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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반양장)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관심 밖이다' / '참석한 적이 없다' / '행복한 세월이었다'..
이 작품은 어울리지 않는 문장들이 한데 배치되어 있고, 또 어울려 있다. *
출판사: 휴먼앤북스
발행년도: 2004년 (초판), 2007년 (양장판)
오지랖 넓은 사람이 많다. 누구 걱정해 주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단언하건대, 한국은 그 오지랖이 너무 심하게 와전되어 있다. 싫든 좋든, 자의든 타의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누군가가 잘못된 길로 빠질까 걱정해 주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개성이라 불리는 그 누군가의 '남들과 다른 그것'은 곧 위험이 된다. 모두가 한 마음이라면 이 시스템은 별다른 급격한 변화 없이 기분 좋게 한 방햐으로 완만하게 흘러갈텐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이 되길 자처하는 부속물들은 '걱정'이 되어 '다른 것'을 하려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틀 안에 넣으려고 애쓰거나, 아님 명줄을 끊어버리려 한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그렇지만 한국에서 보통 이런 숙명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예술가들이다.
어떤 분야의 예술이든 남들과는 다르게, 그리고 때가 되면 변화해서 끊임없이 살아있다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 예술이다. 모든 것이 곧 창작의 과정이라 할만한 예술이 살아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본모습을 평가받을 수 있는 순간을 상실해 버린다. 이미 김춘수 시인이 한 번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키고 지나가서 인용해 보는 것인데, 예술이 없다면 우린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지 못하고 그저 몸짓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기계의 부속품이 되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몸짓을 행하고야 마는 것이다.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지 못한 채..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김영갑 사진작가가 찍은 아름다운 사진들과 직접 쓴 글이 담겨져 있는 에세이집이지만, 일반적으로 에세이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잘 비껴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함정이란 에세이 특유의 피상적인 부분들 (아무리 피상적이라도 이건 정말 별다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잡생각만을 기록한 듯한) 을 말한다. 왜냐면 작가가 에세이를 쓰면서 보여주는 태도와 실로 극적이다 싶은 인생사 때문이다. 인생에 관한 것은 모두가 그처럼 살 수 없고, 솔직히 본받아 살고 싶기에도 좀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남들과 차별화된 개성의 에세이집을 만들어 내는데 '공헌' 했다고 평하자면? ...어쩌면 그것은 너무 잔혹한 발언일런지도 모르겠다. 공헌이라니.
책 제목과 흰색 커버와 사진 세 장으로 이뤄진 산뜻하고 간결한 디자인으로 이뤄져 있지만,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볼 것은 다름아닌 작가가 찍어 조그맣게 축소한 세 장의 파노라마 사진들이다. 아름다운 제주도의 하늘과 자연요소들을 담고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돌과 여자, 그리고 '바람'이 많다는 제주도의 특성을 살려내기 위한 작가적 의도가 담겨져 있는 작품일 것이지만 굳이 자신의 에세이집에 이것을 집어넣은 건 지리적 특성보다도 더 많은 것을 봐 달라는 의미가 있는 것일게다. 격함. 그것은 김영갑의 인생이자 제주의 역사를 은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태풍이라는 것은, 그가 남들의 오지랖을 애써 무시하고 '다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노력과 그로 인해 감내해야 할 상황들이다. 내가 읽으면서 압도당한 것은 서문이 시작되자마자 그것이 느껴져서다. 김영갑 작가는 루게릭병에 걸려 있었다. 정확히 이 작품을 써내려가기 전부터 대외적으로 그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런데 잘 알려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의 작품 속에서 그것을 드러내려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에도 모자란 판에 굳이 자신의 어두운 면까지 자청해서 보여줄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런데 작가는 본문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서문의 몇 페이지 안에서 두 일부분 만으로 독자에게 쐐기를 박는다.
'...외로움 속에 며칠이고 나 자신을 내버려둔다. 그래도 모자라면 등대 밑 절벽 끝에 차려 자세로 선다. 아래는 30미터가 넘는 수직 절벽이고, 바닥은 절벽에서 떨어진 바위 조각들이 날카로운 이를 번뜩인다... (중략)' -> p.25 <시작을 위한 이야기> 중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호흡 곤란으로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 지금 나의 모습이다. 침을 삼키다가, 물을 마시다가, 이야기하다가, 잠을 자다가, 수시로 호흡 곤란에 빠져 눈물을 흘린다. 어쨌든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 p.26 <시작을 위한 이야기> 중에서
그는 죽어간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서문이 이렇게 소개됐으니 에세이의 전개방향도 어찌보면 쉽게 예측되는 것이다. 그는 거의 없는 살림상태로 제주도와 마라도로 건너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필름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순간부터의 기록은 사실상 일반인들은 경악할만한 수준이다. 그의 프로필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더라는 고리고리짝 시절의 허구가 가미된 이야기가 아니라 김영갑, 그에게는 실재하는 인생이었다. 거의 다 쓰러져가는 폐가에서 살고, 임시로 허름한 천막을 만들어 곰팡이가 피어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찍어놓은 필름들을 그 곳에 보관하고, 못 쓰게 되면 태워버리는 잔혹한 행동의 반복. 그리고 걱정하는 부모와 형제들, 친구들과의 연락을 모두 끊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전화마저도 꺼 두고 사는 행동들.
내가 바라보는 김영갑이란 인물은 예술에 매혹된 나머지 그것에 자신의 자아가 먹혀버리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다. 물론 이것은 인생을 살면서 나에게 맞추느냐,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것에 맞추느냐로 고민하며 그 무게를 어디에다 두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전자와 후자 중에서 어떤 인생이 좀 더 험난하냐고 한다면 후자 쪽에 답이 기울어지곤 한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 있을지언정, 무언가를 먹고 최소한 지붕이 있고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는 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본능이자 조건이 아닐까? 아무리 좋아도 그것들까지 포기하다시피 해야했을까? 이 개인적인 물음에 관해 김영갑 작가는 책을 통해 대답한다. ...그래서 자신이 루게릭병에 걸린 것 같다고 말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병은 서문에서 암시를 주는 정도이고, 177쪽부터 시작되는 2장의 글부터 구체적으로 병명과 여러가지 증상들, 점점 굳어가는 육체들이 언급된다. 그 사이에 언급되는 것은 한국사회와 '제주' 사회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예술을 하기 위해 작은 시도들을 지속해 온 작가의 노력이다. 그로 인해 알 수 있고, 또 작가 스스로도 생각하는 것은 예술가란 족속이 얼마나 이기적인지에 대한 것이다. 어느 누구가 평화의 섬이라 이름 붙였고, 또 관광지로도 유명하지만 제주 사람들은 한 집 건너면 모두가 죽음의 경험을 알고 있거나 겪고 있을 정도로 제주는 '육지사람'들이 일으킨 4.3이라는 잔혹한 역사와 그로 인한 슬픔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육지사람'인 김영갑 작가는 제주의 정신을 알아내고자 그들처럼 생활하고, 노인들의 말상대가 되어주면서 그들에게서 아픈 과거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듣는다. 어버이같은 마음으로 끼니를 굶고 사는 그를 걱정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그의 존재는 '빨갱이' 이다. 1장 52 페이지부터 시작되는 '고향이 어디꽈? 빈 방이 없수다'에서 그를 사납게 대하는 주인집 할머니가 그렇다. 다소 냉정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어느 시골 마을의 할머니는 아픈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그의 집념은 사람을 잃게 만든다. 마라도에 갔을 때도, 예술에 정신이 팔려있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작품의 대상'으로 생각해 온 한 소녀의 마음을 얻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병을 앓아서 고생하게 됐을 때 도와주겠다는 형제들의 말을 들었다면 적어도 그들의 마음을 그만큼 아프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산소에 제사라도 지내줬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제주 사람들도 다 같은 한국인인데 육지와 거리를 둔 채 자신들만의 경계를 설정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책임을 물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받을 것 같아 오히려 자신들을 숨기고 살아간다. 그들이 억울하게 받은 오해는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에 이어져 내려오는 일종의 '금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금기에 대한 저항을 사람의 직접적인 강요로 끌어내는 건 부당한 일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에게 불쾌감만을 심어줄 뿐이다. 이에 비교하여 예술이 위대한 점은 존재 자체로도 강렬하지만, 사람의 손에서 창조됐다고 생각하면 그의 생각이 일종의 필터처럼 거쳐져 간접적으로 접근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불쾌감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적다. 예술은 그 자체로 사유할 거리를 만들어주고, 그 때문에 호응이 있으며 사람이 직접 뭔가를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그래서 예술은 금기를 돌파하는데 아주 유용하고, 그 때문에 저항적이다.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그것을 알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혹은 자신의 개인적 의도로 뭔가를 만든다면 두 대상에게 사려 깊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은 밝음과 어두움을 포용해야 한다.
그래서 예술가가 누군가와 어울렸을 때 잘 풀리는 광경을 그리 보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고, 가지 않은 길을 향해 한 발자국 씩 내딛어야 한다. 안정이라는 것을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김영갑 작가가 자신의 사진을 위해 제주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면 근현대사였던 4.3의 기억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이고, 세계를 알아가는 건 결코 단기간 내에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족이라는 존재는 예술가에게 얽매임의 대상이다. 그것을 뿌리쳐야만 자신이 탐구하고자 하는 것에 몰입할 수 있다. 책의 표현대로라면 '수도승'인 셈이다.
결국 최종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예술은 충분히 이기적이다. 세계를 알기 위해선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고, 자신과 연관된 사람들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내쳐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것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게 고백한다. 이것을 읽고 이후 루게릭병 이야기가 등장하면 기어이 눈물이 난다. 결국 이것은 한 예술가의 화려한 소멸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병에 걸린 자신을 동정해 달라는 의사도 없고, 사진예술과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맞바꾼 것을 늘어놓고 후회하지만 그것 역시 독자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이것을 숙명처럼 이야기한다. 자칫 보면 예술가로서의 삶이 얼마나 후회되는 것인지에 대한 고백일지 모른다. ]
그러나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진 예술가의 삶을 사는 것은 얼마나 신성한 일인지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다. 사적인 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같다고 생각한 풍경이 실은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러나 '카메라만 좋은' 대부분의 얼치기들은 예술로 향하는 여정에 대해서 일말의 인내도 갖고 있지 못하다. 참고로 김영갑 작가는 더 잘 살 수도 있었다. 그가 개인전을 열 때 눈여겨 본 바깥쪽에서 여러가지 청탁들과 제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찍고 싶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거부했었다. 그로 인해 끝없는 빈곤에 시달려야 했고, 갤러리를 세워서 마침내 돈을 벌게 됐지만 이미 자신의 몸이 병들어간 후였다. 그는 그런 모든 상황들을 풀어놓는다. 자신의 삶이 존중받을만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두지만, 글 중간중간과 더불어 말미를 향해 가면서 그는 자신이 봤던 세상이 어떤 것인지만큼은 독자에게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애쓴다. 제주의 세상을 알아가면서,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특권들 (그 특권에는 가족과 친구들을 갖고 있다는 것도 포함되겠지.) 을 포기하면서 무엇을 보려고 했는지. 그는 단언한다. 나는 '이어도'를 봤고, 체험했다고. 현실의 이어도는 공중에서 부감으로 봐야만 포착할 수 있는 납작한 바위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어도는 보는 순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섬이다. (현실의 이어도 역시 그렇다. 요즘이야 헬기를 이용하면 볼 수 있지만 옛날에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이어도를 봤다면, 그건 그 사람이 풍랑을 만나 파도를 이용해 높게 떴을 때의 얘기일 것이다. 그러면 아무래도 살아남기 희박하겠지.)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너무나 징글징글하다. 아름다운 사진 속에는 '이 풍경을 보고 싶다, 놓치고 싶지 않다' 라는 세차고 끈질기게 들러붙는 악마적인 욕망이 숨겨져 있다. 그의 삶의 방식은 그저 이 책을 인상깊게 남기려는 데 쓰이는 부가요소일 뿐, 작품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꼭 느껴보고 싶은 아름다운 자연의 예술이었다. 이 책은 꽤 오래 전부터 출판이 되어 있었다. 작가 생전에 출판됐었으니 당연할 것인데, 나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에는 책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사람의 인생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돈을 주고 책을 사는 것은 관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어떤 명성과 시류의 흐름에 따라 책을 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저자라면 책의 내용과 작가를 믿고 돈을 내어 사 주는 독자의 기대치를 만족시켜줘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내가 순전히 독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 생각은 확고하지만 당시에는 더 그랬고, 또 그래서 '에세이'를 믿고 살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에세이가 개인의 일기장에 적어놓고 볼 수준인데 이름값으로 부당하게 돈을 받고 파는 것 같다는 불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난 막 고등학생이 되어있었고, 입학하자마자 둘러본 교내 도서실에서 이 작품이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봤지만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가치를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 때 이 작품을 읽었으면 어땠을까. 어느새인가 학교 밖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관성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고등학생 생활을 한다는 것은 군대와 더불어 거의 기본적인 인간의 생활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던가.) 별다른 변화는 없었겠지만 아마 김영갑 갤러리에 가 보지 않았을까. 그 때는 작가도 생존해 있었으니 말이다. 이 에세이는 순백의 고결함과 순결함이 내면의 끈적한 타르같은 예술을 향한 검은 욕망과 만나 조화를 이뤄내고 있다. 그리고 그 조화를 통해 내가 느끼는 것은 '박력' 이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것을 느끼기 위해, 자신의 인생마저 내던진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인생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여기는 확신 하에. 그래서 남자는 인생의 말미가 되면 자연스럽게 하는 후회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주 오름을 응시하고 있다. 흔히 대부분의 에세이집은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해.' 라든가, 아니면 '너도 나처럼 살 수 있어.' 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김영갑 작가의 이 작품은 읽으면 절대 그처럼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연히 나 역시 그의 인생을 본받을 생각은 없다. 내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 그가 살았던 인생을 내가 또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런 진솔한 태도가 이 작품에 하나의 가치를 부여한다. '김영갑 작가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작품.' 그는 이런 삶을 살 수 있다. 나는 이런 삶을 살 수 없다. 이것은 제주의 땅 위에 뼈가 뿌려지고, 영혼은 이어도로 훌훌 떠나간 '김영갑 작가만의 작품'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