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찬
소피 오두인 마미코니안 지음, 이혜정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만찬(서울: 소담출판사, 2010)

고통은 끝도 없이 되풀이 된다.

 

  Septem peccata Capitales는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사람이 자기 자신의 뜻에 다른 지은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죄를 의미합니다. 교만, 인색, 시기(질투), 분노, 음욕, 탐욕(탐식), 나태 이 가운데서 '탐욕'(탐식)은 정신력의 약화와 게으름, 건강상실을 가져오는 음식을 과도하게 탐하는 것입니다.

  <만찬>(서울: 서울, 2010)의 검은 바탕의 표지 가운데 조심스럽게 들려올려진 포크의 끝에서 떨어지는 붉은 핏물. '고통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끝도 없이 되풀이 되어'라는 여운을 음미하면서 '소피 오두인 마미코니안'의 만찬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그로테스크한 범죄 스릴러 작품 '만찬'이 전하는 초대장을 받아 보셨나요?>

 

   타라 덩컨 시리즈로 국내에 알려진 소피 오두인 마미코니안이 쓴 작품 가운데 <만찬>은 국내에 출판된 유일한 범죄 스릴러 작품입니다. 범죄 스릴러인 <만찬>은 15,000천권의 책을 읽은 독서광이자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자라는 독특한 이력과 12개국에서 번역된 타라덩컨 시리즈만으로는 작가를 재능과 특징을 설명하기란 부족하다는 이유가 됩니다.

  <만찬>에서 그녀는 전작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필치와 사건 묘사로 그로테스크한 범죄 현장으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탐식에 대한 단죄와 단죄의 과정을 요리의 조리과정과 식사와 비교하면서 단죄마저도 또 다른 죄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고통의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거친 옷감이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을 스쳤다.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동시에 위안이 되었다.

고통은 그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감각이었다. -p.16

 

  이 소설에서 음식은 사건을 유발하는 동기인 동시에 하나의 트라우마입니다. 살인자는 어릴적 음식으로 고문을 당한 학대를 경험하였고 성장 후 뚱뚱한 피해자들을 고문하면서 요리를 만듭니다.

 

  소년은 남자가 목구멍으로 쑤셔 넣은 사탕을 곧바로 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날카로운 메스를 보았을 때도 아이는 즉시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중략-

  더 이상 그는 힘없는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훨씬 커졌고 훨씬 강해졌다. 그래, 훨씬 강하다. -p. 65

 

  스물 세번의 식사과정은 식욕을 돋구기 위한 술 '아페리티프'로부터 시작됩니다. '아페리티프'로 사용된 프랑스의 고급 샴페인인 벨리니, 아무르 드 되츠 샴페인은 작품의 품격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독자들을 살인 현장에서 함께 그들의 고통의 만찬에 초대되었음을 알립니다.

  가축 도살장에서 벌거벗은 시체로 발견된 거구의 사내가 너무 큰 껍데기처럼 늘어진 피부에 두개의 갈고리에 메달려 머리는 피부의 주름에 파묻히고 손은 잘려나간 상태로 발견되는 것을 시작으로 사건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범죄의 대상은 고도 비만의 거구들만 노리는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에는 인간의 탐식과 추악한 범죄의 기록들이 있습니다. 사건 현장에 남겨진 시와 피해자들의 기록을 단서로 형사반장 필리프와 소아정신과 의사인 엘레나의 미궁의 사건을 좇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범인은 왜 사건 현장에 다음 범죄를 암시하는 시를 남겼을가요? 그리고 왜 뚱뚱한 사람들을 납치할까요? 형사반장인 펠리프와 엘레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범죄는 범인이 그들 주변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독자들은 상처와 고통의 삶을 살아간 이들의 서로 다른 모습과 결과를 통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학대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범죄를 보면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이 경험한 고통을 타인도 겪기를 원하는 범인의 모습을 보면서 최근 폭력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또 다른 범죄가 된다는 현상이 연상됩니다. 상처 받은 사람은 상처를 안거나 피하거나 전가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그들을 외면할때 그들은 자신들만의 상처의 대처법을 익혀 나갑니다. 극단적인 범죄가 많아진 요즘 <만찬>을 주목하는 것은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 속에 우리의 무관심과 적절하지 못한 행동들이 또 다른 살인자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의 범죄를 힐난하고 공격하기 이전에 그들이 왜 범죄자가 되었는지에 주목하는 것은 단죄의 중요성 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만찬>을 보면서 상처에 따른 세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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