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날의 꿈 : 한정판 커피북
안재훈 외 감독, 박신혜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HD / Color / 110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98분 (극장판)

 

(2012, 5, 30)


나는 아직 충무로에서 직접 굴러볼 배짱이 없는 탓에 사실 얘기거리로 삼아 거들먹거릴 입장이 못 된다. 허나 들은 바로는 한국의 충무로에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그보다 더 하다. 2011년에 개봉한 또다른 애니메이션인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제작한 명필름조차도 오랜 시간 살아남은 영화제작사이지만 이 작품에 한해선 어떤 주제의식이나 미학적 지향점보다도 '우리가 이것을 만들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 (명필름이 만들었지, 디즈니가 만든 건 아니니까.) 을 제일 힘줘서 말했다. 한국에선 한 편의 영화보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어떤 흥행 관련 전망이나 가십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에 의미가 부여된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된 박세종 감독의 <버스데이 보이>, 프랑스 칸 영화제에 초청된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을 제외하고서라도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 V>, 오성윤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제외하면 한국 애니메이션이 어떤 관객동원으로서의 상업적 이윤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우리가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실질적으로 해당 제작사의 수고를 모두 보상해주지 못한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한국 애니메이션의 제작은 몇십년째 '제작하는 것 자체가 기적' 이라는 의의만으로 버티는 중이다. <소중한 날의 꿈> 역시 그런 현실적 무게를 견뎌내야만 했다. 11년간..


작품은 여주인공인 이랑의 달리기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체육, 특히 달리기를 잘 하며 스스로도 자부심을 갖고 있던 이랑은 그 날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추월당한다. 당혹감을 느낀 이랑은 결승선을 앞두고 갑자기 넘어지기를 자처한다.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피치못할 불의의 사고로 졌음을 연출하고 또 어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와 타인들에게 지레 겁먹고 거짓을 한 대가였을까. 이랑은 달리기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시점에서 두 사람을 만난다. 한 명은 서울에서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로 전학을 온 여학생인 수민이며, 다른 한 명은 후에 만나게 되는 같은 학교의 학생인 철수다. 그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랑의 일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소중한 날의 꿈>은 2007년경에 티저 포스터를 한 번 공개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지금에서 완성된 것과 다른 그림체로 그려져 있었는데, 이후에 한 번 뒤엎고 새로 만들어졌다. 작품의 메인 포스터는 철수가 이랑에게 노란 우산을 수줍게 건네주는 것이며 한국 개봉제목과 달리 영문제목은 였다가 로 바뀌었다. 작품을 보면 시작하자마자 철수가 바로 나올 것만 같으나, 이랑의 눈에 바로 들어오고 초반에 또다른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이는 수민이다. 도대체 이 작품은 뭘 다루려 하는 걸까? 작품이 대답한다. 전부 다!

 

 


작품의 외피는 학창시절의 행복한 순간들, 그 중에서도 첫사랑을 부각시켜서 관객들의 공감을 사는 길을 택한 추억팔이용처럼 보인다. 특히 인물들의 복장이나 분위기를 체험해 보지 않은 세대의 입장에서는 2011년이 <써니>의 성공 덕에 복고의 문화가 잠시 뜨겁게 (...군대는 확실히 그랬다. 뭐, <써니> 라기 보다는 티아라의 영향이 더 컸겠지만서도.) 달아올랐던 시기를 떠올리며 잠시 그런 생각을 해 봤다. 과연 저런 류의 작품들이 묘사하는 풍경이 정말 1980년대가 맞는가? 한국에는 이상하게 왜곡되어진 80년대를 다룬 작품들이 많이 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소중한 날의 꿈>을 감상하는데 있어 큰 오류로 작용한다. 작품을 다 보고 자전거를 타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문득 이 작품이 그러한 일시적 열풍이 불기 전부터 이야기를 뒤엎고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작년에 보여줬던 그러한 경향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운 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굉장히 불분명하다. 당시 학생들이 입었던 교복이야 60~70년대까지 거의 동일한 디자인으로 일관됐으니 그렇다 치고, 작품은 시대와 추억을 상징하는 문화적인 코드들을 하나씩 제시하고 있다.


이랑이 철수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게 되는 계기는 두 가지 사건이 있어서이다. 하나는 철수가 날아보겠다며 학교 옥상에서 행글라이더를 만들어 비행을 시도하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이보다 전에 등장하는 장면인데, 여러명의 남자들이 수민을 좋아해서 치근덕대듯 장난치는 장면이다. 물론 그 전에도 한 장면이 존재한다. 이랑과 수민이 모기 잡는 방역차의 매캐한 연기에 숨을 못 쉰 다음 터널로 들어갈 때다. 그들은 거기서 방역차와는 다른 독특한 디자인의 차량을 한 대 보게 되는데, 이제보니 그것은 차라기 보다는 일종의 전동 자전거같은 것이다. 그리고 곧 또래의 남자아이가 뒤에 웬 안경 쓴 남자를 태우고 낑낑거리며 그것을 몬다. 이랑과 수민은 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사실 학교 복도에서 이랑과 철수가 눈을 마주치는 장면을 제외하면, 철수가 등장하는 두 장면은 굉장히 현실성 없다. 그러니까 내 생각은 그렇다는 거다. 내 학창시절의 기억을 아무리 복기해봐도 주위에 그렇게 미래지향적인 운송수단을 몰고 고물을 모으는 사람, 혹은 학교 옥상에서 거대한 연을 만들어 비행을 시도하는 애는 본 적이 없다. (그러고는 추락했는데 멀쩡하기까지 하다.) 허나 거기서 시대의 불분명함이나 비현실성을 지적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오히려 보고 있는 동안엔 현실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 작품의 배경미술이 뛰어난 덕이기도 하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취약점은 어느 문화권의 작품인지 그림으로 볼 때 섣불리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다. 허나 일본 쪽의 작품이거나 미국, 프랑스, 중국 등의 작품일 경우 그림체나 배경으로 '훅' 하면서 그 쪽 동네의 작품이라며 금방 알아챌 수 있을 때가 많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임을 아는 것은 일러스트와는 많은 차이가 나는 본편 작화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색감을 보고 그리 느낄 때였다. 이건 분명 좋지 않다.

 

 


<소중한 날의 꿈>은 그런 문제점들이 해결된 한국 애니메이션 중 한 편이다. 어느 정도냐면 실제 배경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스캔하여 모조리 그림으로 옮긴 콘 사토시 감독의 <도쿄 갓파더즈>의 작업방식을 연상시킬 정도로 배경이 보여주는 세밀함과 정서적 감흥은 경악할만한 수준이다. (게다가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의 애니메이션이다! 5~60년대에 디즈니와 도에이에서 제작한 이후로 2000년대에 픽사의 작품을 제외하고 시네마스코프 애니메이션을 보기가 힘들었다는 걸 생각하면, 한국에서 이 화면비의 작품을 본다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경험이기도 하다.) 주로 밤 시간대를 배경으로 진행되며 극도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도쿄 갓파더즈>와 달리 <소중한 날의 꿈>은 멋진 화구도와 세밀함 속에서 파스텔 톤의 따뜻한 색감을 고수한다. 이성강 감독의 <마리이야기>에서 발전한 듯한 인물작화와 더불어 이런 점들이 '한국의 토양에서 꽃을 피운 애니메이션' 이란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점의 이 작품의 기이함이다.


이 작품은 외형적으로만 봐도 좋은 의미로 한국에서 제작됐다는 것을 알게 한다. 시대를 정확히 말하지도 않는다. TV에서는 김일의 레슬링 장면이 중계되는데 이랑이 보는 작품은 <러브 스토리> 다. (1970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레코드 가게에서는 '산울림'의 앨범이 꽂혀져 있다. (산울림은 1978년에 데뷔했다.) 그런 뒤죽박죽의 세계지만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면 작품이 더욱 힘을 주고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시대상이나 주인공들이 풋풋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랑, 철수, 그리고 작품이 알고자 하는 것은 자아성찰이다. 보통 대다수의 작품들이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 속에 부수적으로 자아성찰의 요소를 집어넣는 반면, 이 작품은 반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만약 인물들이 걸어가는 장면을 롱 쇼트로 구성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만행의 애니메이션' 같은 비유를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래서 작품을 보면 구태여 시대상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은 헛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인물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 현재의 나, 혹은 누군가가 고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이다. 그 점이 20여년의 시간이 응축된 듯한 이 괴이한 페러렐 월드에 현실성의 무게를 더한다.


허나 이랑이 자신은 이 세상에서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또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풀어나가는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이랑이 더이상 계주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뒤에 철수만큼이나 많이 동행하고 또 일종의 롤 모델처럼 여기는 사람은 수민이다. 처음에 이랑은 전학 첫 날에 노래 불러보라는 학급의 짖궃은 요구에 거리낌없이 한 곡조 뽑아주는 대담함과 더불어 의외의 가창력을 가진 수민에게 반해 동경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즈음에 기계장비를 잘 다루고 한국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어 하는 철수를 만난다. 거기서 우산을 빌려주고 음료수를 사 주는, 그러니까 여성에게 애정을 담아 호의를 베푸는 것이 생전 처음이라는 철수와 순진하기 그지 없는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청력장애를 앓고 있지만 솜씨 좋은 비행조종사이자 과학자인 철수의 삼촌, 그리고 철수라는 캐릭터 덕에 작품 속에는 우주의 모티브가 별 다른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들어와 자릴 잡는다. 물론 '사이언스 픽션'으로서의 SF가 아닌 '사이언스 판타지' 로서의 SF다.


철수는 이랑과의 첫 데이트 장소로 자신과 삼촌의 아지트에 데려가야 겠다고 마음먹는다. 동네 꼭대기에 위치한 아지트는 그냥 일반적인 주택집이다. 안에 있는 각종 장비들이 놀랍긴 한데, 그것들이 배치된 이유는 삼촌이 외계에서 오는 신호를 수신하기 위해서란다. 자신만만한 철수의 설명을 들으며 이랑이 보이는 표정은 그저 당혹감 뿐이다. 물론 외계의 신호가 수신될 리가 없다. 공무원의 횡포로 재개발 지역권에 들게 되면서 동네 일부가 철거되고, 거기에 포함된 철수와 삼촌의 아지트는 산산조각 난다. 공상가들이 현실에서 이뤄놓은 것들은 죄다 망가진다. 결국 작품 속의 우주는 그저 인물들의 공상에서만 구현된다.

 

 


그러나 작품은 구태여 현실과 공상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이 극영화와 다른 이점이 있다면, 극영화만큼의 현실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랑은 우주복 없이 인공위성에 앉아있을 수 있으며, 말을 할 수 없는 삼촌이 거기선 이랑에게 조언을 해 주기 위해 말을 한다. 작품은 그런 것에 걸맞게 우주로 나아갔다가 공룡이 살던 시대로 넘어가는 등, 시공간을 마음대로 오간다.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미지들이 이랑이 더 성장할 수 있게끔 큰 도움을 준다. 세상이 됐든, 한 사람이 됐든 뭔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이들은 공상가들이다. 뭐.. 꼭 다 영향을 끼쳤다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철수는 이런 점에서 남자 주인공이면서도 동시에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서 긍정하게 만드는 큰 힘이다.


반면 여주인공인 이랑에 관해서는 아쉬움을 보인다. 작품은 이랑이 이전의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새롭게 거듭나는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현재의 자기자신을 긍정하고 그만 뒀던 거 계속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수민을 동경하던 이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애가 허세덩어리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된다. 예술가의 삶을 꿈꾸는 수민은 정확히 뭘 하겠다는 목표없이 미술관에 있는 배철수 닮은 아저씨 (그것도 '송골매' 초창기 시절의 배철수가 아닌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막 시작됐을 시점의 모습을 닮았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시점이라는 거다.) 를 사랑하며 30대 초반에 자살하는 게 목표라고 얘기한다. 수민이 이랑에게 위대한 예술작품 마냥 특별히 보여ㅈ는 거라며 건네는 자작 시집의 시 일부는 이상 시인의 <오감도>의 영향권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민은 이상이나 목표로 하는 30대 보다도 더 일찍 세상을 떠난 3J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를 꿈꾸는 얼치기에 불과하다. 일찍 요절하여 불멸의 아이콘이 된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요절하고 싶어서 한 사람들이 아니다. 수민은 그들의 예술적 감각을 따라갈 수 없으며 죽음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이랑도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느끼게 되고, 이후로는 더이상 수민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다.


문제는 수민이란 아이가 실은 그닥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 보여지고 나서도 끊임없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마냥 등장한다는 점이다. 정확히 이랑은 자아성찰을 하게 된 근원에 여태까지 자신이 잘 한다고 믿어왔던 것에서 패배를 맛보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도망다니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같은 체육부원이자 앞질렀던 아이가 이랑을 설득하려고 계속 찾아온다. 자아성찰에 관한 갈등이 실질적으로 다른 체육부원을 통해서 부각됐어야 했다. 허나 이런 장면들은 인상적으로 연출되지 못한데다 많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랑이 달리기를 잘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다. 언제부터인가 수민은 곁가지에 가까운 인물로 남게되고, 큰 주제의식을 다루다 보니 정작 기본설정이 자칫하면 망각될 위기에 처한다. 우주와 공룡이라는 거대한 이미지들이 이랑의 꿈을 은유하듯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지만 어떤 때는 연관성을 짓기가 모호할 때가 있다. (어차피 제작 시점이 다르니 큰 상관없겠지만 애니메이션 계의 <트리 오브 라이프>가 되고 싶었는지 물어보고 싶다.) 앞에서 공룡이 등장할 것이라는 암시는 거의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철수가 해남 땅끝마을에서 삼촌이 비행을 시도할 거라는 사실과 공룡발자국 정도를 언급하다 그 곳에 직접 가보는 정도다. 뛰어난 배경미술은 해남 지역의 유적지에 사실감을 더한다. 허나 이런 지역학적 사실감과 더불어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과 방법을 말하는 캐릭터들 앞에서 많은 사전설명을 거치지 않은 공상은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뒤쳐진 공룡이 남기던 발자국 하나는 함축성을 가졌다기 보다는 웅변의 도구로 보여 어째 좀 거북스럽다. 이 거북스러움은 이랑이 다시 달리기를 시작할 때도 사라지지 않아서 많이 아쉽다.

 

 


이런 아쉬움들을 그나마 상쇄시켜 주는데는 작품의 유머가 큰 몫을 한다. '포항 아트필름 페스티발'에서 조그만 강당에 다른 관객들과 함께 작품을 보며 느꼈던 점은, 코미디 장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향한 유머의 적중률이 상당히 뛰어나고 꽤나 그 발생빈도가 많다는 것이다. 또래의 여자아이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서 존댓말을 쓰는 철수와 이랑의 서먹서먹함은 어딘가 귀여워 보이고 재밌다.


하지만 진짜 재밌는 부분은 이 작품이 어떤 언밸런스함에서 유머를 포착해낼 때다. 처음엔 차가운 매력만을 풍기던 수민이 작품이 진행될수록 능력도 안 되면서 도도하기만 하다는 것이 드러나 웃음을 주는 게 그렇다. 그 외에는 레슬링을 좋아하고 남자다운 장난꾸러기지만, 누나를 향해 '언니'라 부르는 이랑의 남동생, 유년기의 미숙한 사랑의 감정을 나훈아의 '무시로'를 배경음악으로 삽입해 묘사하는 괴이쩍은 센스는 착하기만 해 보이는 작품에 또다른 신선함을 부여한다. 가장 압권인 것은 중반부가 넘어서고 나서까지 아지트로 쓰는 집의 철거를 놓고 철수와 삼촌을 찾아오는 공무원 캐릭터다. 작품에서 그나마 악역에 속하는 이 캐릭터는 특유의 철두철미함으로 이들을 괴롭히는데, 본디 선과 악의 강한 대립을 다룬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그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허나 작품은 현실세계였다면 철저하고 우수한 관료주의 엘리트로 보였을 그의 성격이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는 충분히 희화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잘 활용하여 이 캐릭터를 귀엽게 만든다. 자신의 꿈을 찾는다고 다른 거 둘러볼 정신도 없는 캐릭터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끼니 걱정을 하는 이 남자는 (아지트를 비롯한 여러 건물들을 철거하는 현장에서 그는 굉장히 진지한 목소리로 "10시 정각이야! 12시 정각에 밥 먹어야 돼! 우리 엄청 배고프다구!" 를 외친다.) 사실 어찌보면 악역임과 동시에 철수나 이랑, 수민같은 이들이 되고자 했던 수많은 꿈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품이 그에게도 유머러스함을 부여했는지 모른다. 쉴새없이 큭큭대다 보면 뭐든 기분 나쁜 것들도 덜해지는 법이다. 이 작품의 유머는 그런 유연함을 발휘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작품의 '친절함'을 단점에서 장점으로 끌고온다.


"난 달리기를 할 줄 알지만 세계에서 1등 정도는 아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들은 다 그렇다. 그렇다고 근사한 어른이 될 수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어른으로 가는 길에 있다. 그 과정 중에 지쳤을 때 어떤 일을 할지 모르던 시시한 때를 기억하려고 한다. 누가 가는 길이든 처음 가는 길이든 스스로 다다르기 위해 내딛는 지금, 내 작고 힘없는 발자국이 기특할 때가 있을거라 믿는다. 그런 것들을 꿈꾸는 나와 철수는, 하찮지 않다. 1등은 기분 좋은 거다. 그러나 내가 만날 꿈들이 등수가 매겨지는 일이 아니었으면 한다..."

 

 


달리기 장면까지가 사실 좀 작위적인 느낌이 있지만, 저 나레이션을 들을 때 잠시 마음 속에서 울컥했었음을 고백해야 겠다. 관객을 향해 외치는 듯한 결말이 뜬금없어서 달리기 장면에서 끝을 냈어도 됐을거란 생각이 드는데..사실 저 나레이션의 뒤를 생략시켰는데, 뒤로 갈 수록 나레이션 역시 굉장히 두서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멋있는 건 멋있는 법이다. 세상에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법은 사즉생에 가까운 길을 걷는 것만큼 힘들고, 만약 그 길을 통과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자길 깎아내렸던 원인이 사실 굉장히 사소하다는 걸 알고는 공허에 사로잡힌다. 동네 이곳저곳과 학교, 그리고 해남 공룡 유적지를 오가며 이랑이 결론내린 건 다시 달리는 것. 요즘 들어 더욱 성숙한 여성미를 뽐내시는 윤여정 선생의 말을 인용하자면 '답 없는 길을 그냥 가는 것' 이다. (윤여정은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 관해 <씨네 21>과 2010년에 인터뷰하며 위의 말을 했다.) 이랑이 달리고 있을 그 시간에 철수의 삼촌은 한국 최초의 항공기인 부활 호를 타고 해남 공룡유적지 위를 날고 있다. 앞에서 쓰다 깜빡한 게 있었는데, 철수가 이랑을 비밀기지에 데려오고 나서 부활 호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고물로 주워왔다는 것 말이다. 결국 삼촌은 성공한다. 이랑 역시 더 나은, 그리고 동시에 하찮아 보이는 꿈의 강박에서 벗어나 다른 상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리는 중이다.


작품은 이랑이 결승선을 통과했는지, 혹은 1등을 했는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철수의 삼촌이 무사히 비행을 하고 착륙했는지의 여부 역시 보여주지 않는다. 불안함과 관련된 암시? 당연히 아니다. 결승선을 통과함으로 인해 꿈을 이뤘는지 아닌지는 무의미하다.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그저 꿈을 향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그냥 달리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힘을 내어 달릴 수 있는게 행복하다고 얘기한다. 거기에는 어떠한 패배자도 없기 때문이다. 계속 뭔가를 향해 달릴 수 있다는 것. 혹은 날아 보자는 것. 작품은 중요한 건 이런거라며 격려한다. 나는 울컥했고 이야기는 몇 분의 사족을 펼쳐 보이고는 끝을 맺었다.

 


p.s.1 - 그러나 이랑의 달리기 장면과 교차되는 인물이 철수의 삼촌이 아닌, 철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계속 했습니다. 왜 철수가 막판에 나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이랑과 같은 학교 학생이니 달리기 참가한다고 그랬을까요..


p.s.2 - 작품은 개봉 당시 관객들에게 기념으로 원화를 나눠주는 행사를 했다고 합니다. 10만여장이 넘는 원화가 대기 중이었고, 이 원화들이 모두 사라지면 작품이 손익분기점을 넘는 것과 같다고 했다더군요. 그런데 결국 원화가 남았습니다. 흥행에 실패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원화를 소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작화가 참 마음에 들어요.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들과 스타일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그림자 부분을 아끼는 것에서 저는 <소중한 날의 꿈> 정도로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그림체가 제 취향인가 봅니다. 작화에 관해선 개봉에 맞춰 이뤄진 안재훈 감독님과의 인터뷰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소중한 날의 꿈>의 캐릭터는 딱히 정해진 스타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탭 모두가 각자의 생각대로 그리면서 출발했어요. 그렇게 진행하는 과정 중에 그림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그런 작업을 반복, 지금같은 복고적 느낌이 가득한 동그란 캐릭터로 완성됐죠. 그런데 <소중한 날의 꿈>의 투자를 위해 우리가 그렸던 버전들을 많은 회사에 보냈습니다. 그러다 우리 작품을 마음에 들어한 회사가 그걸 자신들 회사에 업데이트를 한거죠. 한 마디로 많은 분들이 보셨던 예전의 포스터는 '유출' 된 건데, 그야말로 선의의 유출이죠. 오히려 그 유출로 <소중한 날의 꿈>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까요.


다만 그렇게 스타일을 수정하면서 많은 의견들이 오갔습니다. 첫 컨셉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스타일로 계속 발전한다면 3~4년 뒤에 일본 스타일을 따라잡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탭 중 한 분이 "감독님은 연기를 하고싶은 캐릭터를 그리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이런 스타일로 가면 CF만 할 수 있는 캐릭터가 될 뿐입니다." 순간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반성했는지 모릅니다. 그 말 한 마디가 <소중한 날의 꿈>의 작화를 바꾼 중요한 포인트였으니까요. 그래서 일반화된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따라하지 않고 우리만의 스타일로 다시 가자고 했습니다. 한 테이블에서 각자의 개성에 맞게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의견을 나누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 뒤 드디어 CF가 아닌 '연기'를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이 지금 <소중한 날의 꿈>의 캐릭터가 됐습니다....'


p.s.3 - 이랑의 성우를 맡은 배우인 박신혜 님의 연기력은 아쉬움이 남는 편입니다. 전체적으로는 무난하게 흘러가는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나 어느 정도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이 필요한 시를 읊는 장면에서의 연기는 관객으로서 작품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더군요. 반면 철수의 성우를 맡은 송창의 님은 개인적으론 전문 성우님들과 맞먹을 정도로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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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자 2013-07-0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글을 보게 되었네요. 저 또한 굉장히 인상깊게 본 애니메이션 이기에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또 새로운 시각을 얻어갑니다. 아마 아시겠지만, 현재 영상자료원에서 <소중한 날의 꿈> 레이아웃 전시전이 있습니다. 원화들과 피규어, 스틸샷, 포스터 등 꽤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글 쓰는 현재 시점에서도 계속 되는지는 확인해봐야 겠네요) 쨌든, 좋은 글을 읽은 감사로,,, 혹시 도움이 될까해서 짧게 댓글 남깁니다.

홍준호 2013-12-09 18:55   좋아요 0 | URL
..여기에 글을 남겨주시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네요. 블로그와 병행하려고 천천히 남기고 있었던건데,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짜증나서 놔두고 있었거든요. Memories 님,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날의 꿈> 전시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서울에 살지를 않는 관계로 전시전 하나를 보려고 원정 가기가 좀 그랬어요. 매번 그렇게 가긴 했었지만, 그리 할 때마다 돈이 많이 들었거든요.

여튼 이 블로그에 들어오셔서 글도 남겨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답글 늦게 달아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