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박은옥 10집 -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정태춘. 박은옥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 TRACKS

1. 봄 밤

2. 동방명주 배를 타고

3. 압구정은 어디

4. 선운사 동백꽃이 하 좋다길래

5. 오토바이 김씨

6. 빈 산

7. 아치의 노래

8. 리철진 동무에게

9. 정동진 3.

10.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1CD / 45:24 Mins / 레이블: 유니버셜 레코드, 삶의 문화

 

 

"...이게 여러분들의 노래지, 우리 부부만의 노랜가요? 모두 고마워요."

 

- 앨범 북클릿에 담긴 정태춘, 박은옥의 감사말 중 일부

 


집에는 6집인 <무진 새 노래>의 LP와 8집인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CD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집을 먼저 끄적이는 건 6집과 8집은 내 자취방이 아니라 집에 있기 때문이며, 그 중에서도 6집의 경우엔 턴테이블이 집에 있기 때문에 여기로 가지고 와도 들을 수가 없다는 이유가 있다. 10집은 내가 처음으로 완전하게 들은 이들 부부의 앨범이다. 여섯살? 아니면 일곱살 때 이 부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는데 (이상은과 같이 들었으니 일곱살 때가 맞을 것이다.) 그건 바로 아버지의 자동차 오디오에서였다. 그 당시 우리 집 자가용이었던 대우 에스페로가 카세트 테이프 재생만 가능했기 때문에 따로 녹음해서 컴필레이션을 만든 것이었다. 그 후로 잊고 있다가 2002년 겨울에 이 앨범을 처음 들었다. 열 네살이었다. 동시에 이 때는 전혀 관심없던 아버지의 CD와 LP 장에서 정태춘과 박은옥의 앨범을 '발견' 하기도 했던 시기였다.

 

군 제대한 후, 1978년에 <시인의 마을>이란 이름의 앨범으로 가수로 데뷔했던 정태춘은 같은 음반사에서 역시 가수 활동을 하고 있던 박은옥을 만나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앨범이기도 하고 1980년에 발표된 박은옥의 2집에는 정태춘이 그녀의 음악작업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해에 그들은 결혼을 한다. 한국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정태춘과 박은옥의 공동앨범 작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정태춘과 박은옥, 각각 발표한 1집 앨범인 <시인의 마을>과 <회상>은 한 편의 수묵화를 음악으로 표현한 듯한 기분을 주는 간결하고도 아련한 수묵화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곡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 중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에 관해서는 슬픈 사연이 있는데, 바로 제작 당시 선곡과 가사가 음반사와 공연윤리위원회의 간섭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곡이야 아티스트의 입장에서 음반사와의 조율, 혹은 강요를 당하더라도 '적어도' 다음의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허나 공연윤리위원회의 경우에는 달랐다. 위원회는 정태춘의 가사쓰기 방식이 방황과 불건전한 요소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여러번 개작을 강요했다. 이 곳에 '다음의 기회'는 없다.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천년만년 지속될 것 같았고, 음반사를 통해 앨범을 내지 않으면 전방위 발표와 판매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정태춘은 그 모순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인의 마을> 앨범의 타이틀곡인 '시인의 마을' 속 화자는 '방랑자'에서 '수도승'으로 바뀌었고, 그 외에 노랫말 몇몇을 바꿔야만 했다.

 

물론 그런 방해들로 인하여 예술적 의도가 일부 손상당했다 할지라도, 신기하게 정태춘과 박은옥의 음악적 역량에 손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물론 예외도 있다. 군부정권 시기의 음악의 나쁜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건전가요 수록의 경우, 그 곡들은 본인들이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들으면 굉장히 뜬금없고, 앨범의 전체적 흐름을 볼 때 분명한 흠이다. (들국화 같은 경우에는 건전가요를 본인들이 직접 불러서 군부정권의 족쇄를 자기네들의 록 스피릿으로 부숴 버렸다. 아. 물론 이것은 LP 때의 얘기고 CD로 재발매 했을 때는 원 의도에 맞게 건전가요 트랙은 빠졌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을 제외하면 어떤 방해공작이 있어도 정태춘과 박은옥의 목소리에서 울려퍼지는 그 아름다운 세계는 손상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가진 개성이 워낙에 확고해서 그럴 것이다. 덕분에 정태춘과 박은옥의 앨범은 1984년, 부부의 이름으로 첫 앨범을 낸 이후에 의외로 쏠쏠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긴 세월동안 가수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그 명성은 10집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의 1번 트랙인 '봄 밤' 과 6번 트랙인 '빈 산' 을 아름답게 노래하는 박은옥의 목소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가 되어서야 느낀 것이기도 했지만 정태춘의 목소리가 지극히 한국의 토양에서만 나올 수 있는 판소리같은 목소리라면, 박은옥의 목소리는 1번 트랙의 전체적인 정서를 담당하는 서양 관악기의 목소리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앨범을 만들 때 가사쓰기는 전체적으로 정태춘이 담당하고 있고 그녀는 거의 보컬리스트의 자세로 음악을 해 왔다. 따라서 그런 가사쓰기 덕분에 자신의 2집 앨범인 <사랑하는 이에게>의 1번 트랙으로 수록된 '트로트' 장르의 곡인 '양단 몇 마름' 같은 곡을 위화감없이 불렀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 곡 역시 정태춘이 썼다.) 조금 과하게 단순하고 얄팍하고 차별주의적으로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나 이들 부부가 이토록 목소리 속에 다른 정서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생활과 음악적 환경이 달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태춘은 본인 말로도 지긋지긋해서 벗어나고 싶었다던 고향인 대추리에서의 생활 속에서 주변의 사물들을 뛰어나게 관찰했으며, 박은옥은 집에서 LP로 팝 장르의 음악을 들으며 음악적인 감성과 해석을 키워 왔다. 그리고 정태춘은 음반사에서 재니스 이안의 'Jesse'를 부르고 있는 박은옥의 모습을 보며 그녀에게 반하게 된다.

 

'봄 밤'은 서양식 관악기와 피아노, 어쿠스틱 기타로 이뤄진 편성이며 어찌보면 정태춘이 부를 수 없는 정서를 가진 곡이기도 하다. 2번 트랙인 '동방명주 배를 타고'는 정태춘이 불렀고, 동시에 이 곡은 박은옥이 부를 수 없는 정서의 곡인 셈인데 두 곡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서 이들 부부가 어떤 면에서 최적인지를 엿볼 수 있다. 박은옥은 많은 중년 남자들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던 '봉숭아' 식의 분위기를 부활시키고 있는데, 그 곡은 소식 없는 누군가를 기약없이 기다리면서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갈한 기품을 유지하려는 듯 봉숭아물을 들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곡 자체의 진행이 봉숭아물을 들이는 과정에 기본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부르는 박은옥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그녀는 '별 사이로 맑은달 구름거쳐 나타나듯 고운내님 웃는 얼굴 / 어둠 뚤고 나타나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전에' 같이 하나의 순간에 마주하며 느끼는 수많은 상념들을 어떻게 이야기로 표현할 것인지를 궁금해한다. 그래서 '봄 밤'과 '빈 산' 이란 곡은 사실 제목만 들었을 때부터 굉장히 추상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광활하고 거대한 외적 형상이 있는 것과 다르게 내적인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박은옥은 그 마음이 하늘의 밤과 지상의 산처럼 거대하다고 믿고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 부분은 정태춘이 부르지 못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봄 밤'은 '봉숭아'처럼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빈 산'은 말 그래도 거대한 산을 기점으로 해가 지고 뜨는 하루동안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곡에는 혼자된 사람의 인생을 보는 듯한 쓸쓸함이 담겨져 있다. 박은옥의 솔로곡은 전체 10곡 뿐에서 2곡 뿐이다. 녹음 당시의 그녀는 몸이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 많은 곡을 부를 수가 없었고, 또 후에 본인이 직접 인터뷰에서 몸 상태 때문에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밝혔다. 허나 '그 덕에'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가늘게 떨리고, 그것이 애잔한 감성을 넘어 어떠한 위태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그래서 '봄 밤'은 기다림의 정도가 더 애잔하고, '빈 산'은 쓸쓸함의 정도가 더 심하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에서 박은옥의 목소리는 여지껏 불렀던 것 중, 이후에 나오는 11집인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에 수록된 동명곡,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와 8집인 <92년 장마, 종로에서>에 수록된 '비둘기의 꿈'과 더불어 가장 구슬픈 감성을 담고 있다. 이것은 이후 정태춘과 함께 부르는 곡에서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반면 정태춘은 박은옥처럼 거대한 추상을 노래하기 보다는 세세한 디테일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시를 만든다. 역시 이 부분은 박은옥이 현재까지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현재 지점에서 노래 부르는 것에 충분히 만족해 하는 것 같다.) 그의 노래들을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어떤 식으로 설명하면 좋을까. 마치 모든 곡들이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 같다고 할까. 그런 감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묘사하는 능력이 대단하다는 의미에서다. 그리고  내용이 밝든 우울하든 이 앨범에서의 곡의 리듬은 그의 여태까지의 작업 중에서는 드물게 대부분 흥이 넘치는데, 그가 가는 곳은 국내든 세계든 어디든지 모두 음악을 하는 마당이 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중국대륙 올로케(?) 인 듯한 '동방명주 배를 타고' 가 그렇지만, 사실 정태춘의 진가는 국내를 무대로 하여 박은옥과 함께 부른 '압구정은 어디', 되게 신나는 '오토바이 김씨', 단독으로 소화한 8분 10초의 대곡, '정동진 3' 에서 발휘된다. 강제 월드 스타가 된 후배가수와는 다른 시각으로 서울 강남 압구정을 바라보는데, 중요한 것은 그 가사쓰기다. '한명회가 놀던 그 정자는 거기 없고 푸드득 / 비둘기 떼 흐린 하늘 낮게 날면 / 지난 여름 장마에 흙탕물을 뒤집어쓴 / 미류나무 한 그루 여기 강 건너 바라보고 / 압구정은 어디, 압구정은 어디' , 혹은 '정동진 3'의 이런 가사들. '강릉 시내 들어와 중앙시장 골목을 헤매다 마른 오징어를 한 축 샀지 / 또 한 골목을 돌아 좌판에서 생선 내려치는 무쇠칼, 가장 큰 칼을 하나 샀지 / 후두둑 소나기 노점 천막을 후려치고 지나간 뒤 / 중앙로 철길 너머 먼 하늘 위 쌍무지개도 나는 봤지' 실로 숨막히는 디테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면 그냥 넋두리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는 이런 넋두리로도 음악을 만들고 리듬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그리고 그것이 흥이 난다.

 

이 두 곡에는 하나의 의의가 있다. 바로 박은옥과의 연관성이 많다는 것이다. 어차피 부부 음악가이고, 어떤 트랙은 두 사람이 같이 부르기도 하는데 그게 뭔 상관이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시인의 마을> 시기와는 다르게 8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정태춘과 박은옥은 점점 민중가수의 색채를 띄게 된다. 시기가 군부독재정권 시기이고 정태춘의 경우에도 그 검열에 피해를 본 적이 있으니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86년에 청계피복 노조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들의 요청으로 일일찻집에 출연해준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들 부부는 몇 번의 공연을 가지게 되는데 그 이후 정태춘은 앨범 속에 저항의 말을 담은 노래들을 조금씩 부르기 시작한다. 허나 이런 테마를 박은옥과 같이 부른 적은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이들 부부의 작업으로 치면 7집 앨범인 <아, 대한민국> 에서였다. 당시까지는 영화와 더불어 음반에도 사전 검열이 존재했는데, 정태춘은 그 검열을 거치지 않으면 음악을 낼 수 없는 환경에 저항하여 직접 자비로 '비합법음반'을 제작해 배포했다. 박은옥은 이 때 내심 정태춘의 작업을 도와주고 싶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태춘은 이번엔 혼자서 해 보는 것이 낫겠다며 박은옥의 참여를 말렸다. 그들은 서정성의 시인들이다. 아마 정태춘은 자신의 아내가 사회의 뇌관을 마구 건드리는 위험에 동참시키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 대한민국>은 부부의 이름이 아닌 '정태춘의 5집'으로 발매됐다. 그래서 데이터베이스 정리를 하면 이 앨범은 취향에 따라 분류되기도 한다. 부부의 앨범으로. 혹은 정태춘의 앨범으로. 이후의 앨범들에서도 이런 테마에 박은옥은 참여를 꺼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앨범에서는 정태춘이 박은옥과 음악으로 맺지 못했던 관계를 맺는다. 가령 그가 부른 '정동진 3'는 박은옥이 부른 '정동진 1', '정동진 2'의 후속이다. 정동진 기차역 대합실에서 소나기가 지나간 뒤, 창문 밖으로 무지개가 펼쳐지는 박은옥의 정동진과 난데없이 바하 캘리포니아를 넘나들면서 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노래하는 정태춘의 정동진. 그러나 너무나 다른 이들 부부의 노래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통일성을 갖는다. 정태춘은 정동진은 내가 만든 상징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민주화를 노래했고 피를 봤던 80년대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정동진을 바라봤던 것이다. (물론 그는 그 공간의 열풍을 불러왔던 드라마인 <모래시계>는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박은옥이 바라보는 세상은 실은 겉으로는 고요하게 보여도 실상은 처절하고 슬픈 투쟁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정태춘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역사에 맞서 싸우거나, 혹은 상처받고 떠나온 사람들이다. 부부는 20세기가 도래하기 2년 전에 발표된 9집 앨범, <정동진 / 건너간다> 에서 한국 현대사의 테마를 마침내 공유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아내를 보호하고자 혼자서 감당해왔던 '환멸의 90년대' 앞에서 그는 점점 지쳐갔는지도 모른다. 그를 지켜보던 박은옥은 마침내 지쳐가던 남편을 돕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은 이 앨범의 마지막 트랙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에서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정확히 '아치의 노래'와 '리철진 동무에게'는 80년대 후반부터 봐 왔던 정태춘의 익숙함 그대로다. 그리고 '리철진 동무에게' 에서 전교조 합법화 운동과 연관지어 보여주는 정태춘의 한탄은 암울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신명나는 록큰롤로 풀어냈던 '오토바이 김씨'와는 다르게 순수하게 슬픔만을 다루고 있다. 적나라하게 현실을 고발하던 그가 흐느끼듯 현실을 말할 때, 듣고있는 청자마저도 이것은 크게 잘못됐음을 느낀다. 80년대와 2000년대.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외쳤는데 도대체 달라진 게 무엇이란 말인가. 허나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부른다. 이번엔 아내도 함께다. 박은옥은 여지껏 이런 테마를 남편과 함께 부른 적이 없었다. 지난 8집 앨범에 있었던 '비둘기의 꿈'이 입시지옥을 견디다 못해 건물 밖으로 몸을 던진 열아홉 고등학생의 실화와 그 유서를 토대로 만들어진 노래였으니, 현실과 맞닿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런 곡들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그녀의 노래는 현실보다는 서정성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었다. 지난 앨범에서 함께 불렀던 '수진리의 강' 같은 곡도 그랬다. 그런데 마치 남편을 도우려는 듯, 이 곡에서 그녀는 바뀌지 않는 현실과 정면으로 부닥친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란 곡은 참 아름답다. 직접적으로 시대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들으면 이것이 8~90년대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이것이다. 그 시대를 이렇게 아름답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들 부부가 서정시인들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투쟁의 길에 접어들자는 것인지에 관해 단순한 이분법 안에서 논의하게 만든다. 정확히는, 어쩌면 뻔한 설명인지 모르겠지만 그 두 개가 조화롭게 혼합됐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박은옥이 이런 곡에 참여했다는 것이 어쩌면 그런 변화를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참여는 정태춘의 목소리가 시대에 대한 성난 외침이 아니라 그래도 희망을 노래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위치에 서 있게 만든다. 그것은 박은옥의 목소리가 굉장한 비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박은옥의 노래부분이 끝나갈 때 쯤, 그녀는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라고 부르며, 무언가를 향해 계속 나아가겠다고 말한다. 정태춘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 나아가려는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어찌보면 남편에 대한 아내의 배려이리라.

 

그래서 정태춘은 박은옥을 대신하여 희망을 노래한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 첫 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 어둠 걷혀 깨는 새벽 길모퉁이를 돌아 /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라고. 정확히 정태춘과 박은옥을 무엇을 향해 나아가려는 것일까. 하필 어둠이 걷혀 깨는 새벽 속에서 첫 차를 타러 나가는 것은 21세기가 되어서 이들 부부가 응시하고, 또 외쳐야 할 대상들이 남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위에서 했던 이상한 은유로 대신하자면, '서양 악기'와 '한국 악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으면서 나이가 들어도 다시 전에 해 왔던 것처럼 첫 버스를 기다린다. 여기에는 음악적 성취와 더불어 사회를 바라보고자 하는 시각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태춘과 박은옥의 음악에는 외국 악기들이 어떤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으며 ('동방명주 배를 타고'에는 얼후가, 박은옥의 솔로 음악에는 바이올린과 관악기, 피아노, 정태춘의 몇몇 솔로에는 아코디언과 록큰롤이 동반된다.) <정동진 / 건너간다>가 나올 때부터는 한국 정치 역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졌었던 시기였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시대, 그리고 21세기의 도래. 그것이 이 앨범으로 하여금 마지막에 희망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현재 2012년이 어떤 상황으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씁쓸하지만, 이 곡만큼은 감동적이다.

 

2003년에 겨울방학이 거의 끝나갈 즈음, 밤에 이 노래를 듣다 혼자 방 책상 의자에 앉아서 흐느낀 적이 있었다. 그 때 부터 본격적인 공부지옥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꿈은 점점 불확실해지기 시작했고, 타의로 입시학원에 다니고, 영어는 잘 되는데 수학은 더럽게 풀리지 않고, 공부를 못하면 각목과 물 먹인 신문지 말이로 엉덩이를 맞고 발바닥과 허벅지를 단소로 얻어맞던 시기였다. 다들 그렇게 개 처럼 맞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시기였다. 군사정권 시기의 폭력이 체벌이란 이름으로 그렇게 되물림 되었던 것일게다. 그리고 밤 11시가 넘어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로 그리 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로 그리 했다. 그 사이에 내 꿈은 비누거품처럼 사라졌다. 차라리 마구 놀 걸 그랬나. 아니면 그냥 순응하는 게 나았나. 아니면 죽는 것이 더 편했을까. 지나고 생각해보니 군대 만큼이나 어떻게 견뎌와서 이렇게 살아있는지 신기했던 시기였다.       

 

언제나 힘들지만, 그럴 때 위로가 되었던 건 투철한 문화적 의식으로 만들어진 이런 예술품들 덕일 것이다. 여교사와 여선생은 연주하라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비싼 단소로 허벅지에 피멍이 들 때까지 학생들을 때렸다. 비록 이 앨범에 단소가 활용되지는 않았지만, 그 때 눈물을 흘렸던 것은 그러한 악기들은 사람을 두들겨 패는 도구가 아니라 아름다운 노래에 이용되는 것이라는 걸 이들 부부가 다시 한 번 일깨워줬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흐느꼈다. 엉엉 울면 맞은편이 부모님 주무시는 큰방인지라 오해를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흐느낌을 멈추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잠을 자야 한다. 그래야 내일이 오고, 하루라도 더 살아야 이길 것 같았다. 그 뒤로 집에 있는 몇 개의 앨범들을 더 들었다. 8집과 6집이 있었고 지구 레코드가 아티스트와의 논의 없이 막 갖다 낸 베스트 앨범 LP도 있었다. 들으면서 이들의 다음 앨범이 꼭 나와줬으면 하고 기다렸다. 그 때가 10집 앨범 나온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말이다. 그 때는 아티스트들도 아이돌 같아서 한 몇 개월 기다리면 바로 다음 앨범 내는 줄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인 이상은이 거의 2년마다 꾸준히 신보를 발표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들은 쉽사리 다음 앨범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앨범 들은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정태춘이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취소했음을 알았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였던 시절에 친근했다는 정도였다.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정치에 많은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당시에는 더했는지라 소식도 우연찮게 뉴스에서 보고 '아. 그런가보다' 하며 넘어갔다. (뒤에 알게된 것이었지만 정태춘은 노무현이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 협상을 했다는 사실을 듣고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2003년이 되어 이들은 20주년 골든 앨범을 발매하고, 이 앨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이전에 발매된 앨범들을 모두 절판시킨다. 2002년에 정규 신보를 발표한 이들 부부는 그 이후로 10년동안 소식이 없었다. 신보가 발매되길 기다렸던 열네살 소년은 스물네살 청년이 되어, 군 제대를 하고 나서야 그들 부부의 신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 시간동안 개인적으로도 몇몇 상황들을 겪으면서 의문을 가졌다.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느 날, 어떤 사진작가가 그들 부부에게 질문을 했다. 새 노래를 기다리는 팬들이 많은데 왜 앨범을 내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정태춘과 박은옥은 웃기만 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고 얘기한 뒤, 한 장의 흑백사진을 보여줬다. 그것은 정태춘이 만신창이가 되어 전경들에게 연행되어 가는 사진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정태춘의 고향인 대추리에 미군기지를 지으려 했고, 그는 그것을 막으려 대추리 농민들과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박은옥은 솔로 앨범을 낼 기회가 있었지만, 남편을 위해 마음을 접었다. 일말의 기대를 갖고 첫 차를 기다렸던 이들 부부가 느꼈을 상처를 약간이나마 함께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은 몇 년은 견딜만했다. 결국 대추리에는 미군기지 건설이 진행되고 있고, 나는 스물넷이 되었다. 그리고 부부는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앨범이 곧 첫 차이니까. 

 

p.s.1 - '봄 밤'은 무려 1982년에 써 둔 것을 2002년에야 불러서 노래로 만든 것입니다. 마치 황병기 님의 앨범이 그런 긴 시간에 걸쳐 곡을 모아 한 장의 음반으로 내듯,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앨범도 그러한 것이죠. '정동진 3'의 경우에는, 왜 뒤에 3이 붙었냐면 이전 앨범인 <정동진 / 건너간다>의 트랙 중에 '정동진 1', '정동진 2'가 있었거든요. 후에 박은옥 님이 말했는데, '정동진 3'은 1과 2를 지었을 때 같이 지었던 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앨범에 싣지 않고 놔 뒀다가 이 앨범에 실었어요. 나왔을 당시에 북클릿을 보다가 곡을 쓴 년도, 그리고 노래로 옮긴 년도를 보며 시간의 격차를 바라보며 많이 놀랐습니다. 사실 저는 묵혀두는 것을 잘 못하거든요.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닙니다만.) 오히려 끄적였으면 바로바로 올려보고 싶어하지요.

 

하여간 그 때 처음으로 노래란 것은 바로바로 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숙성시키고 시간을 기다리며 탄생의 시기를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때문에 황병기 님,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앨범 외에도 10년 째 신보를 내지 않고 있는 장필순 님과 한영애 님도 기다려 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전자의 사람들은 각각 13년, 10년만에 앨범을 발표했고 후자의 사람들은 현재까지도 앨범을 발표하지 않고 있지요.) 물론 생각만 했지, 적응하는 과정은 쉽지가 않더군요. 너무 안 나오니까 말이죠.

 

p.s.2 - 이 앨범이 발매됐을 당시,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캐백수 방송국의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TV로 직접 봤었는데 방청왔던 젊은 관객들의 표정은 다들 애매하더군요. 다들 이 아티스트들을 모르는 듯 했습니다. 그거야 그러려니 하지만 이후의 방청후기 게시판에 올라왔던 것이 보면 참 한숨 나오지요. 제 기억으로는 아마.. '옆에서 노래부르는 아주머니, 뭔가 부자연스럽고 꼭 북한 여자 같아요 ㅋㅋ' 뭐.. 이런 거였거든요. 북한 여인분들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들으라는 노래는 안 듣고 얼굴만 보는 것이 그 후기 남긴 사람의 수준을 생각케 했습니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박은옥)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막차는 생각보다 일찍 오니
눈물같은 빗줄기가 어깨 위에
모든 걸 잃은 나의 발길 위에
 
싸이렌 소리로 구급차 달려 가고
비에 젖은 전단들이 차도에 한 번 더 나부낀다
막차는 질주하듯 멀리서 달려오고
너는 아직 내 젖은 시야에 안 보이고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너 어느 어둔 길모퉁이 돌아 나오려나
졸린 승객들도 모두 막차로 떠나가고
 
(정태춘)
 
그 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긴 긴 어둠 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너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다시 올 봄의 화사한 첫 차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내 영혼 비에 젖어 뒤척였고
 
뒤척여, 내가 오늘 다시 눈을 뜨면
너는 햇살 가득한 그 봄날 언덕길로
십자가 높은 성당 큰 종소리에
거기 계단 위를 하나씩 오르고 있겠니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첫 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어둠 걷혀 깨는 새벽 길모퉁이를 돌아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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