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1 에서 이어집니다.)


순덕이 죽을 때 그 상황을 지켜 본 두 피난민이 있다. 바로 잠시 동굴에서 나와 그녀를 찾으러 온 만철과 상표라는 청년들이다. 순덕에게 남몰래 애정을 품고 있었던 만철은 그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는데, 상표는 보지 못한다. 죽음의 순간이 지나간 이후, 만철이 이 슬픈 감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오름을 마구 달리는 순간이 있는데 평소 자기 자신을 '말다리' 라고 자부하던 상표는 이게 달리기 시합하자고 하는 건 줄 알고 배시시 웃으며 그를 따라간다. 참혹한 상황에서도 일상에서 장난 치듯이 노는 사람이 있는 건 여전한데, 총격전 시퀀스 다음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제주도의 오름이 순덕의 나체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 시퀀스에서는 나무를 보여준 뒤 카메라가 아래로 계속 내려가 동굴 속에 숨어 지슬을 나눠먹으며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확히는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것이며 오름에서 뛰고 있던 만철과 상표도 앉아 있다.
참고로 <지슬>은 대부분의 시퀀스를 실제로 굴 안에서 찍었다. (근데 그 굴이 1992년에 유골, 생필품까지 포함하여 완벽한 보존상태로 발견되어 4.3 관련 현장으로서는 최초로 그 형태가 완벽히 유지된 '다랑쉬굴' 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굴인지 얘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그러나 고혁진 프로듀서의 말에 따르면 카메라가 아래로 내려가 굴 속에 앉은 사람들을 보여주는 이 시퀀스를 찍을 때, 여러가지 문제로 실현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때 감독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 제주대학교에 있는 강당 겸 극장에서 찍어보자는 것이었다. 흑백영상과 조명, 카메라 트릭과 편집으로 적절히 동굴의 분위기가 났는데 이 시퀀스 자체는 참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여태껏 작품에서는 피난민들이 동굴에 진입할 때 이렇게 지상에서 지하로 하강하는 듯한 분위기로 찍은 적이 없었고, 인물들을 제외한 주위의 모든 것들을 암흑으로 처리해 공간감을 없앤 적도 없었다. 물론 얘기를 듣고 보니 촬영장에서 고안된 즉흥적인 상황이었지만, 그 촬영방식이 본의 아니게 등장인물들을 모두 죽음을 향해 하강시키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동굴은 곧 그들에게 마련된 무덤이다. 이 와중에 어머니가 걱정된 무동은 아내에게 내일 마을에 내려가 어머니를 다시 모셔 오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앞의 두 시퀀스를 총괄하는,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라고 규정한 무시무시한 시퀀스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무동의 어머니가 고 중사를 비롯한 토벌대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그녀는 고 중사의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그에게 어머니가 있는지를 묻고 (살인귀 같은 고 중사가 자신의 참혹한 과거를 이야기해서 스스로가 '인간' 임을 증명하는 부분이 이 지점이기도 하다.) 집에 불이 날 때 문득 방에 있는 지슬을 본다. 그녀는 혹시 아들이 와서 이걸 가져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소쿠리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지슬을 향해 기어간다. 다음 쇼트에서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타 버린 집과 어머니의 시신을 본 무동의 모습이다. 순덕의 죽음과 더불어 이 작품에서 가장 잔혹하게 표현된 시퀀스일 것이다.
이 시퀀스 자체적으로 관객의 모든 진을 빼 놓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이걸 본 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내 옆에 앉아 있는 한 여성 관객의 반응 때문이다. 거의 앞자리에서 이 작품을 봤는데 담요 같은 것을 가져와서 무릎에 깔아놓고 보던 여성 관객과 나는 각자 반대 방향의 거의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보고 있는 동안에 극장 좌석이 덜덜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뭐 이런가 싶어서 옆을 봤는데 끝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 관객이 고개를 숙이고 담요에 얼굴을 파묻은 채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었다. 그 관객이 거의 온 몸을 사용하다시피 하여 흐느끼고 있었다는 걸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앉은 좌석줄에는 그 관객까지 포함하여 둘만 앉아 있었는데, 끝자리까지 울음의 기운, 그리고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이 시퀀스가 주는 슬픔은 대단하다.
문제는 이 시퀀스가 단순히 슬픔만을 전해주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무동은 어머니의 타버린 시신 밑에 있는 지슬들을 발견한다. 작품은 무동이 자신의 슬픈 감정을 다른 피난민들에게 알리는 방식을 피한다. 피난민들은 무동이 마을 어디에서 지슬을 얻어 왔다고 생각하고, 맛있게 먹으며 작품은 기운 없이 어머니는 잘 계시더라, 결국 오시지 않았다는 표현을 '응' 이라는 딱 하나의 대사로 표현한 뒤, 한참동안 표정을 가린 채 구석에 앉아 있는 무동의 모습을 부각시켜 보여준다.
4.3의 참혹함을 잘 알 수 있는 유명한 이야기로 이런 것이 있다. 1948 ~ 1949년의 제주도는 그 해에 감자 농사가 참 잘 되었고 맛도 좋았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감자 하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제주도에서 키우는 대부분의 농작물들이 그랬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끝은 그 농작물들이 맛이 좋은 이유다. 땅 속에 묻혀 썩어간 사람들의 시신이 양분이 되었다는 것. 오름의 형상이 여인의 나체로 변하는, 그리고 거대하게 솟아있는 나무를 보여주다 카메라가 땅 속으로 들어가듯 하강하는 것, 그리고 피난민들이 유달리 맛있는 것 같다고 먹는 무동의 지슬들까지. 개별적인 쇼트로 볼 때는 아름답기만한 <지슬>은 시퀀스 별로 합쳐졌을 때 비로소 '끔찍해진다'. 작품은 오름을 비롯하여 흑백으로도 제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자연물들이 그렇게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에는 '양분'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양분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에서 풍요로워졌다는, 끔찍하고 비참한 현실에서부터 생성된 것이다. 작품은 여기서 지슬이라는 것이 가지는 메타포, 그리고 이미지의 비극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비극이 영겁처럼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듯 또다른 죽음들이 연이어 기다리고 있다.


* 작품 속에서 토벌대가 벌이는 행각들은 당시에 일어났던 '오라리 방화사건'을 연상케 한다. 오라리 사건은 1948년 4월 30일 낮 12시에 일단의 청년 30명 가량이 오라리 연미 마을에 들어와 12채의 민가를 불태우면서 시작된 사건이다.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은 마을에서 좌익 활동을 한 자를 색출한다고 불을 질렀다. <4.3은 말한다> 2권에서 이와 관련한 당시 15세였고 마을주민이었던 박기찬의 증언이 있다.
"대동청년단원들이 몰려온다는 마을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어머니와 형, 나 셋이서 겁이 나 안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 우리 집 마당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틈으로 보았더니 손에 몽둥이를 든 수십명의 청년들이 마당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놀랄 틈도 없이 문짝이 와지끈 부서지면서 그 청년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앞장섰던 사람이 마을에서 대청활동을 하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너희들도 죽이고 싶지만 어리니까 봐준다' 고 씩씩거렸습니다. 장독이고 문짝이고 남김없이 때려 부쉈습니다. 그러곤 초가처마에 불을 놓기 시작하더군요."
5월 1일에도 마을에 들어와 폭도를 찾아내겠다며 불을 지르던 이 청년단원들은 그 때 민오름에서 그들을 쫓아 내려오던 무장대를 발견하고 도주한다. 이 때 무장대에 의해 도민 한 사람이 희생당한다. 김규찬이라는 순경의 어머니였다고 하는데, 마을민가가 불타는 모습을 보고 아들을 찾아 그릇, 병아리 등을 담은 구덕을 지고 내려가다 무장대와 마주쳤다고 한다.
"..나도 들은 얘기입니다만, 산 사람들이 청년들을 추격하다 돌아오는 길에 한 여인을 만났답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여인은 그만 '규찬이 순경 어멍 (어머니) 이여' 라고 대답했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더군요. 총을 든 산 사람들 모습을 보고 경찰이나 우익청년단원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대답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산 사람들이 방화에 대한 분풀이로 일을 저질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 제주도민들이 그런 일을 당하는 동안, 미군 측에서는 오라리가 방화되는 광경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려고 공중에서 항공촬영을 하고 있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에서도 이 작품의 사진과 영상 일부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제주도의 메이데이 (May Day On Cheju-do) 라는 작품이다.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이 작품은 제민일보 측의 주장에 의하면 실제 영상만을 가지고 촬영한 것이 아니라 중간에 자체적으로 연출하여 조작했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완벽하게 제대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관해서 아직까지는 의혹으로 느껴진다. 여하튼 이 작품은 항공기에 일반 카메라와 더불어 3D 입체 상영을 위해 개발된 카메라까지 포함하여 두 대로 동시촬영 했다고 한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3D 상영 영화가 아니었을까. 영상으로 4.3의 진행상황과 사건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료이기도 하다. *
오멸 감독이 언론에 한 말 중 인상깊은 지점이 있다. "이방인이 관광하는 기분으로 착륙하게 될 제주도의 공항 밑바닥에서는 아직까지 4.3 사건 희생자의 시신이 발굴되어 나오고 있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는 정방폭포에서는 수도 없는 사람들이 총탄에 쓰러져 갔다." 는 부분이 그것이다. 그 말을 봤을 때 잠시 저 발언을 하는 그의 기분이 어떨지를 상상해 봤었다. 자신이 겪은 일도 아닌데 당시의 비참함을 완벽히 공유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 비참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운 것이 작품을 이런 방향으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됐는지도 모른다. 영화로 만들면 도저히 눈 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법한 소재를 '영화화' 시키는 것, 그리고 직접 경험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보다는 다소 차분하고 객관에 가까운 시선을 유지한 채로 어디에 원인이 있는지를 지적하는 태도까지. (이 작품은 굉장히 정치적이다. 어디에 원인이 있는지를 명확하게 결론내리고, 그 곳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지적이 너무나 명확해서, 원인을 한국이라는 토양 안에서 날뛰었던 '좌'와 '우'를 초월할 수 있지 않았던 것인가 싶다. 그리고 이 글의 초반부에서도 언급한 바이지만 유머까지 겸비하고 있다. 대신 초반부의 유머 코드들이 무조건 관객을 웃게 만들자는 목표 하에 구상된 것이었다면, 마지막에 연기를 피우는 시퀀스는 단순히 웃게 만들자는 목표 이상의 것이 보인다.
사실 이 부분이, 보면서 많이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련의 이야기를 거쳐서 작품이 다다르는 곳은 다름아닌 토벌대가 피난민들의 동굴을 발견하는 지점이다. 윗부분에서 언급한 다랑쉬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풀어볼까 하는데, 1992년에 처음 발굴되고 제민일보가 취재하여 세상에 알려진 이 굴 안에서 11명의 사람이 죽었고, 그 유골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동굴 안에서 아사한 것이 아니라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것이었는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지점은 토벌대가 그들을 죽인 방식이다. 처음엔 수류탄을 던졌는데도 효과가 없음을 안 토벌대는 검불로 불을 피운 뒤, 그 연기를 동굴 내부로 풍기게 만든 다음에 입구 부분을 돌로 막아버렸다. 당시 무장대들이 주로 굴에서 생활하며 토벌대와 싸웠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빨갱이들' 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리라. 하지만 그들은 빨갱이가 아니었고, 살해당할까 두려워 산으로 도망쳤던 제주도 구좌읍 종달리, 하도리의 주민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 1948년 12월 18일에 토벌대의 작전에 의해 모두 질식사하고 만다.
이 다랑쉬굴의 참사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채 모' (구좌읍 종달리에 사는, 92년 당시 67세의 노인이었다. 제민일보 측의 기사에서 이름이 저리 표기된 것인데 아마 본인이 실명 공개를 꺼렸던 것 같다.) 라는 남자였는데, 다랑쉬굴에 있다 혼자 다른 굴로 피신하던 중 좌익 무장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게 된 참이었다. 주민들이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은 산 속의 무장대에게도 들렸고, 이틀 뒤에 채 모와 그들은 함께 굴로 시신 수습을 하러 들어갔다. 이틀 뒤 굴의 상황에 관해 채 모는 이렇게 증언했다.
"굴 안은 그 때까지도 연기로 가득했는데 시신은 고통을 참지 못해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찧은 채 죽어있었고 코와 귀로 피가 나 있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보니 가련한 생각에 여기저기 흩어진 시신들을 나란히 눕혀놓고 나왔다."
<지슬>에도 똑같은 상황이 등장한다. 그러나 작품은 연기를 토벌대가 아닌 피난민들의 무기로 반전시킨다. 동굴로 피난 올 때 식량으로 삼을 겸 해서 지슬과 말린 고추를 들고 온 피난민들은 토벌대를 쫓아내기 위해 고추를 태워 연기를 동굴 바깥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다. 이 연기를 피우는 피난민들도 죽을 맛이지만, 총을 쏘며 진입하려는 토벌대에게도 연기는 상당히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다. 앞도 보이지 않지만 눈, 코, 입이 너무 매우니 도저히 못 들어가겠다는 것이지. 나는 이 시퀀스를 생각할 때마다 이상하게 웃기다. 자연스레 화생방이 연상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운 고추로 성공적인 임기응변을 해낸다는 설정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일지 모른다.
물론 이 시퀀스의 기본은 삶을 향한 피난민들의 의지다. 무동은 어쩌면 어머니의 시신을 본 그 지점에서 자살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지슬을 가지고 돌아와 피난민들과 함께 나눠먹는다. 그리고 피난민들은 지금 어떻게든 살겠다고 매운 고추 연기를 피워 토벌하러 온 군인들에게 풍기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군인들 역시 포기할 법도 한데 끝까지 동굴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아등바등이다. 군인들 역시 동굴 안의 피난민들을 폭도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해야만 죽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그들이 산다. 서로 이유는 정반대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는 똑같다. 작품은 그래서 이상한 희극적 감흥을 느끼게 하면서 바라보게 만들다 관객을 한숨짓게 만든다. 서로가 살고자 하는 의지는 같은데, 왜 귀결되는 지점은 다를까. 왜 서로 다툴 필요가 없는데도 이렇게 만들어야 할까.
문득 4.3 평화박물관에 갔을 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 곳에는 90년대에 제작된 4.3 관련 TV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내부 상영관이 있었고, 거기서 그 작품을 봤었다. 그런데 보던 도중에 내가 굉장히 경악했던 지점이 있었다. 바로 다큐멘터리가 서북청년단에 몸을 담았던 노인을 인터뷰한 것이다. '주제에' 인권보호랍시고 모자이크, 음성변조 처리까지 된 그 남자는 의자에 팔을 괴고 학살의 기억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상영관을 나와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 나는 박물관 관계자에게 다가가 넌지시 질문해 봤다. 아까 그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했던 서북청년단 출신의 노인이 법적인 심판을 받았느냐고. 박물관 관계자는 표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듣기로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는 다시 반문했다. 저 사람 아직 살아 있으면 처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관계자 분이 다시 대답했다. 약간은 분노인지 냉소인지 모를 느낌이 담겨져 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그렇겠죠? 하지만 지금도 살아있는지는 의문이고, 4.3에 관해서 책임을 묻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떤 태도로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했던 짓을 저렇게 이야기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거에요. 끝까지 하지 않았다고 발뺌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저 노인은 그냥 만든 사람들이 저 사람에게 기대했던 만큼의 역할은 한 거에요.

*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질렀던 우익단체 대동청년단 단원 중 한 명은 나중에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제민일보가 조사하여 제주도 시내에서 만나게 된다. <4.3은 말한다> 2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박 아무개' 라는 이름의 사내인데, 인터뷰에 응해놓고도 자신은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부인하다가 이후에 한 번 더 이뤄진 두번째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목격자들이 대질증언을 할 용의가 있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렇게 했다고 합시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5월 1일에 방화 사건에 참여했던 박 아무개는 오라리를 직접 조사하고, 우익청년단의 방화혐의가 분명하다고 판단내린 김익렬 연대장의 지시로 검거되어 제주 모슬포 연대본부 영창에 감금된다. 그런데 그는 미군정에 있는 딘 (Dean) 소장의 명령으로 제주로 온 박진경 중령이라는 사람에 의해 감금된지 22일만에 풀려나게 된다. 풀려나자 바로 오라리 주민들의 반발에 부닥친 제주 수뇌부 측은 다시 박 아무개를 연행하는데, 이번에는 제주 경찰서 유치장에 집어넣고 38일 동안 감금시킨다. 박 아무개는 제민일보 취재진에게 '거기서 특별대우를 받으며 지냈다' 고 증언했고, 이후 1948년 9월 15일에 직접 경찰학교 제 9 기생으로 입교한 뒤에 경찰복을 입고 '4.3 진압' 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
작품은 어쩌면 마지막 순간만큼은 피난민들이 '같은 사람'에게 총살 당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피난민들은 경준의 기지로 살아남고,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작품은 카메라로 집요하게 피난민들의 마지막을 쫓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고추 연기를 피우는 시퀀스에서 쓸데없이 오지랖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해는 한다만 개인적으로는 박 일병과 김 이병을 제외하고는 군인들에게 큰 정이 가지는 않는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지슬>은 어떤 지점에서 <설문대 할망과 오백장군> 설화의 일부를 차용하여 섬뜩한 마무리를 짓는다. '영화' 이고, 선과 악의 입장을 가를 필요성도 어느 정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건 사실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리는 강렬한 심판인 셈이다.
이 끄적임의 중반부 쯤에서 챕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지슬>은 네 개의 챕터로 나눠진 작품이고 그것에 모두 신위, 신묘, 음복, 소지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참고로 이것은 제사의 절차를 표현한 것인데, 거기에 딱히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아마 <설문대 할망과 오백장군> 설화에서 등장한 묘사가 일부가 활용된 것처럼, 제주의 문화적 요소를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일 수 있다. 동시에 이렇게도 보인다. 4.3 은 시간적인 개념으로 보자면 분명 지나간 '과거의 역사' 이기 때문에 이것을 설명하는 방법 역시 과거의 요소를 통해 시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고. 자신의 어머니가 가마솥에 빠진 줄도 모르고 그녀의 고기가 든 국을 맛있게 먹는 오백명의 아들들,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 거치는 절차를 표현한 단어들...


과거는 흔히 아름다운 추억, 혹은 전통으로 미화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어둡고 참혹한 표현을 할 때 활용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작품은 그렇게 4월 3일이라는 날이 쉽게 폭동, 항쟁 등이란 표현을 붙일 수 없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폭동, 혹은 항쟁이라는 표현을 통해 영광을 얻고 가슴 뛰며, 세속적인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굳이 연관성이 많지 않더라도 4월 3일이라는 날과, 제사 절차에 관련된 이런 '과거의 단어' 가 교과서에서 보고 단순히 외우면 끝나는 차원에서 다뤄지지 않아야 핟고, 그리고 그 단어들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작품은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의 단어는 인터넷 상에서, 혹은 단순한 숫자를 넘어서는 끔찍하고 지독한 어둠을 품고 있다. 가마솥 안의 존재는 그 어둠을 가벼운 것으로 얕봤다가 결국 벌을 받는 것이리라. <지슬>은 그 시퀀스를 통해 우리가 마주보는 역사를 절대 가벼운 여흥거리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작품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모든 자리에 제방이 놓여져 있고, 그것이 타오르는 마지막 시퀀스가 놀라운 것은 그 때문이다. <지슬>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피난민과 군인 모두 가리지 않고 모든 시신 앞에 제방이 놓여져 있고 그것이 불탄다. (GV에서 고혁진 프로듀서가 했던 말에 따르면, 저 지방에 적혀진 글들은 모두 해당 인물들에 맞춰서 일일이 다르게 쓴 것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난 한자 까막눈이라 뭔 말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방에 보통 어떤 말이 쓰여져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대충 예상은 된다.) 놀라운 건 제주의 입장을 대변할 법한 이 작품이 '모두'가 안식에 들 수 있기를 기원할 때, 그런 감정상태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증오와 원한을 오랜 시간동안 생각하여 납득하고 이해했을까 하는 점이다. 현실세계에서 그런 용서는 보통 상대방보다 내가 얼마나 더 큰 그릇을 가진 인간인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쓰이는 것이다. 정말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하고 사색하며 증오할 법한 이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단계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슬>은 그걸 해낸다. 가해자라고 생각되는 이들까지도. 이제는 그들 모두가 죽었기 때문에. 이 작품이 현실의 나보다 마음 씀씀이가 훨씬 넓다. 하지만 작품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작품은 관객에게 각오를 다지라고 부탁한다. 이것은 '영화' 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현실에선 이렇게 '1시간 48분만에' 65년 전의 기억을 말끔히 해결할 수 없다고, 위로할 수도 없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그러니 당신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사유하라고. 과거의 일에 묶여있는 영혼들은 지방과 함께 멀리멀리 안식을 취하러 떠날 것이니, 그들이 떠남으로 인해 남겨진 고통의 기억을 나눠받고 현재에서 생각하라고 말한다.
영화는 기록매체다. 40년대에 일어난 4.3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 2012년에야 만들어 졌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들이 필름에 담겨짐으로 인해 <지슬>은 '과거'가 되었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최소한의 의의는, 앞으로 이 작품을 생각할 때 적어도 절대로 가볍게 생각하지는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아마 직접적인 장소를 거론하자면 정방폭포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영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대의 의의이기도 하다. 결국 무언가를 바꿔야 하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그런 사람에게 무언가를 일깨워준다.
2011년의 나는 그렇게 4.3 평화박물관 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2013년의 나는 대구 동성아트홀 극장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어이그, 저 귓것>이나 <뽕똘> 같은 유머러스한 느낌의 작품을 만드는 오멸 감독이 조금 더 좋지만, <지슬>이 굉장한 걸작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작품은 지금보다 더 많이 이야기 되어져야 한다. 완성도의 출중함이야 두 말 할 것 없고, 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됐던 어느 날들을 이야기하고, 그것에 관해 최소한 지방이라도 태우는 것을 극영화적 영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만큼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체감시키기 위해서라도...이 작품은 많이 이야기 되어져야만 한다.



* <4.3은 말한다> 2권에서 발췌한 부분. 미 군정장관 딘 (Dean) 소장이 제주에서 군정 당국 수뇌회의를 주재하고 떠나간 다음 날, 평화정책을 계획하고 추진해 왔던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된다. 그리고 박 아무개를 풀어줬었던 박진경 중령이 연대장 자리를 맡게 된다. 박진경 중령은 영어에 능통하여 딘 소장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고 한다. 취임한 지 한 달 뒤, 박진경 중령은 토벌작전의 공로를 인정받아서 대령으로 고속 승진했고 나중에 강공 토벌정책에 반기를 든 부하의 손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익렬 전 9연대장은 자신의 유고인 <4.3의 진실>에서 박진경 중령이 연대장 취임식날에 했던 연설을 정확히 기억하여 적어놓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라도 독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다시 말해서 초토작전을 감행하겠다는 의지의 발표였다.'
다시 <4.3은 말한다>로 돌아가서, 미 군정이 박진경 중령을 연대장으로 취임시킨 것은 4.3을 무력 진압으로 해결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 였다고 한다. 이 때 딘 소장의 관심사이자 받은 명령은 4.3을 어떤 방식으로든 최단기로 진정시켜서 5.10 선거를 무사히 치르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군정의 강압정책에 반발해서 선거를 단체로 보이콧 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이것을 보고 설득을 하기는 커녕 경찰전문학교 정예부대를 제주도에 들어오게 해 무력 진압 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했으며, 또 상당수의 제주도민들이 산으로 피신했다.
마침내 5월 10일이 되어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첫 선거가 열렸고, 두산백과에 따르면 무소속이 85명(42.5%),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27.5%), 한국민주당 29명(14.5%), 대동청년단 12명(6%), 조선민족청년단 6명(3%),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명, 대한노동총연맹 1명, 교육협회 1명, 단민회(檀民會) 1명, 대성회(大成會) 1명, 전도회 1명, 민족통일본부 1명, 조선공화당 1명, 부산 15구락부 1명이 당선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헌국회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신익희가 당선된다. 마지막으로 7월 10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1948년에 시작된 4.3은 1954년에 끝이 난다.

1992년 3월 말에 발굴되어 4월 15일에 굴에서 꺼내졌던 다랑쉬 굴의 희생자들은 그 날 새벽 6시에 유족들이 도착하자마자 이미 수습되어져 있었다. 읍장과 구좌읍 이장단, 유족들 80명이 참관한 가운데 장례식을 치룬 뒤, 유골들은 모두 오전 7시에 화장장으로 이동해 화장된 뒤 바다에 수장됐다. 행정당국 측에서는 "매장을 권유함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이 한사코 화장을 주장했다." 라고 공식 발표를 했지만, 실제로 유족들은 44년만에 기적적으로 찾은 유골인데 뼛가루의 11분의 1이라도 가져가겠다고 격렬하게 이야기 했다. 그러다 마침내 화장에 동의하게 된 유족들은 그 이유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껏 억눌러 참아왔는데, 매장할 경우에 누가 똥 싸고 오줌 싸고 돌멩이를 던질 것 같아서요.
그래서 화장에 동의했습니다." *
p.s.1 - 고혁진 프로듀서님과의 GV에서 몇 가지 질문을 했었는데, 그 중 궁금한 것이 과연 이 작품이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됐을 때 현지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입니다.
"선댄스에서의 반응은 좋은 편이었습니다. 선댄스는 작품을 고를 때 테크닉에 대한 기준도 많이 두는 편이었는데, <지슬>은 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5~60대 관객이 많았고, 그 분들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런 영화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해 주셨어요. 그리고 작품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마지막 자막에 미 군정이 핵심 배후에 있다고 써 놨었죠. 그런데 그것에 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선댄스에서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분들이 '그 시대의 우리나라라면 분명 그럴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더라구요."
p.s.2 - 아마 어떤 분들은 보셨겠지만, <어이그, 저 귓것>, <뽕똘>과 <지슬> 사이에는 <이어도>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4.3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극장 개봉을 하지 않았죠. 오멸 감독님이 원치 않았다는군요. 현재 극장 개봉 외의 방법으로 관객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p.s.3 - <지슬> 에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세월 2' 라는 것이죠. 지금은 고인이 된 김경률 감독님의 작품 중에 <끝나지 않은 세월> 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당시 오멸 감독님도 제작에 참여 했었다는데, 의견차이로 도중에 나왔다고 하더군요. 오멸 감독님이 4.3을 다루게 됐을 때, 이 소재를 결국 영화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에는 김경률 감독님이 준 영향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슬>의 '제작총지휘' 에는 김경률 감독님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p.s.4 - 이렇게 끄적인 리뷰가 4.3 의 희생자 분들께 미약하게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니.. 이거 적다가 몸살기가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