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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시작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7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짙은 갈색과 표지의 수많은 열쇠들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민음사 모던 클래식의 주제 즉 고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과거의 고전이 아닌 현대의 미래 고전이 될 다분한 가능성이 나타나는 작품들이 모인 시리즈. 민음사 모던 클래식의 작품들은 이러한 가능성이 나타난 현대 진행형의 고전들이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시작들은 이러한 모던 클래식의 큰 틀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작가 존 맥그리거는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을 통해 2002년 가장 어린 나이에 유일하게 처녀작으로 맨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인물이다. 2003년 서머싯 몸 상과 베티 트라스크 상을 수상하는 그는 이 외에도 여러 굵직한 대회에서 수상후보로 등록된 인물이다. 존 맥그리거의 두 번째 소설작품인 『너무나 많은 시작』역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는데 이는 그의 작품이 단발성 완성이 아닌 지속적인 완숙미를 보여 준다. 2010년 세 번째 소설 『개들조차도』는 아직 출판되지 않았지만 이미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과 『너무나 많은 시작』이 4개월 차이로 나온걸 보면 2011년 모던클래식 시리즈 가운데 소개되지 않을까 싶다.
작품의 시작은 작품 속 주인공 데이비드의 어머니, 메리의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 속에 그녀의 가족 또한 있었다. 고용시장을 통해 계약을 맺고 장기간 근속을 하는 모습은 그녀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온갖 궂은일을 하며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를 다른 이의 손에 맡긴 채 고향으로 향하는 메리의 모습.
서장은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이 연결될 곳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진부한 듯 보이면서도 『너무나 많은 시작』이 진부하지 않은 이유는 작품이 다루고 있는 소재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 ‘뿌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성장한 데이비드가 가족을 이루고 단란하게 살아가면서도 그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진술에 의해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장면은 작품의 반전이 아닌 연결점이다. 독자들을 사로잡는 작품의 매력은 과거를 알게 된 청년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미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뿌리가 된 데이비드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수많은 편린들을 퍼즐 조각처럼 모아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일련의 시간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작품은 주인공 데이비드가 모은 수많은 퍼즐 조각들이 나열된 가운데 단편적인 기록들을 나열하여 ‘뿌리’를 향한 여정의 수많은 시작 포인트를 펼쳐 놓았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낯설고 생소하지만 독특하고 흥미로운 독창적인 방식이다. 자칫 무겁게 가라앉을 수 있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시작』의 글의 전개 방식은 여러 편의 에세이나 시를 모아둔 것과 같은 느낌을 더해준다.
작가 존 맥그리거는 삶의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근본적인 기반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은 누구나 ‘뿌리’를 통해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 생명을 엿보는 순간 우리는 삶의 지지기반에 대해서 다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조각 조각 쪼개어진 수많은 단편들이 맞춰져가며 전달되어지는 깊은 메시지들은 시간과 공간을 아울러서 전 세계적으로 작품이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잘 다듬어진 삶의 노래이다.