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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불어 좋은 날 - 한국영화 마스터피스 컬렉션 #3
이장호 감독, 안성기 외 출연 / 블루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감독: 이장호
주연: 김성찬, 이영호, 김보연, 안성기, 유지인, 최불암, 김희라, 박원숙, 이향, 조주미, 김영애, 추석양, 임진택, 임예진
음악: 김도향
촬영: 서정민
18세 관람가 / Color, Black & White / 113분, 112분 (1980년 개봉판)
이장호 감독의 작품은 리뷰를 하기가 힘들다. 내게 그것에 대한 큰 이유가 있다면 이것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리뷰에는 캡쳐가 같이 동반되어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발매된 DVD도 거의 대부분 TV 방영본을 리핑한 가짜들이며, (가령 '한국영화 마스터피스 콜렉션' 이란 이름으로 발매된 게 그렇다.) 그의 작품을 필름이나 VHS를 제외하고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었던 영상자료원의 VOD 서비스가 플래시 방식으로 재생되기 전까지는 클립보드 캡쳐마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론은 순전히 캡쳐를 할 수 없어서 미뤄왔다는 얘기다. 이제는 가능하니까 그의 작품들에 관해서 조금이나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80년대 한국영화를 논할 때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이두용같은 감독들은 필히 거론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동생인 이영호의 대학등록금을 들고 지인인 소설가 최인호의 집을 찾아간 이장호 감독이 그 집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는 방법으로 기어이 얻어내고 만 <별들의 고향>의 판권. 감독은 그 작품을 영화화하여 무려 46만 5천명의 관객을 동원한다. 이 기록은 '영상시대' 동인인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가 개봉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이장희, 동방의 빛이 맡은 사운드트랙이 대히트를 쳤고, 그 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출품되는 등의 성과로 이장호 감독은 화려하게 영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 뒤로 몇 편의 작품을 더 만든 이장호 감독에게 큰 시련이 찾아오게 된다. 정녕 새로운 예술혼은 고통을 동반하여 찾아오는 것인가. 참.. 그것이 겪는 당사자에게는 죽을만치 힘든 일일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새로운 예술적 감흥이 피를 쏟는 듯한 고통 속에서 새롭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내 철학 중 하나가 행운의 찬스는 불행한 얼굴로 온다는 거야. 대마초라는 불행한 얼굴로 와서 나를 의식화시킨 건데 난 그것도 하나님이 만든 죄라고 생각해. 자칫하면 한국영화계 주류의 속물로 흘러가다가 자연도태 될 수 있었는데 그 때 의식에 변화를 가졌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저술한 책인 <이장호 VS 배창호>에 저술된 이장호 감독의 말이다. 정확히 <별들의 고향> 이후, 이장호 감독이 만든 작품은 데뷔작을 포함하여 네 편이고 활동기간은 2년이었다. 위에서 말한 그 유명한 시련은 다름아닌 1976년에 벌어진 대마초 파동이었다. 졸지에 '왕초'가 되어버린 신중현을 비롯하여 당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약쟁이'로 낙인찍혀 사회적으로 퇴출되다시피 했는데, 이장호 감독 역시 휩쓸려서 4년동안 백수 신세가 되어버린다. 스스로도 유년 시절을 살만하게 보냈다고 얘기했던 그는 이 때 처음으로 생활고를 체험했는데, 그 경험과 더불어 반체제 문화운동을 행하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이전과는 다른 영역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다른 영역'이란 가령 당시 막 농촌생활을 시작한 이문구, 송기원 소설가를 만나서 농촌생활의 실상을 체험한 것도 해당된다. 마냥 충무로 안에서 살면서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직접 본 셈이다. 그는 '의식화' 되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던 10.26 사태 이후, 규제에서 자유로워진 그는 동아수출공사와 계약해서 1980년에 <바람불어 좋은 날>로 화려하게 영화계에 복귀하게 된다.

새삼 문화라는 것이 돌고 돈다는 생각을 한다. 굳이 말하자면 패션만 봐도 1970년대에 이미 유행했던 것들이 다시 재유행 중이라며 김추자와 이효리의 코디를 비교하는 것이 그렇다. 70년대의 전유물이라고 느꼈던 나팔바지를 부츠 신고 그 위에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니는 풍경과 LP 복각의 활성화..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짓는 것은 내게 분명 위험한 일이지만, 시대의 상징들이 21세기까지 이어질 때 이 시대는 이랬겠거니 하는 추정을 할 수 있게 된다. 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 역시 내가 경험하지 못한데다 영원히 갈 수 없는 과거의 시대를 연결해보고자 하는 관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70년대의 풍경은 상당히 담백해 보였다. 그 담백함은 아마도 너무나도 많은 금지로 인해 비롯된 '건조함'(= '과한' 담백함) 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80년대의 시작을 알리는 해에 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추정하는 80년대는 '과잉' 이다. 입는 옷부터 시작해서 먹는 음식까지 모든 것에 기름을 발라놓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당대의 외식의 상징과도 같았던 짜장면의 번들거림, '함박' 스테이크의 번들거림, 과잉이라 할 만큼 솟아오른 펌 헤어, 록과 디스코의 혼재, 커피에 타 먹는 과한 양의 설탕과 프림, 요란한 디자인의 쟁반, 그리고 원색. 얼기설기 섹스 장면을 이어가며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진 에로 영화들. 정권의 치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면 80년대는 70년대에 비해 규제가 완화되던 시기였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고, 작품은 그런 시대의 영향이 어느정도 반영되었는지 모른다.

* 파란색 바탕의 거친 화풍이 더해진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서 흑백으로 진행되는데, 출연진과 제작진의 이름은 노란색 궁서체 폰트로 보여지는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단 서울의 도시 풍경은 컬러로 보인다. 희한한 점은 카메라가 도시의 높은 빌딩들을 비춰주다 시장통을 비춰줄 때 녹색 톤의 단색조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주인공이 일하는 곳은 다시 흑백으로 완전하게 변해버린다. 의도적 연출이다. *
주인공인 세 청년이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자리잡기까지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가 끝난 뒤에 나오는 장면들만 봐도 그렇다. 파란색 체육복을 입은 안성기가 연기한 말 더듬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가 대놓고 으리으리하게 지은 검은색 양옥집에 그릇을 되찾으러 간다. 들어가보니 외국품종 개가 그릇에 남은 음식을 핥아먹고 있다. 덕배가 접근하려 하자, 개가 그르렁거리기 시작하고, 머리 좀 심하게 볶은 집 주인은 그 상황이 마냥 재밌다는 듯 깔깔 웃는다. 우리 '란도'가 그릇을 깨끗하게 해 줬다면서 말이다. 주인의 머리, 화장, 의상, 그리고 목소리 톤 모두가 기름막이 두껍게 끼어있는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눈에 기름이 끼어 있으니 대변인지 된장인지 분간을 못하고, 사람 먹는 음식의 남은 것들을 개에게 먹이는 행동은 본인들의 입장에서 재미나는 장난거리 같다. 그 그릇과 접시를 씻어서 새로 음식을 담으면 또다른 누군가가 먹을텐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밑에도 없는 법인데 작품의 어떤 인물들은 아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 같다. 덕배는 겨우겨우 그릇을 회수하며 개 짖는 소리를 낸다. 부잣집 사람들에게 덕배의 존엄성은 개와 같다. 아니. 개만도 못하다. 작품은 그걸 도입부부터 바로 보여준다.
<바람불어 좋은 날>의 전체적인 정서는 이미 전부터 거의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장호 감독이 공백기동안 여러번 꾸준히 읽었던 책은 염무웅이 쓴 평론집인 <민중시대의 문학> 이었고, 최인호 말고도 영화화할 원작소설은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리고 처음 복귀작으로 점찍어 놨던 것은 건설회사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황석영의 소설인 <객지> 였다. 비록 틀어지기는 했지만 은연 중에 정해져버린 사회적 계급에 관한 함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의 정서를 가지는 최일남의 소설인 <우리들의 넝쿨>을 영화화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마 그 때 느꼈던 것들의 영향일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이장호 감독도 자신의 연출 스타일을 포기하다시피 한다. 공백기 때 친해진 소설가, 송기원이 영화를 위한 각색에 동참했고, 생전 처음으로 철저하게 콘티를 만들어 작업에 임한다. 그리고 작품에 필요한 세부묘사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감독은 직접 서울역과 남대문 시장 주변의 인력시장에서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

이장호 감독에게 이런 방식은 사실 다소 놀랍다. 왜냐면 그의 실질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영화감독들은 그런 철저한 준비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장호 감독의 '현장에서의 스승'은 신상옥 감독이었고, <월간좆선> 에 의해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과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정신적 스승'은 이만희 감독이었다. 그림 그릴 때의 작업방식을 도입하긴 했지만 타협도 잘 할 줄 알았고, 그 때의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멀티플레이어적 순발력이 뛰어났던 신상옥 감독, 그리고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처럼 이야기 전개, 대사, 그리고 전체적인 미장센을 모두 자신의 머리 안에 저장해두고 작업에 임했던 이만희 감독은 분명 콘티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이장호 감독은 이 두 사람의 기운을 받아 <별들의 고향>부터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까지의 네 작품을 정말 철저히 즉흥적인 연출력으로 다 만들어냈다. 물론 그는 이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것이 현재까지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천재선언>까지 중에서 몇 편의 걸작을 더 만들어내는 데 공헌하지만 동시에 작품의 기복이 심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바람불어 좋은 날> 만큼은 그런 특유의 방식으로 만들지 않았다. 이 작품을 이장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많은 상징과 무게를 더하게끔 거론하는 이유는 아마 개인, 혹은 한국영화계 전체에 거의 극적이다 싶은 순간들을 만들어내서일 것이다. 이장호 감독에게는 제 2의 영화인생을 선사했고, 학업과 군복무 때문에 잠시 영화계를 떠났던 안성기가 성인배우로 복귀한 작품, 그리고 명보극장에서 개봉할 당시, 그리고 독특한 마케팅 방식 때문에 평론가와 감독 지망생들이 이 작품으로 인해 자신의 꿈을 밀고 나가기로 굳히기로 했다는 얘기만 들어도 그렇다. (당시 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감독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강우석, 장선우, 김동원, 김홍준, 박광수 등이었다. 배창호의 경우에는 이장호 감독를 만나기 전부터 영화인의 길을 꿈꾸고 있었다니까, 뭐...)
<바람불어 좋은 날>은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세 청년과 주변 사람들이 겪고 저지르는 여러가지 일들을 블랙 코미디의 화법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안성기가 연기한 덕배 외에 김성찬이 연기하고 여관에서 일하는 길남, 이영호가 연기하고 이발소에서 일하는 춘식이 등장하며, 이들은 각자 올라와서 타향살이 중에 서로 알고 나이와 상관없이 친해지게 된다. 정확히는 시골에서는 더이상 뭔가를 할 수 없어 서울로 상경해 식모가 되거나 호스테스가 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남성들로 변환시킨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이야기들은 가혹한 현실을 부각하기 보다는 에로틱함만을 추구하는 식으로 변질되곤 했다. 혹여 <바람불어 좋은 날>도 이런 류의 수난극의 형식을 따라 세 주인공들을 남창으로 만들면 충격적이었을까? 하지만 감독은 그런 쇠퇴보다는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사회적 함의와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 그보다 더 깊게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10.26 사태 이후 짤막하게 왔다던 이른바 '서울의 봄'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임예진이 연기한 춘식의 동생, 춘순이 서울로 상경했을 때 그녀를 식모 등의 뻔한 레퍼토리로 가게 하지 않고 구로공단의 여공으로 만든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된 이야기는 바로 세 남자가 일하고 있는 주변에서 발생하는 로맨스로부터 진행된다. 작품이 한 시간 즈음 넘어가면 그 로맨스가 어느 정도 정리 되고, 이후부터는 씁쓸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식이다. 이 중 실질적으로 애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길남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길남과 그의 애인인 춘옥은 데이트를 도시에서 멀리 벗어나 산 위에까지 올라가서는 왕릉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다. 거기도 사실상 묘지인데, 대명천지에 젊은 남녀가 무덤가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다니! 춘식 역시 김보연이 연기하는 '미스 유'와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적인 이야기들을 나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연인관계라고 볼 수 없다. 미스 유는 내심 눈치는 채고 있지만,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모른 체 하며 춘식 역시 고백할 마음이 나지 않아 짝사랑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춘식과 미스 유는 왕릉은 아니지만, 대형 송전탑 밑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춘식은 마치 곧 떨어져 죽을 듯한 위태로운 몸짓으로 세차게 바람이 부는 날에 송전탑 위로 올라간다.
길남은 춘옥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길남의 꿈은 호텔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모두가 '평등' 하게 들어올 수 있는 호텔. 코쟁이도 OK, 나카무라 상도 OK, 왕 서방도 OK 라 말하며 들일 수 있는 그런 곳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미스 유는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춘식에게 꿈을 가져보라고 충고하며,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말해준다. 외국의 어떠한 나라를 거론하면서 그 곳에서는 이 곳보다 더 많은 사회적 혜택이 주어진다는 이야기다. 작품 속에서 미스 유는 춘식과 같은 이발소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평생을 머물지 않겠다고 각오라고 한 듯이 매사 언제나 똑부러지게 이야기한다. 춘식에게 세계의 복지혜택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어떻게 보면 평생을 이발소에서 (이후에 등장하긴 하지만 사실 일하는 곳이 퇴폐이발소에 가깝다.) 머물지 않겠다는 다짐하에 나름대로 익힌 지식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병을 앓고 있는 나이 든 아버지와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남동생을 포함해 돌봐야 할 사람들이 많지만, 언제나 씩씩하다.

* 황량한 동네를 제 맘대로 돌아다니는 인간들은 바로 '가진 자들' 이다.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게 진행되지만 작품은 순간순간 차갑게 극단을 오간다. 유지인이 연기한 부잣집 여주인 명희와 하룻밤 섹스를 즐긴 후, 따라다니는 다른 2:8 가르마의 부잣집 남자가 차를 타고 가면서 다투는데 속력을 줄이지 않아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가던 꼬마아이가 길바닥에 넘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이가 애초에 신경 쓰이지도 않는 듯 내버려두고 차를 몰며 사라져 버린다. 덕배 역시 배달 가던 중 이 차들에 치여 중국음식들을 다 쏟게 된다. *
허나 엄혹한 검열이 영화 속과 바깥의 세계에 적용되었던 시절, 인물들의 모든 주장들은 참으로 왜곡되기 좋은 소재가 된다. 노동자들의 인권을 외치면 빨갱이가 되는 시대였다. 하물며 미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한국의 영원한 친구'와 한국을 식민지배 한 국가,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호텔을 만들겠다는데 이것을 당시에 문제 삼고자 하면 온갖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갖다붙여 레드 컴플렉스의 테두리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 국가의 혜택을 이야기하는 미스 유의 장면도 충분히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부정하고 나쁘게 말한다는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고. 그 말도 안 되는 사유들이 실제로도 통했던 시기였다. 잠깐 숨통이 트였던 시기에 감독과 작품은 이 상황을 비꼬는 것 처럼 보인다. 고작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들은 도시를 떠나 독재정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지극히 순수하고 사적인 행복을 즐기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장호 감독에게 질문한 적 없으니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 눈에 이런 류의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장면들마저도 작품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상징들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배치한다.

* 존 레논이 '이매진'이란 노래를 만들 정도로 많은 영감을 준 그의 음악적 뮤즈, 임예진. (뻥)
아. 그리고 안성기의 바지 뒷주머니에 나무젓가락을 꽂아 넣은 디테일에도 주목하시라. *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감독이 작품을 대체적으로 아름답게 찍을 수 있는 역량을 의도적으로 절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장면들은 상당히 아름답고 정갈하게 찍혔다.) 이장호 감독은 초기의 세 작품을 장석준 촬영감독과 연달아 작업했다. 장석준 촬영감독이 이장호 감독에게는 서울고, 홍익대, 신필름 선배인 인연도 있지만, 사실 그는 초창기 감독의 작품들에서 매혹적인 영상을 구현해내어 매력을 상승시켰던 일등공신이었다. 그런 그가 점점 건강이 좋아지지 않다가 결국 <바람불어 좋은 날>이 촬영되던 1980년에 사망하게 된다. 장석준 촬영감독과의 작업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대신 이장호 감독은 이 작품을 서정민 촬영감독과 함께 작업하게 된다.
그렇다면 서정민 촬영감독은 누군가? 그는 바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마의 계단>, <물레방아> 등 전성기 시절의 이만희 감독과 상당수의 작품들을 같이 작업한 사람이었다. 특히 시각적 미장센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만희 감독과 작업을 했으니, 그 영향이 어느 정도 있을까 기대할만도 하다. 그러나 이장호 감독이 보여주는 서울은 조금의 과장을 더해 마치 6.25 직후를 연상케할 정도로 피폐하다. 건물이 몇 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연적으로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폭격을 맞은 듯 땅은 죄다 파헤쳐져 있다. 피폐해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지역이 신흥개발지역이라서다. 누군가가 일궈놓은 논과 밭을 다 파헤치고 그들을 쫓아내고 얻은 결과물이다. 그래서 작품은 대부분의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거기서 시네마스코프의 구도를 한껏 살린 촬영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점은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하다가 2년 뒤 데뷔한 배창호 감독이 정광석 촬영감독과 작업한 <꼬방동네 사람들>과 많이 대비된다. 그 작품은 달동네를 배경으로 했지만 아름다운 미장센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가령 음악을 맡은 김도향이 가장 기세등등하게 느낄법한 안성기와 유지인의 디스코텍 춤 장면이 있다. 작품에서 딱 두 번 나오는 주제곡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고, 동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박진감 넘치는 순간들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록달록한 원색적 조명과 인테리어로 이뤄진 공간에서 섹시한 시절의 안성기가 사물놀이 춤을 추고 70년대 트로이카 중 한 명인 유지인이 디스코 춤을 추고 있는데! 실제로 유지인이 빙글빙글 돌 때 입은 치맛단이 같이 돌고 있는 것과, 춤추고 있는 안성기를 한 앵글 안에 잡아낸 쇼트는 분명 인상적이다. 그러나 작품은 이들의 춤을 멀리서 보여주거나, 혹은 천장에 반사되는 식으로 촬영해낸다. 어떤 미학적 조합은 별로 고려하지 않은 듯한 실로 자유분방한 카메라워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결국 작품은 시네마스코프의 넓은 화면을 이용해서 다 갈아엎어 버린 황량한 공사지대만을 보여줄 뿐이다. 신흥개발지역은 땅부자들에게나 오아시스일 뿐,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황무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연경관과 조화시켜 작품의 모국을 미화하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밤이 되어 세 주인공이 신세한탄을 하고 꿈을 다짐하는 장면이 나오면 작품은 인물들 주위에만 빛을 허용하고 주변 풍경에는 무심한 듯 전부 어둡게 처리해 버린다. 그 곳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현실을 푸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푸념은 곧 없는 자들이 가지는 신분상승으로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1980년에 개봉할 당시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 판정을 받았다.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이 아이들이 쉽사리 느낄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은근한 노출 수위가 있기 때문이다. 7~80년대 한국에서는 오지랖 넓은 정부 덕에 원래 심하긴 했지만, 특히 본국 작품인 '한국영화'와 중화권 작품들은 거진 위의 등급을 판정받아 미성년자들의 전유물이 되지 못했다. 사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장호 감독의 상업적 감각이 빛을 발해 작가적인 의도와 조화롭게 어울렸다고 볼 수 있다. 흔히 '호스테스 영화'라 통칭되어 불려지던 작품들은 위에서 얘기했듯 기본적인 이야기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오직 섹스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지곤 했다. <바람불어 좋은 날>의 이러한 장면들은 서울로 상경한 세 남자의 나이를 고려하여 혈기왕성한 시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으로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조연 중에서 덕배와 같은 중국집에서 일하는 조 씨가 있다. (김희라가 연기했다.) 박원숙이 연기한 중국집 여주인은 남편의 건강이 원인 모를 병으로 좋지 않은 탓에 밤마다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조 씨의 육체에 몸을 맡긴다. 그리 해서 여주인의 총애를 받은 것일까. 조 씨는 덕배와 다른 일꾼들과는 달리 중국집에서 지배인 일을 하고 있다.
문제는 조 씨도 덕배와 다른 사람들처럼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라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는 이미 결혼해서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골의 아내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면서 소식을 알리며, 동시에 여주인에게 자신의 몸을 바친다. 그런데 그것은 여주인에게 신임을 얻어 뭔가 한탕 챙겨보려고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추진력을 얻기 위함인 것이다.

덕배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닥친다. 작품이 덕배에게만 유일하게 춘순과 명옥을 붙여줘 삼각관계(!) 를 허용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덕배와 부잣집 여주인인 명옥과의 관계는 연애라고 볼 수 없다. 그릇이 깨져 음식값을 물어주기로 한 계기로 명옥의 집에 초대받은 덕배는, 오히려 자신의 남루한 모습이 명옥으로 하여금 관심을 끌게 하는 효과를 거둔다. 이후, 덕배는 그녀에게서 얻은 스카프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화장실에서 혼자 자위를 한다. 평생 같이 어울릴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여인이 자기에게 먼저 다가와 주니, 집에 있을 때는 뻘쭘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성적 욕망을 품는 것이다. 이후, 그는 그녀에게서 데이트 제안을 받게 되고 간만에 큰 돈 쓰며 자신을 치장하여 함께 데이트 장소로 나가게 된다.
또다른 비슷한 경우는 김보연이 연기한 미스 유다. 미스 유와 춘식이 일하는 이발소는 최불암이 연기하는 김 회장이 애용하는 곳이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채소를 팔며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가 우연찮게 뛰어든 부동산 투기가 땅값 호황으로 인해 크게 성공하면서 부자가 됐다. 작품 속의 배경인 그 황량한 땅에는 원래 사람들이 살면서 농지로 쓰던 곳인데, 그로 인해 다 쫓겨나고 재개발 되고 있는 것이다. 김 회장은 미스 유를 사랑하게 되지만, 어차피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돈으로 그녀를 유혹한다. 춘식과 함께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미스 유지만 자신에게 지금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돈이다. 그래서 그녀는 정말 내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김 회장의 요구에 맞춰준다. 그리고 결국 어느 날 밤, 김 회장과 함께 모텔에 들어가 섹스를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그의 사랑을 얻고 돈을 받으면 아버지를 병원에서 치료받게 할 수 있고, 남동생을 대학에 보낼 수 있을테니까. 이장호 감독이 작품 속에서 묘사하는 섹스란 결국 사회비판 적인 것이다.

* <바람불어 좋은 날>은 신상옥 감독의 <만종>과 더불어 최불암의 흔치 않은 악역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 양촌리 이장 아저씨는 자신의 연기인생에 길이 남을 '졸부 스타일'의 극치를 보여준다. 백주대낮에 병맥주를 세 병 따는 것도 모자라서 고기까지 구워먹는 느끼한 남자! *
사실 여기서 유지인과 안성기 즉, 명옥과 덕배의 관계는 이야기 구조로 보자면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일종의 구멍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닥 현실적으로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부잣집 아들과의 불장난스러운 섹스도 일상다반사처럼 여기는 여자가 어떻게 거들떠 보지도 않을 듯한 비루한 인상의 배달부를 연인 삼아 놀러다니는가.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그에게 빠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가의 문제가 그렇다. 아마 이것은 일종의 대위법적 연출을 지향하는 점에서 오는 일종의 결함으로 이해해야 할 듯 싶다. 덕배는 자신도 꼭 상류층의 사람이 된 것처럼 주변의 사람들에게 없는 거드름을 피우며 그녀의 집으로 간다. 호숫가에 앉아 명옥의 펄럭이는 치마 속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춰지는 팬티를 보며 키스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만, 그녀가 자신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작품이 영상을 비롯하여 영화적으로 중시하는 것은 현실적, 그보다 더 상징적인 디테일에 있다. 중국집 여주인과 조 씨가 한창 섹스를 하고 있을 때, 덕배와 같이 일하는 아이가 그 광경을 보고 욕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있다. 유사한 쪽으로 자신의 괴로운 과거가 떠오르는 것이 이유였다. 그 때 덕배가 아이를 말리면서 하는 말은 '우리와는 상관 없는 일' 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이후, 중국집 여주인의 남편이 입원한 병실에 찾아가 그에게 모든 것을 고해바친다. 하지만 그는 아이에게 역시 덕배와 비슷한 말을 한다. '잘못 본 걸로 해.' 미스 유는 조 회장을 찾아가는 것이 죽을만큼 괴롭지만 당장 돈이 없고, 그를 거부하여 일터인 이발소에서도 쫓겨날까봐 어쩔 수 없이 치장하고 그를 찾아간다. 걱정되어 찾아온 춘식에게 그녀는 우습다는 듯 이야기한다. '고맙고 싶군.' 이라고. 걱정만 해준다고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안이 없다는 듯 말을 하자 '갈보' 라는 소릴 듣게 되고, 미스 유는 울면서 그의 뺨을 때린다. 조 회장과 명옥은 자신의 부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짓눌리게 만들고 또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등 노리개처럼 조종한다.
"나..나도 처음부터 말을 더듬은 건 아니여.. 서울 와서 하고 싶은 말 다 못하고 그러다보니께 이렇게 된거여..."
작품 속에서 인상적인 대사가 하나 있다. 초반부에 춘식과 길남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덕배가 그것을 말리는 와중에 두 사람을 향해 위의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의 전개와 인물들의 구조는 1980년이라는 시대와 연관지어 지면서 더욱 깊은 의미를 표출한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전두환의 군부세력은 최규하라는 허수아비 대통령을 앉혀놓고, 독재 타도를 외치던 서울과 광주를 문제삼는다. 하지만 서울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아마도 본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고, 청와대가 거기 있으니까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광주는 달랐다. 군부세력은 광주에서 벌어진 5.18 민주항쟁을 총과 칼로 억압했다. 그것은 해방 이후 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6.25, 제주 4.3 항쟁과 더불어 대한민국 현대사를 피로 물들이는 악행이었다. 그러나 군부정권은 5.18 민주항쟁을 광주 외부로 알려져 나가는 것을 철저하게 검열했고,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언론인들은 전부 해직되거나 처벌받았다. 결국 남은 것은 권력에 아첨하는 자들이었고,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입을 다물기에 바빴다. 그래서 5.18 민주항쟁은 한국보다 독일, 미국, 일본 등의 외국에서 먼저 널리 알려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못 본 걸로 하자는 이야기들은 그런 현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겁먹은 사람들은 우리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말하고, 본 걸 잘못 봤다고 이야기 하자고 한다. 그래서 고마워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한다. '고맙고 싶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작품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군부독재에 몸을 판 갈보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권력자들이 만든 이런 모멸감과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민초가 민초다워졌을 때다. 조 씨는 시골에서 아내가 올라와서 위기에 처하지만, 곧 넉살좋은 웃음으로 뻔뻔스럽게 상황을 해결한다. 비록 일하던 중국집에서 옷까지 찢겨지며 내쫓겨나기는 했지만 그는 기술이 있는데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며 웃으면서 덕배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간다. 길남은 자신의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명옥에게 놀아나던 덕배는 호수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 이 여자가 자신을 갖고 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보통 냉수 맞고 속 차리는 것을, '냉풍 맞고 정신 차린' 셈이다. 덕배는 이후에 챔피언을 목표로 권투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제 남은 것은 춘식이다. 그는 한 정신나간 노인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며 자신이 할 일을 깨닫게 된다.

한국영화계의 원로 배우인 이향이 연기한 이 노인은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가장 강렬한 인물이다. 물론 그는 이 작품만큼 만만찮게 강렬한 다른 작품들에도 여럿 출연했다. 떡 먹이는 그룹이 결성되기 이전에 이미 '의지'를 몸으로 실천한 책 외판원을 연기했던 김기영 감독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윤인자와 키스했던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 같은 작품이 그렇다. 하지만 이 모든 역이 <바람불어 좋은 날>의 노인 역처럼 사람 마음을 울리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노인은 작품의 초반부터 시작해서 중, 후반까지 조금씩 조금씩 긴장감을 불어넣을 만한 시점에 등장한다. 세 명의 주인공이 크게 싸우고 화해하던 날, 이들은 한 중년 남자에게 업혀가는 노인의 모습을 본다. 이 중 춘식은 이전부터 노인의 사연이 궁금했나본지 어느 날 밤에 혼자 용기를 내어 노인을 업고 가는 남자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춘식과 관객은 지금 그들이 서 있는 헤집어진 땅이 한 때 노인이 밭을 일구고 살아갔던 터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김 회장은 고리대금업을 통해 그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모두 빚을 지게 한 다음 모두 몰아내 버린다. 그런 수법을 통해 상가를 비롯하여 새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김 회장의 멱살을 잡지만, 돌아오는 것은 미친 사람 취급하는 주위의 시선이다. 결국 노인의 마지막 항거는 막 개장한 상가 건물의 화장실에서 목을 매는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들에게 그의 시신은 '좋지 못한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결국 노인은 거적에 말린다.
1983년에 만들어진, 그리고 독재정권의 상황을 최대한 이용한(?) <바보선언>에 김명곤과 이희성이 이보희의 장례식을 치뤄주는 장면이 있다. 굉장히 아방가르드적이고 전위적인 영상과 편집을 보여주던 작품은 그 순간, 상당히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거기서 사운드트랙으로 삽입된 음악은 다름아닌 국악이었다. 이장호 감독이 민초들의 죽음에 국악을 사용해야 겠다고 판단한 것은 아마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였던 것 같다. (70년대 시절의 그는 이장희, 임형주, 동방의 빛 등 당대의 청년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석양 아래로 만가가 울려퍼지면서 자기 것을 찾고자 하는 노인의 죽음을 치뤄주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은 80년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런 죽음의 풍경을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이 무언가를 일깨웠는지도 모른다. 더이상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것 말이다.

* 이장호 감독의 75년작인 <어제 내린 비>에서는 상당히 연약하고 감성적인 미남으로 나왔던 배우이자 감독의 동생, 이영호는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극단적인 감정을 오가는 역을 잘 연기한다. *
아. 상징적인 장면 하나를 하나 더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슬로우 모션의 범위 안에서. 춘식이 미스 유를 구하기 위해 살인미수를 저지르는 시퀀스다. 이 시퀀스에서 슬로우 모션이 사용된 지점은 재떨이를 들어 방어하려는 김 회장을 면도칼로 그어버리는 춘식의 쇼트에서다. 죽은 건 아니지만, 김 회장은 곧 힘 없이 쓰러져 버리고 미스 유는 춘식의 품에 안겨 운다. 자신의 아버지는 병원에 가 보지도 못 하고 죽어가고 있다면서.
이 쇼트는 내가 본 1980년의 한국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세 편의 '슬로우 모션' 중 하나다. 다른 한 편은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 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리는 총성과 날아가는 새들, 뛰어가는 사람들의 쇼트였다. 그리고 또다른 한 편은 내가 보지 못한 작품인데, 바로 임권택 감독의 <짝코>의 한 장면이다. 장면 묘사에 따르면 한숨을 쉬는 듯한 김영동의 스코어 음악이 울리며 빨치산인 짝코가 자신의 애인과 함께 토벌대를 피해서 산 아래로 뛰어내려가는 장면인데, 이 장면이 슬로우 모션 처리 되어졌다고 한다.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의 후반부 살인 장면도 빼놓을 수 없고, 그 작품은 내가 본 작품이기도 한데 극장개봉을 1981년 1월 1일에 한 관계로 뺐다.) <바람불어 좋은 날>의 살인미수 장면은 위에서 거론한 두 편과 동일한 위치에 놓을만하다. 세 작품은 모두 마지막을 감당 못하긴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리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인들이 상처입긴 하지만 적어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무시무시한 상황들을 바꿔보려고 한다. <최후의 증인>의 오병호는 기어이 누군가의 누명을 벗기고 범인을 검거하며, <짝코>의 짝코와 그를 검거하려고 일생을 쫓아다닌 송기열은 마지막에 함께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다. 비록 당시 검열에 의해 잘려나가긴 했지만, 임권택 감독은 그들이 TV를 통해 서로가 품게 되었던 증오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되는 장면을 삽입했었다고 한다.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춘식의 포효는 사실 좌절스러운 세상을 향한 절규에 가깝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 것이고, 자신은 결국 징역살이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이대로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감옥에 가더라도 그는 아마 떳떳할 것이다. 그래서 사실 다른 두 작품에 비하면 이 작품은 희망적인 편이다. 적어도 오병호, 짝코, 송기열에 비해 춘식은 징역살이를 살고 다시 세상을 살아갈 가능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단히 깊은 철학적 삶의 목표는 없을지라도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잡초처럼 버티겠다는 근성이 있다.
작품은 길남이 입대 영장을 받아서 덕배와 춘순의 배웅을 받으며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가고, 덕배는 흠씬 두들겨 맞지만 만족한 얼굴로 쓰러져 있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삼총사는 마지막까지 모양 빠진다. 누구는 감옥 가고, 누구는 고향에 들렸다 입대하겠다며 양복 쫙 빼 입었는데 폼 안 나게 삶은 계란을 양복 주머니에 넣으려 든다. (앞 주머니에 지갑 넣어도 모양이 살지 않는다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멋있게 포장할 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진짜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엄혹한 독재시대로 인해 벌려지기 시작한 양극화의 현실 속에서, 그렇게 자존감을 유지하며 버틴다는 건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웃기면서도 씁쓸하기 그지 없는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어떤 일말의 기대를 하게 만든다. 바람불어 좋은 날, 적절한 제목 아닌가! 과연 뭐가 좋은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찬 인생의 바람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으면서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버티어낼 수 있다는 것. 김도향의 록 스피릿이 느껴지는 주제가가 다시 한 번 울려퍼지며 누군가가 로드워크를 한다. 이 순간의 바람은 아마도 굉장히 시원할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을 볼 때도 그랬지만 가끔 이장호 감독과 배창호 감독을 같이 놔 두고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때로는 스승과 제자가 뒤바뀐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배창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꼬방동네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최근작인 <여행>까지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균일한 완성도와 아름다운 영화적 매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이장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장선우 감독 만큼이나 자유분방하게 튀며, 엄청난 걸작과 졸작이 혼재하고 있다. 조선희 전 한국 영상자료원장 / 소설가의 <클래식 중독>의 표현을 일부 인용하자면 '그 누가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와 <Y의 체험>이 1987년 한 해에 한 감독에게서 나온 작품이라고 믿겠는가' 다.
그는 스승인 신상옥 감독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스승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많이 얻어낸 것 같다. 작가적인 세계를 유지하자니 흥행에 대한 압박과 욕망 역시 거부할 수 없었고, 동시에 한국영화계에 화두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도 같이 안고 있었다. 그런 야망은 많은 부침을 이끌어냈다. 스승인 신상옥 감독이 초기 몇 년을 제외하면 문 닫기 전까지 자신의 제작사인 신필름을 빚과 싸우며 이끌어 갔던 것처럼, '이장호 워크숍' 역시 순탄하게 운영되지 못했으며 직접 만든 출판사도 잘 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스승들이라던 이만희 감독이나 신상옥 감독 역시 실생활을 잘 살아낸 건 아니었으니 그들을 따라 '인생을 영화처럼' 살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올 운명을 지녔거나. <바람불어 좋은 날>의 세 주인공과 이장호 감독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 위치해 있는 데뷔부터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가 있는 87년까지의 이장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주목할만한 작품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너무나 다른 듯하고 불균질한 성향들은 모아져 일종의 '이장호 스타일'로 통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어떤 때는 이상한데 , 어떤 때는 놀라울 정도로 부릅뜬 눈으로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리는 것은 천재처럼 보일 정도니까 말이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젊은 영화인들을 충무로로 불러와 후반 시기부터 이어지는 '코리안 뉴웨이브'의 태동을 알렸다. 젊은 영화인들은 고인이 된 하길종 감독이나 꾸준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장르와 정치적 메세지를 뒤섞는 것을 자신과 같이 호흡하고 살고 있는 선배 감독이 하는 것을 보고 열광했다. 작품은 단 한 장면을 제외하고는 검열에 걸리지 않은 채 상영됐고, 이장호 감독은 임권택 감독, 배창호 감독과 더불어 지망생들이 밑에 들어가 가장 배우고 싶은 감독이 되었다.
2012년 현재까지도 이 작품의 강렬함은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것은, 냉정히 보자면 작품이 나온 해로부터 시작해서 바뀐 것이 거의 없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언젠가 조세희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1978년에 초판으로 발간된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팔리고 거론되고 있는 것이 괴롭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것은 작품에서 묘사된 것이 지금까지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춘순은 구로공단에 들어갔다.
훗날 구로공단의 여공들이 부당한 처우에 반발하여 노조를 결성했을 때, 언론은 구로 공단을 비롯하여 다른 회사의 노조라는 개념을 이런 식으로 다룬다. 이상한 촛불 의식 장면을 보여주며 노조를 이도교 집단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파업 장면을 붉은 톤으로 처리해 버림으로서 레드 컴플렉스를 자극한다. 부당한 현실에 반대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빨갱이'가 되는 것이다. 이 때가 1982년이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 이 때 개봉되었다면 작품은 절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작품은 그 위기가 닥치기 직전에 개봉했고, 이후 매춘을 소재로 한 작품이 판을 치던 한국영화계가 나름의 작가적 세계를 간신히 유지하게 만드는 선봉장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바람불어 좋은 날>의 소재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처럼 지금까지 낡지 않았다는 것은 비극이다. 시대'만' 20세기에서 21세기로 바뀌었을 뿐, 아직까지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았다. 바람은 여전히 그 때의 바람이며 명옥과 김 회장은 그대로다. 길남, 춘식, 춘순, 덕배같은 젊은이들도 역시 그대로다. 언젠가 이 칼날 같은 바람이 시원해질 것도 같다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 다른 바람이 불어 그것이 시원하다고 느껴지면, <바람불어 좋은 날>은 '과거의 작품'이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바라는 바일지도 모른다.
p.s.1 - 작품이 거의 잘리지 않은 데는 검열위원회에 속해있었던 박완서 소설가 님의 지지 덕분이었습니다. 거의 결사적으로 막은 덕에 장시간 검토 끝에 딱 한 장면 빼고 잘리지 않았다고 하네요. 잘린 장면은, 현재는 볼 수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볼 수 없던 장면이었습니다. 길남이 춘식과 덕배를 데리고 밤중에 술에 취해 푸념하다가 집창촌으로 가자고 꼬드깁니다. 그 때 혼자 노래를 부르는데요, “영자를 부를거나, 순자를 부를거나, 영자도 좋고, 순자도 좋다. 땡까댕! 땡까댕!” 라고 합니다. 훗날 체육관에서 영부인이 되어버리는 여자를 창녀로 비유해 버리는 패기! ...과연 의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장면은 개봉 당시에 잘려 나갔다고 합니다.
p.s.2 - 배창호 감독님이 이 작품의 조감독이었을 때, 작품 촬영이 끝나고 기념 파티를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영화평론가인 정영일 님이 배창호 감독님에게 <바람불어 좋은 날>의 상영시간이 몇 분 정도 되는지 물어봤다고 했대요. 배창호 감독님이 "글쎄요.. 1시간 50분 조금 넘을걸요.." 라고 했다가 혼났다고 하네요. 조감독이고 작품 제작에 참여했으면 정확히 몇 분 몇 초인지까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 혼난 이유였습니다.
p.s.3 - <바람불어 좋은 날>의 마케팅 중 주목할만한 것은 관객을 상대로 '혹평집'을 공개 모집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수 혹평'에 당선된 학생 중에 황규덕 감독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p.s.4 - 각색을 담당했던 송기원 소설가님은 당시 수사기관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크레딧에서는 이름을 뺐습니다. 후에 구속되어 국가보안사범으로 수감되지요.
p.s.5 - 춘식 역을 맡은 김영호 님은 몇 년 뒤부터 점점 시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시력을 모두 잃어버렸지요. 그리고 길남 역의 김성찬 님은 김비서 방송국의 <도전! 지구탐험대>에 출연했다가 오지 탐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사고였지요.
p.s.6 - 현재 이 작품은 한국영상자료원에 의해 디지털 복원 됐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 VOD 서비스를 통해서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720p, 1080p 해상도로 보실 수 있다는 얘기지요! 가능하면 서플먼트, 내실있는 책자라도 추가해서 (SD 해상도일지라도) 새롭게 DVD로 나와주면 좋겠는데.. 판권 문제가 있는가봐요. 어째 동아수출공사 작품, 화천공사 작품은 복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참 보기가 힘들군요. 아.. 이명세 감독님 초기작품들도 추가해서요. 한국영화 마스터피스 콜렉션의 질은 너무 형편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