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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 Vol.3 - 임윤찬이 연주하는 베토벤과 리스트 2020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 3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외 작곡, 임윤찬 (Yunchan Lim) / 아울로스(Aulos Media)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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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질이 약간 아쉽긴 하지만 듣는데 큰 지장은 없으며, 대단히 좋은 음반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이라도 다시 주목 받고 있어 잘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KBS FM의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 은 참 좋은 기획이었다고 생각해요. 이 기획이 2020년을 끝으로 더이상 이어지지 못해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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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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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됐던 책을 싼 가격에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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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 (HD텔레시네) - [할인행사]
이장호 감독, 이보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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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모 (氈帽) : 조선시대 여성들이 나들이 때 쓰던 쓰개의 하나.
  
  


감독: 이장호
주연: 이보희, 안성기, 김명곤, 박원숙, 신충식, 김기주, 문태선, 김성찬, 김하림, 윤순홍, 김형섭, 추석양
음악: 이종구
촬영: 박승배
18세 관람가 / Color / 110분 (극장 개봉판, VHS 출시판), 115분
 
 
....


<어우동>의 도입부는 조선시대 성종 집권기의 어느 칠흑같은 밤이다. 평민들이 일제히 탈을 쓰고 한 판 놀아보자는 축제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개중에는 그 놀자판인 시간을 아껴 숲속에서 마치 짐승이 교미하듯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랑을 나눈 여자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기생의 시녀였다. 시녀는 그렇게 자유분방한데, 이 기생은 나름의 품위를 지키겠다는 듯 가만히 있다가 별안간 납치를 당한다. 처음엔 보쌈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다. 납치한 자는 그녀를 범한 뒤에 죽이려 든다. 보통은 이런 죽이겠다는 위협을 들으면 벌벌 떨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 여자는 별안간 호탕하게 웃어제끼더니 단박에 이 암살자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호통을 쳐서 그를 무릎꿇린다. 그러고는 얘기한다. 계집의 몸이 그깟 칼로 열려질 것 같으냐? 그래. 이제 내가 너를 가지고 놀아주지. 공깃돌 갖고 놀듯이 말이야. 도입부로 따지면 초장부터 세게 나가는 것이 아주 강렬하다. 표현수위로 보나 그 시퀀스 자체가 주는 격렬함은 관람 중인 관객에게도 어떤 본능적인 감정을 일깨워준다.

 

여기서 잠깐 1980년대 초반의 이장호 감독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그는 1976년부터 4년동안 대마초 사건 때문에 충무로 바깥에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 <바람불어 좋은 날>로 1980년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대신 그것이 <별들의 고향> 이나 <어제 내린 비> 시절의 '흥행사' 로서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람불어 좋은 날>을 통해 한국영화계에 다시 한 가지 화두를 들고 왔다. 그것은 바로 작가들이 다시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그 점에 관해 나름의 발언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문제다. 누구나 하고 싶어 했던 것, 그러나 호스테스 장르와 문예 장르가 맛보게 해줬던 과육에 취해서, 혹은 남산 밑으로 끌려가 구정물 들이킬까봐 하지 않았던 것. 표현의 자유가 마음대로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몰라 괴로워할 때 이장호 감독은 직구를 날리며 자신의 이름을 화려하게 휘날렸다.

 

그러나 그런 위용도 오래 가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바람불어 좋은 날>은 '서울의 봄', 그리고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시나리오부터 본편 사전 검열까지 딱 한 부분만 삭제되고 거의 온전하게 보전되어 개봉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면 감독이 1년 뒤에 바로 차기작으로 내놓고, 3부작으로 만들 생각을 한 <어둠의 자식들>이 문공부에 의해 최종 편집본이 5분 가량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몇십초만 잘려도 바로 티가 나는 영화에서 5분부터는 이미 이야기 자체에 큰 구멍 내는 것을 각오 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작품은 해외에 수출되는 것을 금지당했다. 비록 흥행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이장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제작환경이 다시 힘들어 지고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또 문제가 된 것이 이미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정지를 당하기 전에 영화사와 맺어놨던 계약이 하나 있어서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를 동시 촬영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판이한 줄거리를 가진 두 작품을 동시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에서 감독은 자신의 권한을 조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에게 일임했고, 그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다.


 


이 시기의 감독은 그랬다. 그나마 흥행과 영화제 수상 부분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둔 <낮은 대로 임하소서>는 별로 특출나지 않은 기독교 관련 작품이었고, <바보선언>이라는 무시무시한 걸작을 만들어 내지만 이 작품도 흥행몰이를 하기 전엔 제대로 개봉조차 하지 못한 채 1년간 영화사 창고에서 썩어야만 했다. 그 사이 만든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와 <과부춤>이 연달아 흥행에 실패했던 것이다. <어둠의 자식들>에 이어 <바보선언>이 한국영화계에 준 충격은 대단했지만, 80년대 초반기가 끝나갈 때 쯤의 이장호 감독은 더이상 충무로에서 주목받는 흥행감독이 아니었다.
 
바로 그 때! 이장호 감독의 말에 따르면 한 가지 뭔가 계기가 되었을지 모를 만남이 이뤄진다. 바로 자신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다 데뷔한 배창호 감독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이장호 감독은 자신의 작품들이 연달아 흥행에 실패한 시점에서 영화사무실까지 하나 차리게 된다. 그래서 일단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새마을 운동에 관련된 작품인 <잘살아보세>를 만들기로 하고 자신의 촬영팀과 횡계에 있는 한 오징어 불고기 식당으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곳에는 마침 배창호 감독의 촬영팀도 자리잡고 있었다. <꼬방동네 사람들>로 혜성같이 등장한 배창호 감독은 당시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만들던 중이었다. 조감독이었던 사람은 지금 자신을 압도하는 신성이 되어있다... 그 때 이장호 감독 본인은 뭔가 다시 시작해서 지금보다 나아져야 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 얼굴만으로 충분히 야하게 가는 <무릎과 무릎사이> (위의 사진) *


 


그런데 왜 하필 그 의지의 시작이 <무릎과 무릎사이> 였고, 이후에 <어우동>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그것도 이장호 감독이? 아무리 방기환 작가의 신문연재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 했다고 할지언정, 이 시절의 관객들은 어쩌면 이장호 감독에게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을런지도 모르겠다. 당시 섹스를 활용한 작품들에 관해서는 전두환 정권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우민화 정책인 3S 정책에 연관되어 있었단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흥영화사 창립작품으로 만들어진 <무릎과 무릎사이> 는 확실히 이장호 감독이 이전에 이뤄낸 여러 성과를 생각하면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상당히 얄팍하기 그지 없는 작품이었다. 그냥 성적 쾌락을 안겨주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싶지 않아서 살짝 반미정서적 테마를 끼워넣은 작품이랄까. 비록 이장호 감독에게는 다시 한 번 흥행감독으로서의 발판을 마련해 준 중요한 계기가 된 작품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우동>은 앞에 그 작품이 있다는 이유로 도매금 당하기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 왜 그러냐 하니, 사실 이 작품은 <과부춤>과 <바보선언>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감독의 마음 속에서 나름의 프로젝트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물자체도 좋은 얘기거리가 되겠지만, 원작소설 자체가 글과 삽입된 삽화로 많은 인기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오히려 빨리 영화화 경쟁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한 것이다. 감독은 김원두 사장이 있는 현진영화사와 손을 잡고 작품을 만들어보려 했으나 <일송정 푸른 솔은>의 제작을 먼저 제안받는 바람에 작품은 미뤄져 버렸던 역사가 있었다. 이후에 감독 본인이 이 작품에 관해 어떤 감정을 가졌던 간에 <어우동> 자체는 나름대로 전부터 그에겐 염원이라고 할만한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태흥영화사에서 제작을 맡겠다고 하면서 결국 이뤄지게 된다.

 

 

* 물론 자신의 이 프로젝트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다소 얄팍한 접근법이 필요했던 것 같다. 영화월간지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이장호 감독은 <어우동>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이태원 사장이 또 하나의 에로물을 원했다' 고 답했다.

 

당시 태흥영화사는 첫 작품으로 당시 임권택 감독의 신작이자 배우 김지미의 복귀작으로 <비구니>를 만들고 있었는데, 불교계가 그 작품 만들지 말라고 거세게 반발하는 바람에 반 이상 찍어놓은 작품 제작을 중단해야만 했다. (임권택 감독 본인도 다시 재활용하고 싶을 정도로 잘 찍힌 전쟁 피난 시퀀스가 있다고 알려진 이 작품은 태흥영화사가 몇 번 이사하는 와중에 원본 필름이 사라졌다고 한다.) 작품, 제작비적인 면에서 큰 손해를 보고 실의에 빠져 있던 영화사를 다시 살린 또 다른 '첫 작품'이 <무릎과 무릎사이>인 셈이다. 프랑스 낭트 영화제까지 초청되어 톡톡히 재미를 본 이태원 사장은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또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장호 감독에게 말했고, 그 때 그가 꺼낸 카드가 바로 <어우동> 이었다. *

 

<어우동>의 기본적인 이야기는 스승으로 따지면 신상옥 감독이 만든 일련의 조선시대 여성사극들, 동시대의 작품들로 따지면 이전에 나온 이두용 감독의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와 궤를 비슷하게 한다.. 바로 인권이라는 게 없었던 조선시대 여성수난극. 실제 어우동은 현재 가계도는 삭제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단은 승문원 지사 관직에 오른 바 있는 박윤창의 딸이라고 한다. 태어난 지명이 '음성 군 음죽 현' 이라 이미 태생부터 '음풍' 휘날리게 생긴 거 아니냐는 농을 걸어봄직 하겠지만 어우동, 혹은 어을우동 당사자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조신한 처자였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화려한 스캔들의 아이콘이 되던 계기는 전적으로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해 시집간 곳에서 무시를 당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던 것일게다.

 

보통 내가 다니는 대학도서관에는 찾는 책이 어지간하면 다 있고, 방기환 작가의 작품들도 여럿 구비가 되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동명원작은 없었다. 읽어보지 못해서 원작소설에 관해서는 뭐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장호 감독의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 할 때 어우동이 기녀가 되는 계기를 조금 극적으로 표현한 것을 제외하면, 적어도 그녀의 행적에서만큼은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충실한 편이다. '무늬만 조선시대'를 지향했던 당대의 수많은 토속물들을 생각하면 그 나름대로 들인 정성에서부터 너희들과는 다르다는 확실한 구별점을 만들어 놓고 있는 셈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시대에서 '칠거지악' 이라는 규율에 얽매인 여성은 얼마나 숨쉬기 힘들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어우동 역시 자신의 남편이자 변태인 태산군과 결혼하여 온갖 곤욕을 치루지만 그것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보희가 연기한 어우동은 결론적으로 강수연이 연기한 옥녀, 원미경이 연기한 길례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이미 역사 속에서 얼굴로 따지면 절세미인의 축에 들고 설정 상 몸 자체가 타고난 명기라고도 하는데 그걸 이용해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선사회에 좌절하지 않고 반항해 보는 것이다. 어우동의 그런 시도는 성공적이다. 그녀는 '꽃이 나비를 따라가나? 나비가 꽃을 따라와야지' 란 말을 가장 잘 실천하고 또 잘 이용하는 여자다. 탐욕스러운 어르신들은 공맹 운운하며 얻은 지식을 자랑할 데가 없어 낑낑대는데, 이 여자가 그걸 다 이해하고 받아주니 서초동 영포 빌딩 밑에 있는 보신탕 집 여주인마냥 매혹적 (이거 칭찬이다. 후에 국가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 바람 쐬러 나가자고 그랬다잖아.)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우동은 보신탕 집 여주인보다 독하다. 자신을 탐하러 온 사람들을 무릎 꿇리고 포로로 만든 다음, 기운을 아주 죄다 소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취한 남자라고 문신까지 새기게 해서 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웬만한 죽음의 위협이 앞에 다가와도 전혀 두려워 하지 않고 호탕하게 웃어 넘기는 배포까지 있다. 이러니 어우동은 곧 조선시대 '남자양반들' 의 '토미에'로 승화된다. 누구나 절박하게 원하는 여성이지만 동시에 토막살해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어우동>은 역사적 충실함과 더불어 언제나 작품이 동일선상에 놓여지고 비교되던 당대의 '에로' 장르와 구별되는 상업적인 장점들이 있다. 일단 진지한 톤으로 전개되는 작품이라 작정하고 웃기려 드는 유머는 없지만 양반, 혹은 절대권력처럼 군림해오는 요소를 전복시키는 통쾌함이 있다. 그리고 여러 애마부인들과 당대의 외국 경쟁자들 정도는 가볍게 쌈 싸먹는 젊은 이보희가 마음껏 자신의 누드를 자랑하며 암살의 위협에 시달린다. 어찌 흥미진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보희의 매력은 가히 폭발적인데, 그런 그녀를 보호하는 두 명의 남자들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도발적인 소재, 섹스, 복수의 롤러코스터가 함께 펼쳐지니 이 점이 상당히 재밌게 다가온다. 보통 한국에서 이런 류의 여성 수난기를 다룬 작품은 언제부터인가 한두가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은 파격이 시대의 흐름을 견뎌내지 못하거나, 더이상 아무것도 없는 내용을 가져다 '예술' 이라고 빙자할 수가 없어 점점 존재가치가 도태되었다. (가령 유진선 감독의 <매춘>은 시신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나영희가 보여주는 그 순간의 열연만이 살아남아 있다.)
 
 


 
<어우동>은 어떤가? 작품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두 명의 남자를 등장시킨다. 한 명은 김명곤이 연기한 천가,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안성기가 연기한 갈매라는 인물로 작품의 남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두 인물이 가진 특이점은 양반으로 인해 불구의 신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양반집 머슴이었던 갈매는 그 집 딸내미를 말 그대로 도와주고 업어줬다는 이유로 몽둥이질을 당하고 음부의 일부가 잘려나간다. 그리고 마침 그것을 지켜보게 된 천가는 이 행위가 누설되면 안 된다는 이유로 혀가 잘린다. 이후, 그들은 어우동에 관해 각자 다른 의뢰를 받으면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성인이 된 두 사람은 일반인을 초월한 육체적 능력을 갖고 있다. 작품은 굳이 드러내지 않고도 이 점에 관해서 더 많은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후천적 불구자들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 일반인들을 압도하는 초인적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인물을 보면 이 문제는 곧 어우동에게도 해당된다. 어우동의 아버지로부터 그녀를 즉사시키라는 의뢰를 받은 갈매는 곧 어우동의 처지를 동정하게 되고, 그녀를 보호하다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가 어떻게 이들과 공통점을 가질 수 있을까? 신체가 불구인 것도 아닌데.

 

그래서 작품은 어우동의 누드를 이용한 쾌락적인 시퀀스를 보여주는 것 사이사이로 그녀의 과거회상을 배치해 놓고, 어떤 지점에서는 잠시 본래 진행되는 이야기보다 아예 여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장 힘을 준 부분은 그녀가 기생의 삶을 살게 되는 순간에서다. 남편의 엽색 행각에 질리고, 시댁의 냉대에 질린 어우동은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온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은 출가외인' 이라는 이유를 들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녀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칠거지악이라는 수난을 공유하고 있는 어머니 뿐이다. 그 어머니마저도 시댁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좌절한 어우동은 자신의 시녀와 함께 끝끝내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먼 길을 방랑한다. 어딜 가도 여성의 삶이 이 따위라면, 차라리 이 세상을 떠버리고 마는 것이 외려 마음고생도 덜고 편하지 않을까. 무언가 결심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쓰던 전모를 벗어던진다.

 

 

이장호 감독의 작품에는 대체적으로 품 속의 이야기 전개에서 어떤 식으로든 여기는 자신이 힘 줘서 구상한 것이라고 웅변하듯 찍어놓은 시퀀스가 한 번씩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게 사실 초창기에는 완성도를 깎아내리는 단점이라고 보고 있는 편인데, 가령 데뷔작인 <별들의 고향>에서 안인숙이 연기한 주인공 경아가 윤일봉이 연기한 준만의 집에 후처로 들어가 생활하는 시퀀스가 있다. 경아는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고독하게 그 집에서 정신적으로 병들어가는 준만을 위로하지만, 곧 그녀가 중절을 했고 상상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준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변명 삼아 경아를 떠나버린다. 고독해지고 동시에 비정해져 가는 현대인을 묘사하기 위해 작품이 배치한 중요한 한 방이기에 신성일이 등장하는 시퀀스 만큼이나 비중있게 묘사되는데, 이상하게 이들이 등장하는 시퀀스의 장면 연출이 슬픈 로맨스를 다루는 작품을 난데없는 심리 호러로 둔갑시켜 버렸다. 이는 두번째 작품인 <어제 내린 비> 에서도 비슷한데, 동생의 애인을 사랑한 형의 트라우마를 호러 분위기로 둔갑시켰던 것이 그랬다. 이장호 감독은 새로운 곳으로 튀고 싶은 자신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본인 나름대로는 뭔가 세련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사실 그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이 점은 배창호 감독이 더 안정적이었다고 본다.

 

 

 

어쨌든 이 부분들이 다소 안정적으로 안착했다고 보여졌던 건 당연히 <바람불어 좋은 날> 부터였다. 이 작품은 이미 리뷰를 했으니 보면 알겠지만 세 젊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퀀스 대신 이향이 연기한 노인의 이야기가 마침내 서술되는 지점이 정말 강렬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과부춤>에서 만삭의 여인이 방을 박차고 뛰어나올 때의 슬로우 모션이라든가, 필히 봐야 할 걸작인 <바보선언> 에서 등장하는 이보희의 장례식 같은 시퀀스는 화려하게 복귀한 이장호 감독을 단순한 흥행사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핵심적인 '한 방' 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어우동>은 위의 시퀀스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보희가 절망적인 심정의 뒷모습으로 하늘을 바라보다 앉아서 흰 천을 휘날리며 살풀이를 하는 부분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명장면은 어우동이 새처럼 날아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자살을 위해 강으로 뛰어들며 비통함을 최대치로 끌어낸 채로 끝이 난다. 이것도 그냥 그저 그런 신파일까. 어찌됐건 관객의 눈물을 이끌어내는 게 목적이라는 점에서 부정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작품은 강요가 아닌 영상언어를 통해 설득을 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이후, 강물에 빠진 어우동은 기생들의 맏언니 격인 향지에게 구출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고, 그녀는 후세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변해간다.

 

 

사실 이장호 감독의 영상감각은 정갈하지는 않더라도 대담한 맛이 분명히 있다. 가령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와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그 작품의 무시무시한 결말을 다소 진부하게 만들었던 것이 함께 등장했던 자막이었다. 등장하는 방법도 그렇거니와, 거기서 서술되는 자막의 내용도 옥녀를 포함한 씨받이들의 비참한 삶과 그 악습을 특색없이 비판하는 수준 정도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 에도 배경이 되는 성종시대에 관해 서술되는 자막들이 몇 번씩 사용되곤 하는데, <씨받이> 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건 그 자막이 서술될 때 등장하는 다이나믹한 효과에서다. 그래도 엄연한 사극인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자막의 등장이 자칫 이 장르의 격을 떨어뜨리는 거 아닐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효과는 어울리고, 작품에 관해 따분할지도 모른다는 첫 인상을 말끔하게 지워버린다.
 
하지만 이 작품은 위에서 이야기한 어우동의 자살 시도 시퀀스를 제외하면 그런 연출에서 이장호 감독의 고질적인 단점이 많이 드러나 있는 편이다. 초기 시절처럼 장르를 구분 못하는 건 아닌데, 작품이 담고 있는 함의를 어떻게든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이 많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상으로 멋지게 승화되면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칠거지악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악습이나, 참고만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심정을 웅변하듯 끊임없이 드러내고자 애쓰는 부분들이 많아서 과하게 친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너무 많이 얘기해주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흥미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법. 그래서 이보희가 카메라 렌즈 가까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관객을 쳐다보며 춤을 추는 매혹적인 시퀀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관객에게 어떤 의심을 안겨준다. 왜 저렇게 애써 설명해 주려고 안달이지? '벗는 영화가 아니다' 라는 걸 그렇게 필사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안 그래도 노출이 포화 상태에 있는 작품이었으니까. 그래서 주제의식을 굳이 직접적으로 웅변하려 애쓴 것이 오히려 이 작품을 야한 작품으로만 기억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어지간히 자격지심 있는가 보구나 싶은게다.
 
 


 
* 그 외 지나치게 과잉으로 밀어부치는 경우. 어우동이 자신의 정력을 자랑하듯 남정네들을 그로기로 몰고 가는 이 부분에서 작품은 이보희의 얼굴과 그녀가 펼치는 화려한 진기명기를 겹쳐놓는다. 여기서 이보희는 쉴새없이 웃고 있다. 지금 감상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보희 누님 쉬지도 않고 웃으시니 턱 아프시겠다.' 정도다. *

 

그 점에 관해 한 마디 하자면, 작품은 어우동이란 인물을 단면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어우동의 이미지 때문에 올 초에도 흑요석이란 예명을 쓰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모바일 게임인 <밀리언 아서> 에 어우동 일러스트를 그려 넣었다가 네티즌들에 의해 '어우동이라 싫다', '기생년을 왜 쓰냐' 는 등의 괴이한 비난에 시달린 일명 '어우동 사태'가 일어난 바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의 그녀는 스캔들메이커이자 동시에 가무와 시문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개밥그릇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양반이었다고 해도 기본적인 학식의 깊이가 있는 법이라, 그들을 매혹시키는 기생이라면 적어도 비슷한 수준의 교양을 알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어우동은 당대에 그 스캔들이 부각되어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순 없지만 시화집인 <송계만록>에 남겨져 있는 '부여회고' 같은 자작시를 보면 웬만한 양반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작품은 재미와의 절충점을 찾기 위해 어우동의 이런 교양을 선보일 수 있는 시퀀스를 남자들을 애타게 만드는 대화로 처리하는 재치를 보인다. 소설의 문장들을 빌려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순순히 허락하지 않고 고상하게 남자들을 갖고 노는 작품 속 어우동의 대사는 그 절묘함에 무릎을 치게 만든다. 가령 작품이 시작된지 32분 정도가 지난 뒤에 등장하는 이런 대사들이 그렇다.
 
"내가 왔네. 나비가 왔네."
"그 나비, 꿀을 딸 줄이나 아실런지?"
"부리 없는 나비 봤나?"
"나비도 나비 나름!"
"허허. 찔려보면 알 일."
"매가 꿩을 쫓듯, 순서가 있는 법."

 

이후에 합환주를 먹여주는 척 하면서 이 남자를 협박하여 자신의 노예로 만들 때, "안주가 필요한 건 나으리만이 아니었습니다요." 라고 존대를 쓰다 "큰 소리? 이봐!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그리 쉽게 벗어날 줄 알았나?" 라고 바로 반말로 전환하여 순간의 카리스마를 뿜어내 상대의 기를 눌러버리는 타이밍, 그리고 "어떤가? 자네가 내 말을 거역해 볼 용기가 있는가? 어서 이리 와 엎드려!" 라고 말하면서 그를 굴종시키며 마무리 하는 대화 시퀀스는 참으로 강렬하고 또 유려하다. 다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계급의 차이가 하늘과 땅 같았던 시기였기에,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그녀의 모습이 이후의 전개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반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후반부에서 평민으로 변장하고 자신을 만나러 온 성종을 무릎 꿇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전개는 주변 인물들의 죽음을 초래하고 어우동, 갈매, 천가의 목숨을 위협하게 된다. 뭐,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어우동의 입장에서는 별 상관 없었겠지만 그녀도 힘들었을 것이다.

 

 

* 그 당시나 현재의 관객들이 볼 수 없는 시퀀스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어우동과 성종의 섹스 장면이다. (절대 '성종과 어우동'이 아니다!) 이게 얘기 들은 바로는 처음 개봉할 때는 있었다고 하는데 누군가가 이 장면과 관련해서 감사원에 투서를 넣었다고 한다. 성종이 어우동에게 놀아나는 부분은 당대의 권력자, 즉 전두환 군사정권을 조롱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장호 감독은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 GV를 진행할 때 그 부분에 관해서는 본인은 별 의도가 없었는데 부풀려진 것이라 답했다. 그는 오히려 이런 말을 했다.

 

"만약 풍자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도, 그건 제 의도가 아니라 어우동의 의도겠지요."

 

근데 또 생각해보면 웃긴 것이 당시 군사정권은 자기들을 '왕'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딱히 그렇게 생각해주고 싶지도 않은데 지들 혼자 헛물 켰던 것 같아서 이게 또 우습다.  어쨌든 태흥영화사와 스펙트럼 측에서 후에 HD 텔레시네가 된 <어우동> DVD를 발매하기 위해서 삭제 장면이 있는지 찾아본 것 같은데, 끝끝내 그 삭제된 부분은 찾지 못했다. *


갈매는 이런 상황을 보고 그녀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처지임을 깨닫는다. 사랑 받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처럼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위협을 받는 존재. 심지어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도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 존재. 두 사람은 웬만한 사람들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래도 상대방 측에서 인해전술로 승부하면 아무래도 당해내기 버겁기 마련이다. 결국 이들은 동반자살을 선택한다. 애초에 이장호 감독 본인도 별로 의도한 것 같지도 않으니 뭔가 더 깊게 파고들 의욕도 없다만, <어우동>에서의 시대비판적 연출은 되려 자기는 이 정도 했다고 떠벌려서 인정받고 싶은 관심병 종자같은 면이 있어 그리 흥미롭지 않다. 작품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시대를 말하고자 하든, 장르적인 재미를 주고자 하든 간에 일단 '캐릭터'를 통해서 펼쳐질 때다. 사실 이 작품은 굳이 그렇게 입으로 불평등, 여성수난사 등을 부르짖을 필요가 없었다. 캐릭터들의 필터를 통과하는 순간, 이미 다 납득이 되는 연출력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역시 마무리를 섹스 장면으로 해결한다. 그리고 여기가 아주 가슴에 사무치게 슬프다. 아. 맞다. 깜빡했네. 위에서 어우동이 양반들에게 문신을 새겼다는 이야기를 썼었는데, 사실 이것이 이장호 감독의 작품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감독이 이 디테일을 역전시켜서 딱 한 번 활용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는 남자들의 몸에 직접 문신을 새기던 어우동은 이 작품에선 본인이 남자의 손에 의해 문신이 새겨지기를 자청한다. 그 문신을 새겨주는 사람은 바로 갈매다. 그는 뭘 새기고 있을까. 飛. 날 비. 갈매는 어우동과 함께 '날고 싶어한다'. 아마 신상옥 감독의 <내시>와 더불어 한국영화 사상 가장 슬픈 섹스 장면이 아닐까. 시대에 의해 인생이 뒤바뀐 여자와 성불구자가 된 남자는 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가며 되지도 않을 섹스에 몰입한다. 그런데 이게 몰입이 되냔 말이다. 안 될 것이 뻔한데! 그들은 불평등한 시대에 당하고, 또 이룰 수 없는 설움을 그렇게나마 분출한다. 조선 왕조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의 열망은 이뤄질 수가 없다. 그래서 날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가 멸망하는 길을 택한다.
 
<어우동>은 사실 캐릭터를 봐야 얘기거리와 가치가 많아지는 작품이다. 섹스도 몸을 통해 하는 것이고, 그 몸이란 결국 인물로서 귀결되는 법이다. 감독은 이 작품의 재평가를 요구할 때 꼭 의상 부분을 거론하곤 했다. 실제로도 <어우동>에서의 복식 고증은 이 작품을 폄하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았던 요소이기도 하다. 박물관에 가서 조사도 하고, 실제 고증을 꼼꼼하게 거쳤으며 작품을 수놓는 화려한 원색의 향연은 사극 장르의 어떤 부분들에 한해선 새로 정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복식과 더불어 그것을 착용하는 인물이 있어야 배경이 되는 시대의 양면을 완전히 알 수 있는 법이다. 적어도 이 작품은 그렇다. 물론 <씨받이>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결말처리도 만만찮게 강렬하다. 그리고 어쩌면 담고 있는 함의나 감독 본인의 고민의 흔적이 더 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어우동>을 그 작품들보다 하대 한다는 건 조금 부당하다. 인물을 보면 어우동의 행각들은 마치 바뀔 수 없는 시대에 절망해서 자신을 함부로 대하며 망가져가는 여인의 이야기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기엔 그녀를 따뜻하게 품어주려고 하는 남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장르적 재미에 안착하려는 욕망도 만만찮게 대단한 작품이지만, 나름대로 냉혹한 당대의 현실을 직시하는 시각을 크게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사실상 흥행 외적인 면에서 다시 한 번 거론되어져야만 한다. 진지한 정치적 함의가 담겨져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올시다 라고 답하겠지만, (그런 거 없어! 내가 볼 때는!) 나름대로의 확연한 개성을 가진 여성 드라마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냥 단순히 '그 시대에 가장 잘 나갔던 섹스 영화' 라고 규정되기엔 다소 억울하다. 그런 왕좌는 <무릎과 무릎사이>가 차지해도 될 일이고, 아님 <애마부인> 시리즈가 가져가야 마땅할테니 말이다. 어찌됐던 이장호 감독은 1987년까지 나름의 걸작을 만들어내는 영화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이 작품 덕이다.
 

 
p.s.1 - DVD의 서플먼트로 수록된 극장 예고편이 나름 특별합니다. 당시 작품 촬영을 위해 감독과 출연진, 제작진들이 모두 모여 준비를 하는 모습을 찍어놨었거든요. 임권택 감독님의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극장 예고편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 졌는데, <어우동>의 예고편은 그런 촬영 준비 모습과 더불어 본편에서 빠진 시퀀스가 등장하기도 하는 등 예고편 자체가 재밌게 만들어져 있어요.
 
이장호 감독님 작품들의 예고편이 이런 독특한 맛이 있는데 <바보선언>이야 본편 만큼 포스 있고, <무릎과 무릎사이> 예고편 에는 안성기 님과 이보희 님이 쉴새없이 끈적한 목소리로 '무릎과..무릎사이'를 후크송처럼 주구장창 읊었죠. 사이사이에 '만져보고 싶어요..', '무릎의 향기..욕망..', '갖고 싶어요..' 같은 표현들을 끼워 넣음으로서 당시 관객들에게 제대로 mind-fuck 을 먹여줬었습니다. 지금 들으면 많이 웃기죠. 기분 우울할 때마다 한 번씩 보고 빵빵 터지는 <코만도> 국내 예고편의 포스만큼은 못 미치지만 말예요.
 
<어우동>의 극장 예고편은 위의 저런 요소들 외에 연출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감독님과 배우 분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오디오 인터뷰가 섞여 있습니다. 이 중 가장 압권은 안성기 님의 당시 목소리였지요. "..으하하하. 이장호 감독.. 그 사람 참 요새, 예전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에 만드는 게 그렇게 막 노출되고.."

 

 

p.s.2 - 이건 확인되지 않고 그냥 들은 이야기 입니다만 이 작품이 일본에 소개될 때는 'AV 물' 카테고리에 배치되어 있었다더군요. 확실히, 표현수위가 지금 봐도 나름 강렬하긴 합니다.

 

p.s.3 - <백년의 유산> 이라는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요즘 아침 드라마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악랄한 시어머니를 연기하는 배우 분이 이 작품에선 너무나 인자한 기생들의 맏언니를 맡고 있어 참 놀랍다 싶기도 합니다. 원래 이런 역할도 잘 하는 배우 분이긴 합니다만, 그 드라마 즐겨 보시는 분들은 <어우동> 에서 향지를 연기한 '박원숙' 님은 적응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p.s.4 - 개인적으로 이장호 감독님에 관한 인터뷰를 찾아보면서 참 싫었던 것은, <어우동>에 관한 이 분의 모호한 입장입니다. <월간조선> 2011년 1월호에서의 인터뷰를 보고 있으면 이 작품에 관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정확히 내 영화를 집어낸 사람은 없어요. 예를 들면 <어우동>, <무릎과 무릎사이>에 대해서는 평 자체를 못 받았어요. 마치 에로물처럼 취급하더군요..', <키노>에서 이뤄진 97년경의 인터뷰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기도 하던데, 2012년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특별전 개최로 인터뷰를 가졌을 때는 이 작품에 관해서 그냥 '<어우동>을 만들 때는 정말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돈 독이 올랐었지.' 라고 얘기하며 이 작품을 '그냥 에로영화'로 규정해 버립니다.
 
이게 참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힘이 빠져요. 싫으면 싫다고 얘길 하든가, 이거도 아니고 저거도 아니고.. 자신의 작품을 집어낸 사람이 없다고 그래놓고 인터뷰만 보고 있으면 감독님 본인이 본인 작품을 집어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러길 포기한 것 같아서 말이죠. 재평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해 만든 그냥 에로영화' 라고 별 거 아닌 것처럼 얘기해 버리면 어떡하냐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언론플레이 잘 하는 것 같아서 '이장호 감독님 답다' 싶습니다만. 뭐, 굳이 감독 생각이 어쨌든 간에 제가 보고 좋으면 될 일이지만 그 작품 만든 사람까지 직접 나서서 별 거 아닌 것처럼 얘기해 버리면 그게 그렇게 사람 기운 빠지게 만드는 부분이 좀 있는 것 같아요.
 
p.s.5 - 이장호 감독님은 조선시대의 가장 유명한 두 기생 중 한 명인 어우동을 다뤘습니다. 그리고 1년 뒤, 감독님의 제자이자 그와 함께 80년대 한국영화의 흥행가도를 이끌었던 배창호 감독님도 또 다른 기생 한 사람을 다루게 됩니다.
 
 

Pt.2 에서 뵙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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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박스 셋트 - 거울, 이반의 어린 시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 알아두셔야 할 게, 이 끄적임을 읽으시다 보면 거의 끝부분에서 실제 사람의 시신이 담긴 기록 필름 쇼트가 있습니다. 예. 맞아요. 제가 그걸 또 캡쳐를 해 놨어요. 나쁜 놈이죠. 심하게 잔인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실제 사람이 죽은 거니까 혹시 거부감 있으신 분들은 독일 시퀀스 운운하는 장면이 나오면 스크롤 바를 빨리 내리시라고 적어놓습니다. ...그냥 타르코프스키 감독도 하드코어한 면이 있다면서 누명 한 번 씌어보고 싶었어요. *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반은

누가 심었는지도 모를 버드나무가 자라 있었던

그 강줄기를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그 누구도 왜 이 나무가 강 위에 둥둥 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이것이 이반의 버드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전쟁에서 죽어서 우의를 관뚜껑마냥 덮어쓴 채,

이반이 버드나무 아래 그늘로 돌아왔다

 

이반의 버드나무

이반의 버드나무

하얀 배를 닮은 그것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다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주연: 니콜라이 부를라이예프, 발렌틴 주브코프, 니콜라이 그린코, 예브게니 자리코프, 스테판 크릴로프, 발렌티나 말야비나,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블라디미르 마렌코프

음악: 바야체슬라프 오프치닌코프

촬영: 바딤 유소브

18세 관람가 / Black & White / 95분

원제: Ивано детство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 버리는 경험을 꽤 민망하게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사람이다. 이전에 <솔라리스>와 <스토커>를 본 상태였고, 그 다음이 <희생> 이었다. 이 작품을 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초등학생 때 처음 그 작품의 VHS 커버를 보고는 관심이 가서 대여해보려 했지만 당시에 그 작품의 관람 등급이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였다. 우일 비디오에서 발매된 그 VHS는 내가 처음 비디오 대여점에서 발견했을 때도 포장이 뜯기지 않은 상태였는데, 당시에는 보지 못했고 그 곳 주인이 15세에 근접한 나이가 되면 대여를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 줬다. 그리고 14세가 되던 해인 2002년에 마침내 그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작품이 한국에 개봉했을 때가 95년이었는데 7년 동안 대여 해 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게 희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문으로 들어왔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을 본다는 생각에 흥분했던 당시의 홍준호는 작품이 진행된지 50여분이 넘어 스르르륵 잠들고 말았다. 지루해서 그 고통으로 몸을 배배 꼬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르르륵.. 그렇게.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나는 그와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작품을 볼 때 매혹적인 영상에 눈길이 가는 내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선사하는 영상미학은 단숨에 매혹 될 수 있을만큼 강렬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선보이는 모습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 가령 <희생>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긴 롱테이크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어떻게 보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수다 장면들에 매혹된 듯한 그런 상황인데,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은 날 한 번도 잠들게 만든 적이 없는데 왜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날 꿈꾸게 하고', 꼭 영화가 다 끝나고 난 뒤에 꿈에서 깨게 만들었던가? 사실 지금이야 왕빙, 라브 디아즈 감독 같은 영화인들이 있으니 '아. 타르코프스키는 그 감독들에 비하면 마이클 베이구나.' 하면서 느끼지만 어쨌든 그 때는 그랬다.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내겐 너무 거대한 생각이었고, 그냥 한 편의 작품이라도 잠들지 않을 정도의 깊은 공명을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데뷔작으로 가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반의 어린 시절>의 도입부는 <희생> 등의 작품보다 시각적으로 더 강렬하게 감상자를 사로 잡는다. 사실 강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작품이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 장르의 작품이고 주인공이 어린아이라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감독의 작품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어떤 자극의 정서가 존재한다. 그것이 은유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어머니. 뻐꾸기가 있어요."


작품의 첫 시작에서 ,이반은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바닷가 지대에서 어머니가 떠다주는 물을 마신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지내던 이반은 어떤 소리와 어머니의 시선 하나로 산산조각 나버린다. 악몽이 침범하는 것처럼 카메라가 갑작스럽고 급격하게 줌 아웃하며 이반을 깨운다. 과거를 회상하는 꿈이었던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에 관해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그것이 섬뜩하든 아름답든 간에 기본적으로 '차분함' 이 연상되는 것인데, 도입부 시퀀스는 그 기본적인 선입견을 날려버릴 정도로 상당히 자극적인 감흥을 던져준다.


정말 가히 ' 아, 씨발 꿈' 이라 할만하다.*

 

이건 사실 카메라 움직임과 배경의 전환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까 전만 해도 러시아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엘프같았던 꼬마가 갑자기 황폐해진 눈동자와 검댕이 잔뜩 묻은 얼굴을 한 채 돌아다니니 당시 자국의 관객들은 어떤 감흥을 느꼈을까. 확실한 것은 당시 정부는 <이반의 어린 시절>을 제작하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방식을 굉장히 싫어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창 작품이 촬영되고 있을 때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서 줄거리가 끊기지 말고 진행되어야 하며, 줄거리를 비롯해서 작품의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어져야 한다고 항의했다. 말이 항의인 것이지, 영화 만들겠다는 데 정부가 간섭하고 통제 하겠다는 것도 웃기지만 단 한 순간의 은유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단 한 순간의 '다른 생각'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런 항의전화는 작품 촬영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됐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빌어먹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도입부를 포함하여 작품의 전반부에서 관객이 목도하게 되는 것은 과거와 달리 굉장히 날이 서 있는 듯한 이반과 젊은 중위인 갈제프의 만남이다. 이반은 혼자서 독일군의 총격을 피해 드네프르 강가를 헤엄쳐 왔다. 그래서 처음엔 어떻게 죽지 않고 헤엄쳐 왔는지를 궁금해하던 갈제프는 이반을 심문하려고 한다. 그러나 곧 소년이 러시아 부대의 척후병으로 활동해 왔다는 것을 알고 굉장히 놀란다. 왜 이런 아이까지 전쟁에 개입해야만 하는 것인가. 안쓰러움과 동정심이 느껴진 그는 그라즈노프 대령이 있는 군대에게 전달해 줄 비밀 암호를 적어 내려나가는 이반을 병사가 아닌 '소년'으로 대접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이반 역시 잠시 진심을 느꼈는지 경계심을 거두고 순순히 그의 배려에 응하고, 곧 잠이 든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꾼다.

 

들리는 말로 러시아 정부는 이런 식의 전개와 영화화된 작품의 최종 결과물을 보고 많이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명확하지 않은' 전개방식도 그렇거니와, 그들은 전쟁 승리와 혁명 (시도 때도 없이 혁명이다.) 을 위해 겁없이 전장으로 뛰어드는 소년 전쟁 영웅의 캐릭터가 등장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화된 작품의 초안 시나리오가 실제로 그런 식의 전개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그런 입장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 작품에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겁없이 뛰어드는 소년 병사가 등장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뭔가 그들의 입맛에 맞게 확실하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감독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최고의 영화인 중 한 명이자 인재였지만,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와 체질적으로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아무리 스탈린이 죽고 난 뒤에 조금이나마 사회 분위기를 완화한 상태일지라도 말이다. 

 

 

블라디미르 보고몰로프의 단편소설인 <이반>을 원작으로 한 <이반의 어린 시절>은 원래 제작사인 모스필름 측에서 의뢰한 감독이 한 사람 있었다. 바로 에두아르도 아발로프 감독. 그러나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 신통치 않았나보다. 제작은 중단되었고, 모스필름 측은 그가 찍어뒀던 필름들을 폐기하고 1년간 영화화를 중단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그렇게 누군가가 만들다 만 결과물을 대신 이어받는 식으로 시작됐던 것이었다. 데뷔작부터 온전하게 자신의 의사와 창작적 의도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않은 상태로부터 시작한 것이, 그로 하여금 더 기를 쓰고 자신의 스타일을 처음부터 확립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감독은 의외로 블라디미르 보고몰로프의 소설이 가지는 몇몇 요소들에 매혹되어 있었다. 어린아이가 주인공이라는 점과  어떤 극적전개 없이 마치 냉철하게 보고서를 작성하듯 사건을 서술 하는 점, 그리고 이 아이가 죽음을 맞이할 때도 위치가 추적되어 보고 된다는 설정이 그랬다. 하지만 매혹만 되어 있을 뿐, 소설의 전개방식과 중점요소들을 그대로 영화로 옮기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감독에게 있어 영화는 '정서적인 연결과 시적 서정성'의 집결체였기 때문이다. 감독은 작품을 촬영할 때 제작진들이 소설을 철저하게 고증해서 만들어 놓은 사실적인 프로덕션 디자인들을 보고는 아무런 영화적 아이디어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감독은 모스필름 측에서 준 시나리오를 자신의 방식으로 수정하기 시작한다. 과연 '전쟁'과 '꿈'은 어울리는가? 감독은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이야기의 정서적 연결과 시적인 서정성의 합일을 위해서 과감하게 두 가지 요소를 결합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직접 현실의 잔혹함과는 또 다른 방식의 잔혹함을 목도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웃기지 마! 지금 애, 어른이 어디있어!? 전쟁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아!

나 되게 쓸모 있는 사람이야! 뭐든지 잘 할 수 있다고!"

 

작품을 처음 본 지도 꽤 됐고 (그 때는 러시코에서 출시된 DVD를 통해서 봤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된 DVD로 다시 본 것도 꽤 오래 되어서 이 대사가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흐름 상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훌륭하게 척후병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이반은 포상을 기대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군사학교로 가는 게 좋겠다는 '어른들'의 대답이다. 이쯤 되면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겠지만 이반은 전쟁고아다. 그리고 이 소년을 척후병으로 보낸 군인들은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군사학교로 보내는 것이 그나마 나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반은 끝까지 자신은 쓸모가 있으니까 계속 이용하라고 어필한다. '이용' 이라는 말.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용이라는 단어만큼 편하면서도 무서운 말은 없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순수한 분노의 의지로 이용하라고 외치는 말처럼 이용하기 좋은 수단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써 놓은 이반의 말은 어른이 듣기에도 꽤나 매섭다.

 

실은 위의 대사와 장면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반이 또 꿈을 꾸는 장면이 있다. 총 네 번 등장하는 작품의 꿈에서 두 번째 꿈을 꾼 것인데, 이번에는 이반과 어머니가 우물에 물 뜨러 와서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반에게 우물이 깊으면 낮에도 별이 보인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정말로 우물물에 무언가가 빛을 뿜어내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반사인 것 같기에는 우물에 비친 대상이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호기심이 생긴 이반은 우물 밑으로 내려가서 반짝이는 뭔가를 잡으려 한다. 바로 그 때 위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이반의 시야에서 어머니가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작품이 물의 이미지를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물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에서 물의 이미지는 자주 출현했다. 그 중에서도 <거울>이나 <스토커>에서 보여준 물의 이미지는 그의 작품들에서 가장 돋보이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솔라리스>나 <희생>에서의 물은 생물을 죽음에서 삶으로 이끌어내는 지루하게 감상한 사람이라도 그 장면들은 아예 포스터로 만들고 싶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지. 금승훈 감독의 글 중 하나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하여' 에 적힌 일화를 조금 인용하자면, 감독은 시베리아에서 지질학을 공부할 때 동시에 해저 탐사반에 자원해서 심해 탐사를 했던 경력이 있다고 한다. 아마 그의 작품세계에서 물이 자주 연관이 되는 건 감독 본인의 이런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심해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해저의 물결을 카메라로 담아낼 수 있는지에 관한 가능성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 물의 이미지가 가장 직접적으로 많이 이용되는 것이 바로 <이반의 어린 시절> 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작품에서 이용되는 물의 이미지는 죽음을 삶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반이 가장 생기발랄했던 시절에 어김없이 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삶의 기억들은 현재의 자신이 산 송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원인이 된다. 작품은 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속성들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가령 음식물 쓰레기가 물과 어울렸을 때 더 심하게 풍기는 냄새, 물에 잠긴 사람의 시체가 보여주는 흉측한 몰골과 썩은 냄새. 그 냄새... 물에 불어버린 뭔가를 만질 때 느껴지는 물컹함과 파편화되는 요소들 같은 것들 말이다. 이반이 꾸는 두 번째 꿈에서 총에 맞은 어머니는 우물 옆에 쓰러져 있고, 그런 그녀의 몸에 물이 세차게 끼얹어진다. 죽은 사람에 몸에 물을 끼얹는 것은 더 불어터지고 썩은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과거의 회상이기는 하지만, 꿈으로 표현된 이 시퀀스를 통해서 과연 정말로 이반의 어머니가 이런 방식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물이 사람의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어머니의 죽음은 이반에게 강렬한 트라우마로 남는다. 물은 몸의 기억이다. 축축히 젖어드는 물방울이 예전의 일을 기억하게 만든다. 이후로 작품은 꿈에서 깨어난 이반의 단독 쇼트가 등장할 때마다 끊임없이 조그맣게 낙숫물 소리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것은 작품 속 대부분의 장면에서 굉장히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반의 모습을 납득 시키는데 큰 효과를 발휘한다.

 

이렇듯 내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감탄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자연적 요소들을 마치 영화 속 미술처럼 이용하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들에 있다. 그리고 동시에 놀라운 로케이션 촬영 능력도 있는데, 이는 자연적 순간들을 잘 이용하는 데이비드 린이나 홍상수 감독같은 사람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마치 헐리우드에 있는 ILM 같은 특수효과 회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구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상력을 영상으로 구현한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서다. <스토커>에서 천장 뚫린 방에서 비가 쏟아지는 장면 같은 것. 아니면 <노스탤지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도 될 것 같다. 주인공이 집 앞에 주저 앉아 있는데 그 뒤로 교회인지 사원인지 모를 옛날 건축물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들 말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이제 막 컴퓨터 그래픽이 그 질감을 조금씩 극복하고 초보적으로나마 이용되고 있을 때였고, 광학 특수효과가 애니매트로닉스와 조합하여 구식 특수효과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지금의 눈으로 냉정하게 따진다면 그 당시의 특수효과 합성 쇼트는 뭘 해도 티가 날 때였다. 단지 티가 나도 당시 시대에 이뤄낼 수 있는 성취에 감탄한 것도 있고, 또 예의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봤을 뿐이지.   

 

그런데 이 감독은 <이반의 어린 시절>만 한정지어도 그 당시의 헐리우드가 '평면적으로' 구현해왔던 영화적 세계 (헐리우드의 매트 아티스트들이 감쪽같이 그림을 그려놨지만 어쩔 수 없이 실제 세트와 따로 노는 모습을 종종 보지 않았던가.) 를 능가해 버리고, 스크린을 캔버스 삼아 실재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려낸다. 어떤 '공허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이 미학적으로 수준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과 더불어 감독과 여러편을 함께 작업한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의 공로가 크기도 하고. 이런 아름다움은 주로 이반의 이야기가 주가 되는 장면들에서 빛을 발하는데, 도입부의 첫번째 꿈에서 나무를 만지작거리던 이반의 얼굴을 클로즈 업 한 상태에서 카메라가 이동하는 장면이 있다. 당연히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있기 때문에 딱히 뭔가 놀라운 것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이제 보니 그 장면은 이반이 하늘을 날고 있음을 표현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뭔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늘을 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감독은 꿈이라는 것을 표현해주기 위해 별 설명도 없이 능청스럽게 이 소년을 날게 만든다. 그러나 '난다'는 행위에 중심을 두지 않고,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더 많이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시각 기술 요소가 관객에게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정서적 공허함의 여지를 애초에 느끼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외에는 도대체 저런 배경을 어디서 찾아냈을까 하는 로케이션의 대단함도 있다. 가령 작품 속에서는 갈제프 중위와 그라즈노프 대령과 더불어 이반을 보살펴 주는 크롤린 대위라는 인물이 나온다. 작품은 주로 이반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가도 간간히 이반을 둘러싼 주위의 어른들의 시점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드물게 이반이라는 아이의 존재와 정서가 범접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루는 독립적인 시퀀스를 하나 보여준다. 바로 크롤린 대위의 사랑 시퀀스인데, 이야기 진행상으로 보자면 이반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잠시 다른 데로 튀는 셈이니 그닥 좋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작품과 별개로 시퀀스 자체는 굉장히 강렬하다. 그것이 잠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헷갈리게 만들었다는 것은 문제겠지만,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자작나무 숲의 전경은 감탄을 불러 일으키게 만든다. 흑백으로 촬영됐기 때문인지 하얗고 빼빼 마른 자작나무숲이 유독 창백하게 느껴져 죽음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것이다. 갈제프 중위는 마샤라는 이름의 간호장교와 숲에서 밀고 당기기를 한다. 아. 참고로 여기서 밀고 당긴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삶과 죽음이 쉽게 오고 가는 전쟁터에서 이 남녀는 감독의 작품치고는 드물게 커플이라면 한 번 쯤 따라 해 보고 싶은 장면을 연출한다. 그것은 바로 참호 위에서 키스 하기. 크롤린 대위의 감정은 이미 마샤에게 향해있고, 그녀는 남자의 명령인지 구애인지 모를 이 행위를 받아 들여야 하는지에 관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녀는 결국 체념한듯 그의 키스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작품의 카메라가 크롤린과 마샤의 키스 장면을 담아내는 방식이 아주 독특하다. 본디 참호라는 것은 총알을 피해 사람이 걸어다녀야 하므로 깊게 파서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참호의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가 집중하는 것은 바닥을 볼 수 없기에 더욱 막연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참호의 깊이다. 그리고 얼만큼 깊은지 모를 참호 위에서 남녀가 키스를 하고 있다. 작품은 결론적으로 참호를 죽은 사람을 묻기 위해 파는 무덤처럼 촬영해내고 있다. 만약 키스를 하고 있는 와중에 이들이 총을 맞는다면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참호는 곧 그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작품은 여기서 전쟁에 관한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것이 오히려 외면적으로는 얌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데,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다루는 전쟁이라는 것은 어떤 요소로도 중화되거나 혹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것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동원될지라도 말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아무리 고차원적인 사상을 보여준들 무엇이든 당대의 상황에 맞게 끼워맞춰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감독은 자신의 저서인 <봉인된 시간>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식의 장면 몇몇을 연출했음을 밝히고 있다. 정확히 어떤 장면들인지는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작품의 이 시퀀스는 어떠한 타의적 해석을 거부시킨다. 사랑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작품들이 연상시키는 고요하고, 어떻게 보면 얌전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감독 본인은 꽤 담대했는지도 모른다.

 

 

* 인상적인 순간 하나 더. 이반은 군사학교로 보내려는 그라즈노프 대령의 결정에 반발해서, 홀로 부대를 떠나 적진을 정찰하러 떠난다. 가는 길에 이반은 폐허가 된 집에서 사는 정신나간 노인 한 사람을 보게 된다. 실제 폐허를 찾은 것인지, 아니면 프로덕션 디자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집의 전체적인 형태가 사라지고 아궁이와 굴뚝, 문만 남은 모습이 굉장히 기괴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리고 이런 프로덕션 디자인은 극도의 사실성을 추구했다는 보고몰로프의 소설과는 반대의 지점을 지향하고 있다. 어쨌든 작품 속에서 노인은 그 곳에서 마치 집이 정상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반은 그 노인에게 말을 걸다 그가 정신이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반은 군인들에 의해 다시 돌아가게 됐을 때 그를 위해 음식들을 놔 두고 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반을 데리러 온 군인들은 노인을 노망 났다고 취급하거나,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인의 모습에서 비극성을 느끼고 그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은 이반 뿐이다. 차가 떠난 뒤, 노인이 한 마디 한다. 오히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 미쳐버린 노인이야말로 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도 지극히 정상적이다.


"신이시여.. 이 전쟁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입니까..." *

 


그리고 그런 담대함은 완성본을 본 당대의 정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말한 바 있는, 소년을 용맹하게 적진에 뛰어들게 하는 영웅으로 그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은 후반부에 이르러 아예 이반을 정신착란에 시달리고 있는 소년으로 만들어 버린다. 억압하는 사회에서 예술가는 극단의 위치에 서게 된다. 동조하거나, 아니면 저항하거나. 얽매이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첫 시작부터 명확했다. 그는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하나의 회화를 보여준다. 이반이 다시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자 갈제프 중위는 그림책을 하나 보여준다. 그리고 이 중 이반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독일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묵시록의 네 기사들' 이다. 그림 속에서 두 번째 기사가 전쟁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종말론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작품 속에서 '적국'이 되어야 할 독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경계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반은 베를린에 잠입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독일놈들은 잔혹하고 무식해서 이런 판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면서 광장에서 책을 모조리 불태우는 것을 봤다고 말한다. 그러자 갈제프 중위는 이반에게 뒤러는 독일인이긴 하지만 500년전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물론 나치즘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이다. 아무리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저지른 죄과가 있을지언정, 그로 인해서 나치즘이 '유태인들에 대한 히틀러의 신의 한 수' 운운되며 납득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공산주의 시기의 러시아가 독일을 비판하고 자신들이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2차 세계대전 시기의 독일을 증오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당대의 러시아가 완벽한 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용맹한 소년 전쟁 영웅은 중위가 호신용으로 준 칼을 이용하여 혼자 있을 때 전쟁 놀이를 한다. 나름의 위악을 부리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관객이 알 수 있게 되는 부분은 이 소년이 얼마나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로 가득 차 있는가다. 마치 무성영화 시기를 보는 듯, 작품은 극한의 어둠 속에서 조명만으로 이반의 가족들이 그 날 몰살당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과거이자 환상의 일부를 보여준다. 이반은 그 날 이후로 우물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그 우물의 어두움 속에서 악몽을 마주하며, 그것에 매몰되어 살고 있다. 감독은 진심으로 그들을 동정한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입장보다도 예술가이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아무래도 데뷔작이라서 그런 것일까? 감독이 작품을 영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다소 직접적이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갈제프 중위가 독일의 나치당 본부에 진입했을 때, 작품은 실제 패전 직후의 독일의 모습을 담은 기록 필름을 삽입한다. 기록 필름의 삽입은 <거울> 에서도 이용됐던 적이 있는데, (러시아군이 겨울에 강을 건너는 장면이었다.) 그 작품에서의 영상은 감독과 제작진 측에서 처음 발굴하여 보여준다는 의의로라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의 기록 필름은 상당히 공포영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패전하여 자살하고 사살당한 인간들의 시신이 가감없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앞서 나오는 후반부의 시퀀스는 앞서 나왔던 상징적 이미지들이 선물세트처럼 총동원된다. 밤에 적진에 침투하기로 계획한 등장인물들은 조심스럽게 강을 건넌다. 감독과 제작진들은 당시 러시아에서 물에 잠겨버린 숲을 찾아내 그 곳에서 촬영했다. 마치 전쟁으로 '망가져버린 세상'을 상징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곳은 생명이 깃든 늪지도 아니고,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의 흑백영상 덕에 어둠만 가득한 죽어가는 숲이 되어버렸다. (초반부, 평화로운 시절의 이반이 지냈던 바닷가 주변의 숲과 닮았다.) 군인들은 이반의 잠입을 위해 길을 터 주고, 쉴새없이 날아드는 적진의 조명탄과 총탄들은 강물로 떨어져 가라앉는다. 물은 끈적하게 바닥 밑으로 가라앉은 조명탄 파편과 총탄의 기억을 간직할 것이다. 이 밤이 지나간 뒤, 살아남은 갈제프 중위의 얼굴에도 끔찍했던 전쟁의 기억이 새겨진다.

 

그리고 독일로 온 그는 빨치산으로 몰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이반의 마지막 사진을 보고 충격에 빠지게 된다. 앞으로 이어질 작품연보를 생각하면 독일 시퀀스는 사실 과장된 느낌이다. 이런 점을 보면 데뷔작답다 싶다. 직접적으로 보여줄 필요까지는 없었던 이반의 사형 장면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도 알고 보면 자비가 없다!) 굳이 연출해가며 잘린 목이 굴러가는 묘사까지 덧붙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시 정부를 향해 자긴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 한다면,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자 했다면 성공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가 대지를 탐구하는 지질학을 전공하고, 심해의 물결을 영상화하기 위해 고민했던 것. 그것을 영화적 목표로 삼았다면 독일 시퀀스는 어찌보면 사족이고 실패다. 폐허가 된 수용소의 빈 공간을 유려한 움직임으로 훑고 지나가는 바딤 유소프의 카메라는 끔찍하리만큼 아름답지만,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감독의 작품에 관해 칭찬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내게는 이반의 사형 장면이 두 번째 작품인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타타르족이 사람 죽이는 장면보다도 더 끔찍했다.

 

 

 * 되도않은 소리지만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는 많은 "우리가 국민들한테 뽑으라고 강요한 적 없어. 국민들이 우리한테 위임한거지. 그리고 지금 그들은 댓가를 치루고 있는거야." 란 말을 했다던 요제프 괴벨스의 불 탄 시신이 찬조출연 *

 

오히려 후에 만들어질 작품들의 연관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결말이다. 아무 일도 없던 과거의 시절, 놀이를 하던 이반은 아리따운 소녀를 보며 호감을 가지며, 곧 둘은 활기차게 뛰기 시작한다. 밀물과 썰물을 볼 수 있는 바닷가에서 촬영을 했는지, 그 덕분에 작품 속에서 이반은 마치 물 위를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반이 가지고 있는 몸의 기억 중 물이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런 물의 기억은 죽은 고목나무 안으로 들어가며 암전되어 버린다. 끔찍하고 끈적한 물의 기억이 송장같은 고목 속으로 들어가니 오히려 더 썩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수생도 가능한 나무 종이 있으니 저것이 일반화가 될 수는 없지만, 나무뿌리에게 생명으로 작용할 수 있는 물과의 관계를 동시에 죽음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은 시적인 심상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동시에 우리가 그에게 가장 감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서를 표현해내는 능력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변형의 가능성을 보고 각각 견디거나 흐르게 만든 시간이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 그것이 행복한 기억이든 끔찍한 기억이든간에. <이반의 어린 시절>은 어쩌면 데뷔작이기 때문에 가끔 덜컹거리기도 하지만, 어느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초장부터 완벽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든 명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되어 그랑프리를 석권한다. 그러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이 작품 이후로 4년간 침묵한다. 어떤 작품을 만들기 위해 4년의 시간이 걸렸다면 꽤나 길다. 당시 정부가 그를 고깝게 봐서 압력을 행사한 것도 있겠지만, 들리는 얘기로는 그 스스로가 자책하고,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여 시간을 그만큼 보냈다고도 하더라. 그래도 사람인데, 어떻게 누군가에게 영향받지 않고 이렇게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내나! 궁금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된 DVD의 북클릿에는 그런 궁금증을 풀어줄만한 재밌는 작품이 하나 있다. <봉인된 시간>에서도 언급된 것이지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시인인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시 한 편을 머리 속에서 영화화 했다고 써 놨다. 그리고 <거울>이나 <스토커> 같은 작품은 아예 직접적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 시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 정확히 보여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반의 어린 시절>을 만들 때 그 시가 영향을 줬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이 끄적임을 읽을 때 가장 위에서 본 것이 바로 그 시다. 이제는 안드레이의 말을 들을 수 없지만, '..a possible source of influence' 란 표현답게 연관의 가능성을 제시해 볼 수는 있겠다. 기억..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기억'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 하다못해 자신이 살지 못한 시대의 '묵시록의 네 기사'에 대한 기억, 혹은 차기작에서 등장하는 '삼위일체' 같은 성당벽화에도 기억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떤 특정 작품에 영향을 받든, 받지 않았든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서 '그런 기억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반은

누가 심었는지도 모를 버드나무가 자라 있었던

그 강줄기를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그 누구도 왜 이 나무가 강 위에 둥둥 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이것이 이반의 버드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전쟁에서 죽어서 우의를 관뚜껑마냥 덮어쓴 채,

이반이 버드나무 아래 그늘로 돌아왔다

 

이반의 버드나무

이반의 버드나무

하얀 배를 닮은 그것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다

 

 

이반의 버드나무 (Ivan's Willow)(1958)

(지은이: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

 

 

p.s.1 - "야, 이 자식아! 러시아는 91년까지 소련 연방이었다고! 너 신문도 안 보고 사냐!?" 는 말이 있을 수 있는데요, 예. 91년 당시 세 살이었으니 신문은 보지 않았습니다. 남들한테 개그 칠 때는 '소련'이란 표현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데 이상하게 여기서 끄적이려니 잘 안 되네요. 그래서 그냥 러시아로 표기했습니다. 근데 지금 하려는 이야기에서는 소련이란 표현을 쓰긴 써야겠네요. '러시아 카메라' 라고 하면 뭔가 어감이 잘 달라붙지가 않아서..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항공 촬영을 시도하다 당시 제작진 중 한 명이 추락사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장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도입부의 꿈 장면에서 보였던 버드 아이 뷰 쇼트를 찍다가 일이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정부에서 영화를 찍을 때 감독들에게 필히 80kg 가까이 하는 '소련제 카메라'로만 찍으라고 권고 했었대요. 그걸 사용해서 항공 촬영을 하다가 일이 난 것이지요. 뭔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이후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할 때도 정부가 '소련제 카메라'를 들고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베니스 영화제 풍경을 찍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하기 위해서 들고 가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네요. 어찌됐건 참 끔찍한 일입니다.


p.s.2 -  작품이 굳이 공포스러운 연출을 하지는 않지만 이반에게는 마리오 바바 감독님의 <블랙 사바스>에서 가장 살 떨리는 에피소드인 '물방울' 만큼 낙숫물 소리가 무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p.s.3 - 의외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님과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님은 촬영을 할 때마다 많이 다퉜다고 합니다. <이반의 어린 시절> 같은 경우에는 위에서 설명한 추락 사고 때문이기도 했는데, 이후 이 작품으로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님도 정부에 의해 징계를 받았다는 일화를 보면 그래도 뭔가 인정을 하니까 그렇게 협업을 지속했겠거니 싶습니다. 실제로도 이렇게 말을 했다더군요. "처음 찍어보는 사물을 이렇게 긴장감있고 황홀하게 찍은 사람은 타르코프스키 이외엔 없었다." 라고요.

 

p.s.4 - 이반이 혼자 전쟁 놀이를 하다 자신의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는 시퀀스의 결말은 마치 구해달라는 듯, 혼자서 종을 울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님의 작품에서 등장한 종! 뭔가 낯설지가 않죠? 개인적으로는 그 시퀀스에서 <안드레이 루블료프>에 대한 영감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이반을 연기한 배우인 니콜라이 부를라이예프 님이 이후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종 만드는 소년인 보리스카를 연기하게 되니 분명 연관성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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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트 H - 미니앨범 Fly High
인피니트 H (Infinite H) 노래 / 울림 엔터테인먼트(Woollim)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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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S

1. Victorious Way
2. Beautiful Girl (Featuring by Bumkey)
3. 니가 없을 때 (Featuring by Zion T.)
4. 못해 (Featuring by 개코 ('다이나믹 듀오'))
5. Fly High (Featuring by 베이비 소울)


1CD / 18:08 Mins  / 레이블: 울림 엔터테인먼트

 


'아이돌 유닛 음반에서 맡아보는 신선하고 자극적인 프라이머리 향'


- 자신들의 EP 앨범인 에 관해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무엇이냐는 E뉴스의 질문에 대해 인피니트 H의 듀오, 장동우와 이호원이 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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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해보려고 하니 선뜻 잘 되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EP 앨범 (사실 EP, 싱글 등으로 분류하기가 좀 애매해서 그냥 묶어서 불러본다.) 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개개인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이 정도 되는 음악을 도저히 싱글값을 지불하고 사기가 좀 그렇다든지.. 하여간 나는 그렇다. 이건 아마 음악적 문제보다는 돈에 얽매여있는 홍준호의 세속적인 구질구질함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20분도 채 안 되는 음악이 담긴 EP 앨범을 돈 주고 사라고 한다면 이건 팬심으로 사라고 해도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만든다. 몇 번 사 보고 나니 느낀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팬일지언정, 아무리 그 속에 담긴 음악의 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다고 할지언정, EP라도 20분 정도 되는 음악을 담은 앨범도 많은데 그 이하로 담으면 지갑 속에서 배추잎을 꺼낼 때 손을 부들부들 떨게 만든다. 잘 못 꺼내겠다는 이야기다. 하여간 그게 내 마음 속의 마지노선이구나 싶다.


이럴 때 새삼 디지털 음원의 장점을 체감하게 된다. 특히 아이돌 가수들의 경우에는 CD로 구매할 때 화려한 화보집을 동봉해서 소장가치를 높이겠다는 야망을 세우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브로마이드, 스티커같이 자잘하고 외적인 것들에만 힘을 주는 듯하여 그닥 구매욕구가 샘솟지는 않는다. 정규앨범이라면 모를까. EP 앨범으로 보고 있으면 어째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생각만 드는 것이다. 냉정히 보면 스티커, 포토 카드 같은 것들은 아무 데도 쓸데없는 장식품이니까. 그러다 보니 음원만 적절하게 구매할 수 있는 디지털 시장이 이럴 때는 쓸모가 있다고 느껴진다.


그 중 인피니트에서 새로운 EP가 등장했다. 한 팀으로서 발표한 것이 아닌 두 명의 멤버로 구성된 인피니트 H란 이름의 유닛 그룹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미 정규앨범의 트랙 리스트에도 이름이 있었고 또 아이돌 중에서 개인적으로 인피니트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콘서트에까지 가보지는 못했는데, 가끔 갔다 왔다는 팬들의 후기를 구경 삼아 읽다보면 인피니트 H의 활동은 리더인 김성규의 솔로 앨범과 더불어 꽤 예전부터 미리 계획되고 선을 보이고 있었던 것 같다.


가끔 팀 활동을 하는 아이돌들이 한 명, 혹은 두 명 정도로 뭉쳐서 개별 활동을 하는 것이 본인들의 소망인지, 아니면 소속사 측에서 이벤트성을 기획하는 것인지에 관해 궁금할 때가 있다. 뭐,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볼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만 결과물이 꼭 다 좋다거나, 혹은 나쁘기만한 것은 아니라서다. 가령 개인적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좋은 음악을 만든다는 생각은 별로 해 본 적 없는 빅뱅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멤버들이 솔로나 듀오로 활동할 때 훨씬 더 재밌고 기억에 남을만한 앨범들을 많이 내놓았다. (태양의 1집인 나 GD & TOP 1집은 정말 듣는 재미가 있다. 가사가 좀 심하게 유치하다만 승리의 1집인 도 편곡만큼은 귀 기울일만 했고.) 인피니트의 경우에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작년에 복귀하면서 발표한 EP 앨범인 를 듣고 조금 걱정이 됐지만, 개인적으로 보기에 인피니트는 한국에서 몇 년 뒤에 들어도 기억에 남을 아이돌 음악을 만들어내고 또 부르는 보이 밴드다. 몇 년씩 활동해도 자신들이 부르는 음악의 색깔이 뭔지 파악조차 못하는 아이돌들이 만만찮게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아예 첫 등장부터 우리는 이런 음악을 한다는 것을 선전포고 하듯 등장한 인피니트는 그만큼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그들에게 곡을 주는 작곡팀인 스윗튠의 공로가 굉장히 크다. 하지만 그만큼 다른 음악 장르에 관한 관심과 탐구를 대외적으로 적극 어필하고 (남우현의 라틴 댄스가 그렇다. 나는 보기 좋던데 그거 금지 영상이라데.), 아예 '군무돌' 이라는 칭찬에 걸맞게 섬뜩할 정도로 안무를 딱딱 들어맞게 추는 멤버들 개인의 노력도 존재한다. 


이 중 는 인피니트 내에서 랩과 보컬을 맡고 있고 때로는 안무 코디네이터도 하는 이호원과 장동우의 듀오 앨범이다. 그러나 김성규의 솔로 앨범인 와는 반대로 이 앨범은 걱정이 됐다. 다름아닌 굉장히 화려한 피처링 아티스트들의 명단 때문이다. 타블로의 <열꽃>, 혹은 GD의 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긴 범키라든가,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 그리고 자이언 T. 게다가 앨범 제작은 DJ 프라이머리. 힙합이나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음악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분명 어디서 목소리를 들었거나 음악을 들어본 사람들의 모임이다. 걱정되는 것은 그들이 철저히 해당 아티스트를 위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영역 이상을 넘지 않을 것인가, 아님 본의 아니게 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이라면 자기 색깔이 있는 법이라, 본 노래를 부르는 아티스트가 자신을 맘껏 이용하라고 와 준 사람들을 '위해서' 노래를 한다면 앨범의 정체성이 모호해진다. 특히 이것이 눈으로 보는 영화가 아니라 귀로 듣는 음악이라면 더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인피니트 H는 자신의 첫 EP를 다소 삐걱대면서 출발하고 있다. 어쩌면 미리 예측을 해야 했던 것일까? E뉴스에서 인터뷰를 했다길래 읽어보다가 위에서 끄적인 '아이돌 유닛 음반에서 맡아보는 신선하고 자극적인 프라이머리 향' 이라는 표현을 봤을 때 미리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솔직히 개별 트랙에 관해 뭐라 말하기가 참 난감하다. 실질적으로 장동우와 이호원의 색깔이 묻어나오는 트랙은 1번 트랙인 'Victorious Way'와 3번 트랙인 '니가 없을 때' 정도이기 때문이다. 5번 트랙인 'Fly High'도 여성 보컬인 베이비 소울의 느낌이 확연하게 드는 덕에 장동우와 이호원의 목소리를 잘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곡 자체가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 그냥 어느 누구한테 줬어도 질적인 면에서 그만큼 뽑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현재 활동하고 있는 보이 밴드에 대한 자부심, 불러만 주면 어디든 가서 팬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가사는 어느 가수에게 대입시켜도 무방하다. 4번 트랙인 '못해'는 앨범을 통틀어 가장 처참하다. 정말 완벽하게 주객전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의 곡이나 다름없고, 인피니트 H는 아무런 빛도 내지 못한다. 일말의 빛도 말이다. 김성규의 솔로 앨범인 가 마냥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줬던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정말 '못해'를 들을 때는 PC에서 듣고 있던 플레이어를 끄고 싶었다. 어찌됐건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한 것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걸 제외하면 나머지 두 트랙은 들을만한 편이다. 다섯 곡 뿐이면서 뒤로 갈수록 실망감을 주는 것과 반대로 1번 트랙인 'Victorious Way' 는 약간 밋밋할지라도 앞으로 진행될 앨범에 관해 꽤 기대를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모든 음악에서도 그렇지만, 내가 이쪽 음악에 대한 소양이 깊지 않지만 이미 IZM 같은 사이트에서는 턴테이블 스크래칭마저도 DJ 웨건의 것이라는 따끔한 지적을 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적어도 장동우와 이호원은 그 스크래칭에 짓눌려 욕을 얻어먹을 정도로 못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 트랙만큼은 말이다. 이미 아이돌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듣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이 두 사람은 힙합 장르의 음악이라고 해놓고 막상 들으면 도대체 무슨 장르인지 모를 정도로 발만 잠시 담궜다가 빼거나 하지는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스크래칭 효과가 주는 아우라가 정말 절대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들으면 누자베스의 'Battlecry'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돌의 컨셉이야 사랑에 관한 이야기, 혹은 스스로 전사가 되는 이야기로 나눠지곤 하지만 앨범에서 후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곡은 이 1번 트랙 하나 뿐이기 때문에 단연 돋보인다.


3번 트랙인 '니가 없을 때'는 어차피 잘 불렀어야 했을 곡이었다. 찾아보니 2012년 8월에 했던 인피니트의 콘서트 '그 해 여름'에서 이미 선보였기 때문이다. 제일 처음 선보였던 것 같은데, 그만큼 열심히 했어야 할 것이다. 의외가 있다면 가사를 읽어볼 때 다소 강한 톤의 랩이 나올 줄 알았는데 곡 자체를 다소 무심하게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인피니트로 활동할 때 문득 이 '래퍼 라인'이 등장하는 순간은 언제나 강렬했다는 기억이 있다. 그걸 생각하면 다소 의외다. 그래서 든 생각이, 어쩌면 피처링 아티스트들의 면면이 이렇게 화려한 건 인피니트로서 활동할 때의 기시감과 더불어 앨범에 대한 완성도에 더 신경을 쓰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의도는 좋고, 어차피 그리 해도 팬들은 앨범을 사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독이 되었다. 굳이 랩이 현란하고 격렬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히 귀에 착착 감길 정도로 좋다고는 생각치 않으나, 인피니트 H 본인들이 자신들의 음악성에 관해서 다소 확신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의 랩에 관해서는 사실 팬들도 일관되게 옹호를 하지 못하고 있기도 한데, 특히 이호원의 랩 실력에 관해서 다소 그런 부분들이 존재한다. 만약 피처링 아티스트들이 없는 상태에서 프라이머리 만이 제작을 맡고, 장동우와 이호원의 목소리로만 채워서 앨범이 나왔다면 아마 앨범에 대한 평가는 더 나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앨범의 질이 나빠질 지언정 오히려 그런 방식을 더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하게 나빠질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협업이라고 해도 해당 아티스트가 작사, 작곡에 함께 관여하는 경우도 많은데 인피니트 H의 경우에는 모든 곡을 받아서 작곡했다. 인피니트일 때는 스윗튠이 곡을 주더라도 적어도 곡 자체에 관한 작사나 랩 작사에 관해서는 멤버들의 의사가 반영됐던 것으로 아는데, 여기서는 아닌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 곡에 대한 장동우, 이호원의 해석은 꽤 재밌다. 그리고 여기서 이호원의 보컬은 <응답하라 1997>에서 보여준 연기 덕이었는지 팀 내의 '상남자'라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애수가 느껴지는 정서를 어색함없이 전달해주고 있다. '못해' 에서와는 다르다. 확실히 이호원은 보컬이 매력적이다. 랩은.. 음.. 그냥 노력한다는 점에서 좋게 들어줄만한 점이 많고.

 

음악을 '눈으로 봐야 할 때'의 딜레마라는 게 다시금 느껴지는 것도 오랜만이다. 인피니트 H 는 방송에서 'Special Girl'과 '니가 없을 때' 를 라이브로 불렀고, (아. 물론 MR은 깔고.) 쇼케이스에서는 전곡을 모두 직접 부르고 피처링도 가능하면 모두 소화했다. ...'못해'는 빼고. 일곱명이 보여준 조화로운 팀워크가 두명이 되고 안무의 활용도 그리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빛이 바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의외로 춤과 어우러지는 그들의 랩과 보컬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앨범으로 들을 때는 별로였던 'Special Girl' 도 괜찮게 보였으니 말이다. 그것이 귀로 들어야 하는 앨범으로 가서 매력이 반감하게 되는 건 결국 음악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무대를 보고 있으면 이 듀오가 분명 안무와 랩, 보컬로 곡을 나름대로 자신에게 체화하고 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더하다. 이번 앨범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안전한 길로 가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아. 장동우의 랩 작사에 관해서 뭔가 끄적이려 했는데 깜빡했네. 인피니트가 'Before The Dawn' 을 발표했을 때 나는 그 제목이 상당히 뭔가 있어 보인다고 느껴졌다. 나름의 철학이 있다고 생각했달까. 이것은 사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에서 하비 / 투 페이스가 "동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했습니다." 라는 멋있는 대사를 날려줬던 덕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내 예상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누가 말했더라.. "예! 제목 'Before The Dawn' 의 의미는, 새벽이 오기 전에 그녀를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아. 맞다. 얘네들 아이돌이었지. 그런 걸 감안하고 보니 눈에 띄었던 것이 장동우의 랩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랩 작사는 큰 의미도 없는 외래어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 같지도 않고, 굳이 라임 맞추기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장동우는 기껏해야 자기네 팀 이름 넣고 활동 종료한지 그리 오래 된 것 같지도 않은데 다시 돌아왔다, 아니면 지 자랑인 홍보성 랩 (그것도 한두번 들을 때가 좋지, 계속 들으면..) 대신 원곡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랩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꽤 듣고 읽어보는 재미가 있다. 가령 'Crying' 이란 곡에 나오는 '일상을 꿈의 연속으로 안겨 줬던 / 사진속 갇힌 미소만이 반겨 / 유리심장 깨질까 포장해 감싸고 / 이세상 별빛과 어우러진 너를 보면 / 무한히 지연된 아픔에 얼룩 절대 지우지 못해 절대 비우지 못해' 라든가, '추격자'에 나오는 '잊어버려 이별의 말 앞에 멈춰가는 가슴 치고 무릎 꿇어본 나 / 꺼져버려 썩은 장작 같은 슬픔에 타버린 날 끌어본다'  같은 랩들. 의외로 시적인 감흥이 존재한다. 랩의 비중은 인피니트의 곡에서 그리 많지 않지만, 오히려 이것이 상대적으로 빈약할 수 밖에 없는 아이돌 곡의 기본 토대에 미장 작업을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이번 앨범이 괘씸한 것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이돌 중에서 스스로 이번 앨범에 자신들의 정체성이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한 예도 없던 것 같다. 분명히 자신들의 음악적 세계관이 담겨 있다고 거짓말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고. '프라이머리 향'. 인피니트 H는 욕을 먹든 안 먹든 그를 안전하게 따라 왔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그리고 EP 앨범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이번 것은 분명 본전은 뽑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 솔직함이 역설적으로 다음 활동에 대한 기대를 하게 만든다. 여기 이호원의 말이 있다.


"인피니트H가 이벤트성으로 나왔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절대 아니에요. 길게 보고 나왔거든요. 센 음악을 기대했는데 실망했다는 분도 있으시던데, 이번에 우리가 다 보여준 게 아니란 걸 알아주세요. 이제야 막 첫 단추를 끼운 거죠. 앞으로 보여줄 게 한참 더 많이 남아있어요. 정말로."


나는 솔직히 인피니트 H의 결성이 팬들 사이에서 퍼진 '야동 커플' (여기서 야동이라 함은 호야, 동우의 이름을 줄여서 칭한 것이다. <깨알 플레이어> 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들은 이미 '래퍼 버전 <우리 결혼했어요>' 스러운 상황들을 찍은 바 있다.) 을 보고 소속사 측에서 요거 장사 되겠다 싶어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만 의외로 저런 말을 들으니 기대가 된다. 그러니까 지금 이 앨범의 완성도를 다음에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하는 기대. 아마 다음 앨범에서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앨범을 만들 듯한데 어찌됐든 지금 것보다는 나아질거라 생각한다. 분명 명확한 자신들의 주관이 들어가면 괜찮아질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뭔가 배운 것을 토대로 하여 다음을 기대해본다. 하지만 다음에도 이 앨범과 차이점이 없다면? 그럼 곤란하다. 정말로.

 


p.s. - 앨범 커버 컨셉이 괜찮습니다. 두 멤버가 흰색 양복을 입고 있고 다채로운 색깔의 페인트칠로 범벅이 되어 있는 건데, 여러가지 것들을 자기 걸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거겠죠.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 니가 없을 때 *

작사: Zion.T, Lil Boi, Louie
작곡: Zion.T

 

니가 없을 때도
내 속이 타네 시간 없을 때에도
계속 기다려 니가 없을 때엔
다 큰 나인데도 어리숙해


널 바래다 주고 홀로 밤길을 거닐 때
잘 가라는 니 문자에 또 웃게 돼
니가 너무 보고 싶어 전화를 걸 때 마다 통화음이 참 길게만 느껴지던데
지쳐 기댄 곳에 니가 없을 때
너무도 화창한 날에 너를 못볼 때
무심코 펼친 지갑 속에 니가 웃을 때
너무 많이 생각나 니가 없을 때면
없을 때면 보고파
너도 나와 같은 느낌인지 묻고파
요즘 이런 내게 제일 슬픈 말
니가 보고픈데 니가 없을 때


니가 없을 때


니가 없을 때 홀로 tv를 보고
니가 없을 때 나 산책해봐도
뭔가 적적해 너와 걸을 때야 난
비로소 맘이 놓여 얼음 땡
You really feel so nice
But 아차 한 순간 너와 멀어질까 봐
난 문자 하나하나도 신경쓰게 돼
역시 바보 같아져 니가 없을 땐


Baby Baby 내게 말해
Baby Baby 속삭여줘
Baby Baby


너도 나와 똑같이 느낀다면 내 손을 잡아봐 girl
내게 니가 없을 때처럼
너도 내가 없을 땐
Baby 내 목소릴 키워줘
plz let me be ur love


니가 없을 때
I wanna feel you
We're getting stronger
I wanna listen to
Cuz I love you so much
I wanna feel you
We're getting stronger
I wanna listen to
Your voice, Song, My honey


지금 뒤를 돌아보면 니가 있을 것 같고
주머니엔 귀여운 니 손이 있는 것 같아
껴안고 자는 베개가 꼭 너 같고
뭐 그래, 어딜 봐도 다 너뿐인 것 같아


와락 하고 등을 안아줄 것 같고
목소리만 들어도 함께 있는 것 같고
힘들 때는 내 이름 부르는 것 같아


니가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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