카 호숫가 작은 샛강에 내려 거대한 일출을 보리라

주린 채 잠들지 않고 총성에 그 잠 깨지 않고 아이들, 새벽 강물을 마시리라

늙은 기린들도 뚜벅뚜벅 그 물가로 모이고 밀림의 새들은 날고

세계 어디에도 이들보다 흠, 덜 행복한 사람들은 없으리라

비자도 없이 또, 국적도 없이 그 어디서라도 그 언제라도

맑은 물 가에 내려, 그 땅 위에 올라가 일하고 그 대지와 하나 되리라

 

그날 또, 일군의 오리배들 티티카카 호수에 내리리라

그 수초의 섬 위로 오르리라

거기 또, 오리배들

정오의 하늘에 가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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