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대문호라는 타이틀 혹은 한나라를 대표하며 시대적 흐름을 주도한 작가들에게는 인격적인 면보다는 극적이며 화려한 범상치 못한 생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이야기는 대상에 대한 전체적인 부분중 극히 일부분만을 이야기 하며 독자들에게 혹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대상을 인간으로서의 작가를 뛰어 넘어 전혀 별개의 인종 혹은 존재로 둔갑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한 포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도스토예프스키'를 한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그 명칭 답게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많은 작품들을 통하여 러시아의 문학 수준을 전세계의 중심에 세웠으며 체제와 이념 그리고 인간 내면 탐구와 종교성까지 폭 넓은 분야에서 활동하여 문학사에 커타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인식함에 있어서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통하여 연대기와 작가 소개를 통해서 접하는 부분적 지식들의 합일 것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체를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부분을 알 뿐 전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이야기하고 한 작가를 이야기 할때 빠질 수 있는 오류는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부분에 대한 이해로 전체를 바라볼때 우리 모두는 오류와 편견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 많은 부분에 대하여 알고 이야기 할때 우리는 온전한 '대문호'에게로 한 발씩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문학사에서 '대문호'로 평가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20세기 작가 '레오니드 치프킨'의 만남은 비록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통해서 뜻 깊은 만남을 가지게 된다. "현재"의 어느 겨울날 이뤄진 레닌 그라드로의 방문은 19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의 만남의 시작이었다.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픽션과 다큐의 경계선상에서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작품은 아슬아슬하며 위태로운 그리고 숨겨져 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솔직하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대문호로서의 정신적 위대함의 뒷면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 이 모든것이 사실은 양면이 아닌 하나로서 그의 작품에 반영되고 소개되었다는 사실이 '레오니드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통해서 소개되는 것이다. 대문호의 흔적을 따라 올라가 여름날의 바덴바덴에서 드디어 만난 '도스토예프스키' 작가는 이 만남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 세계'를 보여준다. 러시아 문학의 깊이의 정수를 보여준 대문호에 대한 이야기가 작가의 손을 통해서 옮겨진 이 글에서 독자들 가슴 속에서 그 생명력을 꽃 피우게 된다. 부분을 넘어서 전체를 이야기 하는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은 '레오니드 치프킨'과 '도스토예프스키' 두 거장의 새롭고도 독창적인 열정적인 만남의 기록이다. 여름날 그곳에 있는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레오니드 치프킨' 그리고 '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