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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하~!)

 

 

 

 

 


~ TRACKS

(Side A)

1. 무인도

2. 아침

3. 너와 내가

4. 못난이

5. 꿈나라

6. 무인도 (Instrumental)

(Side B)

7. 하늘을 바라보소

8. 그리고

9. 아까시아 길

10. 헤어져 살면

11. 님은 먼곳에 (Instrumental) - 신중현

12. Summertime (Instrumental) - George Gershwin

 

LP 개수 : 1

러닝 타임 : 31:26 Mins

레이블 : 킹 레코드, 유니버셜 레코드 (1974) / 서라벌 레코드 (1980)

 

 

 

 

 

 

울트라 미라큘러스 하이퍼리얼리즘 현아 섹시 코만도

사이키델릭 소울 다이너마이트 여인

.....

 

 

 

 


가수 조용필이 <SBS 스페셜 : 대한민국 가수, 조용필> 에 등장해 인터뷰를 할 때, 나이 60을 훌쩍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오빠라고 불리는 기분이 어떻느냐는 식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조용필의 대답이 재미있어서 지금도 기억을 하는데, 그는 '오빠' 라는 단어를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오빠라는 말은, 조용필을 대신하는 그런 말이죠. 강력한 힘이랄까요.. 그러니까, (팬들이) 믿는 구석이 있는 거죠."

 

 


실제로도 조용필은 빼어난 아티스트지만, 유독 부모 세대가 그를 언급할 때 흥분까지 하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국 그런 의미인 듯하다. 우리 시대에도 너희들처럼 아이돌이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과거를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이 잠시나마 젊어져 해당 시기로 돌아가는 법이다. '오빠' 라는 말은 해당 가수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람을 바라보는 팬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어떤 찬란한 한 때와 함께 해 온 사람이 지금도 왕성히 활동할 때, 우린 그로부터 스스로의 젊음을 투영한다.

 

 


오빠 했으니 이제 '누님' 한 번 가 줘야지? 언제 한 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김추자 누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을 봤다. 김추자의 복귀 소식이 TV 좆선에서 나오는 바람에 신빙성의 문제를 은연 중에 갖고 있던 차에 그 사람은 댓글로 '요새 훨씬 젊은 애들이 춤 잘 추고 노래 잘 하고 엉덩이도 잘 흔드는데 다 늙어서 나오면 어쩌라고' 라는 투로 써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본 어느 누군가가 '김추자 선생님이 이미 몇십년 전에 엉덩이 흔들고 춤 추는 걸로 쇼부 보신 분입니다' 라고 답을 했다. 쇼부는 외국어지만, 가끔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말에 임팩트를 추기 위해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활용하는 건 찬성이다. 쇼부. 끝은 없는 거야..

 

 

그렇다. '태초에' 라고 하면 오버 리액션이겠지만 거의 반 세기 이전의 한국 가요사에도 돌부처도 돌아 앉게 만든다는 육감적 매력을 뽐낸 가수가 있었다. 그녀가 바로 김추자이다. 사실 지금처럼 포화상태가 아니라서 그렇지, 어느 시대에든 가창력 만큼이나 춤도 인상적으로 추는 여가수들이 분명 있었다. 김완선, 인순이, 나미, 인순이가 멤버 중 한 명이었던 희자매, 이은하, 들고양이들 등등.. 그런데 디스코의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건 진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활달히 명맥을 유지했던 기생들도 기본적으로 가무에 능했는데, 어째 해방 이후 일정 기간동안의 시대는 정말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이봉조 작곡가와 함께한 앨범인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의 1번 트랙, '무인도'를 듣는다. 아! 김추자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공백이라 할 수 있는 그 시대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이다. 당사자 말에 따르면 어디서 딱히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김추자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춘천 향토제'에 나가 '수심가'를 불러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명창의 호평을 받았으며 3위에 입상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탈춤도 잘 췄으며 기계 체조 선수로도 활동, 문화방송 합창단에서도 활동하기도 했다. 정확히 가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능력들은 어지간히 다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김추자는 1969년에 신중현의 스튜디오에 오디션을 보러 와서 발탁된다. 김추자와 신중현의 작업물들은 유명하다. 하지만 이 앨범은 이봉조와 함께한 것이기 때문에 뭐, 여기서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싶다.

 

 

이봉조는 많은 사람들에게 KBS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알려져 있지만, 현미의 남편이기도 했고 그녀에게 그 유명한 '떠날 때는 말 없이', '밤안개' 등을, 정훈희에게는 '안개'를 작곡해 준 명 작곡가이다. 사생활이 다소 난잡한 면이 있었지만 그걸 잊어버리게 될 정도로 능력 있는 예술가임에는 분명하다.





* 이 중 '안개'는 이명세 감독의 2006년작인 <M>에서 본편에 핵심적인 사운드트랙 삽입곡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아마 그 작품을 본 관객들이라면 '아, 이 노래!' 할 텐데, 작품 속에서는 엔딩 타이틀에 보아가 부른 리메이크 버전이 나오기도 한다. 위의 영상에서는 보아의 버전이 먼저 나오고, 원곡 가수인 정훈희가 1967년에 부른 버전이 뒤에 나온다. (정훈희가 부른 1967년 원곡은 당시 공개됐던 김수용 감독의 <안개> 의 사운드트랙으로 이용된 바 있다. 윤정희가 정훈희의 목보컬을 립싱크하여 작품 속에서 부르거든.) * 

 

 

이봉조가 작곡한 음악들을 듣고 있으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단순히 트로트 장르의 곡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진정 어덜트 컨템포러리 장르의 음악들을 만들어서다. 그 중에서도 '안개'는 참 드문 형식이었다. 당장 프랑스 센 강을 배경으로 곡을 삽입해도 위화감이 없을만큼, 샹송의 정서가 느껴지는 멋진 곡이기 때문이다. 현미의 '밤안개'는 또 어떤가? 처음 부른 버전을 들어보면 그녀의 풍부한 성량에 맞춘 듯 빅 밴드 풍의 스윙 음악을 듣는 것 같다.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봉조는 어떻게 보면 한국의 1세대 재즈 / 블루스 아티스트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런 것들이 김추자와 만나면 어떤 작용을 일으키게 될까?

 

 

아니. 난 사실 김추자가 신중현과 작업을 했을 때에도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육감적인 안무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었을까 싶다. 끽해야 '거짓말이야', '늦기 전에' 라든가, 펄 시스터즈에게 준 곡을 그녀가 다시 부른 '커피 한 잔' 정도인 것 같다. 소울과 발라드 장르의 문법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록을 음악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신중현에게서 어떤 춤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쾌감 같은 것을 찾기는 힘들어 보여서였다. 그나마 영상으로 본 것 중에서 김추자가 신명나게 몸을 흔드는 모습을 보여준 건 전부 다른 작곡가가 만들어준 곡에서이기도 했고.

 

 

분명 당시 김추자의 무대를 찍은 영상이 존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이브 만들기에 취약한 한국이기 때문에 다 없어졌겠지만. 그녀가 신중현의 곡을 부르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은 것 중 현재의 우리가 볼 수 있는 곡은 '석양' 이나 '저무는 바닷가' 정도다. (당시 한국에서 TV 프로그램 녹화를 한 번 하고 나면, 그것을 담은 필름이나 테이프를 재활용하거나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아카이브를 형성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런 것들의 값이 비쌌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는 음악계에서도 그랬는데, 하나의 마스터 테이프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보관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가수의 녹음을 위해 덮어 씌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버려지는 경우도 많았고. 아니면 검열에 걸려 소각되거나.)

 

 

대신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게 있었는데, 김추자는 곡 템포의 빠르기와 정서에 맞춰 자신의 육감적인 모습을 뽐낼 줄 안다는 것이었다. 비음이 섞인 독특한 보컬, 뇌쇄적인 시선 처리와 감상자를 애닳게 하는 손동작 등.. 느린 곡에서도 할 건 다 하는 사람이었다. 김추자의 스펙트럼은 극단을 능숙하게 오가도록 구축되어 있었다. 아. 물론 신중현의 곡은 좋다. 김추자가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었던 건 기본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좋은 곡들을 불렀던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 강대철 감독의 1971년작, <내일의 팔도강산>에서 김추자의 등장분이 있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정책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이 프로파간다 연작은 한 편마다 초호화 배우 캐스팅에 다른 유명예술인들의 카메오 출연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서 카메오인 김추자는 김희갑이 지은 '빗 속을 거닐며' (작품의 주연인 김희갑과는 동명이인.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작곡한 사람이기도 하다.) 를 신명나게 부른다.

 

화면 중앙에서 무려 윤정희와 신성일이 춤을 추는데, 정작 그들의 춤사위는 김추자의 기운에 가려져 회사 부장님과 사원의 느낌만 줄 뿐이다. * 

 

 

대신 하지만 그럴수록 궁금증이 생긴다. 이 여인이 빠른 템포에 신명나는 브라스 섹션의 지원을 받으면 어떤 시너지를 보여줄까? 이건 내가 빅 밴드 풍의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여하튼 아주 개인적인 취향으로 인해 생긴 궁금증이었다. 여기에 해답을 주는 곡이 이봉조와 만나서 작업한 이 앨범의 1번 트랙 '무인도', 2번 트랙 '아침' 이다. 확실히 김추자가 목에서 고음을 쭈욱 뻗을 때, 록 기타의 선율보다는 브라스가 어울려 보인다. 그릭 이런 창가를 부를 때 들을 수 있는 쭉 뻗는 김추자의 시원한 보컬은 '아침'에서 빛을 발한다. '무인도'가 하일라이트를 보여주기 위해 예열해야 했다면 이 곡은 그런 거 없다. 그냥 쭉 가는 거다. 햐아.. 정말 시원한데다 펑키하기까지 하다. 경박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무인도'는 대신 '아침' 에는 없는 거대한 스케일의 박력이 있다. 디스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는 펑키한 기운도 느껴진다.

 

 

위에서 김추자의 비음 등 보컬에 관해서 잠시 말을 했지만, 당대의 평론가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보고 '미끈하게 빠지는 스타일이며, 비음이 섞여 경우에 따라서 매우 선정적으로 들린다' 고 언급한 바 있다. '무인도' , 김추자나 정훈희처럼 실력과 더불어 어떤 가수의 이미지를 규정짓는 강력한 어떤 정서가 없었으면 어땠을까? 이 곡은 결국 트로트가 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나마 주현미, 이미자 등 전통 강호들이 소화하기엔 어째 좀 동떨어지는, 기괴하기만한 곡이 되었을 것 같다는 얘기다. 그건 사실 '무인도'가 트로트로 규정하기에는 너무나 박력 넘치는 진행을 보여준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장르를 떠올리기 이전에 정말 이봉조가 김추자의 장악력을 믿고 거대한 규모의 곡을 지어줬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물론 신중현은 김추자에게 두성과 비음 등 전통 창법이 금기시하는 테크닉을 적극 구사하길 주문했고, 그 결과 그녀는 가장 반(反) 트로트적인 가수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트로트를 꼭 '한국적인 음악' 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그 전에 국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악은 웬만하면 두성을 쓰지 않는다. 신중현은 단순히 국악을 관습적으로 답습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미인'을 한국 전통 음악의 5음계를 이용해 만들었으므로, 한국적 음악 작법을 가미한 자신만의 음악성, 즉 '소울-사이키델릭' 의 소울을 김추자에게 심어줬기 때문이다.

 

 


A면의 1, 2번 트랙은 사실 '이봉조 앨범에서의 김추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정점이기에 이 앨범에 있어서는 핵심이자 곧 단점이 된다. 그래서 사실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가 명반이라 불린다면, 그것은 그 앨범 자체의 완성도가 뛰어나다기 보다는, 어떤 가수와 더불어 시대를 대표하는 '명곡' 이 수록된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인지, 이 앨범에서 '무인도'와 '아침' 에서 느낀 전율을 다른 곡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건 결국 그 두 곡이 신중현에게 음악적인 무언가를 받았던 '당시의 김추자' 의 강점을 어떻게 보니 잘 맞고, 또 잘 드러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심하게 말하면 '어떻게 하다 보니 잘 맞은' 거랄까?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여전히 김추자가 노래를 부르지만 앞의 두 곡만한 개성이 묻어나오지 않는다. 밋밋하다. 나름대로 '무인도'와 '아침'에 가깝게 들었던 곡들은 A면의 5번 트랙인 '못난이'와, 내가 CD 트랙처럼 표기하여 8번 트랙이라 했지만, LP 식으로 따진다면 B면의 2번 트랙에 해당되는 '그리고' 정도다. 왜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이봉조의 관현악 편성은 여전히 빅 밴드 특유의 소란스러움이 있다. 쉴새없이 쾅쾅거리는, 동시에 현란한 키보드 연주는 압권이다. 그러나 곡 자체가 '무인도'와 '아침' 만큼의 업 템포가 아니라 발라드에 가깝다. 이런 식의 느릿느릿한 리듬이라면 김추자는 여전히 신중현의 곡에 여전히 맞추어져 있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 연주되는 긴 분량의 곡에 맞춰 몽환적인 목소리와 바이브레이션을 해야 했던 것. 그게 '김추자 다운 것' 이라고 규정할 수 있었지만, 개인이 노력을 해도 다른 작곡가와 작업할 때는 그에 맞춰 바꿀 수도 있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 당시의 김추자는 그것을 100% 성공적으로 해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에서 들려오는 허밍 부분이 사이키델릭한 감흥을 다시 가져다 줬기에 들을만 했던 것일까.. 가끔 생각해보는 문제다.

 

 


물론 내 취향에 맞지 않은 곡들이 있긴 하다. 예컨대 A면의 3번 트랙인 '너와 내가' 라든가,  (나는 9번 트랙이라고 표기했지만) B면의 3번 트랙인 '아까시아 길' 은 곡이 너무 고루하게 들려 솔직히 시간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생각 뿐이다. 그러나 제일 처음 들리는 투 톱만은 못하더라도 이 앨범의 곡들은 대체적으로 다 들을만하다. 단지 김추자와 이봉조의 만남이 이 앨범에서 어째 엇박자를 일으킨 것 같다. 그래도, 옷 두 벌은 건졌으니 된 거겠지.

 

 


헌데 독특하게도 김추자의 이름을 뺐을 때 남는 게 '이봉조 작곡집' 이라 그런지, 각 면의 마지막 즈음에 배치된 그의 연주곡이 예상치 못한 귀의 즐거움을 주는 순간이 있다. 이봉조는 당시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한국에서 언제나 색소폰을 가장 잘 다루는 사람으로 거론되곤 했다. 하지만 자신의 곡인 '무인도', 신중현의 곡인 '님은 먼곳에', 조지 거쉬인이 쓴 오페라, <포기와 베스>의 수록곡인 'Summertime' 을 트랙 리스트에 올려놓은 센스 때문인지 테크니션의 노련함에 관한 기대만큼, 아티스트로서의 작품을 접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예상 외로 '무인도'의 경음악 연주 버전은 기존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압권은 '님은 먼 곳에'와 'Summertime' 의 커버다.

 

 


사실 이 곡은 김추자가 부른 버전 빼면 조관우의 리메이크만 생각나는 정도다. 부른 사람이 몇몇 더 되는 걸로 안다. 원래 '님은 먼 곳에'는 패티 김을 위한 곡이었다. 그러나 당시 패티 김은 노래를 거절했고, 이걸 김추자가 부른 것이었다. 김추자가 부른 버전이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고 난 뒤, 패티 김이 결국 1984년에 이 곡을 직접 부르게 된다. 자기도 노래 놓친 게 결국 아까웠던 거지. 하지만 대부분은 1995년에 조관우가 부른 리메이크 버전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정말 잘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봉조는 여기서 김추자 이후, 패티 김과 조관우, 혹은 장사익.. 그 사이에서 주목할만한 결과물을 이뤄낸다. 나는 '님은 먼 곳에'를 이런 식으로 리메이크 한 걸 처음 들어봤다. 이 곡은 누가 부르든, 어떤 성별을 가진 사람이 부르든 원곡이 가진 쓸쓸함과 비극의 정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봉조는 '님은 먼 곳에' 를 위해 류복성이 칠 법한 봉고를 배치 시키고, 피아노를 우아함이 아니라 철저한 리듬 악기로서의 정체성을 이용한다.

 


결과적으로, 신명나는 재즈의 분위기도 가득하지만 영화음악 분위기도 좀 난다. 가령 예를 들자면, 최경연 음악평론가는 이봉조의 '님은 먼 곳에' 커버를 두고 '007 영화의 사운드트랙 같다' 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007 시리즈에서 이런 리듬을 듣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제임스 코번이 주연한 007 시리즈의 아류작인 <전격 플린트 고고 작전>, <전격 플린트 특공 작전>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그 작품의 음악을 제리 골드스미스가 작곡했는데, 딱 이런 음악적 정취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혹은 낭만기를 조금 뺀 미셸 르그랑의 음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제리 골드스미스의 <전격 플린트 특공작전> 사운드트랙 중에서 *

 



원곡을 듣지 않고 먼저 접할 경우, 오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이봉조는 이렇게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이것은 앨범의 최종 트랙에 해당하는 B면의 6번 트랙, 'Summertime' 에도 해당된다. 어찌 보면 '님은 먼 곳에'가 이 곡과 비슷한 과가 아닐까 싶다. 원 오페라인 <포기와 베스>의 등장인물인 클라라가 무더운 여름에 한가로운 삶을 꿈꾸며 단독으로 부르는 곡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불어 결과적으로 '현재 없는 것' 을 그리워 한다는 점에서 '님은 먼 곳에' 와의 유사성이 있다. 이봉조는 독특하게 그 곡에 활기를 더 했고, 'Summertime' 에는 묘한 관능을 부여한다. 해당 곡들이 원래 어땠었는지를 생각한다면 배신감, 몰이해 등으로 격하할 수도 있겠지만 이봉조는 그저 장르 문법에 충실했을 뿐이다. 'Summertime' 에서 이봉조의 색소폰 연주는 그가 악기를 불고 있는 마우스 피스 사이에 있을 타액까지 연상될 정도로 끈적끈적하다. 더불어 매혹적이기도 하다. 거기엔 마치 애초에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민족적 문화를 향하여 어떻게든 정서적으로 다가가려는 사람의 노력이 있다.

 

 


그에게 끈적한 색소폰의 선율은 흑인음악과, 그것이 나올 수 있었던 민족 자체에 대한 음악가로서의 헌사나 다름없다. 아무리 이해하려 한들 결국 표피적인 선에서 그칠 것을 알기에, 그는 절륜한 기교로 자신의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그 점이 기존과 다른 음악적 이미지를 새로이 이끌어 냈더라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오만하지 않은 음악인 셈이다.

 

 


작곡가는 가수와 작업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인장을 분명하게 남기고 싶어한다. 결과는 좀 기묘한 형태가 되고 말았다. 가수에게 평생동안 언급될 명곡을 두 개나 선사해 줬지만 정작 다른 곡들이 그만큼의 힘이 없으니 말이다. 헌데 작곡가가 나서서 직접 연주한 두 개의 커버곡이 앨범의 두 타이틀곡에 버금가는 음악적 감흥을 청자에게 남긴다. 이럴 때 '작곡가' 라는 사람의 위치는 결국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하나 같은 의문이 생긴다. 의도적인 건 아니겠지만 아홉곡을 부른 김추자의 입장에서 그녀가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는 반면,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무대' 에서의 이봉조는 세 곡 중 두 곡에서 실로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조그맣게 '이봉조 작곡집' 이라 되어 있긴 하지만 '김추자'의 이름이 크게 박힌 데에서 결국 어느 쪽에 좀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해야 했는지는 청자들도 대개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으리라 본다.

 

 

이런 점에서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를 두고 '명반'이라 하기가 좀 그렇다. 명반은 개별의 곡이 다르지만 비슷하게 유기성을 가지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모든 트랙들을 마냥 들을만 할 때 해당 호칭을 붙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는 '명반'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명곡이 수록된 앨범' 이라고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김추자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브라스 섹션과 어울리는 명곡이 몇 개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강렬한 커버 디자인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분명 이 앨범은 평가 받을만 하다. 나는 김추자란 이름을 부르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시각적 이미지가 저것이니까 말이다. 이 앨범은 합이 좀 어긋났지만 그래도 그녀의 이름이 손상될 정도는 아니다.

 

 

김추자는 젠 체 하며 자빠졌던 한국의 문화계에서 그들의 위선을 벗기고 야성을 일깨운 선구자였다. 그 야성이 사람을 억압하고 천년만년 정치해먹는 경우의 천박함과는 다르다. 김추자는 야성의 예술을 보여준 가수다. 마녀다. 말레피센트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무조건적인 박애주의자 성녀만을 원했던 당시의 한국에서 마녀가 살기란 여간 퍽퍽한 환경이 아닐 수 없다. 김추자 자신의 말로는 절대 은퇴가 아니라 공백기가 길어졌을 뿐이라 하지만, 광풍 수준으로 휘몰아치며 시대를 풍미했던 이 말레피센트는 놀라울 정도로 소리 소문 없이 일반적인 사람의 삶 속으로 침참해 들어갔다. 이봉조 역시 1987년에 타계한다. 곡은 여전히 사랑 받는다. 곡은 영원히 살아 있으니, 이제 나는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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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노래는 몸에서 나와요. 머리에서 생각해서 나오는 게 아니고, 느낌 그대로 나오는 거죠. 사이키델릭이나 소울 창법도 신중현 선생님께 배웠다기 보다는 생래적인 것으로 봐야겠죠."

 

- 2007년 6월, <월간 신동아>와의 전화 인터뷰 중에 자신의 노래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김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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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 김추자 님은 1981년, 동아대 정치학과 교수인 박경수 님과 결혼한 뒤에 1986년에 잠시 콘서트를 한 것 빼고는 철저하게 언론과의 접촉을 거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부터 슬슬 복귀설이 나돌기 시작했죠. 거의 매 해 빠지지 않고 나왔던 것 같아요.

 

 


흔치 않게 전화로 인터뷰를 했던 <신동아> 2007년 6월호를 스크랩해서 가지고 있는데, 사실 이 리뷰를 처음 끄적이기 시작한 올 해 1월 1일에도 복귀 소리가 나왔고, 그거 보면서 그냥 그러려니 했거든요. 그런데 4월 5일이 되어 다 쓰고 나니 정말 복귀하는가 봅니다. 이번 달이 그 달이죠.

 

 


<신동아>의 인터뷰에서 김추자 님은 복귀를 위해서라도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 때부터 7년이 지났는데, 이제 김추자 님의 연세도 예순 셋이 됐습니다. 일흔 셋 되어도 목소리 한결같은 이미자 님도 있고, 동년배의 조용필 님도 여전하니 기대는 됩니다만 김추자라는 사람이 복귀설만 나돌하게 하고 그걸로 거의 10년 넘게 끌어온 걸 생각하면, 사실 신뢰를 상당히 잃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제게 김추자란 이름은 그 분이 부른 노래 제목과 유사하게 '거짓말장이' 일 뿐이죠. 기대보다는, 정말 어떻게 나오려고 그러나 한 번 매섭게 지켜봐야 겠습니다. 소문만 나돌게 한 벌이에요, 벌. 신보가 발매되면 그것에 관해서도 할 말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p.s.2 - 방송사 어딘가에 분명 아카이브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만, 현재 제가 볼 수 있는 '김추자 님이 '무인도'를 부르는 모습'은 앨범 발매 당시가 아니라 1986년에 잠시 콘서트를 하러 방송 출연을 했을 때 입니다. 희한하겓 앨범 발매 당시에 '무인도'를 부르는 모습은 정훈희 님의 모습만이 있죠.

 

 


여기에 사연이 있다고 해요. 이봉조 님이 1975년에 '칠레 국제 가요제' 에 초청을 받습니다. 이른바 국가대표로 초청 받은 거죠. 국가가 칠레이니까 '무인도'를 에스파냐 어로 편곡해서 부르기로 했지요. 요즘도 흔치 않은 일이지만 당시는 더 흔치 않았던 '인터내셔널 버전' 인 것입니다. 이러려면 원곡 부른 가수를 데려가야 했는데, 이 때 현미 님이 이봉조 + 김추자 조합의 해외여행을 극구 반대를 했다고 하는군요. 예. '밤안개' 부른 그 현미입니다. 이봉조 님의 아내 분이었죠.

 

 


김추자라는 가수가 섹시 컨셉을 당시에 드물게 고수하며 인기를 끄는 가수였고, 그에 걸맞게 남자관계가 문란하다, 건방지다 등등의 많은 루머가 있었어요. 그 중 정말 많은 것들이 루머로 밝혀지긴 했지만...여튼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결국 칠레 가요제에 이봉조 님과 같이 간 사람은 엉뚱하게도 정훈희 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한 번 남을까 말까한 칠레 가요제의 '무인도'에서 우리는 김추자 대신 정훈희를 봤죠. 그리고 김추자의 공백기가 길어질수록 TV에서 '무인도'를 열창하는 사람 역시 정훈희 님이었습니다. 충분히 부를 수 있겠지만, 조금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봉조와 현미 부부 역시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음악적 동지로서는 평생을 갔지만 사랑은 아니었죠. 그리고 현미 님이 걱정했던 건 '김추자와 함께 가서' 라기 보다는 '그녀와 같이 간 사람이 이봉조라서' 였던 것 같습니다. 그와 결혼하고 나서 숨겨진 자식이 두 명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수를 보내지 않는게 더 명답일 것 같습니다만.

 

 


p.s.3 - 올 2월에 이봉조 님의 유품들이 도난 당했다고 합니다. 현미 님이 금고에다 남편의 유품들을 넣어두고 관리해 왔는데 절도범이 그걸 다 때려 부수고 가져 갔다는군요. 도난당한 물품 중에는 1974년에 쓴 '무인도'의 악보도 있다는군요. 이 놈의 나라는 도대체가 문화유산을 가만 놔두질 않네요.

 

 


p.s.4 - 이 앨범은 LP만 있을 뿐, CD로 복각되거나 발매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예전에 LP 소장하시는 분의 집에 갔다가 이걸 192kbps 로 mp3로만 리핑을 해 와 듣는 식으로 소장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용량만을 생각하다 보니 원체 무지해서 비트레이트를 그 모양으로.. 뭐, 지금 생각해보니 헌 책방 돌면서 이 앨범의 LP를 구해야 겠다는 생각 뿐이죠.

 






* 아침 *

작사 : 이종택 + 작곡 : 이봉조


창문을 열어라 가슴을 펴라

하늘을 보아라 먼산을 보아라

찬란한 하루가 시작이 된다.

눈부신 행운의 아침이다.

세상은 즐겁게 인생은 신나게


찬란한 하루가 시작이 된다.

눈부신 행운의 아침이다.

세상은 즐겁게 인생은 신나게

인생은 신나게 





* 무인도 *

작사 : 이종택 + 작곡 : 이봉조


파도여 슬퍼말아라

파도여 춤을 추어라

끝없는 몸부림에

파도여 파도여 서러워마라


솟아라 태양아 어둠을 헤치고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라

빛나라 별들아 캄캄한 밤에도

영원한 침묵을 비춰다오

불어라 바람아

드높아라 파도여 파도여





* 1986년에 방송에서 콘서트를 하기 위해 잠시 출연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 MBC 방송국의 <화요일에 만나요> 출연분이죠.

첫 딸을 출산하고 나서 출연했다고 하는데, 

최규성 음악평론가는 '비만해진 그녀의 모습에 팬들이 실망했다' 고 감정을 드러냈지만, 

뭐.. 노래는 이 때도 잘 했던 거 같아요. 


사실 이 때의 무대는 개인적으로 '청개구리 사랑' 이 아주 좋았습니다. 

여전히 춤 되고 노래 된다는 걸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애 낳은 아주머니가 스텝 제대로 밟아주시더라구요. 그래서 '무인도' 말고 이거 넣었습니다. *




* 1975년 '칠레 국제 가요제' 에 출전한 정훈희 님의 '무인도' 커버. 

이봉조 님이 지휘하다 말고 중반에 갑자기 색소폰 연주도 하며, 

정윤희 님이 돌고래 초음파를 발사하는 명 무대입니다.


참고로 이 때 '무인도'가 국제 가요제 결승에 진출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곡은 3위 본상, 정훈희 님은 최고가수상의 영예를 안게 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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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많아요.
 뭐가?
스포일러가.

근데 이 작품에다 스포일러란 표현을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

 


감독: 오멸
주연: 양정원, 이경준, 성민철, 홍상표, 문석범, 박순동, 강희, 김동호, 김순덕, 조은, 어성욱, 백종환
음악: 전송이, 서지선
촬영: 양정훈
12세 관람가 / Black & White / 108분

 

....


제주도의 군부대도 4월 3일이 되면 4.3 박물관에 견학을 간다. 다른 군부대도 모두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군부대는 그랬다는 얘기다. 내가 본 비 오는 날 제주도의 날씨는 대부분이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공문이 날아오고, 대략적인 인원들을 꼽아서 가던 그 날도 안개가 자욱했다. 정확한 이름은 4.3 평화기념관.. 버스에서 내리면 그럭저럭 거리감이 느껴지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생각해보니 그 때 한 번 가보고는 못 가봤기 때문에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면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으니까. 참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난 포항도 가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끼는 경우가 있다. 고등학생 때, 통학버스비를 내지 않고 일부러 한 학기 정도는 학교에 걸어서 간 적이 있었는데, 내 발걸음의 속도로 그 곳까지는 대략 40분 가까이 걸렸다. 그 때는 맞은 편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껴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난 안개를 좋아한다. 스스로 알 수 없이 내 한 몸 다 가려지는, 그것에 묻혀진다고 생각할 때의 인상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안개는 달랐다. 마침 내가 제주도에 발령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기에 더 그렇지만, 그 곳은 낯선 공간이었다. 곳곳에서 까마귀 소리가 들리고 산 에 위치한 안개 속에 싸인 평화기념관을 향해 걸어가는 경험은 특별하다. 목적지는 저기 있는데, 거기까지 도달하는 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나는 길을 잃은 채 그저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게 희한하다. 육지도 아닌 섬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이. 육지도 끝이 있지만, 동시에 끝없이 이어져 있기도 하다. 길을 잃으면 이 두 발로 새로운 길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섬은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벗어날 수 없다. 섬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그게 더 막막하다. 너무나 벗어나고 싶은데, '새로운 길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면 원래 도망쳐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섬의 한계이자 동시에 정의다. 4.3을 아는 것, 혹은 오멸 감독의 <지슬>을 보는 것은 결국 당사자들에게는 숙명으로, 상관 없는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의도치 않은 원죄처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내게 그 박물관과 작품은 원죄처럼 보였다. 박물관은 고요했고 <지슬>의 도입부 역시 파도가 치는 시퀀스를 제외하면 고요하다. 무채색의 컨셉으로 내부가 디자인 되어졌던 박물관, 그리고 흑백으로 찍힌 작품... 컬러의 세상은 우리에게 몰입하라 강요하지만 흑백같은 단색조들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서 몰입하게 만든다. 각각의 색깔을 가지고 있고, 개성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던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검은색, 흰색, 회색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색깔이 비슷하다고 한 덩어리로 보여 별 것 아닌 듯 치부하다 중요한 것들을 놓치기 전에 관객은 필사적으로 몰입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슬>의 처음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적인 것들' 이다. 일종의 '전운' 같은 느낌이랄까? 회색빛 구름이 드리워진 공중 쇼트를 보여준 뒤에 작품은 제주도의 어느 한 민가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제사용 그릇들을 보여준다. 그 전에는 이미 '빨갱이 토벌대'로 온 군인들이 민가에다 불을 질러 그 주변을 폐허로 만든 뒤다. 군인들을 이끄는 수장인 김 상사가 어질러진 제사 그릇들을 발로 차며 문을 열자 그와 함께 온 군인인 고 중사가 칼을 다듬고 있다. 김 상사가 제사음식으로 쓰려는 것을 가져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를 꺼내더니, 그의 칼을 얻어 깎고는 서로 나눠 먹고 웃음 짓는다. 과일 한 쪽도 나눠먹는 선진병영 환경에서의 군인들의 우정이라며 국방부가 홍보 영상으로 쓸 법도 하지만 사실 이 쇼트는 굉장히 끔찍하다. 왜냐면 뒤에 웬 머리 긴 여자가 사다코 마냥 몸이 반쯤 가구 안에 걸쳐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 이 쇼트를 마주했을 때, 그리 끔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감독이 구상했을 이 쇼트의 연출이 영화적으로 감정을 증폭시킨다기 보다 연극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래서 반응이 조금 늦게 왔다. 아. 저게 여자의 시신이구나.. 지금 저 군인이 사람을 죽인 것이구나.. 생각해보면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지슬>에서 앞으로 벌어질 '4.3 학살'의 첫 순간을 본 셈이다. 이런 역사적 사건은 사실 리얼하게 그 시대를 묘사하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첫 순간을 다큐멘터리적이지 않고, 의외로 양식적인 연출로 묘사한다. 막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배경처럼 자리 잡아 있는 여인의 시신, 그녀의 시신이 담겨진 가구, 그녀의 푹 숙여진 머리를 가운데 놓고 양 옆에 선 두 군인이 사람을 죽인 칼로 배를 깎아 나눠먹으며 웃는 모습까지.. 구도를 비롯한 전체적인 조형에 신경을 쓴 것이 상당히 미학적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작품은 도입부를 통해 <지슬>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를 관객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 4.3 은 4월 3일 새벽에 제주 남로당 무장대들이 제주대 내의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했다고 정의되어져 있고, 또 그것이 맞지만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처음 불안감이 조성됐던 것은 1947년에 일어난 3.1절 발포 사건 때문이었다. 제민일보 취재반이 지은 <4.3은 말한다> 1권에 따르면 당시 3.1 절 기념집회 도중 기마경관이 아이를 쳤다고 한다. 일부러라기 보다는 아마도 타고 있던 말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서 생겼던 일 같은데, 아이가 치었으니 성난 군중들이 그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졌다.

 

그런데 여기서 경찰 측이 경찰서를 습격한다고 오인하고 제주도민들에게 발포를 하게 된다. 당시 집회에 시위대는 없었고 200여명 가량의 관람객들만 있었는데, 그 중 6명이 발포에 사망하고 만다. 경찰과 미군정은 민심수습을 하려 들지 않고 경찰서 습격을 근거로 내세우며 집회 관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남로당 제주위원회 측은 악화된 민심의 흐름을 반 경찰 / 군정 활동에 이용하여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필두로 민관총파업을 유도해서 돌입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내가 가졌던 궁금증 하나는, 제주도에 공산주의 세력이 있는데 왜 그것을 애초부터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4.3은 말한다> 에서 제민일보 취재반과 인터뷰를 가졌던 남로당 연구 전문가 김남식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는 남로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구금되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왜냐면 당시에 남로당은 군정청에 합법정당으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6.25가 일어나기 전이고, 일본으로부터 해방됐지만, 친일파들이 처벌받지 않고 그대로 공직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니 뭔가 불가능했던 것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남로당 제주도당은 4.3을 일으켰다. 군경의 초토화작전에 의해 엄청나게 큰 인명피해가 날 것이라는 점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고립된 지역인 제주도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역사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가 지은 <이승만과 제1공화국: 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에 따르면 이 남로당의 봉기는 중앙당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남로당 제주도당 측은 봉기를 일으키기 전에 중앙당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4.3을 일으키겠다고 결정해 버렸다. *
 
이것은 4.3 이라는 것이 현재까지도 마땅하게 어떤 활동이었는지 통합적으로 규정되지 못했다는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일게다. 누군가는 '사태' / '사건' 이라 이름 붙였고, 누군가는 '항쟁', 또 누군가는 '폭동'이라 말하며 아예 '혁명' 이라고 이야기 되어지는 것도 들은 적이 있다. 이 많은 호칭들에 문제가 있다면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우리네 말이듯이 어떤 명칭을 붙여주느냐에 따라 해당되는 사례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감독과 제작자는 GV나 인터뷰에서 작품을 흑백으로 촬영한 것은 제주의 풍경이 이 이야기를 풀어놓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흑백의 색깔은 모든 것을 중화시키는 마력이 있다. 오멸 감독은 작품의 색채를 통해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바뀌는 명칭들을 전부 한 덩어리로 묶어버린다. 
 
그래서 <지슬>에서는 '사태, 사건, 항쟁, 폭동, 혁명' 이라는 표현이 모두 무의미해진다. 작품은 그 모든 명칭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공통적인 속성을 본다. 위의 다섯개 단어가 정의를 규정받는 대가로 요구하는 것. 바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 우리는 그것을 '학살'이라 부른다. 군인들이 배를 나눠먹으며 서로의 전우애인지 뭔지 모를 웃음과 마음을 공유하는 쇼트가 끔찍하게 보였던 건 그 뒤에 죽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흑백의 세상에서도 그것만큼은 똑똑히 보인다. 그리고 작품은 그 죽음을 응시하라고 말한다.

 

사실 안타깝게도 4.3은 이제 점점 논의되기 어려운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시간의 문제인 셈인데, 가깝게 보자면 용산 참사, 멀게 봐도 5.18의 경우에는 적어도 아직 관련자들이 살아있어 궁극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가지고 싸울 힘이 존재한다. 그러나 1948년에 발생한, 이 일의 도화선이라고 일컬어지는 3.1 절 발포 사건이 일어난 1947년까지 따지면 4.3은 무려 65년 이상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 유독 아카이브가 빈곤하기로 유명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일은 점점 논의될 수 있는 힘을 잃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로당, 이승만 정권, 미국,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 각각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관련자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자 악재가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지슬>은 다큐멘터리 터치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덧붙여 그 일의 원인을 남과 북, 한 쪽에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은 4월이 아니라 11월부터 시작한다. '해안선 5km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폭도로 여기겠다'는 공포가 퍼져나간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말이다.

 

 

* 4.3에 관한 시선들 중 하나로, (자칭) 군사 전문가인 지만원은 4.3을 '폭도의 반란'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저서 제목인 <지워지지 않는 오욕의 붉은 역사: 제주 4.3 반란 사건>만 봐도 그의 견해를 대충 알 수 있는데, 이 책의 한 부분에서 북괴의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이란 저서의 일부가 인용되고 있다. 지만원 박사는 이 책에서 4.3 발발의 첫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고 썼다.

 

'투쟁에 나선 남조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원수들의 피비린 탄압을 불굴의 투지로 싸워냈다. 2월 7일 이후 26일까지, 수많은 경찰지서가 녹아나고 악질경찰관, 악질관리, 반동분자 수십명이 처단되었다. 26자루의 총과 481발의 탄약을 빼앗고, 61대의 기관차, 27개의 통신기구, 수많은 다리와 도로를 파괴하고, 83개소의 전신전화선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또다른 비슷한 시선으로는 언론인 조덕송 기자가 <신천지> 1948년 7월호에 쓴 현지보고서,
 '유혈의 제주도' 에서도 등장한다.
 
'...직접 난동의 희생이 되고 있는 제주도민은 뭐라고 사건의 원인을 말하고 있는가. 금번 사건의 도화선은 순전히 도민의 감정악화에 있다. 무엇 때문에 제주도에 서북계열 사설청년단체가 필요하였던가. 경찰 당국은 치안의 공적도 알리기 전에 먼저 도민의 감정을 도발시키는 점이 불소하였다. 왜 고문치사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직접 원인의 한 가지로 당국자는 공산계열의 선동모략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근인의 한 가지로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30만 전 도민이 총칼 앞에 제 가슴을 내밀었다는 데에서 문제는 커진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

 

군인들이 첫 등장했을 때의 섬뜩한 분위기를 제외하면, 제주사람들이 첫 등장하는 시퀀스는 유머러스하다. 오멸 감독의 전작 두 편인 <어이그, 저 귓것>과 <뽕똘>이 유머가 아주 풍부했기 때문에 그 실력이 어디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신 애초에 작정하고 유머 코드를 넣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고 나면 더이상 웃기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다. 이들은 폭도로 간주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두려워 산으로 숨어든 참에, 군인들이 올까 구덩이에 숨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은 참 이상하게도 비좁은 구덩이 속으로 끊임없이 모여든다. 자리가 없으니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가라고 애원하는데도 말이다.
 
이 시퀀스는 어떻게 보면 꽤 상징적인 측면이 있다. 해안선 5km 바깥에 있다 폭도로 몰리기 싫은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서로 모이는 것인데, 군인들과는 달리 이 마을 사람들은 육지를 오가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다. 공동체로서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모여 숨어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들 중에는 충분히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도 존재한다. 마을 사람 중 한 명이고 '삼촌'이라 불리는 자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에 협조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에서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의 아버지가 해코지를 당했다. 그래서 그는 간간히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경질적인 대응을 받는다. 그는 멋쩍게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만, 일단은 마을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한다. 이후에 군인들의 동굴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말린 고추를 태워 연기를 피우는 부분에 이르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이 삼촌을 용서하고 같이 화해한다. (근데 이 삼촌이 '동호 삼촌'인지 헷갈린다.)
 
마을 사람들은 4.3 이 어떤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왜 죽는지에 관해 의문을 가지고 항변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러 온 토벌 군인들을 걱정하며, 서로 뭉치는 것이 도리어 고립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 이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다. 이들은 그저 일상을 살고 있는 것 뿐이다. 사회가 설명을 해 주지 않으니 위기의식을 느낄 새도 없고, 또 계속 그 의식에 사로잡힐 수만은 없으니 그냥 어딘가에 폭도들이 있는가보다 하면서 그렇게 산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는 토벌대들을 걱정하고, 친일했던 사람을 포용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피난올 때 집에 놔 두고 온 돼지에게 먹이 줄 걱정을 한다. 마지막으로 기어코 가지 않겠다는 어머니를 어떻게든 끌고 가야 하는데, 얼만큼 심각한지 모르니까 일단은 어머니의 의사를 존중하여 놔두고 간다. 이런 판단은 당연하다. 그들은 사람이니까.
 

 
 
작품 속에서 이런 방식은 일부의 군인들에게도 해당된다. 사이 좋게 배 깎아먹는 이후, 다른 군인들의 모습이 처음 등장하는 시퀀스는 추운 겨울날에 나체로 가혹행위를 받고 있는 병사인 박 일병의 모습에서다. 그러나 그의 나체가 등장하기 이전에 관객이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너무 추워서 꽉 쥔 주먹을 클로즈 업 한 쇼트다. 사병인 그 군인이 가혹행위를 받고 있는 이유는 '빨갱이 / 폭도들을 한 놈도 사냥하지 못해서' 다. 사람의 시체를 옆에 두고 눈밭에서 똥을 싸고 있던 김 상사가 가혹행위를 시킨 백 상병을 부르고, 밑의 애들에게 좀 잘 해주라는 말을 남긴채 사라져간다. 이 사병이 다음 순간에서 받는 대우는 몸에다 찬물이 끼얹어 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있으면 이 사병이 쥔 주먹은 여러 외부적 여건에서 발생된 고통이 증오로 승화된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친구이지만 계급 상으로는 후임인 김 이병과 더불어 마을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정은 잘 모르지만 그들이 무고하다는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꽉 쥔 그의 주먹은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내는 것과 같다.

 

의외로 증오의 순간은 예상 못한 지점에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서 상당히 섬뜩했던 부분 중 하나인데, 장지문이 클로즈 업 된 쇼트가 그것이다. 김 상사가 자신의 동생을 찾는 것이 장지문에 가려져 소리만 들려오는데 관객이 듣기에도 제대로 된 정신상태에서 소리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옆에서 누군가 지속적으로 칼을 갈고 있는 중이다. 작품은 가장 인도주의적이고 조용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장 지독하게 광기에 휩싸여 있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장지문이 열리고 마을 사람들이 키우는 돼지가 가마솥에 넣어질 때, 우리는 그들이 왜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지에 관해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김 상사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마약에 중독되어 있고, 옆에서 조용히 칼을 갈던 고 중사는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폭도들을 죄다 잡아 죽이라고 지시한다. 관객은 후에 이 군인이 사람을 무차별로 학살하면서 자신의 가족이 빨갱이에게 희생당했다는 과거를 읊조리는 것을 듣게 되어 살인귀가 된 연유를 알게 된다.

 

<지슬>의 이런 디테일은 실제 이런 관련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들려왔던 증언들을 참고하여 넣은 것이다. 가령 우린 5.18 관련 TV 다큐멘터리에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진압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약물이 함유된 막걸리 등을 마시고 광주 시가지로 갔다고 증언한 것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이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비단 5.18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베트남전을 비롯한 전쟁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약물이 없으면 버텨내기 힘들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더불어 빨갱이에 대한 무시무시한 증오를 드러낸 사람이 있지만, 정작 오해로 인해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인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 디테일은 '관습'이라 할 정도로 실생활이나 관련된 여러 작품들에서 봐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질리지 않고 여전히 생생히 무섭게 다가오는 이유는 약물과 누구나 오해로 인해 품을 수 있는 증오라는 익숙한 요소들이 우리의 인성을 단숨에 마비시켜 버린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군인들도 어찌보면 일상을 살고 있다. 그들 역시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명령에 살고 죽어야 하는 군인인지라 굳이 거기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빨갱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무고한 사람이라면 그는 공적을 세운 것이 아니라 살인범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인생을 보상받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두 사병만 빼 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습격한 마을 사람들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에 관해 단 한 번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사람이고 국방의 의무라고 여기며 자신의 일니까. 작품은 '사람이라서 그리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뒤엉키게 만들어놓고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서로의 입장이 이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작품은 정말 사무치게 슬프다. 마치 우리가 왜 싸우고 죽어야 하느냐고 묻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오해의 증오는 그 절규를 바로 일축시켜 버린다.
 
이 시퀀스의 마무리는 섬뜩하다. 사병들은 민가에서 가져온 돼지를 가마솥에 넣고 끓이며, 고 중사의 명에 따라 '폭도들'을 죽이러 나서려 한다. 그리고 옆에선 김 상사가 약에 취한 채 기왕 폭도 잡으러 가는 김에 계집애도 하나 건지라고 말하며 땅바닥을 기고 있다. 죽은 돼지가 담겨진 가마솥의 동그란 형상은 곧 동굴의 구멍으로 바뀌며, 피난 온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 잠시 그 구멍을 응시하다 다시 숨어 들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피난 온 마을 사람들은 도리어 스스로를 막다른 곳으로 몰고 있다. 그들은 가마솥 안의 돼지다.


 

 
* <지슬>은 작품 속 인물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지슬>이 분노의 시선으로 부릅뜨고 '침묵하고 있다' 고, 그래서 진실을 밝히라고 외치는 곳은 작품 속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미국과 그에 관련된 사람들'이다.

 

미 군정은 3.1 발포사건을 알아보기 위해 자신들의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한다. <4.3은 말한다> 에서 언급하는 그들의 자료에 따르면 미군 조사단은 제주 총파업의 원인을 3.1 절의 경찰발포로 인해 도민들의 감정이 고조됐고, 남로당이 이 점을 이용해 대중을 선동하여 증폭시켰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후속조치를 '경찰의 행위' 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그들이 떠나자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대가 제주도에 상륙했으며, 경무부 수뇌진이 제주도민의 90%가 좌익색채라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게 된다.

 

이후, 파업이 잠잠해지자 미군정 당국은 제주 수뇌부를 전면 교체하게 된다. 3.1 발포 사건 이후로 제주도 경찰관의 숫자를 줄이고, 사정 모르는 육지 사람들 / 서북청년단 일원들로 채워나간 것이다. 참고로 이 때 전면적으로 유입됐던 서북청년단은 40년대 후반에 결성된 반공단체로, 사무실은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으며 활동자금은 한반도 서북부 출신 실업가들과 미군정청 고위관리들, 그리고 이승만 정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의존하고 있었다. 흔히 4.3을 일으킨 원흉 중 하나로 꼭 거론되곤 한다. 그리고 이 서북청년단으로부터 일부가 빠져나가 대동청년단이라는 또다른 우익 단체를 만들게 된다. 둘 다 이승만 정권의 노선에 맞춰 활동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4.3 해결에 참여했다가 후에 해임되는 수난을 겪은 9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유고인 <4.3의 진실> 에서 그의 견해와 더불어 끔찍한 일화 하나를 볼 수 있다. 3.1 발포사건 이후, 제주도 내에서 약 2,500명의 청년들이 구금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 김용철, 양은하, 박행구라는 이름의 청년들이 구금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다 죽는 일이 발생한다. 제주 경찰 측에서는 3월 15일에 시체를 몰래 강에 내던지려다 그 광경이 청년들의 가족들에게 발각되고, 그 사건이 제주민심에 큰 충격을 줘 도민들이 경찰들을 믿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미군정이 뒤에 있는 경찰들의 과잉진압에 대해서는, 비록 이승만 정권 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봉 당시 경무부 공보실장까지 이렇게 얘기하게 만들 정도였다. '...물론 폭동 원인에 경찰도 과실이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느 면에서 경관의 고문에 의한 치사 사건이 있었고, 또 경찰이 청년단체에게 경관행세까지 방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미군정 하에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의 폭동' 이라며 공산주의 세력 쪽에 원인이 있다고 봤지만, 동시에 당시 관공리 쪽의 문제도 심각했다고 지적한 이인 경찰총장도 있다. 그는 1948년 6월 17일 <서울신문> 에서 이렇게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제주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 것은 시정방침에 신축성이 없는 것과 관공리가 부패하였다는 것 등을 볼 수 있겠다. 특히 그들은 제주도에 가는 게 무슨 정배나 가는 양으로 생각함으로써 인재될 만한 사람들은 제주도로 안 가고 보니, 명예나 돈이나 바라는 친구들이 어찌 옳은 시정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부패상은 작년인 1947년에 내가 제주에 방문했을 때 이미 역력히 말하고 있었다...'  *

 

 

* 1. 김익렬 9연대장의 유고인 <4.3의 진실> 에서 그가 쓴 4.3 초기의 피난민 입산사태에 관한 주장과 견해.

 

'토벌이 시작되고 1주일이 못 되어 폭도의 세력은 강해지고, 경찰은 읍내를 수비하는 데도 급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육지에서 토벌명령을 받고 내려온 김정호 사령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수립된 작전계획이 '초토작전' 이다. 이 작전이야말로 제주도를 대폭동 사건으로 확대시킨 근본원인이 된다. ...최초의 작전은 극비밀리에 조천면과 애월면 일대의 산간마을에서 행해졌다. 그 초토작전은 철저하게 이뤄져 비밀의 누설을 방지하였으므로 당사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제주도 미군정 장관이나 9연대 정보부에서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점차 인접마을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산간마을 주민들은 치안부재 상태에서 생명보전 때문에라도 할 수 없이 폭도들에게 조금이라도 협력 안 한 마을이 전무할 정도였다. 따라서 초토작전의 대상이 되지 않은 마을은 거의 없었다. 산간마을 주민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폭도에 가담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주읍이나 일주도로변의 치안이 확보된 해변마으로 피난하든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대부분은 폭도에 가담하였다. 해안마을로 하산한 주민들에 대하여 또 경찰들이 귀찮게 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처음엔 강력히 초토작전을 반대하였으나 다음부터는 어찌된 셈인지 묵인하는 태도로 나오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장려하는 태도로 변하였다.'

 

미군정이 초토작전을 묵인하게 되자 경찰은 공공연하게 한 마을, 한 마을을 초토화시켜 나갔다. 이렇게 되자 일이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돌변하였다. 대부분의 산간마을민들이 산으로 도주하여 폭도들에게 가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폭도의 수는 기하급수로 증하가여 갑자기 수백, 수천이 되어 그 수를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말았다.'

 

2. 당시 경찰의 진압작전을 직접 보고 그것을 경향신문 신춘 현상수기에 써서 당선되어 1964년 1월 5일자에 게재됐던 임두홍의 글, <내가 겪은 사건실기 - 4.3 폭동> 중 일부..
 

'..과연 그들 경찰이 하는 일은 무엇이었던가? 그들의 총구는 닭과 개를 향하여 불을 뿜었고 아무 집에나 마구 들어가서 밥을 시켜먹었으며, 마을의 개들은 그들을 보면 꼬리를 감추고 도망갔다.

 

그들은 젊은 여인들을 붙들어다가 욕을 보였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만 보면 폭도라거나 혹은 빨갱이라고 하여 행패를 부리고 잡아갔다... 젊은이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순경들은 마을사람들을 전부 학교 운동장에 모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몽둥이로 사람들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맞는 사람들은 '내가 맞을 죄를 졌으면 가르쳐 달라' 고 악을 썼지만 때리는 순경들의 입에서는 욕설과 몽둥이만이 내려졌을 뿐이었다.'
 

3. 4.3 당시 통위부 정보국장을 맡았던 백선엽 장군이 쓴 <실록 지리산> 118 페이지 일부..

 

'..한편으로 11연대 (9연대가 11연대로 재편성 되었음) 는 공비들의 정보망을 차단하고 좌익세력에 위협을 주기 위해 좌익 혐의자들을 마을별로 색출, 공개 처형 하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했다. 이 같은 처형 과정에는 집안끼리의 갈등, 개인적 원한 등이 얽혀들어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당시 토벌정책으로는 그런 옥석을 가려내지 못했다.' *
 
 
"..그나저나, 아까 그 여자 쏴 버리지 그랬냐..?"
 
"그러게...
아냐. 그래도, 사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참고로 <지슬>은 네 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다. 그리고 두번째 챕터와 세번째 챕터는 장르적인 재미에서도 가장 긴박감 넘치고, 동시에 지독히 슬프며 작품 속 인물들의 오해와 갈등에 불을 붙인다. 그래서 솔직히 보는 내내 괴로웠다. 왜냐면 웬만한 호러 장르의 작품들보다도 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죽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일원 중 한 명인 경준 ('뽕똘'이라 불려야 옳겠지만, 그는 이 작품에서만큼은 유일하게 '뽕똘'이라 불리지 않는다.) 의 안내에 따라 좁다란 굴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지만 몇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잘 따라오다 학교에 놔둔 책을 가지러 가기 위해 사람들을 이탈한 순덕이란 처녀. 그녀는 굴에 들어가 있는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인 동호 삼촌 부부의 딸이다. 그리고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몸이 불편하니 자신은 못 간다며 마을에 남은 한 할머니. 그녀는 동굴에 숨어 있는 무동이란 남자의 어머니이다. 김 상병은 광대하게 펼쳐진 제주도의 오름에서 순덕을 발견하지만 차마 총으로 쏘지 못한다. 
 
문득 보면서 느꼈던 너무나 끔찍한 생각은 '차라리 저기서 박 이병이 순덕을 총으로 쐈다면 나았을까?' 하는 것이다. 순덕은 도망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다른 군인들에게 붙잡히고, 고 중사와 김 상사에게 성적으로 농락당한다. 총에 맞아 죽는 것이나 성적 노리개가 되는 것이나 끔찍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기어이 전자의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박 일병이 김 이병에게 배고플 때 먹으라고 얻은 감.. 아. 맞다. 이 작품 제목에 대한 의미를 안 적었네. '지슬'은 제주어로 '감자'를 의미한다. 그 '지슬'을 순덕에게 갖다 주려다 그녀가 입수한 총에 맞아 죽기 때문인 것 같다.

 

난 섬 사람들과 육지 사람들 사이의 상처가 지독하게 곪아 버렸음을 극명히 드러내는 이 시퀀스가 참 싫다. 흑백 영상의 명암 처리는 아름답고,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민가의 장지문이 순서대로 닫혀가며 그것을 카메라가 빠르게 트래킹 하여 포착해내는 순간은 너무나 '영화적' 이라는 느낌을 준다. 알고 보면 사선에 내몰린 한 처녀가 사력을 다해 살아보고자 마지막 저항을 하는 처절한 순간이다. 그러나 작품은 군인들의 시선으로 이동해서는, 마치 오사마 빈 라덴 때려잡으러 가듯 작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근래에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제로 다크 서티>를 봐서..) 순덕의 죽음 직전 순간을 연출하고 있다. 여기에도 영화적인 리듬이란 표현을 쓴다면 그게 해당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그 리듬이 너무 매끈해 보이는 것이다. 폭력의 순간을 보여주자고 관객에게까지 폭력을 쓸 수는 없다. 이것은 작품을 만든 오멸 감독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이 작품을 정식 개봉 전에 시사회 겸 기획전 형식으로 대구 동성아트홀에서 상영됐을 때 처음 관람했다. 그 다음주에 한 번 더 봤었는데, 처음 이 작품이 상영됐을 때 고혁진 프로듀서의 GV가 있었다. 오멸 감독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작품의 공동감독인양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고, 또 그에 걸맞게 작품 제작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내게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의외로 오멸 감독이 찍은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작품은 대부분의 시퀀스가 그 날의 느낌을 따라 즉흥적으로 찍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테이크를 재촬영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그런 방식으로 예전부터 찍어 왔던 홍상수 감독도 이 정도의 '화면 때깔'이 나오지 않는데, 감독의 능력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제주도의 풍광이 그만큼 멋들어져서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실제로 제주도의 풍광은 어딜가나 멋지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퀀스 역시 즉흥적인 느낌에서 찍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시각적인 폭력을 제공하지 않는 대신, 지극히 장르 영화적 재미의 향기를 풍기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일까? 오멸 감독의 작품은 잘 나가다가 꼭 한 번씩 나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었다. <어이그, 저 귓것> 은 초반 30분, <뽕똘>은 마지막의 '자파리',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순덕의 죽음과 더불어 벌어지는 한 밤 중의 총격전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감독이 듣는다면 그의 입장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면 날 보고 어떡하라고, 이 자식아!?' 라고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일테니 뭐라 할 순 없지만...개인적으로는 그래서 '개별적인 쇼트'로 따질 때는 이 작품이 싫었다. 오히려 <어이그, 저 귓것>이나 <뽕똘>이 좋았던 것이다.
 
두 작품은 사실 기본적으로 워낙에 한정된 예산으로 만들어진 탓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영화적인 화면빨' 과는 거리가 많이 멀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이 솔직함이었다. 지금의 여건에서 우리는 이렇게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보다보면 갑자기 예상 못한 공격을 하듯이 불현듯 너무나 아름다운 쇼트들을 보여주곤 했다. 그건 그 여건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짜 내어 구현한 아름다움이었다. 반면 여전히 빡빡하더라도 앞의 두 작품보다는 여유로운 여건에서 시작한 이 작품은 모든 순간이 지나치게 매끄러워 갑자기 보석같은 순간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 없다. 오히려 이 아픈 순간을 묘사하는 것에 있어 저런 연출이 타당한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아마 개인적인 체감의 차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지슬> 의 매력은 개별적인 쇼트보다 하나의 시퀀스에 있다. 잘 된 쇼트, 잘 되지 못한 쇼트들을 모두 합쳐 하나의 시퀀스가 되는 것이기에, 매끄럽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시퀀스는 매력적일 수가 없다. 작품 속에서는 이런 시퀀스가 여러 개 합쳐져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지점이 있다.. (Pt.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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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S

1. 몰라주고 말았어

2. 가버린 사람아

3. 태양의 빛

4. 내 곁에 있듯이

5. 춘천의 하늘

6. 고독한 마음

7. 하늘을 바라보소

8. 그리고

9. 그대는 나를

 

CD 개수 : 1

러닝 타임  : 36:59 Mins

레이블 : ESP 엔터테인먼트, 포니 캐년 코리아


.....


 

말레피센트의 귀환



1.


최근에 안젤리나 졸리 여사가 출연한 <말레피센트>라는 작품이 있다. (비록 본편의 완성도가 좌절스럽다는 평가가 많지만, 마녀 말레피센트를 맡은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풍문이다. 풍문이라 하는 것은, 내가 아직 작품을 못 봤기 때문이다.) 말레피센트는 월트 디즈니 사의 1959년작인 클라이드 제로니미 감독의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악역으로 등장했던 마녀다. 


사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그녀가 그렇게 사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잠자는 당사자인 오로라 공주의 부모가 말레피센트도 파티에 초대해 줬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것 아닌가. 현실세계였으면 사실 악역들도 세금 내고 사는 엄연한 시민인데. 암만 생각해봐도 말레피센트가 오로라 공주에게 저주를 건 이유는 출생 파티 때 초대를 해주지 않아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면, 말레피센트도 사람이다. 상처받은 그녀는 오로라 공주에게 열여덟살 생일이 되기 전, 물레 바늘에 찔려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지리라고 선언하고 사라진다.





* 사람 혼 쏙 빼놓는 김추자의 '저무는 바닷가' 뮤직 비디오.

참고로 이 곡, 박찬경 감독의 다큐멘터리 <만신>에도 잠깐 나왔었다. 알아채신 분 계시려나.. *



김추자, 이봉조의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 앨범 리뷰 (-> 보러가기) 를 끄적일 때, 그녀를 '말레피센트' 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과 차이점이 있다면, 팬의 입장에서는 김추자는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었다고 보인다는 점일게다. 물론 이건 철저히 팬으로서의 생각이다. 


김추자는 1981년에 박경수 동아대 교수와 결혼식을 올린 뒤, 1986년에 잠시 TV에 출연하여 무대를 가진 뒤에는 33년간 철저히 가정주부의 삶을 살았다. 소주병에 얼굴을 난자당하고, 안무가 북한에게 보내는 수신호라는 모함에 시달리는 파란만장한 연예계 인생을 살았어도 오뚝이처럼, 1978년에 복귀 공연을 가졌던 그녀였다. 그래서 사실 복귀 3년 만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점이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나 김추자는 유명인으로서 활동했을 때도 말수가 많지 않았고, 자신의 분장실을 따로 쓰기를 주문했던 만큼 폐쇄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을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김추자가 벌이는 행동, 그녀에 관한 소문들은 모두 갑자기 주문을 거는 마법 같다. 갑작스러운 은퇴선언도 당시 대중들에게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녀는 결혼을 함으로써, 당사자로서는 재밌게 살았다지만 (가수로서는) 죽음과도 깊은 잠에 빠졌다. 


솔직히 몇 개월 전에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 리뷰를 끄적였을 때 내 마음은 일종의 분노에 가까웠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심이야 어찌됐든 김추자는 끊임없이 번복을 해댔기 때문이다. 돌아오겠다는 소리는 사실 2000년부터 들려왔었고, 나는 그녀의 복귀 시도 소식을 2007년에 처음 들었다. 


사실 말만 그렇게 하는 거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원래 십몇년 걸려 작품 발표하는 예술가도 많다. 그러다 보니 팬들의 입장에서는 예술가가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도 언젠간 새로운 작품을 낼 거라는 기대를 가지며 살 수 있다. 예술가가 얼마나 이기적이든,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팬들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헌데 김추자는 단순히 침묵을 넘어서서 뭔가 준비를 하다가 꼭 그 결정을 뒤집었다. 2000년에 복귀하기 위해 몸매를 가다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시월애>, <푸른 소금>을 만든 이현승 감독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자신의 인생을 뮤지컬 화 시키려 했을 때도 결국 뒤집혀서 끝끝내 좌초되지 않았던가.

 

물론 나 스스로도 최근에 어떤 일을 겪으면서, 예술과 관련된 분야는 여러모로 계약이 참 불공정한 구석이 있구나 싶어 김추자가 당한 일에 대해 공감을 할 수는 있었다. 이 슈퍼스타에게마저도 불공정한 약속과 계약을 오는구나..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겪어가면서 일을 하는 거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끊임없는 번복을 저지르는 행동은 용서가 되지 않았지만.


김추자는 그 옛날 자신을 가리키는 소문대로 '구름 같은 김추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나 역시 차라리 그녀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항상 돌아온다 돌아온다 말하다 지난게 10년이 넘어가고, 나도 그 소문을 들은지가 7년이 됐으니 말이다. (게다가 올 해 같은 경우에는 김추자의 복귀 소식을 관심 갖고 전한 방송사 중에 'TV 조선'이 끼어있어서.. '쩝. 이 방송사를 믿느니..' 하는 마음도 있었고. TV 조선 믿느니 차라리 <환단고기>를 믿겠다.) 


올 해도 복귀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앨범 커버마저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던 시간.. 툭!! 김추자는 정말 갑작스럽게 돌아왔다. 삐딱함은 가시지 않았다. 재작년부터 노장 예술가들이 단체로 회춘이라도 했는 듯 새롭게 복귀하길래 거기에 묻어가려고 돌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내게 김추자는 13년만에 <Chinese Democracy> 앨범을 낸 건스 앤 로지스의 한국판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까지는.




2.


2000년에 김추자가 내려했던 앨범의 구상과 좌절된 이유는 2007년에 6월에 월간지인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최영철 기자 (인터뷰어) : 2000년 각 신문에 다시 음반을 내고 복귀한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결국 안 나왔으니 오보가 되고 말았네요. 


김추자 : 만회해야죠, 뭐. 그 때 음반을 내려고 작곡가도 자주 만나고 재즈 발레도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몰라요.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을 했죠. 헬스장에 가서 매일같이 몸매를 가다듬고 그랬는데...


최영철 기자 : 그런데 어쩌다 음반 작업이 중단됐습니까.


김추자 : 음반을 내고 공연도 하기로 기획자와 계약을 했는데, 그 사람은 음반보다는 공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죠. 그게 돈이 되니까. 좀 지켜보니 음반은 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눈에 보이는 거에요. 그 때 저는 음반 취입에 비중을 더 두고 있었거든요. 지금처럼 음반시장이 어렵진 않았으니까.


약속한 녹음 날짜는 다가오는데 데모 테이프도 가져오지 않고 시간만 끌기에 계약이 자연스럽게 깨졌는데, 글쎄 그 기획자가 나 모르게 거액의 손해 배상 소송을 낸 거에요. 음반을 내기 위해 각종 비용이 들었다며 그걸 나보고 물래요. 계약서에도 분명 쌍방간에 이해 관계가 맞지 않으면 자동으로 파기한다고 돼 있었는데, 결국 제가 이겼지만, 소송이 2년을 넘게 끌면서 소금에 절어 시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속앓이를 좀 했죠.. (중략)


최영철 기자 : 어떤 음반을 낼 계획이었나요.


김추자 : 새로운 곡은 몇 곡만 하고 내 히트곡을 다시 부를 계획이었어요. '빗 속의 여인', '미련' (<신동아> 본문에서는 '비련'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비련'은 조용필 곡이잖아.), '마른 잎' 같은 노래들 말예요. 옛날엔 신중현 선생님 밴드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밴드에 맞춰서 새롭게 하면 또 다른 느낌의 노래가 나올테니까.


(중략)


최영철 기자 : 은퇴하신 적은 없으니, 음반 다시 내셔야죠.


김추자 : 당연하죠. 그런데 요즘 음반시장이 너무 죽었어요. 사실 지난해 10월 (이 인터뷰가 실린 해에서 생각해보면 지난 해는 2006년) 부터 음반을 내려고 '김추자 & 컴퍼니' 라는 기획사를 설립하고 작곡가를 만나러 다녔어요. 사업자 등록도 제 이름으로 했어요. 지난 10년 넘게 많은 음악을 들어온 덕에 직접 음반 제작을 하려고 했던 거죠. 내게 맞는 작곡가를 찾으려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났는데, 음반시장 상황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저는 그 사람의 작품을 들으면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수 있어요.


그런데 대다수의 작곡가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의욕 상실이라고나 할까. 작곡을 해서 음반이 팔려야 먹고 사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음반을 내려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저를 참 많이들 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면에서 팬들에게 빚이 많아요. 1982년에 신중현 선생님에게 받은 곡이 열 곡 정도 있습니다. 신 선생님이 젊을 때죠. 그 데모테이프와 악보가 아직 있어요.



이 인터뷰에서 김추자는 1982년에 신중현에게 받은 열 개의 데모 테이프와 악보가 있다는 언급을 한다. 받기만 했지, 본격적으로 앨범에 쓰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1982년이면 그녀의 은퇴 후의 일이다. 독특했다. 비록 은퇴는 했지만 언젠가 돌아올 마음이 있으니까 이후에 곡을 받은 건가?

 

이 때 언제 나올지 모를 김추자의 신보에 대해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신곡과 예전 곡을 다시 부르는 방식을 취하겠구나.. CD 시대인데 러닝 타임이 좀 길었으면 좋겠네. 후자는 틀렸지만, 전자는 맞았다. <It's Not Too Late>. 김추자의 이 앨범에 비견될 수 있는 앨범은 뭐가 있을까. 아마도 조니 미첼이 57세가 되어 20대 시절 자신이 부른 곡들을 다시 부른 2000년작, <Both Sides Now> 앨범 정도만이 맞설 수 있을 것이다. 

 

 


 * 조니 미첼 *


사람에 따라서 일찍 데뷔해 폭죽 터지듯 화려하게 빛을 내다 사그러지는 경우도 있는 반면, 대기만성형이라고 나이 들어 꽃피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생물학적 전성기'는 결국 마흔 이전에 끝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이런 이유로 무엇보다 힘이 넘치고 창작욕이 왕성해지는 젊은 시절의 걸작들을 다시 부르는 시도는 자칫 가수 당사자에게 위험한 시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조니 미첼은 과거의 영롱함과 달라져 버린 자신의 허스키한 현재의 목소리를 원숙함으로 무기 삼아 느린 톤으로 여유롭게 돌파하는 방법을 택했다. 


모든 곡들이 다 새롭게 들리고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Both Sides Now' 를 다시 부른 것은 정말 대단한 선택이었다. 아무리 살아봐도 인생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그 곡을 60이 다 되어가는 여인의 음성으로 들을 때는, 젊은 시절의 영롱함은 상대가 될 수 없는 깊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가수가 나이 들어 자신의 곡을 리메이크하는 행위를 두고 헛짓거리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잘만 해주면 말이다.




* 조니 미첼의 1969년 앨범 <Clouds>에 수록된 'Both Sides Now'.

6~70년대 한국에서는 포크 음악 연주자와 가수들의 단골 레퍼토리 곡이었다. 양희은도 자신의 첫 독집 앨범인 <양희은 고운 노래 모음 1집> 에서 이 곡을 번안하여 불렀다. *




* 조니 미첼의 2000년 앨범 <Both Sides Now>에 수록된 'Both Sides Now'.

한국에는 리차드 커티스 감독의 <러브 액츄얼리>의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되면서 

다시 많이 알려졌다. *





* <It's Not Too Late> 기자회견에서의 김추자 *



김추자의 <It's Not Too Late>를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에 비교하자니, 사실 이 앨범이 완전한 리메이크 앨범은 아니라서 공정할까 싶기도 하다. 이 앨범에서 리메이크곡은 다섯곡이기 때문이다. 네 곡은 신곡이다. 물론 이 신곡들도 대부분 과거에 받아 놓은 것이긴 하지만서도. 그래도 무작정 비견해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먼저 궁금해지는 것은 신곡이다. 첫 인상은 아무래도 세월의 흐름이 있다보니 김추자의 목소리가 굵어졌다는 것이다. 그녀도 한결같이 목소리가 유지되는 이미자나 조용필 같은 체질은 아닌가보다. 그러나 굵어진 보컬은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운 점은 김추자의 공연을 직접 본 사람들의 말을 나도 느낄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흔히 김추자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열정, 광기 등 육감적인 감흥이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냉정히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현 세대가 6~70년대 김추자의 실제 공연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져 있다. 자료 보존에 관해 무지해던 당시의 인식 때문이다. 


그나마 팬들이 열악한 화질로 녹화한, 80년대에 공백기를 깨고 잠시 노래를 부르러 나왔을 때의 모습정도만 볼 수 있다. 그 정도만으로도 김추자의 다이너마이트적인 매력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지만 아무래도 아쉬운 것이다. 김추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가수로서 청각적인 면 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면에서도 같이 볼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사람이다. 

 

허나 당시의 앨범으로 들으면 김추자에게 사르르 녹는 교태가 있지만, 아무래도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잘 없었다. 그건 비단 김추자와 연주를 담당한 연주자들만의 문제라 볼 수는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한계에서 온 것일게다. 딥 퍼플의 'Highway Star' 도 발표 당시에는 가장 '빠른 곡' 이었다 하지 않는가.


클래식이 클래식이 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시대적 한계를 뚫고 시퍼렇게 날을 발하는 에너지에서 비롯된다. 김추자는 청각적인 면 만큼이나 시각적인 면에서의 평가도 강하게 요구되는 사람이었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녀의 진면목을 알 수 없었다. 마치 무용가인 이사도라 덩컨이,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영상자료가 하나도 없어 춤을 어떻게 췄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야의 신화로 추앙받듯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신중현이 만든 신곡인 1번 트랙 '몰라주고 말았어'는 김추자에 대한 영상자료적 괴리를 거의 대부분 메꿔주는 마력을 자랑한다. 어느 정도냐면, 음악만 들어도 춤을 추는 김추자의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질 정도다. 설사 그녀의 전성기를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물론 그 이전에 먼저 음악가로서의 신중현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가를 체감하게 되어 감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2번 트랙인 '가버린 사람아'는 김추자의 1969년 데뷔 앨범인 <늦기 전에 /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에 수록됐던 곡이다. 또, 6번 트랙인 '고독한 마음'은 김추자가 당대의 인기 록 밴드였던 '검은 나비'와 콜라보를 한 앨범인 <김추자와 검은 나비> 의 수록곡이다. 그리고 '고독한 마음'은 후대에 들어와 사이키델릭 여제로 추앙받는 김정미가 불러 유명한 곡이기도 하다.

 

 


 

* 신중현의 '마른 잎'을 각자 자신의 앨범에 수록한 김추자와 장현. 

80년대에 이렇게 TV에 같이 나와 듀엣으로 노래 부른다. *

 

 

개인적으로 신중현에게 느낀 재미와 불만은, 똑같은 곡을 다른 가수들에게 여러번 부르게 했다는 점이다. 솔직히 한 가수가 신보를 낼 때마다 똑같은 곡을 여러번 부르게 한 건 좀 심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신중현은 가요를 클래식처럼 바라본 것 같다. 동일한 클래식곡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개성을 만나 다르게 해석되듯, 일명 '신중현 사단'이라 불렸던 김추자, 김정미, 장현, 이정화, 박인수 등등의 쟁쟁한 보컬리스트들이 부른 버전들은 각기 새로운 해석이 됐다.

 

<It's Not Too Late> 에는 몇십년이 지나도 낡지 않은 신중현의 곡을 소화하기 위해 송홍섭, 한상원, 정원영 등 한국의 최고 연주자들이 동원됐다. 그 결과, 오히려 사반세기가 넘은 신중현 음악의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솜씨는 그의 아들들과 맞먹거나 오히려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이것은 신중현과, 혹은 앨범의 곡들을 작곡한 이봉조, 김희갑 같은 사람들과 비슷한 시기를 거쳐왔다면 거쳐왔다고 할 수 있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송홍섭은 '사랑과 평화'의 베이시스트이며 한상원은 자신의 이름으로 만든 밴드를 이끌고 있지 않은가. 이들의 손길에 의해 탄생한 '몰라주고 말았어' 의 둔탁한 키보드 사운드, 원곡보다 메탈에 가까운 방식으로 탈바꿈한  '가버린 사람아'는 가히 감동적이다. 청자로 하여금 듣다가 전율을 일으키게 만들 정도다.

 

앨범에서 신중현과 이봉조의 손길이 닿지 않은 (참고로 '하늘을 바라보소'와 '그리고'는 전에 리뷰한 바 있었던 음악가 이봉조의 작곡집인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 의 수록곡이다.) 두 곡 중 하나인 5번 트랙 '춘천의 하늘' 역시 또다른 놀라움을 맛보게 된다. 여기에는 피아니스트인 정원영의 솜씨가 주효했다. 그녀의 연주로 인해 나는 김추자가 재즈 풍의 음악을 부르는 모습을 처음 듣게 되었다. 

 

사실 이 말은 확실치 않다. 김추자가 발표한 앨범의 개수는 대충 잡아도 50개가 넘는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복각이 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혹시 모른다. 그녀가 재즈 앨범도 냈을런지는. 그래서인지 <It's Not Too Late>도 정확히 김추자의 몇 번째 정규 앨범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딱히 구분은 했는지조차도 모르겠고.

 

 


 

* 김추자가 발표한 '수많은 앨범들 중 하나'. <어디로 가야하나>. 

앨범 커버 오른쪽 위에 남자의 성기처럼 보이는 그림이 있어 

천박하게로는 '김추자 자지 앨범' 이라고도 불린다.

김추자 앨범이 대개 비싸지만, 

이 앨범도 몇 년 전에 가장 비싸게 거래되던 앨범 중 하나였다고 한다. 

아마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 

 

 

3.

 

사실 '노래를 부르기만 하는' 가수들을 싱어송라이터보다 낮게 바라보는 시선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이런 시선으로 폄하하거나 한 적은 없으니, 차별한다기 보다는 그냥 얘는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런가보다 하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는데, 여튼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김추자를 논할 때는 이 관점이 다소 이상해진다. 세션 연주자들은 모르겠지만, 김추자의 경우에는 보컬 녹음을 과거의 아날로그 원 테이크 방식으로 진행했다. 


사실 당사자에게는 더 익숙한 방식일 수 있겠지만, 요즘 관점으로 볼 때 이 방식은 굉장히 불편하다. 한 곡 전체를 끊어서 녹음하여 좋은 부분만 골라내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다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딱히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작가적 의도로 했다기 보다는 당시 기술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김추자의 경우에는 예외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적 세계를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느낌 그대로 나온다고 정의한 바 있다. 사이키델릭 음악을 체화하는 방식이나 소울 장르도 신중현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생래적으로 익혔다고 말을 할 정도니까! 자칫 투박할 수 있지만 이런 나름의 방식으로 김추자는 독보적인 아티스트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딱히 노래를 직접 만든 것도 아닌데 말이다.

 

<It's Not Too Late>의 발표기자회견에서 김추자는 자신의 노래 연습 과정을 '응접실에서 라디오 틀어놓고 춤추기' 로 설명했다. 솔직히 그 말 듣고 좀 웃었다. 요새 음악계가 기획사 차려놓고 하루의 대부분을 연습생들의 훈련에 집중하는데 그러고도 모자랄 판에.. 아무리 잔뼈 굵은 가수라도 그렇지, 강산이 세 번 넘게 바뀐 공백을 메우는 방법이 '고작' 라디오 틀어놓고 춤추는 건가 싶었으니 말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김추자는 에둘러 자신이 끊임없이 음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그런 식으로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앨범을 들으며 음악은 뭐니뭐니해도 창작을 최고로 우선 쳐 줘야 하지 않냐는 오래된 생각이 잠시동안 바뀌었다.

 

3번 트랙인 '태양의 빛'은  김추자가 신중현의 그림자를 아예 지워버린 경우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콘서트 개최와 정규 앨범 발매가 미뤄졌을 때 김추자는 문득, 이 곡 자체가 추모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태양의 빛'은 새롭게 편곡 과정을 거친다. 과거의 버전이 어땠는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지만 여기서 김추자는 '절규'로 노래 부르는 '봄비'의 박인수마냥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1, 2번 트랙에서는 록커였고 3번 트랙에서는 짐승처럼 운다. 그러다 4번 트랙에서는 몽환적인 발라더가 되기도 한다. 무절제하고 통제가 되지 않는 느낌이라 33년 공백의 한을 한 번에 다 풀겠다는 패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춘천의 하늘' 부터 마지막 9번 트랙인 '그대는 나를' 에서는 김추자는 시침 뚝 떼고 자신을 절제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김추자는 주체 못하는 에너지를 안에 넣어두고, 능숙하게 보컬리스트로서의 자신을 억제한다.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부족함이 있다면 그건 아마 라이브 무대에서 시각적으로 보여주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김추자에게 있어서 '얌전' 할 수 있는 음악들의 선곡은 오히려 내게 참 반가운 경우였다. 나는 최근에 <무인도 / 하늘을 바라보소> 앨범을 리뷰하면서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의 관점으로 바라봤는데, 그건 바로 신중현과 달리 이봉조 작곡가와 그녀의 합이 꼭 잘 맞지는 않다고 생각이 들어서였다. 리뷰를 남길 당시, 그 앨범에 있는 '무인도'와 '아침'은 굉장히 강렬한데, 다른 곡들이 두 곡을 못 따라간다는 식으로 써내려 갔었다. 


그런데 <It's Not Too Late>에서 김추자가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당시의 곡들 중 두 곡을 다시 부른다. 그게 7, 8번 트랙인 '하늘을 바라보소'와 '그리고' 다. '그리고'는 당시 들을 때도 독특한 허밍 때문에 그나마 괜찮게 들었는데, 원곡의 빈곤함을 탓하기 이전에 해당 곡이 밋밋하게 들렸다면 가수의 책임도 분명 있다. 두 곡은 김추자가 소화할 수 있는 곡의 스펙트럼의 한계를 증명하는 경우였다. 해당 곡을 만든 이봉조의 화려한 관악 사운드에 발 맞춰 가기에 당시의 그녀가 가진 목소리는 끈적하고 요사스러운 매력은 있되, 무게가 별로 없었다. 관악기에 달라붙을 접착력은 떨어졌달까.


사실 두 곡은 김추자의 커리어에서 딱히 유명한 곡이라 볼 수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모든 곡이 다 소중하겠지. 하지만 처음 트랙 리스트에서 두 곡의 이름을 봤을 때 나는 임진모 음악평론가가 말한 의문과 감탄 섞인 '그만큼 공백기를 가졌으니 우리가 모두 아는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의 김추자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런 실험을 했다' 를 이해했다. 

 

김추자의 음악적 세계관은 그대로다. 그러나 그녀의 성대에 두터운 세월의 막이 쳐지면서 어딘가 밋밋했던 이봉조의 두 곡은 마침내 행복하게 가수와 다시 만났다(고 생각한다). 앨범의 후반부는 이렇듯, 곡 자체의 완성도보다도 청자의 관심을 오로지 김추자의 보컬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김추자는 노래를 짓지 않았지만, 온전히 그 노래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체화해 낸다. 김추자는 정말 조니 미첼도 울고 갈 아티스트 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순간이다. 아. 참고로 '그리고'는 이번 버전의 연주도 참 좋다. 오니시 유카리의 앨범인 <직격! 한류부인권> 도 생각나고 블루지하기도 하면서 펑키한 느낌도 난달까? 

 


 


 

"나는 늦었다, 나가려면 일찍 나갔어야 했다고 그랬더니 제 딸이 "엄마. 지금도 늦지 않았어." 하더니 둘이 같이 거울을 보면서 "엄마, 나랑 같이 늙어가잖아. 엄마 늙지 않았고 주름도 없어. 엄마. 노래해." 라고 하더군요."

 

 

자. 이제 끝내야 하나.. 이 앨범에 가지는 유일한 불만이 있다면 언제나 간만에 복귀한 가수들이 LP 시절 감성을 못 버려서 CD 러닝 타임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분량으로 앨범을 발매한다는 것 정도? 이렇게 생각하면 누구든 어쩔 수 없이 세월이라는게 내려앉게 마련이다. 김추자에게 <It's Not Too Late> 는 '첫 CD 앨범' 이다. 그런데 정작 앨범 전체 길이를 보면 CD 를 바이닐 레코드로 생각한 듯하다. 조용필도 그랬지만 항상 이 놈의 길이가 아쉽다. 그리고 커버 디자인 같다. 내게는 오히려 CD 라벨 디자인이 더 좋아보인다. 김추자 앨범들이 대체적으로 인물 사진 치고는 앨범 커버들이 독창적이고 재밌는게 많은데, 이번 앨범의 커버 디자인은 어째 좀 밋밋해 보인다.


끄적이고 보니 리뷰가 호평일색이다. 이건 정말 내가 감동 받아서 그렇다. 이 정도로 전율한 것도 간만이다. 바로 위에 언급한 이 사소한 불만을 제외하면 <It's Not Too Late>는 올 해를 넘어 앞으로도 회자될 앨범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다. 

 

그녀의 귀환이 전국적인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녀에게 사과해야 한다. 혼자서 이렇게 미루고 또 미룰거면 차라리 돌아오지 말라고 생각했으니까. 김추자는 그런 싸늘한 시선을 비웃듯 시간의 간격을 완벽하게 좁히는 작품을 들고 왔다. 더불어 김추자는 여전히 도도하고 자신의 이름에 대한 자존심이 있어 보인다. 이런 자신감이 음악을 소비하는 주요 층의 취향을 완벽하게 흡수해서는 아니다. (나미 같은 경우에는 신곡 'Voyeur' 를 통해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여전히 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세월이 흘러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또 변해도, 김추자는 자신의 모습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앨범을 보니 그녀는 공백기를 너무나 잘 견뎌냈다.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망, 앨범을 내고 싶다는 열망이 김추자를 지금까지 버틸 수 있게 했나보다. 

 

이 앨범은 실로 감동적이다. 마지막으로, 복귀하시기 전까지 팬으로서 잠시 나쁜 마음을 가져서 정말......


미안하다~! (고승덕 톤으로)

 

 

.....

 

 

​"예로부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이죠. 그러느라고 다들 썩지 썩어. 

농담이고요, 그런 심리도 있죠. 하지만 제가 제 관리를 못해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에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제 관리를 하고 있거든요. 정말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저도 참 독한 사람이에요. 인터뷰도 영원히 안 하겠다는게 아니라 어떤 작품, 뭔가 건수를 갖고 나서겠다는 겁니다.

 

- 2007년 6월, <월간 신동아>와의 전화 인터뷰 중에서 "인터뷰를 거절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게 언젠가 다시 무대에 설 때를 위해 자신을 신비화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요" 라는 최영철 기자의 질문에 대한 김추자의 답.

 

 .....


 

p.s.1 - 제가 산 것은 초판입니다. 초판 물량에 한해서 김추자 님이 저렇게 사인을 하셨죠.


p.s.2 - 김추자 님 콘서트가 이번 달 28일부터 29일까지 코엑스 D 홀에서 열립니다. 아흐.. 보고 싶네요.


p.s.3 - 본문에서 은퇴에 관해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표현을 썼는데, 정말 궁금하더군요. 이 분이 왜 그렇게 미련 없이 은퇴하셨는지. 기자회견 글을 읽다가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연예계 생활할 때 간첩이다 뭐다 그런 이야기 너무 많이 들어서 연예계 생활이 하기 싫더라고요. 1969년에 춘천 좁은 데 살다가 넓은 데 와서 히트라고 쳤는데, 간첩이다 CIA가 왔다갔다 그러는데 그때는 정말 노래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결혼생활이 제게는 참 행복한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다시 마음먹은 건 이젠 그런 것도 다 소화할 수 있으니까 더 늦기 전에, 목소리 더 망가지기 전에 들려주고 싶은 생각인 거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


p.s.4 - 이번 앨범 발표에 발맞춰 김추자 님의 앨범 두 개가 LP로 복각되어 발매되더군요. 그보다 의문인게 '이 앨범은 LP 발매 안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막상 CD 사고 보니 언젠가 음반사 측에서 한 번은 LP로 우려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김추자 님이 보컬 레코딩은 아날로그로 하셨다고 하니까, LP 발매도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디지털 레코딩 한 것은 CD로 들어야지, LP로 들으면 별 의미가 없지 않겠냐는 생각이 있어서요. 레코딩을 아날로그로 다시 하지 않는 한 말이죠. 가수의 동의가 있어야 겠지만 음반 작업하면서 누락된 곡들을 보너스 트랙 삼아 두 장짜리 LP로 나오거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몰라주고 말았어 *


작사 + 작곡 : 신중현


사라져 버릴까봐 떠나가 버릴까봐

그림자 같이 너를 내 곁에 두었어


꿈이 사라질까봐 모습 사라질까봐

싫다고 말을 해도 놓지를 않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모두 너를 좋아하고 너의 말을 할 때면

질투한 마음 나는 버리지 못했어


맴도는 너의 모습을 버리려 애를 써도

그림자같이 너는 떠나지 않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사라져 버릴까봐 떠나가 버릴까봐

그림자 같이 너를 내 곁에 두었어


꿈이 사라질까봐 모습 사라질까봐

싫다고 말을 해도 놓지를 않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몰라주고 말았어 너는 

너는 몰라주고 말았어

몰라주고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말았어





* 그리고 *


작사 + 작곡 : 이봉조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리고 돌아서 갔네


생각하면 무엇하리 떠나 버렸네

사랑하고 사랑했네 너는 떠나갔어도

그날따라 바람이 불고 있었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리고 돌아서 갔네


생각하면 무엇하리 떠나 버렸네

사랑하고 사랑했네 너는 떠나갔어도

그날따라 가랑비 오고 있었네


그리고 눈을 감았네

그리고 혼자 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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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 벅, 제니퍼 리

성우: 크리스틴 벨, 이디나 멘젤, 조나단 그로프, 조쉬 가드, 산티노 폰타나, 알란 터딕, 시아란 힌즈, 스티븐 J. 앤더슨, 에디 맥크러그, 로버트 파인

미술: 마이클 지아이모

음악: 크리스토프 벡

전체 관람가 / Color / 92분

원제: Frozen

 

 (2014, 1, 20 / 3, 29 / 4, 26 / 4, 28)

.....

 

 

나는 솔직히 정말 걱정이 된다




'잘 생긴 왕자가 긍정적인 소녀를 사악한 여왕으로부터 구해낸다' 

-> '긍정적인 소녀가 사악한 여왕을 잘 생긴 왕자로부터 구해낸다'



크리스 벅, 제니퍼 리 감독의 <겨울왕국>이 어떤 작품인지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바로 위의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저 소녀를 설명할 때 '긍정적' 이었는지, '왈가닥' 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해지면서 조금씩 바뀌어진 듯 하다. 엘사를 악역이라 규정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근데도 굳이 1월 17일에 극장에서 관람한 이 작품의 리뷰를 끄적이는 건, 그냥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좋은 짤방들이 많이 생성되어, 그걸 삽입한 내 끄적임을 보는 게 어떤 기분일까 싶어 한 것이라 보면 될 게다. 그냥 개인적인 궁금증이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 개봉된 디즈니 작품 중 가장 관객에게 사랑 받았다. 가수들은 자신의 가창력을 자랑하기 위해 'Let It Go' 를 쉴새없이 불렀으며 그 덕에 우린 클래식 음악 수준으로 한 곡이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를 충분히 만끽했다. 물론 이런 결과로 종편 채널에 의해 현 대통령과 공통된 모습을 갖고 있다는 굴욕 아닌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건 어느 정도의 더러움을 감수해야 하는 측면도 있는 법. 엘사 공주님의 고귀한 승리는 온갖 수난을 극복한 결과다.



<겨울왕국>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설정과 전개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그 중에서 일반적인 디즈니의 통념을 뒤집은 엘사와 안나의 캐릭터는 충분히 관객을 매혹시킬만한 치명적인 매력을 전해 줬다. 이 중 엘사는 주디 갈란드와 크리스 에반스의 뒤를 잇는 성소수자들의 대통령이 된 상태이며, 안나는 디즈니 작품의 남자 주인공들의 역할을 채 와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기념비적인 캐릭터이다. 그로 인해 디즈니 제작 작품 속에서 남자 캐릭터들이 할 일이 없어지긴 했지만, 작품은 그마저도 세심하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테면 이 작품에서 처음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이웃나라의 왕자, 한스를 이 작품의 실질적인 악역으로 만든다던가,  얼음 장사꾼인 크리스토프의 역할이 그렇다. 크리스토프는 이 작품 속에서 사건 해결의 주체로 개입하는 순간이 거의 없다. 허나 <겨울왕국>의 세상에서 안나를 제외하고 엘사의 능력을 무섭게 바라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실리적인 얼음 장사꾼으로서 순수하게 엘사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스의 경우에는 안나와 함께 부르는 'Love Is An Open Door' 가 사랑에 관련된 곡이 아니라 악당을 상징하는 곡, 그러니까 '디즈니 빌런' 곡으로 둔갑시켜 버린 점에서 관객인 나의 뒷통수를 쳐버렸기 때문에, 그게 신선해서라도 분명 예전엔 볼 수 없던 캐릭터처럼 보인다. 

 


참고로 <겨울왕국>의 도입부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운드트랙으로 볼 때 'Vuelie' 라고 명명된 그 트랙이 (나는 그 트랙을 이름대로 안 부르고 '나나나 헤야나' 라고 부른다. 저건 뭐라고 발음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Frozen Heart' 가 등장하기 전까지, 마치 지금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를 보는 건지, 아님 마이크 가브리엘, 에릭 골드버그 감독의 <포카혼타스>를 보는건지 헷갈리게 만들어서다. 그만큼 북유럽 느낌 나는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도 'Vuelie' 만 듣고 있으면 무슨 우림 속 원주민들이 불 피워놓고 축제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트랙만 지나보자. 그러면 'Frozen Heart' 를 시작으로 'Do You Wanna Build The Snowman?' ->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 -> 'Love Is An Open Door' -> 'Let It Go' 까지 이어지는 무척 흥미로운 초반 40여분이 이어진다. 작품이 가진 훌륭한 점은 관객과 평론가들로 하여금 단순히 안무와 음악에 취해 '항유' 차원에서 그치게 하지 않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게끔 흥미를 돋궜다는 점이다. 디즈니 / 픽사를 비롯하여 기본적으로 G, PG 등급을 넘지 않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은 폭력과 위협, 죽음 등을 시각화할 때 정말 많은 고민을 하고 허용될 수 있는 표현수위 안에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것을 감안하고 봐도 <겨울왕국>은 '밋밋' 하지 않다. 말하자면 작품의 갈등과 해결의 핵심이 되는 엘사의 초능력은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진다는 얘기다. 작품이 위협을 조성하는 요소들은 각종 흉기들을 이용해 발생하는 고어적인 폭력을 통해서가 아니다. 엘사의 마법으로 만들어지는 얼음의 뾰족한 형태가 병사들을 향해 다가올 때. 혹은 그 마법이 공중에 뜬 상태에 있는 어린 안나의 머리를 강타한다던가, 성인 안나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가는 순간들로 부터다. 



의외로 병사들과 안나의 심장 속을 향해 발사하는 엘사의 마법은 사실 극적 연출로서도 익숙한 이미지이고, 동시에 상징적인 측면도 많이 있어서 이후의 작품 전개를 먼저 생각하게 되어 순간의 위협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관객으로서 내게 가장 긴장됐던 순간은 어린 엘사가 자신의 능력을 미숙하게 다뤄, 실수로 동생인 안나의 머리에 얼음을 박아 넣을 때였다. 

 


<겨울왕국>의 주 관객층이 아동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데려오려면 부모의 동행이 필요한 법이다. 그 부모들을 자극하는 연출이라고 해야할까. 나이가 어떻든 간에 머리 다치면 그것만큼 큰 일도 없다. 그런데 부모 입장에서 볼 때 미취학 아동 시기의 자기 자식이 착지할 에어백 류의 기구도 없이 공중에 붕 뜬 채 머리까지 다치면.. 그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함의 절정이다. 어쨌든 디즈니가 <밤비>, <피노키오>, <덤보>에서 보여준 위협적 이미지들이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정말 무서운 반면, 이 작품은 많이 자제하면서도 그만큼의 위협적 정서를 담아낼 줄 안다. 작품에선 해당 연출이 지나간 이후 안나가 기억을 잃는다. 그리고 엘사는 안나를 다치게 한 것으로 인한 죄책감과 능력을 저주로 생각하는 스스로의 두려움, 더불어 그녀가 왕국을 통치해야 하는 여왕의 자리에 오르는 상황까지 겹친다. 

 


이런 이유로 이후의 뮤지컬 시퀀스들은 좋고 흥겹기까지 하지만 모두 다 긴장감을 밑에 깔고 있다. 기억의 일부를 잃은 안나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허나 언니에게 여전히 살가운 정이 있어서인지 끊임없이.. 참 끈질기구나 싶을 정도로 다가온다. 엘사는 이것을 끝까지 밀쳐내려고 한다. 

 


본격적으로 디즈니가 짐승의 등장, 혹은 판타지 같은 이야기를 배제하고 '사람의 이야기'를 담기 시작한 것이 <포카혼타스> 부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작품도 디즈니 사에서 과거에 만든 작품들처럼 가사 그 자체를 이미지로 형상화 하려는 경향의 뮤지컬 시퀀스들로 채워져 있었다. 거기에 상황극 개그도 적절히 끼워 넣어주고. 정확히 얘기하자면 노래가 나오는 그 순간만큼은 캐릭터들이 어떤 상태이건 상관없이 나름대로 갖고 있던 흥에 모두 취해버리는 셈이다. 이는 89년부터 90년대 말까지 이어지던 '디즈니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들에서도 여전했다.

 


알고 보면 이 와중에도 나름의 변화를 이뤄내기 위해 시도한 흔적은 있다. 가령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게리 트러스데일, 커크 와이즈 감독의 <노틀담의 꼽추>나 론 클레멘츠, 존 머스커 감독의 <보물성> 에는 가사 그대로의 이미지를 구현하면서도 그 인물의 '절망적인' 심리를 형상화하는 곡들이 있었다. 전자는 악역인 클로드 주교가 에스메랄다를 향한 정념에 괴로워하다 그녀를 마녀 취급 하기로 작정하는 'Hellfire', 후자는 주인공인 짐 호킨스가 실버 선장을 따라나서면서 자신의 불우했던 환경과 방황하던 심리를 묘사한 'I'm Still Here' 같은 곡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작품은 디즈니 사의 애니메이션 중에서 관객 대상으로 크게 재미를 못 본다.





 

그러다 네이슨 그레노, 바이론 하워드 감독의 <라푼젤>에 이르러 디즈니는 뮤지컬을 극의 흐름과 정서에 일치시키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해낸다. <겨울왕국>도 그렇다.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 는 'Do You Build The Snowman?' 을 듣고 보게 될 경우, 성문을 여는 안나의 충만한 행복과 왕위를 계승하는 대관식을 여는 엘사의 긴장된 모습을 그냥 건성으로 보지 않게 된다. 인물들은 모두 안무를 하면서 기본적인 중력을 무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빨리 가슴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13년동안 언니 만나고 싶어 만날 노크만 해 제끼던 여인의 한풀이가 관객에게 와닿을 때 엘사와 안나가 여는 '문' 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바깥세상을 맞이하는 두 여자의 모습을 작품이 교차편집 할 때 거기엔 단순한 앙상블 그 이상이 있다. 이것이 결국 'Let It Go' 에 이르게 되면서, 홀로 된다는 것에 관해 유독 두려움을 많이 가지는 한국 관객들에게 시원한 해방으로서 납득시킨다. 괜찮아. 문을 열어도 돼. 그리고 이 시퀀스에서의 엘사는 미치도록 아름답고 섹시하다. 금발. 살랑살랑 걸음걸이. 번쩍거리는 드레스. 자신감 넘치는 표정까지.

 

 


 

 




 * 'Let It Go' 의 한국 버전 중 하나. '다 좆까'. 욕설 선진국 한국이 욕으로 이뤄낸 아주 희귀한 쾌거.

"다 좆까 / 완벽한 년은 뒤졌어 / 이 곳에 / 시발 빛을 받으며 / 아렌델 개 좆 까라 / 추위는 좆도 아니니까" 로 마무리 되는 가사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

 

 

잠깐 딴 소리. ..음. 딱히 헐리우드에 한정지어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가 주로 헐리우드 작품들에서 많이 봤기 때문에 굳이 한정 짓자면, 요 몇 년새 만들어지는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작품의 시각적인 하일라이트를 후반부가 아니라 중반부에 미리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그러고 나서 후반부는 다소 소소한 전개나 액션 시퀀스로 진행된다. 

 


<겨울왕국>은 'Let It Go' 시퀀스에서 절정을 선사한다. 문제는 그 이후다. 'Let It Go' 이후, 이 작품에 대한 내 호감이 급격하게 떨어지더라. 도입부의 '나나나 헤야나' 를 들으며 느꼈던 괴리감이 다시 살아났다고 해야할까. 잘 만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왕국>을 극장에서 보고 나오며 뭔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던 이유에는 아마도 디즈니가 만든 전작이 <라푼젤> 이라서 였다. 사실 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더 나은 함의를 갖기 이전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며 느꼈던 매력적인 지점들은 각자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내겐 그것이 뮤지컬 시퀀스의 효과적인 배분과 활극적인 재미였다. 

 


<겨울왕국>은 그걸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뮤지컬 장르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개인적으로 싫은 것이 하나 있다. 뮤지컬 작품은 대개 상영시간이 긴 편이다. 문제는 그 긴 작품들 대부분이 전반부에는 흥미로운 춤과 노래로 가득하다 인터미션을 거치거나, 혹은 중반 이후에 들어가면서 급격히 비중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전반부에 작품의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 후반에 몰아서 한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것이 참 싫다. 애초에 곡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뮤지컬적 요소가 들어가 있으면 그걸 기대하게 된단 말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전면적인 뮤지컬이라고 보긴 힘들다. 이 작품 역시 그렇다. 그러나 초중반부의 이야기를 대사와 뮤지컬 시퀀스를 적절히 구사하며 훌륭하게 이어 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올라프가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중후반부는 많이 실망스럽다. 'In Summer' (<메리 포핀스>가 생각나기는 한다.) 라든가,  사랑을 이뤄주려는 크리스토프의 친구들, 트롤들이 부르는 'Fixer Upper' 는 음악적으로 영 힘이 달린다. 물론 'Fixer Upper' 는 곡 자체가 복선을 넘어 맥거핀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쓰임새가 꽤 재미있다. 내 눈에는 그 곡이 여지껏 기존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연애라는 것을 모르고 후닥닥 해쳐먹으며 노래로 커플을 이어주려 했는지에 대한 반증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디즈니의 커플 노래치고 이렇게 인상에 남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의도라면, 굳이 '부자연스러움' 으로서의 뮤지컬 시퀀스가 필요했을까? 감정과 상황을 노래와 안무로 표현해야 하는 뮤지컬은 해당 장르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부자연스러움의 극점이다. 이런데 해당 시퀀스 자체가 부자연스럽다는 점을 관객에게 굳이 전해줄 필요가 있었을까? 내게 'Fixer Upper' 는 잔재미는 있으나 이야기 상으로도 그렇고, 굳이 넣을 필요 없는데 넣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더불어 활극적인 재미를 따지는 기준에서, <겨울왕국>의 액션 시퀀스는 적절했다고 볼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뮤지컬 시퀀스는 볼만한 게 많고 중반부까지는 천의무봉의 경지다. 하지만 액션 시퀀스는 영 힘이 빠져 보인다. 이를테면 얼음 운반 썰매를 몰고 타는 스벤, 크리스토프 + 안나가 늑대 떼들에게 쫓기는 순간이 그렇다. 2D와 3D 버전으로 한 번씩 봤지만, 딱히 역동적이지도 않고 액션의 합도 돋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박력도, 절정의 순간도 없다. 



여기서 좋은 비교 대상이 되는 작품은 역시 전작인 <라푼젤> 이다. 기본적으로는 디즈니 공주 캐릭터의 모험이지만, 알고 보면 상영시간 내내 젊은 남녀가 티격태격하며 연애 하는 이야기다. 그 덕에 작품은 마지막에 등이 하늘 위로 날아가고, 두 주인공이 배를 타고 호숫가로 나가는 순간에서 관객에게 그 로맨스를 납득시키는 데 성공한다. 상영시간 동안 관객들이 동화됐기 때문이다. 더불어 <라푼젤>은 <겨울왕국>처럼 역시 액션 시퀀스의 빈도는 높지 않고 또 몇 장면 되지도 않으며 시간조차 짧은 편이다. 하지만 한 번씩 등장하는 동적인 순간들이 웬만한 활극 뺨치는 수준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것이 액션 시퀀스가 아니라 안무를 선보이는 차원에서 끝난다 할지라도 <라푼젤>은 분명 인상적인 순간을 남긴다. 

 

 



* 라푼젤과 플린이 동굴에 갇히기 전에 벌이는 액션 시퀀스 *

 

 

 

* 'Kingdom Dance' 시퀀스 *

 

 

영화의 역사를 다뤘거나 뮤지컬을 다룬 책을 보면 나오지만, 이 장르의 기원이 되는 보드빌 쇼는 귀족이 아니라 빈민층의 사람들, 혹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예술의 형태였다. 보드빌 쇼는 사회자와 노래, 춤, 악기 연주, 콩트, 마임 등으로 이뤄진다. 관객과 무대를 분리시키지 않아서 이들이 언제든지 사회자의 진행방식에 따라 참여도 할 수 있었다. <라푼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고, 'Kingdom Dance' 시퀀스 같은 것은 축제라는 배경을 빌려 거의 뮤지컬의 초기형태인 보드빌 쇼를 동화 속으로 옮겨와 효과적으로 되살려 낸다. <겨울왕국>은 정작 이런 재미들을 많이 챙기지 못한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한스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솔직히 자신의 왕국에서 왕위서열이 열 몇번째로 밀려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그가 악역이 될 듯하다는 생각도 조금은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그냥 그 캐릭터가 어느 순간 많은 변화를 일으킬 것 같다는 정도에서 생각이 멈췄다. 케빈 리마 감독의 <마법에 걸린 사랑>에서 에이미 아담스가 검을 들고 용과 맞서는 시퀀스를 보고 난 뒤부터, 그냥 어떤 식으로든 내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독특한 변주가 나오겠거니 싶었기 때문이다. 

 

 

* 안나를 엿 먹이는 엘사의 모습 *

 

 

<겨울왕국>은 한스와 결혼하겠다는 안나를 보며 엘사가 "처음 만난 사람과 바로 결혼할 수는 없어" 라고 초장에 바로 엿을 먹인다. 깜짝 놀랄 발언이었지만 작품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프링글스 아저씨 닮은 영감이 악역처럼 보여서 뒤에 저 발언을 만회할만한 전개가 나오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스가 본색을 드러낸다. 그는 권력을 탐하며, 안나를 이용했음을 밝히고 '급' 악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걱정되는 건 안나라는 캐릭터다. 안나를 보고 있으면 나는 마봉춘 방송국의 TV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의 363회인 '만약에...' 1부의 코너로 나온 <우리 결혼했어요> 속 송은이, 길 커플을 떠올리곤 한다. 무직이라는 유재석이 송은이의 절친으로 등장해서 길에게 그녀의 어디가 좋아서 결혼할 거냐고 묻는다. 그는 그러면서 이 말을 덧붙인다. "...혹시 은이에게 상처줄거면, 접근하지 마요. 이런 식으로 은이에게 접근해서 적금 빼먹고 도망간 남자가 한둘이 아니에요." 라고. 곧이어 길은 송은이를 보며 "예쁘잖아요" 라고 하는데, 분노한 유재석이 그의 멱살을 잡는다. 그리고 말한다. "너 뭐야. 너 뭐하는 놈이야! 너 은이한테 뭘 바라는거야!?" 맞장구치듯 자막이 뜬다. '돈이 목적이냐' 사랑한다, 예쁘다는 길이의 말은 함부로 입 놀리지 말라는 유재석의 경고로 마무리된다.



...나는 굳이 디즈니 속 만화에서까지 '첫 눈에 사랑에 빠지면 그건 상대방 쪽에서 네 재산을 노리거나 이용하려는 거다' 라는 이야기를 보고 싶지 않았다. 




* M.B. 님의 <겨울왕국> 패러디 만화 '미친 소리' 편 *




물론 리뷰에서는 간간히 테마에 맞게끔 컨셉, 혹은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다소 냉소적인 면을 보여줄 때가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바깥에서 '원래 세상이 그래' 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아직까지는 그 발언을 하게 되면 죄책감이 따라온다. 그럼 원래 세상이 그렇게 될 동안 너는 무얼 했냐는 식이다. 아니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어쩌면 글에서 그런 표현이 묻어나오는 건, 내가 주로 다루는 작품들이 대부분 나의 현재 시간으로부터 주로 거슬러 올라가고, 결론적으로 나보다 더 오래 묵은 작품인 경우가 많기에, 그 접점을 줄이려 범하는 행동일런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프라인에서 언젠가 때가 되면 하게 될 지 모를 상황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온라인에서부터 연습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충분히 바보 같은 행동이라는 점은 잘 안다. 하지만 무리해서라도 디즈니랜드에 들어서는 순간 오직 꿈을 꾸게만 해 줄 것이라고 대놓고 공표하는 디즈니의 그런 정책이 개인적으로는 꽤 멋있다고 느끼던 차였다. 그건 그냥 단순한 현실도피성 발언이 아니라, 삶의 삭막함 속에서도 이뤄지기 힘든 해당 가치들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꿈과 순수의 한 영역이니까. 물론 현실의 디즈니 사는 그것으로 돈을 벌어먹는 기업이고, 디즈니랜드에서 그런 아름다운 꿈을 꾸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모순과 논리가 있지만서도.



그런데 이렇게 하면 마치 디즈니의 과거 애니메이션이 너무나 낡고 고루한 것으로만 상징되지 않나? 물론 디즈니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건 몇 편 없지만, 적어도 과거의 디즈니 작품들을 보면서 마냥 시대착오적이라 느낀 적은 없었다. 그걸 볼 때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겨울왕국>은 안나라는 인물을 상징 삼아 전통강호로서의 디즈니가 가진 이미지를 단박에 철딱서니 없는 것으로 부정해 버린다. 정말 그렇게 했어야만 했는가?



뭐, 기왕 부정하는 김에 그 에너지를 끝까지 밀고 가서 여태껏 월트 디즈니 사의 작품에서 본 적 없는 이미지를 구현해 냈더라면 또 모르겠다. 사실 디즈니는 그런 거 해도 무방하다. 굳이 종교로 예시를 들자면, 한 때 교회에서는 반기독교적 현상의 최대 원인으로 KBS에서 방영된 <디즈니 만화동산>을 꼽곤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측에서는 아동들에게 해당 종교를 전파하려 했으나, 그들이 아침에 그 프로그램을 봐야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아서 신도 확장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생명을 멈춘 안나를 되살리기 위해 엘사가 키스라도 할 줄 알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 쇼트의 막강한 상징성 때문에라도 <겨울왕국>은 혁명적인 작품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겨울왕국>은 어찌되었든 멋진 결말을 만들어내며 끝맺는다. 그런데 보고 나오면서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작품은 디즈니 사의 과거 작품들에서 접할 수 있었던 낭만적인 감성을 현실의 세상으로 밀어내어 기어이 놀림받게 만든다. 안나 캐릭터 말이다. <겨울왕국>은 말미에 이르러 디즈니가 꾸며왔던 기존의 영토에 어울리지 않게 발을 걸친 듯한 인상이다. 안나 캐릭터 말이다. 사실 관객으로서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기성적인 것을 끝까지 거부하는 시도를 한다고 할 때, 거기에 '예술'을 갖다 붙이면 나는 일단 속아주는 편이었다. 실제로 대개 내 만족의 선에서는 만족할만한 경우가 많이 나오기도 했었고. 그런데 안나라는 캐릭터를 기어이 그런 과정에 이르게 했어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내 눈에는 안나의 수난이 여전히 기존 디즈니 작품에 대한 조롱처럼 느껴져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라푼젤>이 더 좋다. 근데 디즈니가 <겨울왕국>의 방식으로 과거의 자신들을 죽이고 또 죽일 것 같아서, 좀 걱정된다. 왜냐면 회사 측에서 죽이고 싶어하는 그들의 과거도, 내게는 꽤 재밌었기 때문이다.


 

 





p.s.1 - '<겨울왕국>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당신은 작품을 완전히 잘못 받아들이고 있어요.' 라고 민원이 들어올 것 같아서, 여러분이 제게 <겨울왕국>의 블루레이 타이틀을 선물 삼아 보내주시면 감상하고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뻔뻔)  



p.s.2 - 아. 맞다. 이 작품,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님의 <눈의 여왕>을 원작으로 했어요. ..갑자기 이렇게 적으니까 되게 뜬금없네요. 그리고 끄적이는 동안에 오스카 장편 애니메이션 상과 주제가상을 수상했죠. ..이것도 뜬금없나. 여튼 언제나 지나간 사실을 언급함으로서 여러분에게 다시 환기를 시키는 역할을 하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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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S

(On Side A)

1. 누구없소? 

2. 호호호

3. 비애

4. 달

5. 여인 #3

(On Side B)

6. 코뿔소

7. 갈증

8. 루씰

9. 바라본다

 

LP 개수 : 1

러닝 타임 : 40:16 Mins

레이블 : 동아기획, 서라벌 레코드 (LP) / 신나라 레코드 (CD)

 



 

그러니까.. 이 앨범의 제목은,

곧 이 서재의 근원

 

..... 



"신촌에 이상하게 노래 부르는 애가 있다던데, 그게 너구나?"

 


한영애는 몇몇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와 인연을 맺은 계기에 관해서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많이 놀랐던 사실이 있는데, 바로 그녀는 의외로 노래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영애가 노래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친구가 주선해준 덕분이었다. 신촌의 음악감상실인 프린스 살롱에서 오디션을 보게 된 것이다. 



한영애는 친구의 말을 듣고 시큰둥했다. 난 노래에 딱히 관심도 없는데 내가 왜 해야하니? 어지간하면 해, 얘. 이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야! 친구의 답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노래를 부르다 위의 말을 해 준 사람을 만난다. 포크, 블루스 음악 장르의 거장 중 한 사람인 이정선 말이다.

 


6~70년대 한국에서는 음악감상실이 가수 데뷔와 앨범 발표로 가는 확실한 통로 중 하나였고, 오디션을 받은지 단 30분만에, 한영애는 주급까지 꼬박꼬박 받아 챙기면서 프린스 살롱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됐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봐준 이정선과 그룹 '해바라기' 로 활동하여  그의 도움 (이라 쓰고 '지시' 라 읽는다.) 으로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세 장의 앨범을 낸다.

 


정작 당사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 앨범으로, 태평양에 갖다 버리거나 마스터 테이프에 불을 질러 없애 버리고 싶었던' 이라고 말했던 비공식 앨범들에 대해서 나는 아는게 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음반이 나왔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원체 구하기도 힘들거니와 찾다 보니 팔겠다는 사람을 보긴 봤는데... 그 사람이 댓가로 내놓으라는 배춧잎의 개수가 좀 많았다. 발견했을 당시에는 그래도 좀 어렸으니 나이로 어필해서 네고시에이션에 들어가 보려 했으나... 정작 그 분이 막상 거래에 들어가자 '태어나는 것과 달리 가는 데는 순서 없다'는 태도로 급 변경하시어 결국 떠나 보내야만 했다.

 


 



* 내가 봤던 한영애의 비공식 앨범 중 하나. <작은 동산>. 1977년인가 1978년 발매 음반이란다. 뭐, 정확한 발매년도도 잘 모르겄다. *

 

 


신기하게도 그 뒤로는 한영애의 비공식 앨범들이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 놈의 중고값이 초장부터 질리게 만들었던 이유가 컸겠지만, 아마 결정적인 건 내가 묘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의 팬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싫어하는 앨범이라고 하니까.. '가수 당사자가 싫어한다니까, 뭐.' 하는 식으로 알아서 합리화가 되더라. 나는 순종적인 구석도 꽤 많은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까 아직도 듣지 못하고 있네. 

 


한영애의 정규 2집 앨범인 <바라본다>는 그 유명한 '누구없소'와 '코뿔소'가 수록되어 있고 1988년에 발표됐다. 이미 70년대부터 해바라기로 활동했으며 85년에는 그 유명한 '신촌블루스'의 객원 보컬리스트로 활동했지만, 그녀는 1986년에 발매한 자신의 앨범인 <여울목>을 '공식적인 1집' 으로 친단다. 물론 자신의 이름이 전면에 나서는 앨범을 내기까지 이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에는 1977년부터 7~8년간 꽤 오랫동안 연극배우로 활동한 이유도 있다. 

 


이런 일화들을 듣고 있으면 한영애란 아티스트는 자기 세계에 대한 명확한 고집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내가 이 아티스트를 처음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들은 일화가 바로 위에 언급된 '친구의 주선으로 오디션에 응시' 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후에 좀 더 찾아보니 한영애는 예전부터 음악과 많은 연관이 있었으며 관련 활동도 해 온 터였다. 학창시절에는 합창 경연 대회를 할 때 마다 지휘자로 뽑혔고 국군장병 위문공연 때도 대표로 노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독학으로 기타도 익혔단다.

 


더불어 그녀는 이정선의 참여로 만든 세 장의 앨범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해당 앨범을 만든 이유에는, 그녀의 표현대로 따르자면 이정선의 '지시'가 있었다. 헌데 한영애는 포크 장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연극이 취향에 맞게 되었고 이 곳으로 뛰어들어 오랜 시간 음악을 외면한다. 8년 뒤에 이정선의 권유와 설득으로 다시 음악하는 삶을 꿈꾸게 되고 나서야 한영애는 이런 꿈을 품는다. 난 음악을 앞만 보이게 부르지 않을거야.. 뒤와 옆까지 보이고 또 느낄 수 있는 음악을 할거야.. 

 


한영애는 자기고집 뿐만 아니라 수줍음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연극을 하며 '음악의 양감' 을 꿈꾸기 전까지,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과 음악을 함부로 연관시키듯 말하지 않았다. 본인이 본인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뇌한 뒤에야 비로소 움직인 셈이다. 

 




* 연극 오래 했던 역량을 발휘한 경우. 한영애의 공연 영상을 찾다보면, 그녀가 무대에서 의상이나 헤어 스타일을 상당히 변화무쌍하게 하고 나오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시도가 사실 최초는 아니다. 가요 프로그램 보다 보면 '소방차' 마저도 승마복 입고 노래 부르다 간주 부분에서 갑자기 고을 원님 복장으로 갑자기 사극 분위기 내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소방차의 그런 변신은 감상자로 하여금 꽤나 뜬금없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한영애의 경우에는 뜬금없다기 보다는 그런 의상이나 헤어스타일의 변신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맥락을 초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문에 그녀의 이런 무대 연출은 상당히 전위적이다.


(캡쳐 사진은 1996년 8월 3일에 방영된 KBS의 <빅쇼>의 한영애 편 중에서.) *

 

 

앞만 본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나 사물의 여러가지 면에서 딱 하나만을 바라본다는 얘기다. 사실 포크, 혹은 블루스 장르의 음악으로 당시에 잘 알려졌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영애의 음악은 어느 하나 명확하게 그 장르를 정통으로 알고 또 하고 있다는 생각을 받긴 힘들었다. 아마 그녀가 '정통'으로 어떤 음악 장르를 파고 들었다면 그것은 객원 보컬로 참가했던 <신촌블루스 1집> 일 것이다. 공식 정규 1집인 <여울목>은 실질적으로 보자면 '정서' 만을 담고 있을 뿐, 블루스 고유의 12음계 형식을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걸 포크라고 여기기에도 힘들고.. 

 


이런 점에서 한영애에게 장점이 될만한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장르이건 정통적으로 성취한 부분이 없기 때문에 반대로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음악 장르를 섭취한 상태라는 점이다. 단점은..어느 장르이건 '정통적으로 성취한 부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충분히 음악의 앞, 뒤, 옆을 볼 수 있지만 그녀에겐 양감의 형태를 정할 수 있는 도자기가 없었다.

 


정규 2집인 <바라본다>는 그 음악적 도자기를 남의 손이 아니라 한영애 자신의 손을 통해 처음으로 빚어낸 경우다. 그녀의 파트너인 김수철의 '사랑과 평화'의 송홍섭의 가이드가 기본적으로 큰 역할을 했지만, 그녀 역시 앨범 수록곡의 작사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한영애와 두 사람은 서울 스튜디오에서 1988년 7월 7일부터 8월 10일까지 한 달 가량 집중력있게 녹음하여 이 명반을 완성해냈다.

 


앨범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들으면 가장 처음 접하는 트랙은 윤명운이 작사와 작곡을 겸한 '누구없소?' 다. 블루스의 정서가 가득 담겨져 있지만 본인 말에 따르면 '트로트처럼 부르고도 싶었던'  이 곡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한영애가 록 장르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목소리가 치명적으로 고혹적이라서 였다.

 


트로트처럼 부르고 싶다고 말을 했다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 장르는 그리 끈적하게 불러서 좋을 게 없다. 흔히 트로트의 여제인 주현미나 이미자 같은 아티스트들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을 생각해보면 대개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간드러진 편이다. 그래서 좀 무례할 수 있지만, '누구없소?' 를 부를 때의 한영애는 어딘지 모르게 사연 많은 거리의 여인같다는 기분도 든다. 트로트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이뤄질 수 없는 삶의 아픔을 마치 체로 걸러낸 듯하여 순수하게 감성적인 눈물샘을 자극한다면, '누구없소?' 는 그냥 그 자체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피로감이다. 

 


사실 눈물이 나올 틈도 없다. 곡 속의 주인공은 외로움과 고단함에 저항해보려 몸부림치기 이전에 거기에 굴복하여 그냥 무조건 이 날 하루가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어찌보면 어두운 곡이지만 사실 듣고 있으면 히트칠만 하다는 생각이 다분하게 드는 곡인 셈이다. 특히 언제나 귀 기울여 듣게 되는 부분은 맛깔나는 기타 리프인데 일본에서 태어나 조용필과의 인연으로 그의 백밴드인 '위대한 탄생'에 들어가 경력을 시작했던 박청귀의 리드 + 리듬 기타는 무심하게 물러나 있다가 간주 부분에서 스르륵 들어와 짧지만 강렬한 리프를 남기고 사라진다. 이런 형식은 지금도 다른 가수의 타이틀곡들에서 일반적으로 들을 수 없는 편이기도 하고. 여기서 방점은 무심하게 물러나 있다가 들어오고 다시 나간다는 점이다.

 


주된 리듬을 형성하며 심지어 앞으로 내세우는 기타 파트는, 의외로 베이스다. 흔히 우리는 베이스를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준다고 생각하지만, 이 곡에서 기억에 남는 서너마디의 리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이 악기다. 참고로 이 베이스 솜씨는 앨범의 제작을 맡았던 송홍섭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소리와 더불어 밑에 소개하겠지만, 쟁쟁한 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를 모두 하나의 매체로 담아낸 사람은 조하문 1집, 시나위 1집 등을 작업한 최병철 엔지니어다. 역시... 

 


이런 부분들 때문에 <바라본다>는 80년대 한국 음악 앨범이 이뤄낸 최대 성과물 중 하나로 꼽힌다. 3년 전에 나왔던 한국 록의 명반 중 명반이라 불리는 <들국화 1집>과 이 앨범을 비교해봐도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인데, 사실 잘 모른다 해도 '누구없소?' 만 들으면 바로 수긍을 하게 된다. 이후 90년대에 들어 아티스트들이 앞다투어 음향 엔지니어링과 마스터링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한국 음악계의 음향 수준이 다소 상향 평준화 되기에 이 앨범의 기술력은 다소 흔한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영애의 앨범에서 이 정도의 라인업을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기억에 남는다.

 


8번 트랙인 '루씰'은 '누구없소?' 와는 달리 온전한 한영애의 보컬을 들을 수 있는 곡이다.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다. 신촌블루스의 멤버인 엄인호는 이 곡을 작곡한 뒤 한영애에게 넌지시 말했다고 한다. "사실 나, B.B. 킹 생각하면서 이 노래 쓴 거야." 라고. 곡을 들어본 적은 없어도 B.B.킹이란 이름이 블루스 음악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라는 사실은 마치 기본 상식처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엄인호에게 그 말을 들은 한영애는 잠시 생각하다 거의 10여분 만에 스르륵 작사를 완료한다. 

 




* B.B.킹. 본명은 라일리 F. 킹 (Riley F. King) *

 

 


'루씰'은 정확히 얘기하자면 B.B.킹이 자신이 연주할 때 쓰는 깁슨 기타에 붙인 이름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 이름이기도 하고. B.B.킹이 연주를 하고 있던 한 바에서 어떤 남자 둘이 한 웨이트리스를 가지려 싸우고 있었단다. 그 때 그들의 행패로 인해 바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이들과 불을 피해 밖으로 나오던 B.B.킹은 그만 깜빡하고 자신의 깁슨 기타를 놔두고 온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다시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 결국 기타를 구해서 나온다. 그리고 싸우던 두 남자는 결국 불에 휩싸여 죽는다. 사건이 다 정리된 이후에 B.B.킹은 이후 그들이 차지하려던 웨이트리스의 이름이 루씰이란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기타에 그 이름을 붙인다. 

 


노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한영애의 끈적한 보컬은 마치 60년대 말에 한국에 '음악계의 다이나마이트' 라는 별명을 가진 김추자가 처음 등장했을 때 받았던 느낌, 혹은 세간의 유명한 평가 중 하나인 재니스 조플린이나 멜라니 사프카의 보컬 같다는 인상도 준다. 말 그대로 '첫인상' 말이다. 한영애가 가진 끈적함과 건조함은 그 세 아티스트들을 넘나든다. 고혹적이지만 거기엔 삶의 무게가 담겨 있고, 혹은 재니스 조플린처럼 절규하기엔 보컬의 기교가 먼저 떠오른다.

 


두 곡을 처음 들으면서 왜 한영애가 '미녀' 대신 소리의 '마녀' 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앨범을 제대로 들은 것은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난 일이다. 참 이상하지.. 이상은이나 신중현의 음악을 처음 들은 건 일곱살 때라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한영애의 이 <바라본다>를 처음 들은 건 정확한 나이대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머리가 약간이나마 굵어지고 나서는 맞는데 마치 최면에 걸렸다거나 꿈을 꾼 듯 진행 과정은 기억하나 시작과 끝은 몽롱하다고 해야할까..

 


그러나 확실히 최근 들어 이런 식으로 느낀 부분은 있다. 한영애라는 아티스트가 가진 독창적 보컬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갈구'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점. 그녀는 포크 장르에 어울리지 않았고, 또 완벽히 블루스 장르를 소화한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재니스 조플린처럼 술과 약물로 자신의 몸을 망쳐 (당사자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았고, 요절하지도 못했으며 절규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멜라니 사프카 만큼의 잔잔한 서정을 담아내지도 못했다. 이런 점에서 이 앨범에 유일하게 불만이 있는 곡이라면 2번 트랙인 '호호호' 다. 들을 때마다 좋다고는 느끼는 곡인데, 앨범 전체로 따지면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여튼 예전엔 한영애의 힘이 로컬 음악 신에서 그 두 가수의 감흥을 '처음부터' 전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적어도 <바라본다> 에서는 그녀가 두 가수의 위상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누나. 이 곡 히트 시켜줘.

누나가 이 곡 히트 못 시키면 내가 나중에 다시 부를거야."

 


멜라니 사프카 이야기를 했는데, 앨범을 들으며 그녀의 느낌을 상상했던 건 3번 트랙인 '비애'와 5번 트랙인 '여인 #3' 에서였다. 이 중 3번 트랙인 '비애'는 유재하가 준 곡으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1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한영애의 2집 앨범을 위해 직접 곡을 쓴 그는 그녀에게 전해주면서 위의 말을 했다. (유재하는 한영애의 절친한 동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앨범을 만든다. 그 누구보다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싶어해서 그리 되려고 노력했던 유재하는 처음으로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라이브 무대를 선보인 뒤, 결국 <바라본다>가 발표되는 광경을 보지 못하고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참 희한하다. 예술은 때로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잖아? 헌데 이미 하늘 위로 날아가 버린 사람을 다시 땅 위에 되돌려 놓지 못한다. 세상이 바뀌는 것에 비하면 한 사람은 너무나 사소하고 작은 것일지 모르는데 말이다. '비애' 는 참으로 유재하스러운 발라드 곡이지만, 그 속에는 상상도 못할 비통함이 있다. 곡은 구했지만, 그 곡을 쓴 사람을 구하지 못한 누군가의 자책감이 목소리가 되어 스피커를 찢고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루씰'의 가사를 인용하자면 '나도 너 처럼 소리를 갖고 싶어'.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소유물이 되면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결국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혹은 '누구없소?' 처럼 이 고단한 하루를 어떻게든 떠나보내고 꼭 아침을 맞았으면 하며 그 시간대를 갈구하는 것처럼. 자신의 현 상황에서 이루거나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픈 열망은 점액처럼 녹아내려 불안에 떨고 있는 영혼을 잠식한다. 아하. 파스빈더 감독님이 제목을 원체 잘 지으시니까 내가 또 어떻게든 훔쳐서 묻어가는구먼. 이루지 못한 지독한 갈망은 감상자로 하여금 귀를 뗄 수 없게 만들며 숨을 죽인 채 듣게 만든다. <바라본다>의 음악적 매혹과 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성취를 향한 갈망으로부터다.

 


그리고 이 압도감을 일순간에 해방시키는 지점은 바로 한영애가 부르는 록 장르의 곡들에서다. 4번 트랙인 '달', 6번 트랙인 '코뿔소', 마지막 9번 트랙인 '바라본다' 가 그것이다. '달'도 좋긴 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파괴력과 강렬함을 지닌 채 앨범의 핵심적인 이미지를 감상자에게 주입 시키는 곡은 바로 이 두 곡이다. 한영애는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의 인지도를 한껏 끌어올렸으며, 냉정히 보자면 제작 당시에는 그녀보다 음악계에서 더 큰 상업적 성취를 거두고 있던 아티스트들이 세션으로 총출동하여 도운 부분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을 비롯하여 김현식, 전인권, 박주연, 김효국, 김희연, 그리고 당시 참여해놓고도 앨범 참여 리스트에는 빠져 있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까지.. 굳이 한영애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혹은 같은 소속사에서 활동하는 가수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이들은 모두 자청하여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의 앨범 제작을 도왔다.

 


여기서 한영애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자신의 그 독특한 보컬과 폭발적인 성량으로 그저 코뿔소처럼 앞으로 꾸준히 돌진하는 것 뿐이다. 사실 아무리 80년대가 음악의 전성기였다 할지라도 '코뿔소' 처럼 어떤 정치적 의식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은 채 순수하게 팍팍하고 고단한 현실의 삶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곡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는 경우는 잘 없었다. 

 


그 때문인지 각기 다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라 해도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이 험한 세상 / 오늘도 달려야 해 / 우리는 코뿔소 / 자신의 모든 문제 스스로 헤쳐서 / 밀고 가야 해' 라 부르는 이 곡은 결국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가만있어 / 우리는 달려야해 거짓에 싸워야해 / 말 달리자' 라 부르는 80년대 버전의 '말 달리자' 나 다름없다. 크라잉넛 노래 말이다. 한영애가 이 앨범에서 불렀던 곡들은 록이지만 알게 모르게 펑크의 정서도 스며든 느낌을 준다.

 



 

* '바라본다' 의 코러스 녹음에 세션 자격으로 참여한 아티스트들.

맨 좌측부터 정윤정, 전인권, 박주연, 김련, 윤명운, 홍찬숙, 조정은, 김현식.

이들의 사진은 <바라본다> LP 속지에 수록되어 있다. 

신나라 레코드에서 발매된 CD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

 

 

그리고 압권은 김수철이 작곡하고 한영애가 작사한 '바라본다' 다. 5분 10초의 길이를 가진 이 곡은 작정하고 앨범의 핵심이 되겠다는 듯 만들어졌다. 위에서 언급한 세션 보컬리스트들은 다들 기본적으로 가요계에서 잔뼈 굵은 사람들이다 보니 코러스 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목소리를 들으려 혈안이 돼 있었다던데, 자신의 목소리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듯 샤우팅으로 일관하는 상태로 3~4번을 반복 녹음한 탓에 이들은 모두 작업이 끝난 후에 탈진해 버렸다고 한다. 김수철의 경우에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보다 더 한 프로그레시브적인 록 멜로디를 한영애에게 줬고, 박청귀의 기타는 약이라도 빤 듯 쉴새없이 절정의 단계로 날아오른다.

 


생각해보면 이 곡은 일부러 최대한도로 힘을 준 것이 청자들에게 오히려 더 쉽게 다가오는 계기가 됐을런지도 모른다. 한영애가 쓴 가사가 막상 볼 때 다소 난해하기 때문이다. 곡 제목 자체도 '바라본다' 이면 흔히 '무엇을' 보는지 궁금해하기 마련인데 그것이 없다. 그리고 가사의 상당수는 '숨가쁜 계절의 문턱으로 이미 지나버린 / 저 들판 한가운데 산처럼 우뚝 섰던 마음의 연민들', 혹은 '춤추는 욕망 모두 내 속에서 잠재우고 / 빈 가슴 빈 손으로 저 문을 나설지니' 같은 추상적이고 은유적인 느낌을 준다. 어떤 청자에게는 이 노래가 해당 아티스트의 심상을 생각하게 만드는 재미를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끝내 대부분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에는 결국 생각하는 것도, 아는 것도 모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접점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접점은 분명 '사랑하리라' 일 것이다. 뒤이어 나오는 '그 뜨겁던 눈물의 의미를', '그 외롭던 생명의 향기를' 일 것이다. 생각이 필요없이 이 가사들은 모두 직관적으로 훅 다가와 청자의 귀를 뚫고 들어가고, 몸을 구석구석 훑은 뒤에 심장을 강타한다.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의 정확한 나이 때는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받았던 충격은 정확히 기억한다. 너무나 충격적인 곡이었고, 앨범을 순서대로 듣다 보면 이 곡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대단하다. 혹은 체념일 수도 있겠다. '아. 결국 사랑인가' 싶어서.. 사실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의 어감이 전해주는 감흥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곡을 들으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거대한 범위를 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있었다.

 


흔히 스스로 주제, 혹은 자신의 위치를 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 분수와 주제라는 것은 대개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반영한 차원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삶의 가혹함에 좌절하고 굴복한 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한다는 얘기다. 계급의식인지 모를 그 무엇이 깨달음이라 자청하고 끼어들 때  우린 스스로 굉장한 비참함을 느낀다. 이를 보며 한영애는 우리가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고, 때로는 거대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과감히 바라보고 또 사랑해도 상관 없다고 소리친다. 

 


말하자면 무엇을 바라보든 혹은 무엇을 사랑하든, 그 앞에서 우린 '주제'를 알고 초라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바라본다'는 말 그대로 바라봄만을 이야기하는 곡이지만 신기하게도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고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며 사랑하면, 우린 점점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커진다고 노래한다. 커지려면 갈구해야 한다. 사랑은 갈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곡은 멋있다. 심지어 이 곡은 마무리 부분에 있어서 한영애의 보컬이 원래의 멜로디를 소화하지 못하고 흐트러 진다는 것을 그대로 담아놨다. 하지만 노래 부르기에 실패했다거나, 어지간히 노래 못한다며 비웃지 못하게 된다. 그 흐트러진 보컬을 담은 마무리에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목소리를 쏟아부으며 뜨겁던 눈물, 혹은 생명의 향기를.. 우리가 때로는 경멸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향기 (나도 그렇지만, 가끔 주위 사람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게 보일 때가 있거든요.) 를 사랑하라며 예찬하는 가수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 하는 일이 너무나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지간히 유토피아 같은 생활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야 모른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쳐도, 아마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으로 바꿀 수 있는게 무엇인가.. 한영애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알 수 없다. 유재하를 제외하고, 그녀는 앨범에 참여한 사람 중 김현식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들국화는 한 번 해체됐으며 전인권은 마약에 허우적댔다.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우리 앞에 닥쳐오는 위기나 느껴지는 삶의 회의가 우리의 능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삶이 오직 위기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오직 긴 시간을 두고 우리의 삶을 바라봐야만 얻을 수 있다. 바라보는 것은 갈구하는 것이다. 먼저 떠나간 무언가를 상상할 때 그게 사람이든, 되고 싶었던 꿈이든 상관없다. 떠나간 것을 다시 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야 한다. 삶과 죽음이란 모르기에 언젠가 떠나간 것들과 다시 마주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시 마주했을 때 나 이렇게 살았다고 이야기 하기 위해, 우리는 꾸준히 바라보며 갈구해야 한다. 떠나간 너를 그리워하며, 이루지 못한 나의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목이 타 왔기에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이렇게 바라봤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고 한영애의 노래는 이야기한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 곡과 이 앨범을 듣고 그리 느꼈던 것이 있어, 최대한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한영애는 여전히 살아있고 노래를 부르고 앨범을 낸다. ...6집 이후로 11년째 앨범이 나오고 있지 않지만서도. 그래도 <바라본다>가 명반이라는 사실을 퇴색시키지는 못한다. 더불어 '바라본다'는 명곡이다. 동시에 나를 살게 하는 참으로 사소하고도 큰 존재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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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을 위해서 곡을 마련해 주신 여러분들, 소리를 만들어주신 송홍섭 씨,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주신 김수철 씨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재하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 2집 앨범 <바라본다> 커버 뒷면에 적힌 한영애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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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본다 *

작사: 한영애 + 작곡: 김수철



 

바라본다

화려한 하루를 남기고 이미 불타버린

저 하늘 구탱이에 녹처럼 매달렸던 마음의 구속들

 

바라본다

숨가쁜 계절의 문턱으로 이미 지나버린

저 들판 한가운데 산처럼 우뚝 섰던 마음의 연민들

 

바라본다

춤추는 욕망 모두 내 속에서 잠재우고

빈 가슴 빈 손으로 저 문을 나설지니

아.. 그렇게 자유가 된다면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춤추는 욕망 모두 내 속에서 잠재우고

빈 가슴 빈 손으로 저 문을 나설지니

아 그렇게 자유가 된다면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그 뜨겁던 눈물의 의미를

사랑하리라 그 외롭던 생명의 향기를

사랑하리라 그 뜨겁던 눈물의 의미를

사랑하리라 그 외롭던 생명의 향기를

사랑하리라 눈물의 의미를

사랑하리라 생명의 향기를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하리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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