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수박향기(에쿠니 가오리: 소담출판사, 2012)
어느 기묘한 여름날의 이야기들
자포자기의 심정일 수도 있고 혹은 순진함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던 시절의 치기로 기억될 수도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 기억은 일상의 저편에 묻혀 있다가 특정한 시기와 상황이 되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혼자만의 비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선명한 기억가운데 존재하는 이야기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수박향기>는 미스테리한 느낌을 주는 어릴적 기억에 관련한 이야기 단편집입니다. 몽환적이고 애달픈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가의 글은 한 여름 무더위 속 그늘과 같은 서늘함과 안식을 전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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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이 오싹하고 잔혹하고 위험했던 상황을 마주한 어릴적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저자 에쿠니 가오리 (江國香織) 는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이 특징인 일본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입니다. 동화적 작품을 비롯해 연애 소설, 에세이, 미스테리 분야등 폭 넓은 영역에서 활동하는 그녀는 오늘날 많은 독자층을 확보한 '에쿠니 가오리만의 작품 세계'로 다양한 작품을 통해 한국의 독자들과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신작 <수박향기>는 에쿠니 가오리 작품 영역 가운데 미스터리 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단편 작품 모음입니다. 수박향기, 후키코 씨, 물의 고리, 바닷가 마을, 남동생, 호랑나비, 소각로, 재미빵, 장미 아치, 하루카, 그림자라는 열한편의 이야기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만의 '비밀'과도 같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음산한 아이였다. 거짓말도 잘했다. 학교를 싫어했다. 다른 아이들이 싫었고, 철제 창틀과 천장의 형광등도 싫었다. 운동장도 발판도 가정 실습실도 교내 방송을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들리는 지지직 하는 소리도, 나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였다고 생각하다. 얌전했고, 성적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이들 속에서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으면 그만이었다. - 소각로 p.100
얌전하고 성적이 평범한 아이로 기억되는 소녀의 불안전한 감정과 사고 그리고 자기 인식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독백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작품은 1인칭 시점에서 주인공이 직접 자신이 간직한 비밀 이야기를 하나씩 독자들에게 전해줍니다. 자신의 내면과 경험에 관한 솔직한 고백은 때로는 위태롭고 애달프기도 하고 위험천만한 상황을 묘사하는데 이 가운데서 에쿠니 가오리만의 독특한 문장력은 소녀들의 이야기를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가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손을 내밀자 매우 커다랗고 마른 것이 내 손안에 툭 떨어졌다. 바삭바삭한 애처로운 감촉. 그것은 짙은 갈색의, 턱없이 큰 죽은 매미였다. 나는 공퐁에 질린 나머지 소리도 내지 못했고, 손이 굳어 그것을 버리지도 못했다. - 물의 고리 p.48
무더운 여름이 계속 되면서 쏟아지는 햇살에서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햇살로부터 벗어나고픈 모두의 마음이 간절하듯이 어릴적 기억을 되짚어 보면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은 상황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의 기억들'이 차려져 있는 향연을 마주하면서 어릴적 순수했지만 누구보다 잔혹했던 시절. 그리고 시간의 늪 속에 봉인했던 기억들을 다시 마주 봅니다.
소녀들의'비밀 이야기'를 모두 읽고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면 우리는 다시 여름을 추억하겠죠. 무더웠던 햇살 아래에서 벌어졌던 일들과 한 여름밤의 추억 가운데 비밀이 되어버린 경험과 기억을 간직한채 조금씩 성숙해 나가는 소녀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무더운 여름 순수하지만 잔혹하고 피하고 싶은 비밀 이야기 속으로 더위를 피해 떠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